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법(佛法)에 귀의한 승만부인
勝鬘得書歡喜頂受(승만득서환희정수) 讀誦受持(독송수지)
승만 부인은 편지를 받아 기뻐하며, 정수리 위에 받들었다가, 편지를 읽고 외우며 받아 지니고는
生希有心(생희유심) 向旃提羅而說偈言(향전제라이설게언)
희유한 마음을 내어 전제라(찬다라)를 향하여 게송=노래를 부르듯 말하였습니다.
我聞佛音聲(아문불음성) 世所未曾有(세소미증유)
내가 듣자니, 부처님의 음성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所言眞實者(소언진실자) 應當修供養(응당수공양)
편지의 말씀대로 진실하다면, 마땅히 공양을 올려야 하리라.
仰惟佛世尊(앙유불세존) 普爲世閒出(보위세간출) 惟 생각할 유
우러러 생각하건대 부처님 세존께서는 널리 세상을 위하여 출현하셨으니
[우러러 생각건대 일체중생 구하러 세상에 나셨으니’ 이는 《법화경》의 일대사 인연의 내용과 비슷하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오직 한 가지 크나큰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일대사인연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듯이 나 역시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나 역시도 부처님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보살행을 실천해 성불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처럼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을 통해 자신의 일대사인연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경전을 바르게 이해하는 마음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출생하는 문제에 관한 첫 번째 비밀은 자신이 의지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출현 할 때는 분명히 자신의 의지대로 생일, 고향, 부모를 선택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선택해서 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비밀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명한 출생의 메시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정뿐만 아니라 미물인 곤충, 심지어 인간이 해충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 생명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만큼 다른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우주법계는 본래 하나의 대 생명력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것이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며, 남을 도와주는 것이 자기를 돕는 일이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우주의 생명력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지에서 보면 불보살들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제하는 원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강물에 오물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오물을 버리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일대사인연이 무엇인지를 잘 기억해 항상 보살과 같은 삶의 질로써 살아가야 할 것이다.-혜경스님]
亦應垂哀愍(역응수애민) 必令我得見(필영아득견)
역시 응당히 불쌍하게 여겨주시어, 저로 하여금 반드시 뵈올 수 있게 하소서.
卽生此念時(즉생차념시) 佛於空中現(불어공중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을 때, 부처님이 허공 중에 나타나시어
普放淨光明(보광정광명) 顯示無比身(현시무비신)
깨끗한 밝은 광명 널리 놓으시며/, 비할 데 없는 몸을 나타내 보이셨다.
勝鬘及眷屬(승만급권속) 頭面接足禮(두면접족예)
승만 부인과 그 권속들은 머리를 발에 대어 정례(절) 하고는
咸以淸淨心(함이청정심) 歎佛實功德(탄불실공덕) 咸 다 함, 덜 감, 짤 함
모두들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참된 공덕을 찬탄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승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根機)이다.
부처님은 어느 날 젊어서 방탕하게 살다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에 그를 만났다.
부처님은 “그대는 예전에 내가 보낸 천사(天使)를 만나 보았는가”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천사를 만나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는 분명히 너에게 천사를 보냈다. 그대는 늙어 가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느냐, 병든 자를 만나 본 적이 없느냐, 죽은 자를 만나본 적이 없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바로 생(生)·노(老)·병(病)·사(死)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천사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천사(天使)’라는 말의 의미는 종교에 따라 각각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배경이 투영된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다보니 천사는 어깨에 하얀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식의 천사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의 모습이 바로 천사라고 말하고 있다. 석존도 생로병사라는 천사를 만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만일 상근기라면 생·노·병·사라는 천사의 그림자를 보고 나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다’ 즉 ‘나도 언젠가는 병들고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고 자각해 발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석존의 경우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는 경전 문학적 기법으로 천사를 만나 발심해 출가했다. 자신이 직접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생·노·병·사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본 것이다. 석존은 저렇게 되기 전에 생·사가 없는 본래의 깨달음의 세계로 가야 되겠다고 발심했던 것이다.
중근기는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지, 친한 친구가 죽었다든지 하게 되면, 그제야 우리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면서 발심하는 경우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든지, 친한 친구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하근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친구가 죽어도, 심지어 자식이 죽어 그 주변에서 수없이 생·노·병·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를 말한다.
