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經卷第十六 須彌頂上偈讚品第十四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三藏沙門(삼장사문實叉難陀 (실차난타 

3회의 14.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7

 

서북방의 진실혜(眞實慧) 보살 ㅡ 아로나화(홍연화)의 세계 ㅡ 성수월불(星宿月佛)

爾時(이시) 眞實菩薩(진실혜보살) 承佛威神(승불위신) 普觀十方(보관시방) 而說頌曰(이설송왈) 

그때, 진실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설하였으니,

 

ㅡ보살의 명칭을 설명하면, 제8 동진주(童眞住) 중에서 원(願)바라밀을 행하여 진실한 지혜로 중생을 잘못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세계의 명칭이 아로나화(阿盧那華)이니, 이를 한역하면 홍연화(紅蓮華)인데, 이 꽃이 붉고 흰 것이 분명해서 홍색(紅色)이며, 이지위가 제8주의 시증위(智增位)가 되나니, 대지혜로 원(願)을 따라 자비를 행하여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하게 하는 것이 홍련화의 붉고 흰 것의 분명함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것은 지혜를 나타내고 붉은 것은 자비를 나타내기 때문에 세계의 명칭이 홍련화이니, 

참된 지혜를 따라 생사에 처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 마치 연꽃이 물에 처할 때 붉고 흰 것이 활짝 피어서 장관인 것과 같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ㅡ부처님의 명호가 성수월(星宿月)인 것은, 이 지위의 진지(眞智)가 뚜렷해서 근기를 알아서 그 차별함을 요달한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성수월이 되는 것이니, 중생의 차별적인 근성을 요달함이 분명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ㅡ도래한 방위는 서북방이니, 이는 건(乾)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경강(堅剛, 굳세고 튼튼함)이 되고, 천(天)이 되고, 원만한 순백의 청정함이 되나니, 능히 온갖 색을 나타내어서 그 속에 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의 명칭이 진실혜이며, 세계의 명칭이 홍련화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성수월인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대지혜가 원만히 밝아서 능히 중생의 근기 차별을 나타내는 것이 천(天)이 상(像)을 나타내자 사물이 분명한 것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선재동자의 제8 선지식인 비목구사(毘目瞿沙) 선인(仙人)이며, 이를 한역하면 출성가외(出聲可畏)로, 참된 지혜가 원만히 밝아서 온갖 사(邪)가 두려워 함을 밝힌 것이다. 

선인(仙人)이란, 이 지위에서 지혜가 증가하면서 오염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며, 

또 지혜를 얻어서 사견(邪見)과 함께 함을 나타낸 것이다.

 

寧受地獄苦(영수지옥고) 得聞諸佛名(득문제불명) 

不受無量樂(불수무량락) 而不聞佛名(이불문불명)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들의 명호를 들을 것이니, 
무량한 낙(樂, 즐거움)을 받지 않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하는 것이 더욱 괴로운 것이로다.

 

所以於往昔(소이어왕석) 無數劫受苦(무수겁수고) 

流轉生死中(유전생사중) 不聞佛名故(불문불명고) 

그 까닭을 말하자면, 지난 왕석(往昔, 옛적)의 수 없는 겁(세월)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나고 죽는 생사(生死) 가운데에서 유전(流轉)하여 헤매이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한 탓이기 때문이라.

 

於法不顚倒(어법부전도) 如實而現證(여실이현증) 

離諸和合相(이제화합상) 是名無上覺(시명무상각) 

법(法)에 전도(顚倒)되지 않아서 여실(如實)하게 그러한 대로 현증(現證)하여 깨달아서
모든 화합상(和合相, 아리야식)을 여의었다면, 이를 위없는 깨달음의 무상각(無上覺)이라 하며, 

 

ㅡ8식(八識)에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을 전5식(前五識) 또는 5식(五識)이라 하며, 

뒤의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을 후3식(後三識)이라 한다.

전5식은 색(물질)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識)으로, 각각 색경(색깔, 모양, 크기) · 성경(소리) · 향경(냄새) · 미경(맛) · 촉경(감촉)의 5경(五境)을 인식 대상으로 하고,

후3식 중 의식(意識)은 5경(五境)에 법경(法境)을 더한 6경(六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제6의식)으로,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다.

말나식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으로, 8식 중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그 본질적 성질 즉 자성(自性)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식(識)들이며,

말나식(末那識)의 본질적 성질은 언제나 심세하게 생각하는 항심사량(恆審思量)으로, 전통적으로 사량(思量) 또는 의(意)라고 하며, 이는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를 의역한 것이며 마나스를 음역하여 말나(末那) 또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본질적 성질은 인과의 종자를 함장하고 인연에 따라 그 종자를 현행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는 집기(集起, 쌓고 일으킴) 또는 심(心)이라고 하며, 이 두 낱말은 치타(citta)를 의역한 것이며, 이러한 성질을 가진 식을 아뢰야(阿賴耶)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아뢰야식이 우주만물의 근본이 되는, 즉 아뢰야식에 포함된 종자로부터 우주의 삼라만상이 전개된다고 본다.
아뢰야연기설에 따르면 개별 유정의 아뢰야식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부터 상속하여 각자 자신의 우주 만상을 변현하는, 즉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를 이룬다. 그리고 모든 유정의 각자의 우주는 서로 교섭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변현을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 교섭하여 공통된 변현을 이루기도 한다.
깨달음의 증득의 측면 (즉 환멸연기의 측면)에서는, 아뢰야연기설에서는 유루(有漏)의 아뢰야식 가운데는 이미 선천적으로 무루종자(無漏種子)가 있다고 보며, 이 무루종자는 부처와 보살 등의 깨달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듣는 것을 증상연(增上緣)으로 한다. 그리고 그 세력이 성도(聖道)에 의해 강력해져서 3계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인 번뇌장과 소지장을 마침내 끊고 전의(轉依)를 증득하게 된다.ㅡ 위키

 

現在非和合(현재비화합) 去來亦復然(거래역부연) 

一切法無相(일체법무상) 是則佛眞體(시즉불진체)

현재도 화합한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 또한 그러하나니
일체법에 대하여 상(相, 소견 관념)을 가지지 않는 무상(無相)이라면,

이러함이 곧 부처의 참된 체성의 불진체(佛眞體)라 하겠습니다.

