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 第八 不動地
讚歎請說
天王과 天衆의 供養讚歎
是時天王及天衆이 聞此勝行皆歡喜하야 爲欲供養於如來와 及以無央大菩薩하야
雨妙華幡及幢蓋와 香鬘瓔珞與寶衣의 無量無邊千萬種하니 悉以摩尼作嚴飾이로다
是時에 天王과 及天衆이 이때에 천왕과 천중들이
聞 此勝行 皆歡喜하야 이 수승한 행을 듣고 모두 기뻐서
爲欲 供養於如來와 부처님 여래와 무수히 많은
及以 無央大菩薩하야 대보살들을 공양하고자 無 없을 무, 央 가운데 앙, 無央=아승기
雨 妙華 幡 及幢蓋와, 미묘한 꽃, 당번 그리고 일산, 幡번 幢당 蓋개=일산, 우산, 幢 기 당, 幡 기 번, 깃발 번,
香 鬘 瓔珞 與寶衣의, 향, 화만, 영락과 보배옷을 香향 鬘만 瓔珞영락
無量無邊 千萬種하니, 무량무변한 천만 가지로 雨= 비내리 듯 공양을 올리니,
悉以 摩尼作 嚴飾이로다. 모두가 마니로 장식되었네. 嚴飾엄식, 飾 꾸밀 식,
(2) 天女의讚歎 讚歎찬탄
天女同時奏天樂하야 普發種種妙音聲하야 供養於佛幷佛子하고 共作是言而讚歎호대
一切見者兩足尊이 哀愍衆生現神力하사 令此種種諸天樂으로 普發妙音咸得聞이로다
於一毛端百千億 那由他國微塵數의 如是無量諸如來가 於中安住說妙法이로다
一毛孔內無量刹에 各有四洲及大海하며 須彌鐵圍亦復然하야 悉見在中無迫隘로다
一毛端處有六趣하니 三種惡道及人天과 諸龍神衆阿修羅가 各隨自業受果報로다
於彼一切刹土中에 悉有如來演妙音하사 隨順一切衆生心하야 爲轉最上淨法輪이로다
刹中種種衆生身이요 身中復有種種刹하야 人天諸趣各各異어든 佛悉知已爲說法이로다
大刹隨念變爲小하고 小刹隨念亦變大하니 如是神通無有量이라 世間共說不能盡이로다
天女同時 奏天樂하야, 천녀들이 동시에 천상음악을 연주하고 奏 연주할 주
普發 種種 妙音聲하야, 갖가지 미묘한 음성을 널리 발하여
供養 於佛 幷佛子하고, 부처님과 불자들에게 공양하면서 幷 어우를 병, 나란히 할 병, 아우를 병
共作是言 而讚歎호대, 다같이 이러한 말로 찬탄을 하네.
一切見者 兩足尊이 일체 모든 것을 다 보시는 양족존께서
哀愍衆生 現神力하사, 중생을 애민하고 신력 나투시어 哀愍애민=애처롭고 가엾게 여김
令此 種種諸天樂으로 이 갖가지 모든 천상음악이
普發妙音하야 咸得聞이로다. 널리 발하여 다함께 듣게 하시네. 咸 다 함,
於一毛端에서 百千億 那由他國의 微塵數의 한 털끝에 백천억 나유타 국토의 미진수와 같은 端 끝 단, 微塵미진
如是無量 諸如來가, 그렇게 한량없는 부처님들이
於中安住 說妙法이로다. 그 안에 계시어 묘법을 설하시네.
一毛孔內에 無量刹이, 한 모공 속에 한량없는 세계가 있고 無量刹무량찰
各有四洲 及大海하며, 각 세계마다 사주와 바다가 있으며
四洲사주= 수미산을 에워싸는 구산팔해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네 개의 대주
須彌 鐵圍 亦復然하야, 수미산과 철위산도 그러하여 須彌수미= 우주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 鐵圍철위
悉見在中 無迫隘로다. 모두가 그 안에 있으나 비좁지 않네 迫 다그칠 박, 핍박할 박, 隘 좁을 애, 막을 액
[이 게송에서 화엄의 사사무애 도리가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엄경은 ‘일심사상 또는 보살사상을 선양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 일체존재의 사사무애의 경계를 드러내는 이치라고 보기도 하고 또 보현행원품에는 아미타불 극락세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는 보살행입니다.]