근기를 ‘달리는 말’에 비유하면, 상근기의 말은 주인의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알아서 달린다. 이와 같이 가장 좋은 말은 총명해 알아서 미리 행동하므로 굳이 채찍을 사용하지 않아도 잘 달린다. 중근기의 말은 채찍으로 엉덩이를 한번 맞고 나서 달린다. 중근기의 말은 채찍질을 당하고 나서야 주인의 뜻을 알아차려 달리는 말이다. 하근기의 말은 엉덩이에 피가 나도록 얻어맞아도 잘 달리지 않는 말이다. 하근기의 말은 어리석어 채찍으로 얻어맞아도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승만은 부모인 파사익왕과 말리부인의 영향을 받아 불법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근기에 속한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들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편지를 딸에게 보내게 된다. 그 편지를 받아보고 승만은 발보리심하게 된 것이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여기서 부처님의 출현이란 말이 나오는데 <법화경>에 부처님께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했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일러 모든 부처님이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모든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 부처님의 지혜)을 열어주어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이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도에 들어가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승만부인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발원하자 수승해서 비교할 바 없는 대광명의 부처님 모습인 무비신(無比身)이 허공중에 홀연히 나타난다. 부처님의 법신은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이 법신 부처님은 중생이 부르면 즉각 나타난다. 다만 그 부르는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해야 나타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불교를 신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혜총스님]
['승만경'이 대승경전으로 『법화경』에 설해진 일승사상(一乘思想)과 '열반경' 등에 설해진여래장사상의 대의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도 매우 간명하게 경문이 서술되며 다른 대승경전에 나오는 보살이나 부처님 제자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고 오직
승만 부인만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지안스님]
[아요사국은 범어로 아요디야(Ayodhya)는 중인도의 코살라, 즉 슈라바스티의 남쪽에 인접한 작은 나라를 말한다.
지금의 베나레스(Benares)의 북방으로 오우드(Oudh) 지방이며, 불교 8대 성지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사위성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 아요디야는 인구 10만 정도 되는 작은 종교도시로, 힌두교 사원과 이슬람 모스크를 합쳐 1만개 정도의 종교사원이 있다고 한다.
옛 신라시대 때 경주에 두 집 건너 한 집이 절이었다고 하듯이 아요디야는 인도에서 중요한 종교도시에 속한다.
승만부인이 시집간 아요디야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삼국시대 이전 김해지역에 여러 개의 가야국(駕洛國) 가운데 금관가야국의 왕이 인도의 아요디야국에서 온 허황후(許皇后)와 결혼을 하게 된다. 허황후와 김수로왕(金首露王) 사이에 7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들이 수행해 성불한 곳이 현재 지리산(智異山) 칠불암(七佛庵)의 아자선방(亞字禪房)이다.
허황후의 동생 장유화상은 현재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시(金海市)의 신어산(神魚山)에 있는 은하사(銀河寺)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외국인 승려가 우리나라에 처음 세운 절이다. 은하사는 영화 ‘달마야 놀자’를 찍은 곳으로 유명하다.
허황후가 인도 아유사 사국에서 배를 타고 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 파사석이란 돌멩이를 싣고 왔다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신문왕(神文王) 3년에 이 돌로 석탑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 남해(南海)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의 석탑(石塔)이다. 이 돌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는 종류의 돌로 밝혀졌다.
「가락국 본기」에 보면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 덕분에 바다 물길 헤쳐 왔구나.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후만을 도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 왔구나’라고 기록돼 있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3. 부처님을 찬탄하고 예배하다
如來妙色身(여래묘색신) 世閒無與等(세간무여등) → 응신
여래의 아름답고 묘하신 몸=妙色身(응신)은 세상에서 더불어 같이할 이 없으며,
無比不思議(무비불사의) 是故今敬禮(시고금경예)
견줄 수도 헤아릴 수도 없으니, 이제 공경하며 예배드립니다.