 

若能如是觀(약능여시관) 諸法甚深義(제법심심의) 

則見一切佛(즉견일체불) 法身眞實相(법신진실상) 

만약 이러하게 제법의 깊고 심오한 이치의 심심의(甚深義)를 관찰할 수 있다면
곧 일체의 모든 부처님 법신(法身)의 진실상(眞實相)을 보게 될 것이니, 

 

於實見眞實(어실견진실) 非實見不實(비실견부실) 

如是究竟解(여시구경해) 是故名爲佛(시고명위불) 

실(實)에서 진실(眞實)을 보고, 비실(非實)에서 진실이 아닌 불실(不實)을 보아
이와 같이 여실(如實)하게 끝까지 궁구하여서 이해하는 구경해(究竟解)를 얻었다면
부처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실하게 끝까지 궁구하여서 바르게 보는 구경해를 얻었다면 부처라 합니다)

 

佛法不可覺(불법불가각) 了此名覺法(요차명각법) 

諸佛如是修(제불여시수) 一法不可得(일법불가득) 

부처님의 불법(佛法)은 가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이러함을 잘 아는 것을 이름하여 법을 깨달은 각법(覺法)이라 하나니, 
제불(諸佛)을 이러하게 닦으셨으니, 하나의 일법(一法)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로다.

 

知以一故衆(지이일고중) 知以衆故一(지이중고일) 

諸法無所依(제법무소의) 但從和合起(단종화합기) 

하나(一)로 인하여 많은 것(衆)을 알고, 많은 것(衆)으로 인하여 하나(一)를 아나니, 
제법(諸法)은 의지하는 바가 없는 무소의(無所依)이나,

오로지 화합(和合)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無能作所作(무능작소작) 唯從業想生(유종업상생) 

云何知如是(운하지여시) 異此無有故(이차무유고) 

능히 짓는 주체의 능작(能作, 주관)과 지어지는 객체의 소작(所作, 객관)도 없는 것으로,

오로지 업이라 생각하는 업상(業想)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이러함과 다른 것, 이차(異此)가 없는 까닭이로다.

ㅡ능작(能作)과 소작(所作)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내 마음이 능작(能作)하여서 소작(所作)을 얻는다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업이라고 생각하는 업상(業想), 즉 업이라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ㅡ이러함과 다른 것, 이차(異此)가 없는 까닭이로다.

연기법에서 '차유고(此有故) 피유(彼有), 피유고(彼有故) 차유(此有), 이것이 있음으로해서 저것이 있게 되었고,

저것이 있음으로해서 이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와 같은 뜻입니다

 

一切法無住(일체법무주) 定處不可得(정처불가득) 

諸佛住於此(제불주어차) 究竟不動搖(구경부동요) 

일체법은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이며,

그 머무는 곳의 정처(定處)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그러함에 머물러서 구경(究竟)에도 동요하지 않으십니다. 

 

수능엄경(首楞嚴經) 7권 11에서

"아난아, 무엇을 이름하여 뒤바뀐 전도(顚倒)라 하는 것인가?

아난아, 원만한 성품의 마음인 성원심(性圓心)이 무명에 훈습됨으로 말미암아 무명으로 인하여 식(識)이 생기고,

식(識)의 거짓된 망(妄)으로 인하여 견(見)이 생기나니,

필경에 없는 것을 좇아서 마침내 유(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주체인 능유(能有, 번뇌)와 존재하게 되는 대상인 소유(所有, 업)는 능인(能因, 업)과 소인(所因, 번뇌)이 아니며,

능주(能住, 업)와 소주(所住, 번뇌)의 상(相)은 분명히 그 근본이 없는 것이니,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하여 세계와 모든 중생들이 건립된 것이니라."

"ㅡ성원심(性圓心)는 금강반야 진여의 실체를,

무명에 훈습된 것은 자성을 지키지 못한 망명(妄明)으로 인하여 허망한 망식(妄識)이 생기고,

이 망식으로 인하여 허망한 망견(妄見)이 생겨서, 이에 무상(無相)의 진(眞)을 좇아서 유상(有相)의 망(妄)을 이루기 때문에

필경에는 없는 무(無)에서 구경의 유(有)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능유와 소유와 능주와 소주 모두가 능인과 소인이 아니며, 또한 뚜렷한 근본이 없는 것이다.

 

유(有) → 소유(所有) = 주(主) → 객(客) = 능유(能有) → 소유(所有) = 번뇌(煩惱, 혹或) → 업(業)

인(因) → 소인(所因) = 주(主) → 객(客) = 능인(能因) → 소인(所因) = 번뇌(煩惱, 혹或) → 업(業)

주(住) → 소주(所住) = 주(主) → 객(客) = 능주(能住)  → 소주(所住) = 번뇌(煩惱, 혹或) → 업(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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