大智度初品中 十喩釋論 第十一卷 第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경량 엮음 참조

11. 초품 중 열 가지 비유=十喩를 풀이함 8

 

問曰, 若諸法十譬喩 皆空無異者 何以但以 十事爲喩 不以山河 石壁等爲喩?
묻나니, 모든 법의 열 가지 비유가 모두 공하여 차이가 없다면,  어찌하여 단지 열 가지 일만으로 비유를 삼고, 산ㆍ강ㆍ석벽 등을 비유로 삼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 諸法雖空 而有分別 有難解空 有易解空, 今以易解 空喩難解空

답하나니, 모든 법이 비록 공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공=難解空(난해공)'과 '이해하기 쉬운 공=易解空(이해공)'으로 분별할 수 있나니, 지금은 이해하기 쉬운 공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공을 비유하였다.

 

復次 諸法有二種 有心著處 有心不著處, 以心不著 處解心著處。

또한 제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마음이 집착하는 곳=心着處(심착처)'와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곳=心不着處(심불착처)'dl니,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곳으로써 마음이 집착하는 곳을 풀이하였다.


問曰, 此十譬喩 何以是心 不著處?
묻나니, 이 열 가지 비유가 어찌하여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곳이 되는 것입니까?


答曰, 是十事不久住 易生易滅故 以是故 是心不著處。

답하나니, 이 열 가지 일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쉽게 생기고 쉽게 멸하는 것인 까닭에 '마음이 잡착하지 않는 곳'이 되나니,

 

復次 有人知十喩 誑惑耳目法 不知諸法空故 以此喩諸法。
또한 어떤 사람이 이 열 가지 비유를 통하여, 눈과 귀를 홀리는 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법이 공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로써 제법을 비유한 것이다.


若有人 於十譬喩中心著 不解種種難論 以此爲有 是十譬喩 不爲其用 應更爲說 餘法門。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열 가지 비유를 통하여, 그 마음이 집착되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힐난하고 따지면서, 이러한 것들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열 가지 비유는 쓸모가 없는 것이 되기에 다시 그 밖의 다른 해탈문=門을 말해 주는 것이니라. 

모든 승려와 학자들이 한결같이 법문(法門)이라 그냥 해석하는데 ()은 열반문에 이르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법화경(法華經)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오래된 고성(古城)이 바로 열반무위성(涅槃無爲城)이라는 뜻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問曰, 若諸法都空 不生不滅 是十譬喩等 種種譬喩 種種因緣論議 我已悉知爲空。

묻나니, 제법이 모두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면, 이 열 가지 비유 등의 갖가지 비유와 갖가지 인연의 논의도 이미 모두 공한 것임을 나는 알 수 있으나, 

 

若諸法都空 不應說是喩, 若說是喩 是爲不空。
만약 모든 법이 도무지 공하다면, 이 비유를 들어 설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만일 이 비유를 들어 설한다면 공하지 않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答曰, 我說空 破諸法有。今所說者 若說有 先已破, 若說無 不應難!
답하나니, 내가 공을 말하여 제법이 있다고 하는 집착을 파했거니와, 지금에 있어서, 만약 있음이라 말했다면 이미 앞에서 파하였고, 없음이라 말했다면 힐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譬如執事比丘 高聲擧手唱言 '衆皆寂靜' 是爲以聲遮聲 非求聲也。

비유하건대 일을 맡은 집사 비구가 손을 들고 높은 소리로 외치면 대중이 모두 조용해지는 것과 같으니, 이는 소리로써 소리를 막으려는 것일 뿐 소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以是故 雖說諸法空 不生不滅 愍念衆生故 雖說非有也。以是故說 '諸法如化'
이러한 까닭에 비록 제법이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설하는 것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비록 말하기는 하나, '유'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변화한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經. 得無㝵無所畏
▷經 걸림 없음=無礙(무애)와 두려움 없음=無所畏(무쇠외)를 얻다. 


▶論. 種種衆 界入 因緣中 心無㝵 無盡 無滅 是爲無㝵無所畏。
▷論. 갖가지 무리의 18 계ㆍ12 입의 인연 가운데 마음에 걸림이 없고, 다함이 없고, 멸함이 없으니, 이러함이 걸림 없음이며 두려움 없음이다. 