如來色無盡(여래색무진) 智慧亦復然(지혜역부연) → 보신
여래의 모습(몸)은 다함이 없고 지혜=(보신) 역시 또한 그와 같으며,
一切法常住(일체법상주) 是故我歸依(시고아귀의) → 법신
일체의 모든 법(진리)에 항상 머무시니=(법신), 그러므로 제가(저희) 지금 귀의하나이다.
['여래'란 타다아가타(Tathagata)라고 하여 진리[眞如]에서 오고 진여에서 나타난 깨달은 이, 즉 깨달은 사람(覺者)의 존칭이다. 즉 '그와 같이 오기 때문에 여래이고, 그와 같이 가기 때문에 여래이다. 그리고 여래를 여거(如去)라고도 한다'. 상세히 말하면 석가모니여래이다. 이는 싯다르타 태자가 성도해 성인이 되고 정각(正覺)을 얻은 것에 대해 남으로부터 받들어진 존칭이다. 이를 해석하면 석가 종족이 오랫동안 산림의 적정처(寂靜處)에서 마음을 닦고 도(道)를 배워 지자(智者)가 된 진여에서 내생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降伏心過惡(항복심과오) 及與身四種(급여신사종)
마음으로 지은 허물=心過惡인 악업과 몸으로 짓는 네 가지 업=身四種을 항복 받았으며,
已到難伏地(이도난복지) 是故禮法王(시고예법왕)
이미 다 조복하신 경지(지위)에 이르렀으니, 그러므로 법왕=진리의 왕께 예배하나이다.
[이 구는 3계(三界) 안의 4주지(四住地), 즉 3계의 일체 견혹(見惑)인 견일체주지(見一切住地)와 사혹(思惑)인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의 악(惡)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여래의 해탈의 덕을 찬탄하고 법신을 공경예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마음의 허물=心過惡, 3독(三毒) 즉 탐진치 미혹과,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네 가지를 거꾸로 생각하는 4도(四倒)이다. 우리 인간은 덧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고뇌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즐겁다. 즉 낙(樂)이라고 생각하며 혹은 그 마음이 항상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조금도 고정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정불변한 자기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자기 주관의 중심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을 들어 말하는가. 우리 신체의 어디를 살펴보아도 이 ‘나’를 집어낼 수 없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없다. 또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착각된 것이다. 우리들은 일종의 착각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몸의 네 가지=身四種, 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음(死)를 말한 것으로서, 이 신체는 4대(四大), 지(地)·수(水)·화(火)·풍(風)이라는 네 가지의 성분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다.
지대(地大), 굳고 가로막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사물을 마음대로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모든 견성(堅性)은 이에 속한다.
수대(水大)는 습윤(濕潤)을 성(性)으로 하고 사물을 수섭(收攝)함을 용(用)으로 하며 모든 습성(濕性)은 이것에 속한다.
화대(火大)는 난열(煖熱)을 성으로 하며 사물을 성숙하는 용(用)으로서 온갖 온성(溫性)은 이에 속한다.
풍대(風大)는 동전(動轉)을 성으로 하므로 사물을 장양(長養)함을 용으로 하며 모든 동성(動性)은 이에 속한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신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노·병·사의 계박(繫縛)에 사로잡히지 않은 심경, 즉 몸도 마음도 자유자재하여 번뇌인 악마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이라도 이것만은 꺾을 수 없는 경지, 이것을 난복(難伏)의 지(地) 또는 불지(佛地)라고 하는데 이 마음을 금강심(金剛心)이라고 한다.]
知一切爾焰(지일체이염) 智慧身自在(지혜신자재)
일체의 알아야 할 바(實智)=爾焰를 모두 아시며 智慧身=지혜의 몸(방편지)이 자유자재 하시며
攝持一切法(섭지일체법) 是故今敬禮(시고금경예)
모든 진리를 받아 지니셨으므로 이제 예경하나이다.
[이는 여래가 가진 반야(般若; Prajna)의 덕을 찬탄한 것으로, 이염(爾炎)이란, 범어 Jneya(즈내야)의 음역을 소리를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므로 이것을 번역하면 지모(智母)가 된다.