一毛端處에 有六趣하니, 한 털 끝에 여섯 갈래 있어 一毛端處일모단처
三種惡道 及人天과, 세 가지 악도, 인간과 천상, 諸龍 神衆 阿修羅가, 용왕, 신중, 아수라들이
[6취 중생의 여섯 갈래 가운데 3종 악도= 지옥ㆍ아귀ㆍ축생 그리고 인간ㆍ천상과 모든 용과 신중ㆍ아수라]
各隨 自業受果報로다. 제각기 업을 따라 과보 받네.
[모두 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똑 같은데, 그 한 마음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즉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은 전부 각자의 마음이 만들어낸 현상입니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다ㆍ누구 덕이다.” 하는 것의 '때문'이란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덕'이라 하는 것은 잘 됐을 때를 말하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의 약간의 영향은 있겠지만, 전부 엉터리 답입니다.
전부 자기 자신의 한마음을 어떻게 운용하면서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살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내는 겁니다.]
於彼一切刹土 中에, 저 모든 세계 국토 가운데 悉有如來 演妙音하사, 다 여래가 계시어 묘음 펴시사
隨順 一切衆生心하야, 일체중생의 마음을 따라 爲轉 最上淨法輪이로다. 가장 높고 청정한 법륜 굴리시네.
刹中 種種衆生身이요, 세계 안에는 갖가지 중생의 몸이 있고
身中 復有種種刹하야, 몸 안에는 다시 갖가지 세계가 있어
人天諸趣 各各異어든, 인천의 諸趣= 온갖 갈래가 각각 다르건만
佛悉知已 爲說法이로다. 부처님은 다 아시고, 위하여 법을 설하시네.
大刹 隨念變爲小하고, 큰 세계가 생각따라 작게 변하고 [큰 세계가 생각을 따라 변하여 작게 되고]
小刹이 隨念亦變大하니, 작은 세계가 마음따라(마음 먹기에 따라) 크게 변하니
如是 神通無有量이라. 이러한 신통이 한량이 없어 世間共說 不能盡이로다. 온 세간이 함께 말해도 다할 수 없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과 깨달음을 성취한 광대한 공덕에 대해 설한 경전으로 전체적인 주제는 한마디로 여래(如來)의 해탈(解脫)세계와 보살(菩薩)의 실천(實踐)으로 요약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無上正等覺으로 표현되며 이 뜻은 비할 데 없이 가장 높고 올바르며 보편적인 깨달음이란 뜻이다.
여래가 깨달으신 광대한 세계는 범부 중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로 화엄경에서는 이 해탈의 세계를 부사의 해탈경계(不思議 解脫境界)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 화엄경의 첫 번째 주제이고 그 다음은 이처럼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를 구현(具現)해 가려는 보살의 광대한 실천(普賢行願)이다.
여래가 깨달아 들어간 불가사의한 해탈경계를 설명하고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보여준 뒤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뭇 중생들을 이 해탈경계로 인도하려는 보살의 실천이 화엄경의 전체적인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은 이 불가사의한 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로 들어가기 위해 한량없는 실천을 다짐하는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을 설한 품(品)이다.