 

問曰, 如先說 諸菩薩 於無量衆中無所畏 今何以更說 '無㝵無所畏'?
묻나니, 앞에서 말하기를 '모든 보살들이 한량없는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음을 얻다' 고 하였으나, 지금 어찌하여 다시 걸림 없음=無㝵(무애)와 두려움 없음=無所畏(무소외)를 얻었다 하는 것입니까? 

 

答曰, 先說無所畏因 今說無所畏果。

답하나니, 앞에서는 두려움 없음=無所畏(무소외)의 원인을 말하였고, 지금은 두려움 없음=無所畏(무소외)의 과를 말하는 것이니, 

 

於諸大衆 乃至菩薩衆中 說法無盡 論議無減 心無疑難 已得無㝵無所畏故。
모든 대중을 비롯한 보살 대중 가운데서 설법이 다함없고, 토론(논의)에서 움츠려들지 않으며, 마음에 의혹이나 거리낌이 없게 되어, 이미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며, 


復次 如先說 於無量衆中 無所畏 不知以何等力故無畏, 以是故 更說無所畏 以得無㝵力故。

또한 앞에서는 한량없는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음을 얻었다 하였으나, 무슨 힘으로 두려움 없게 된 것인지 모르는 때문에 다시 두려움 없음을 말하였으니, 걸림 없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問曰, 若諸菩薩 亦有無㝵無所畏 佛與菩薩 有何等異?

묻나니, 만약 모든 보살들에게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이 있다면, 부처님과 보살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 如我先說 諸菩薩自有 無所畏力故 於諸法中無所畏 非佛無所畏。

답하나니, 내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보살들은 스스로 두려움 없는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두려움 없으나,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사무소외)은 아니니라.

 

復次 無㝵法有二種, 一者 一切處 二者 非一切處。

또한 걸림 없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온갖 모든 곳=一切處(일체처)이요, 둘째는 온갖 곳이 아님=非一切處(비일체처)이니,

 

非一切處 名如入一經書 乃至百千經書中無㝵 若入一衆 若入百千衆中無所畏。

온갖 곳이 아님=非一切處(비일체처)이라 함은, 한 가지 경서나 백ㆍ천 가지 경서 가운데 걸림이 없다면, 한 대중에 들어가거나 혹은 백ㆍ천 대중 속에 있을지라도 두려움이 없게 되며, 

 

諸菩薩亦如是 自智慧中無㝵 非佛智慧。

모든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의 지혜 가운데에서는 걸림이 없게 되었을지라도, 부처님의 지혜(일체지)에는 미치지 못하니,   

 

如佛放鉢時 五百阿羅漢 及彌勒等 諸菩薩皆不能取。

마치 부처님께서 발우(바리때)를 던지셨을 때 오백의 나한과 미륵보살을 비롯한 모든 보살들 누구도 받지 못한 것과 같나니, 

 

諸菩薩亦如是 自力中無㝵 佛智慧力中有㝵。以是故說 '諸菩薩 得無㝵無所畏'。

모든 보살들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의 힘 가운데서는 걸림이 없지만 부처님의 지혜 안에서는 걸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이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經. 悉知衆生 心行所趣 以微妙慧 而度脫之。
▷經 중생들의 마음 가는 곳을 모두 알아 미묘한 지혜로써 그들을 제도하여 해탈시키다. 

 

▶論. 問曰, 云何 '悉知衆生心行?
▷論. 묻나니, 어떻게 중생들의 마음 가는 곳을 다 알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 知衆生心 種種法中處處行 如日光遍照, 菩薩悉知 衆生心行 有所趣向而教之 言一切衆生

답하나니, 중생들의 마음이 갖가지 법 가운데서 곳곳으로 행하는 줄을 앎이, 마치 햇빛이 두루 비치는 것과 같으니, 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알고는, 일체 중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나니,

 

趣有二種 一者 心常求樂 二者 智慧分別 能知好惡。

'일체 중생이 향해 나아감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마음으로 항상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지혜로 분별하여 능히 좋고 나쁨을 아는 것이다. 