『승만경의소(義疏)』에 의하면, 「이염이란, 중국에서는 지모라 한다. 지모란, 진제(眞諦)의 경공(境空)으로서 지(智)를 낳는 근본이기 때문에 어머니[母]라고 한다.」라고 하며 지혜의 바탕을 말한다. 하늘과 같은 맑은 거울[明鏡]은 만상을 역력히 비치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신(智慧身; Jnna-Mati)'이란, 사리(事理)의 정사(正邪)를 판별(判別)하는 마음의 작용과 대경(對境)에 향해서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분별하는 정신작용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모두 거두어 간직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금 공경하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염이라는 말과 또 지혜신이라는 말이 중복되어 있음은 앞의 이염 즉 지모는 실지(實智)를 가리킨 것이며 뒤의 지혜신은 방편지(方便智)를 찬탄한 것이다.]
敬禮過稱量(경예과칭량) 敬禮無譬類(경예무비류) 譬 비유할 비
부처님의 크신 공덕 헤아릴 수 없음에 예배하며, 비유할 수 없음에 예배하며
敬禮無邊法(경예무변법) 敬禮難思議(경예난사의)
가이없는 법문(진리)에 예배하며, 생각하기 어려움에 예배하나이다.
[이것은 여래의 세 가지 덕을 찬탄한 것으로서 여래의 세 가지 덕이란 은덕(恩德), 단덕(斷德), 지덕(智德), 혹은 법신덕(法身德; Dharmakaya), 반야덕(般若德; Prajna), 해탈덕(解脫德; Moksa) 등과 그 절대 무변으로 입에도 마음에도 다할 수 없는 감사함을 나타내며(과칭량 過稱量), 그 덕은 무량무변하여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비유할 수 있는 무리가 없다.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무비류 無譬類). 그러기에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의 넓고 크며 가이 없음을(무변법 無邊法) 말한다. 또한 도저히 사람의 지혜로는 생각해 헤아리기가 어렵다(난사의 難思議)라는 것으로서 그 덕에 경례 드린다는 것이다]
哀愍覆護我(애민복호아) 令法種增長(영법종증장)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희를 보호하여 주시고, 부처님 법의 종자가 자라나게 하소서.
此世及後生(차세급후생) 願佛常攝受(원불상섭수)
금생에도 다음 생에도 부처님께서 항상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이 구절은 승만부인이 여성으로서의 우아하고 정숙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여래의 법신, 법의 진리를 모조리 이해하고 찬탄하며 귀의해 왔다. 첫째로 아무쪼록 부처님의 공덕에 의해 애민을 내리시어 저를 보호되도록 법신을 얻는 종자인 만선(萬善)을 증장(增長)토록 하소서, 하고 우선 부처님의 가호(加護)를 받고 나서 후에 이익이 증장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생(生)을 받고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후생(後生)」에도 이와 같이 애호(愛護)되기를 원하오니 부처님이시여, 아무쪼록 이 뜻을 항상 거두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린다.]
我久安立汝(아구안립여) 前世已開覺(전세이개각)
내가 너를 편안하게 한 지 오래이니, 전생에 이미 깨달음을 얻게 하였으며
今復攝受汝(금복섭수여) 未來生亦然(미래생역연)
이제 다시 너를 거두어 주노니 미래의 생에서도 역시 그러하리라.
我已作功德(아이작공덕) 現在及餘世(현재급여세)
저는 이미 공덕을 지었듯이, 현재에도 또 다음 생에도(나머지 생에서도)
如是衆善本(여시중선본) 唯願見攝受(유원견섭수)
이러한 모든 선근들을 근본=善本으로 삼겠사오니, 오직 원컨대 거두어 주소서.
[승만이 두려워하면서 여래에게 애호를 원한 것에 대해 여래는 “묵연히 허락하고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대로 하여금 확실한 대법(大法)의 기초 위에 안립(安立)토록 해 왔다. 그대는 현세에 나오기 이전에 이미 깨달음을 열고 있었다. 지금 또한 그대의 원을 받아 드릴 뿐 아니라 미래세에 생을 얻어도 역시 이와 같이 지켜 줄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라고 여래는 승만이 2세(二世)를 원했는데도 3세를 통해 보증하신 것이다.