화엄경(華嚴經)의 2가지 주제 즉 해탈경계(解脫境界)와 보현행원(普賢行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해탈경계 : 실천을 통해 들어가야 할 곳, 이는 곧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 소입(所入) : 깨달음을 통해 가야 할 곳, 즉 목적지
**보현행원 :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주체의 능동적인 실천
- 능입(能入) :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
흔히 화엄사상을 유심연기(唯心緣起)라고 말한다. 그것은 삼계는 허망하다. 다만 일심(一心)이 만들 뿐이다. 라고 설하는 십지품(十地品)과 함께,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畵家)와 같이 여러 가지 것=五陰 그리고, 일체의 세계 안에 있는 법 중에 그가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셋에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모든 것이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고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깨달으면 그 사람은 참다운 부처를 보리라고 설하는 야마천궁 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이나 또, 만약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마음이 모든 여래(如來)를 만든다고 관(觀)하라고 한 말로써 알 수 있고 이러한 뜻의 글은 화엄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다 만들 수가 있다고 하는 화엄경의 이 말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세계가 마음이 소산(所産)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서 자기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유심조(唯心造) 또는 一切唯心造라고 한다. 오직 마음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하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도중에서 되돌아 온 원효(元曉)스님의 유명한 일화를 상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원효와 의상은 함께 중국의 법장스님을 찾아가 화엄학(華嚴學)을 배우고자 길을 떠났다. 도중에 비는 오고 날은 어두워 노숙(露宿)하게 되어 어느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때 원효스님은 목이 말라 어둠 속을 더듬어 그릇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 물은 아주 시원하게 갈증을 가져 주었다. 여기 저기 해골과 뼈가 흩어져 있었고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원효스님은 구역질을 느꼈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단적으로 예시하는 일화이다.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객관적인 세계를 마음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인식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깊은 인식은 우리의 自覺으로부터 시작하고 우리의 자각은 자기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에서 나온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보니 밝은 여전히 비가 오고 두 사람이 잠을 잔 동굴은 풍장(風葬)을 하는 무덤이었다.
원효스님이 깨달은 유심조(唯心造)는 그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스님은 굳이 법장에게서 화엄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도중에서 되돌아 온 것이다.
우리들 중생이 迷惑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찰함으로써 문득 눈을 뜨면 깨달음의 세계를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세계를 짓는 일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淸淨한 세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부처도 또한 煩惱하는 중생의 세계로 내려와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이것은 부처의 마음이 짓는 중생의 세계이다. 이렇게 마음은 부처와 중생의 세계를 짓고 부처도 그와 같이 중생의 세계를 짓고 중생도 그와 같이 부처의 세계를 짓는다. 때문에 화엄경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같음을 강조한다. 이것을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은 如來의 몸속에서 일체 중생이 菩提心을 일으켜 보살행을 수행하고 깨달음(等正覺)을 성취하는 것을 본다. 하고, 보살은 스스로의 몸속에 모든 부처의 보리가 있음을 안다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 보살의 마음은 여래의 보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마음속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속도 또한 그와 같다고 설하고 있는 것은 중생과 부처와의 관계를 파고들어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여래를 발견하는 如來藏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화엄경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것은 믿음이다. 명난품(明難品), 정행품(淨行品), 현수품(賢首品) 등 3장에 걸쳐 이 믿음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설하고 있다. 그 중 賢首品은 이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곧 道의 근원으로서 功德의 어머니이다. 하고, 梵行品은 처음 發心했을 때, 즉시 正覺을 이룬다고 까지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보통은 信心을 내면 차츰 修行을 해서 부처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나 화엄경은 믿음을 일으키면 그 순간에 成佛한다고 한다. 이같이 믿음을 중요시하는 화엄경은 대단원(大團圓)을 맺는 마지막 章인 立法界品에서 文殊보살로 하여금 그 믿음을 대표하게 하고, 동시에 지혜를 대표하게 한다.
불교에 있어서 믿음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청정한 마음, 眞如의 本覺을 깨닫게 하는 지혜가 발동해서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점에서 믿음은 智慧안에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믿음과 지혜는 항상 함께 일컬어지고 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지혜가 이것을 이끌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미신으로 떨어지기가 쉽다. 그 반대로 지혜가 있어도 믿음이 수반하지 않으면 그 지혜는 도리어 邪見이 될 우려가 짙다. 화엄경이 믿음을 설한 다음, 지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우려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事物의 진실을 통찰하는 예지(叡智)를 말한다. 그리고 사물의 진실이란 緣起의 道理, 즉 인연의 도리를 말한다.
무릇 연기를 보는 이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부처를 본다고 한 화엄경의 말은 바로 지혜의 중요함을 말한다.
진여의 본각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發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如來藏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다. 여래장이란 여래의 성품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도리어 여래의 성품으로 싸여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여래가 사람의 번뇌에 싸여 있고 동시에 사람은 여래의 지혜로 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은 번뇌에 싸여서 드러나지 않고 있는 이 여래장에 문수보살에 의해서 대표되는 믿음이 작용할 때, 거기에서 깨달음이 열려 화엄경의 主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나타난다고 설한다.