 

汝莫隨著心 當隨智慧 當自責心, 汝無數劫來 集諸雜業 而無厭足 而但馳逐世樂 不覺爲苦。馳 달릴 치, 逐 쫓을 축,
그대는 집착하는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땅히 지혜를 따라야 하며, 자신의 결함이나 잘못을 스스로 꾸짖고 책망하라. 그대가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쌓아 모은 온갖 잡된 업을 싫어할 줄도 만족할 줄도 모르고, 다만 세상의 쾌락만을 쫓다가 괴로워하게 됨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汝不見 世閒貪樂致患 五道受生 皆心所爲 誰使爾者?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쾌락을 탐하다가 환란에 이르고 5도(지옥 아귀 축생 인간 하늘)에서 번갈아 생을 받음 모두는 마음이 하는 짓일 뿐, 어느 누가 그렇게 시키겠는가?

 

汝如狂象 蹈藉殘害 無所拘制 誰調汝者?若得善調,則離世患。蹈 밟을 도, 藉 깔개 자, 殘 해칠 잔, 拘 잡을 구,
그대가 마치 미친 코끼리가 날뛰면서 잔인하게 해치나, 억제할 길이 없는 것과 같다면, 누가 그대를 (마음을) 길들일 수 있겠는가? 만일 (그 마음을) 잘 길들일 수 있다면 세상의 환란을 멀리 여의게 될 것이니라.
 


當知處胎不淨 苦厄猶如地獄, 旣生在世 老 病 死 苦 憂 悲萬端。厄 재앙 액, 

태에 드는 일부터가 부정하고 고달픈 것으로, 마치 지옥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이미 태어나 세상 살이에 있다면 늙음ㆍ병듦ㆍ죽음ㆍ고통ㆍ근심ㆍ슬픔이 천만 가닥이요, 

 

若生天上 當復墮落, 三界無安 汝何以樂著?

하늘에 태어나더라도 다시 삼계로 타락해야 할 것이니, 편안하지 않나니, 어찌하여 그대는 쾌락에 집착하는가?'

 

如是種種 呵責其心 誓不隨汝 是爲菩薩 知衆生心行。呵 꾸짖을 가, 
이와 같이 갖가지로 그 마음을 꾸짖고는 서원하기를 '결코 그대를 따르지는 않으리라' 고 하니, 이것이 보살이 중생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니라. 

 

問曰, 云何名 '以微妙慧而度脫之'? 是中云何名 微妙慧? 云何名 麤智慧?
묻나니, 무엇을 ‘미묘한 지혜로써 제도하고 해탈시킨다’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무엇을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고, 무엇을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世界巧慧是名麤智慧 行施 戒 定 是名微妙慧。

답하나니, 세간의 교묘한 지혜는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고, 보시ㆍ지계ㆍ선정을 행하는 것을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며,

 

復次 布施智是爲麤慧 戒定智是 名微妙慧, 復次 戒 定智是爲麤慧 禪定智是名微妙慧。
또한 보시하는 지혜를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고, 지계ㆍ선정의 지혜를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며,
또한 보시ㆍ지계의 지혜를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고, 선정의 지혜를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며,


復次 禪定智是爲麤慧 無猗禪定是名微妙慧
猗 아름다울 의, 더할 의, 

또한 선정의 지혜를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고 '기대지 않는 선정=無猗禪定(무의선정)'의 지혜를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며, 

 

復次 取諸法相是爲麤慧 於諸法相不取不捨是名微妙慧
또한 제법의 실상을  취하는 것을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고, 모든 법의 실상을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는 것을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며, 


復次 破無明等諸煩惱 得諸法相 是名麤慧, 
入如法相者 譬如眞金不損不失 亦如金剛不破不壞 又如虛空無染無著 是名微妙慧。

또한 무명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제법의 실상을 터득하는 것을 '거친 지혜=麤慧(추혜)'라 하고,

법 그대로의 한결같은 실상 들어 간, 즉 순금이 순도가 줄어들거나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금강이 깨어지거나 무너지지도 않는 것과 같이, 허공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이, 한 경지에 드는 것을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라 하니,

 

如是等無量微妙慧 菩薩自得 復教衆生。以是故說 '諸菩薩悉知衆生心行所趣 以微妙慧而度脫之'。
이와 같이 한량없이 미묘한 지혜를 보살은 스스로 터득하여 얻고는, 다시 되돌려 중생들에게 가르치고 교화하나니, 그러한 까닭에 ‘보살들은 중생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모두 알고서 '미묘한 지혜=微妙慧(미묘혜)'로 제도하여 해탈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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