여래로부터 승만이 3세에 걸쳐 선(善)을 쌓고 수도(修道)의 공덕을 짓고 또 지을 것을 보증 받았으므로 승만은 “나는 이미 전생에서도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쌓고 수도의 공덕을 짓고 또 현세에서도 거듭 불제자가 되고 미래세에서도 이와 같이 부처님에게 귀의해 모든 대승에 의한 법의 선행을 쌓고 쌓을 것입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허락해 주옵소서”하고 말한다.
이 「선본(善本)」이라는 것이 법신의 종자로 특히 대승 중 『승만경』에서는 「선(善)」이 골자로 되어 있다.]
爾時(이시) 勝鬘及諸眷屬(승만급제권속) 頭面禮佛(두면예불)
이때 승만 부인과 그녀의 모든 권속들이 얼굴과 머리를 부처님 발에 예배하였다.
[승만부인과 부처님 사이에 교환된 예찬과 섭수의 약속은 불교의 「믿음[信]」에 연결되는 것으로 깊이 믿고 귀의하는 마음 위에 비로소 약속된다고 생각한다.
불교입문에 있어 무엇이 제일 요소인가에 대해 우리들은 귀의(歸依)의 생각을 우선 맨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부처님[佛]과 가르침[法], 승단[僧]의 3보[三寶]에 대한 귀의이다.
‘스스로 부처님(붓다)께 귀의합니다. 스스로 가르침(단마)에 귀의합니다. 스스로 스님들(상가)께 귀의합니다.’
이 3귀의문[三歸依文] 가운데 「부처님」이란 원래부터 붓다, 스승이신 붓다이며, 「가르침」이란 붓다가 설해 밝힌 불법(佛法), 교법(敎法)이고, 「스님들」이란 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 즉 붓다의 후계자로써 집합한 승가[僧團]이다. 이 3보에 귀의하는 마음을 갖는 것에 불교입문의 제일 긴요한 뜻이 있다.
이와 같이 귀의하는 마음[念]은 불교에 대한 진실한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참다운 신심(信心), 참다운 신앙이라는 것은 순진(純眞)하고 지순(至純)한 종교심의 싹틈이며 이 싹을 다시 육성하는 것도 신앙이다. 그리고 신앙은 청정심에 깃든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하는 말이 『열반경(涅槃經)』이라는 경전에 있다. 이 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심성본정·心性本淨)이라는 아함불교(阿含佛敎) 이래의 전통인 불교적 이해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청정심(淸淨心)으로 파악한다. 이 청정심은 가끔 외계의 깨끗치 못한 것[객진·客塵]에 의해 더럽혀질 때, 거기에 여러 가지의 번뇌가 생겨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외계의 것에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마음은 외계와의 접촉에 의해 여러 가지 내용이 지어지고 형성되어 간다.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고, 마음이 더러워지면 중생도 더러워진다」고 『아함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를 표시한 것이다.]
[“여래묘색신(如來妙色身) 세간무여등(世間無與等) 무비부사의(無比不思議) 시고금경례(是故今敬禮) 여래색무진(如來色無盡) 지혜역부연(智慧亦復然) 일체법상주(一切法常住) 시고아귀의(是故我歸依)”
이 게송은 부처님께서 나투시는 현묘한 3신(三身), 즉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을 찬탄하고 있다. 묘색신이 응신, 다함없는 여래색신과 지혜는 보신, 끝으로 일체법 상주는 법신을, 이렇게 삼신을 찬탄하고 예배 공경한다.
부처님의 몸은 진리의 몸으로 우주 법계에 항상 머무시면서 널리 중생을 위해 복전(福田)이 되지만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듯이 “만약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색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써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여래는 본체가 미묘하여 곧 법의 몸인 여러 부처이며 법의 본체는 볼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능히 아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 부처님의 몸은 무량수(無量壽)요, 무량광(無量光)이다. 영원한 생명이요, 아비무간지옥의 천년 어둠도 몰아내는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다. 또한 부처님의 지혜도 다함이 없어서 <별역잡아함경>에 “부처님은 과거세를 알고, 미래세를 역시 알며, 현재세에 모든 법이 무너지는 모양도 다 아십니다. 모든 현상을 통달하여 닦아야 할 것을 마땅히 닦고 끊어야 할 것을 모두 끊나니 그래서 부처라고 말한다. 전체적인 현상과 부분적인 현상을 낱낱이 분별하여 꿰뚫어 알아 일체 모든 것을 알고 보나니 그래서 부처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혜총스님(불교신문)]
[승만경의 역사적 사실과 경전적 사실을 살펴보면, 우선 『승만경』이 설해진 사위성과 등장인물인 푸라세나짓과 말리카부인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 경전적인 두 가지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대승경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승만경』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푸라세나짓왕과 말리카부인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푸라세나짓왕은 부처님을 존경해 석가족의 공주와 결혼하고 싶었다. 석가족은 전통적으로 자존심이 강해 그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녀를 공주로 꾸며 사위성으로 보냈다.