화엄경은 문수보살로 하여금 믿음과 지혜를 대표하게 하듯이 普賢보살이 如來藏三昧에 들어 그러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경계를 설하게 함으로써 여래장을 대표하게 하고 있다. 또한 이 여래장은 진리 그 자체를, 그리고 여래장의 개발은 수행을 말한다. 그러므로 보현보살은 진리와 수행을 대표한다.
法界 즉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설하는 입법계품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인의 선지식(善知識)을 순방(巡訪)하면서 보살행에 대해서 묻고, 끝내는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을 설하고 있다.
선재동자는 맨 처음 믿음과 지혜를 대표하는 문수보살을 찾아가서 그의 교화를 받고 菩提心을 낸다. 그리고 최후로 진리와 수행을 대표하는 보현보살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法界, 즉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해서 보현보살에게서 끝내는, 그곳에서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하는 이 같은 구성은 지혜가 뒷받침하는 바른 믿음에 의해서 진리의 세계를 확인하고, 그 진리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보살행을 행한 결과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 최초로 문수보살을 만난 다음, 최후로 보현보살을 만나기까지의 사이에 선재동자가 만난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가지 보살행을 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선재동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보살이나 비구, 비구니가 있고 在家의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가 있으며 바라문(婆羅門) 등으로 異敎徒와 國王, 정치가(政治家), 長者, 實業人, 기술자, 의사, 노동자, 뱃사공, 귀부인, 창녀, 天神, 地神, 수신(樹神), 仙人, 보통사람의 남녀 등 온갖 계급의 사람들을 만나 보살행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보통 같으면 진리를 구하는 일이므로 성인(聖人)이나 이름 있는 종교인을 찾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입법계품에서는 종교인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 묻는다. 경에서는 비록 53인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온갖 종류의 인생경험을 망라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다시 말해서 선재동자의 깨달음에 이르는 구도행각(求道行脚)이 온갖 인생경험을 편력한 것임을 말해 주고 그러한 구도행각 끝에 깨달음을 이룬 것을 말해 준다.
화엄경은 깨달음에 이르는 이 같은 과정을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4단계로 나누어 설한다. 그것은 믿음과 지혜와 보살행과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 신, 해, 행, 증의 4단계는 수직적(垂直的)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연기(緣起)의 도리에 의해서 동시적(同時的)으로 전개된다.
최초로 믿음을 일으켰을 때 이미 최후 단계의 깨달음이 완성되었을 때도 최초의 믿음과 수행이 행해진다고 한다. 처음 發心하였을 때, 즉시 正覺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의 믿음과 지혜와 보현보살의 진리와 수행이 일체가 된 것을 비로자나불이라고 이름하고 있는데 이것을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비로자나불의 셋이 일체가 되었다고 해서 삼성원융(三聖圓融)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삼성원융의 도리를 바로 앎으로 해서 인간이 그대로 성불한다고 설한다. 이러한 삼성원융의 설은 신. 해. 행. 증이 동시적으로 전개되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작성자 kyoungahn]
(3) 請說
普發此等妙音聲하야 稱讚如來功德已하고 衆會歡喜黙然住하야 一心瞻仰欲聽法이로다
時解脫月復請言호대 今此衆會皆寂靜하니 願說隨次之所入인 第八地中諸行相하소서
普發 此等妙音聲하야, 이러한 미묘한 음성 널리 발하여 稱讚 如來功德已하고, 여래의 공덕을 찬탄하고서
衆會歡喜 黙然住하야, 대중들이 기뻐하며 잠자코 앉아 讚 기릴 찬, 黙 잠잠할 묵, 묵묵할 묵
一心으로 瞻仰 欲聽說이로다. 일심으로 우러러 설법 듣고자 하니 瞻仰첨앙= 우러러 사모함,
時 解脫月 復請言호대, 그때에 해탈월보살이 다시 청하여 말하되
今此衆會 皆寂靜하니, '여기 모인 대중이 다 적정하오니 皆寂靜개적정,
願說 隨次之所入인, 원컨대 차례에 따라 다음에 들어갈
第八地中 諸行相하소서. 제 8지의 모든 행상을 설해 주소서.'
2. 修習方便
爾時에 金剛藏菩薩이 告解脫月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七地中에
善修習方便慧하며 善淸淨諸道하며 善集助道法하며 大願力所攝이며 如來力所加며
自善力所持며 常念如來力無所畏不共佛法하며 善淸淨深心思覺하며
能成就福德智慧하며 大慈大悲로 不捨衆生하며 入無量智道하니라
爾時에 金剛藏菩薩이 그러자 금강장보살이 告 解脫月菩薩 言하사대, 해탈월보살에게 말했다.
佛子야 "불자여, 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은 於七地 中에, 제 7지에서
善修 習方便慧하며, 방편지혜를 잘 닦고 善淸淨 諸道하며, 모든 도를 청정히 하여,
善集 助道法하며, 조도법을 잘 모으고 大願力 所攝하며, 큰 원력을 잘 다스리면서[큰 원력에 섭한 바이며,]
如來力의 所加며, 여래의 힘이 가피한 바이며, 自善力所持며, 자신의 선근력을 유지시켜서
[자기 힘이 없으면 안 되니까 자기의 좋은 힘을 가지며.]
常念 如來力 항상 여래의 십력과 無所畏,무소위와 不共佛法을, 18 불공불법을 생각하고
善淸淨 深心思覺하며 깊은 심사각을 잘 청정히 하여 能成就 福德智慧하며, 복덕과 지혜를 능히 성취하며,
大慈大悲로 不捨衆生하며 대자대비로 중생을 버리지 않아서
入無量智道하니라. 한량없는 지혜의 도에 들어가거니와
[제8지를 향해 닦아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감을 밝힌 분이다.]
*不動地의 명목을 설명하면= 이 지위의 보살이 세간에 처한 지혜에서 공용을 구하지 않고 神으로써 사량하여 생각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면서 지혜가 만유를 따라 通化하는데 方所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부동지라 함을 밝힌 것이다.
*부동지의 行門을 설명하면= 이 지가 願波羅蜜을 행하니, 이 地의 지혜가 증가하여 지혜의 體가 본래 청정하기에 願으로써 행을 일으켜 더욱더 다시 자재롭게 하는 것이다. 만약 원으로써 지혜를 일으키지 않으면 오히려 2승과 같아질까 걱정하여 원으로써 방비함으로써 청정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지에 이르고 나면, 법이 합당히 모든 부처의 3加와 일곱 가지 勸으로 본원을 念케 해서 지혜 작용을 일으키므로 運에 맡겨 능히 광대한 자비를 일으켜서 문득 능히 작위 없는 지혜와 자비를 성취하여 작용에 맡겨 원만함을 성취하는 것이다. 앞의 제7지는 세간에 들어간 가운데서 행이 있고 개발이 있음을 성취하지만, 이 지는 행이 있고 개발이 있는 가운데서 행이 없고 개발이 없음을 성취하는 것이니, 지혜 작용에 맡겨 대자비를 원만케 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나중의 善慧에서 자재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운에 맡긴 지혜가 더욱 밝아서 作意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법계의 국토가 마니보배의 그물로 그 위를 가득 덮음을 널리 나타낸 것은 지혜의 경계가 널리 포함되어서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시설한 것을 이름하여 망(網)이라 하고,
지혜가 체(體)가 없어서 능히 온갖 법을 나타내면서도 作者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마니(摩尼)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지혜 작용을 잡아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과보의 依果가 因을 관해 果를 알고 과를 들어 인을 권함을 밝힌 것이며, 나아가 널리 경문에 설한 것과 같으니, 이 8지 교문이 수행할 바의 법이며, 야천의 명호가 대원정진력인 것이 행하는 사람임을 밝힌 것이다.
* 삼계 중에서 이 地가 어떤 界의 해탈을 얻는가를 설명하면= 이는 사물을 이롭게 하는 지혜의 작용이 두루 함을 얻으면서도 항상 공용이 없이 해탈함을 밝힌 것이다. 초지부터 7지까지는 유위와 무위에 모두 배우고 닦음이 있지만, 이 8지는 두 행이 이미 종결됨을 밝힌 것이니, 예컨대 보살행 중의 이 地는 功의 마침이요, 모든 부처의 10력과 18불공법의 자재로움은 10지에 비로소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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