당시 석가족의 입장에서 사위성은 강대한 나라였기에 그 나라의 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푸라세나짓왕과 석가족의 하녀 사이에서 비유리왕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비유리왕자가 어느 정도 자라 어머니의 고향인 석가족을 방문했다. 그러자 석가족 사람들이 비유리왕자를 가리키면서 하녀의 아들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는 이 사실에 엄청난 치욕을 느끼고 나중에 왕이 되면 석가족을 다 멸망시키겠다고 한을 품게 되었다.
푸라세나짓왕이 다른 나라로 가서 잠깐 왕궁을 비운 사이 비유리왕자는 왕권을 찬탈해 왕이 된다. 그 후 왕자 때 받은 치욕감을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석가족을 쳐들어간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에 있다가 종족이 멸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비유리왕이 쳐들어오는 길목의 죽은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마침 이파리도 없는 나무 밑에 앉아 땀을 흘리는 석존을 보자 비유리왕이 “저쪽에는 그늘진 숲이 있는데 왜 이런 곳에서 고생하십니까”라고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친족이 없는 것은 그늘이 없는 나무와 같소”라고 답했다. 비유리왕은 부처님의 심중을 헤아려 군대를 물리게 된다.
그 후 다시 두 번째로 쳐들어왔는데 역시 부처님은 위와 같이 대치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부처님도 “석가족이 지은 악업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하시며 말리지 않았다. 석가족은 비유리왕에 의해 거의 멸족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승만경』에서는 푸라세나짓왕과 말리카왕비 사이에 승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하나의 경전이 생겨난다. 여기서 대승경전이 출현하게 되는 근거에 대해 설명하면, 각 경전을 연극에 비유해서 『아함경』에서 연극의 주연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석존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오직 하나뿐인 인물이다. 그리고 조연으로 성문의 비구·비구니의 출가 제자와 우바새·우바이의 재가 제자들이 등장한다.
대승경전 속에는 형식상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연이지만 수많은 형태의 부처님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약사여래부처님 혹은 비로자나부처님 등 여러 부처님이 등장하게 된다. 대승경전에서는 주연(主演)이 형식상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수많은 화신의 불보살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해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조연(助演)으로는 수많은 불보살님이 등장하는데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함께 나타난다.
『승만경(勝經)』 서품(序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푸라세나짓왕, 말리카부인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승만경』에서는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과 푸라세나짓왕, 그리고 말리카부인을 경전적 사실로 유도하기 위해 배우로 기용하고 있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종교(宗敎: religion)의 어원이 라틴어 religio에서 파생된 것이라 하는데 이 어원의 뜻을 예배(禮拜)라고 번역하며 또는 결합(結合)이라 번역한다. 물론 이는 서양의 신을 믿는 종교에서 하는 말이다.
인간이 초월자 혹은 절대자에게 예배를 올린다는 의미와 인간을 절대자와 결합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교에 있어서 예배는 필수적인 요소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낸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부처님을 예경하는 마음으로 공경의 예를 갖출 때 신심이 우러나고 신앙심이 돈독해 지는 것이다.
입적한 지 오래된 어느 큰스님은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주는 조건으로 3000배의 절을 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절이란 몸과 마음을 다하여 공경을 표하는 예법이지만 진리를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숨은 뜻이 있다.
부처님을 향하여 자기의 원을 피력하고 그러한 원이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힘에 의하여 성취되기를 바라는 순진한 마음이 일어나야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신행이 귀의, 찬탄, 참회, 발원의 네 가지에 의해 믿음의 바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ㅡ지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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