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1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유마경'과 '화엄경'은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에서; 

 

다섯째,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들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유마경'에서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 중에서 문수(文殊)와 미륵(彌勒)과 같은 대보살이나 사리불과 같은 영향성문(影響聲聞, 보살행을 닦는 성문)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들은 모두 3승 중에서 방편을 배우는 권학(權學)의 대중들이다. 설사 그 중에서 어떤 보살들이 천상ㆍ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제취(諸趣)에 태어나서 같은 부류로 함께 온다고 할지라도 모두 3승의 권학(權學)을 성취시켜 점진적으로 반절시키려는 것일 뿐, 여전히 원만한 부처님들의 본승(本乘)을 설하지 못한 것이다.

ㅡ영향성문(影響聲聞); 영향은 그림자와 메아리인데 감응하여 나타난다는 뜨이다. 법신보살이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몸을 감응하여 나타냄으로써 여래의 교화를 돕는 것이다. 즉 밖으로는 성문승을 나타내지만 안으로는 보살행을 닦는 자다.

 

그러나 '화엄경'에서의 법을 들으러 오는 대중들은 이와는 다르게 모두가 여래승(如來乘)을 타고 불지(佛智)의 과덕(果德)과 자체의 법신(法身)이 보현행(普賢行)을 갖추어서, 그림자를 따라 사방 찰해(刹海)의 모든 도량에 나타나 여래승(如來乘)의 근본법을 성취한 이들로서, 이 중에는 단 한 한분도 3승의 근기를 가진 이가 없으며, 설사 3승의 근기가 있다 할지라도 장님이나 귀머거리처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마치 장님이 해와 달이 밝아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귀머거리가 천상의 음악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듣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타고난 가난뱅이가 천상의 보물 창고에 갈지라도 취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대복덕(大福德)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옥에 처해 있는 중생은 수용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갈증의 업이 심한 아귀가 백천 년을 지나도 물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거늘, 바닷가에 있으면서도 물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3승의 근기는 도력(道力)이 궁극에 이르지 못한 탓에 마음을 돌이켜서 회심(廻心)하지 못한 니는 법계해(法界海)의 모든 부처님 경계에 항상 머물면서 부처님과 더불어 덕(德)을 같이하고 몸(身)을 같이할지라도, 끝내는 믿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따로 부처의 견해인 불견(佛見)을 구하는 까닭에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는 것이다.

“불자(佛子)야, 설사 보살이 무량한 백천억(百千億) 나유타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해서 갖가지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모은다 할지라도, 이 여래의 부사의한 공덕(功德) 법문을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믿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하고, 법문에 들지도 못한다면, 진실한 보살이라 칭할 수 없으니, 여래의 집안인, 불가(佛家)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마경'과 '화엄경'은 법을 듣는 대중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유마경'에서는 사바세계의 대중들이 피차(彼此)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향적(香積)세계에서 온 보살 무리들은 더러움의 구(垢)와 청정함의 정(淨)이 완연히 존재하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부류는 견해가 여전히 참답지 못해서 청정한 불국토라는 한쪽만을 지키기 때문에 비록 보살이라 칭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법도(法道)가 원만하지 못하나니, 이 무리들은 부처님의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한 탓에 비록 보리의 기뻐하는 의지와 염원이 있지만, 마음이 청정한 불국토에 매여 있어서 저 법신(法身)과 지신(智身)과는 현격히 떨어져 있다.

이러한 까닭에 '법화경'에서는 “불퇴전(不退轉) 보살들의 수효가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을지라도 역시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대중들은 자신과 불신(佛身)이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도 차이가 없으며, 성(性)과 상(相)이 서로 용납하고, 일(一)과 다(多)가 서로 동별(同別,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차별성이 있는)하기 때문에 법계해의 지수(智水)에 거처하면서 물고기(범부 중생의 비유)도 되고 용(龍, 성인의 비유)도 되고,

열반의 큰 집에 머물면서 음양(陰陽)을 나타내어 만물을 교화한다.

이 때에도 일체법은 하나가 주(主, 주체)가 되면 나머지는 반(伴, 객체)이 되어서 상호 끝없이 작용한다는, 주(主)와 반(伴)이 자유롭게 서로 비추고 참여하며,

스승과 제자가 서로 융화하며, 인(因)과 과(果)가 사무쳐 통하는 것이니, '화엄경'의 대중들은 모두 이와 같은 무리들인 것이다.

ㅡ예를 들면 아미타불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할 때에는 보살로 나타나서 반(伴)이 되고 제자가 되며, 동시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주(主)가 되고 스승이 되나,

만약 석가모니부처님이 정토에 출현할 때는 역시 보살로 나타나서 제자가 되고 반이 되며, 동시에 아미타불은 스승이 되고 주가 되는 것 등이다.

 

여섯째, 가르침을 설해서 법문을 세우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유마경'은 유마힐 거사가 약간의 부사의한 신통변화를 나타내서 2승(乘)의 마음을 돌이켜서 회심(廻心)하게 한 것이며, 또 생사(生死)의 입장에서 몸의 병을 나타내어 더러움과 청정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또한 보살의 대자비라는 병을 나타내어서 불이(不二)의 법문을 충분히 진술하였는데, 이는 정혜(定慧)의 관지(觀智)를 건립함으로써 구하지 않는 법의 불구법(不求法)이 가장 핵심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법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일체법에 대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등각(等覺)인 5위(位)와

앞의 5위에 10신을 더한  6위(位)의 행상인과(行相因果)의 같고 다름을 충분히 진술한 화엄경의 법문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ㅡ행상(行相)은 수행해 나아가는 양상을 말한다. 화엄경에는 각 지위마다 수행해 나아가는 양상의 인과 과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일곱째, 유마힐보살이 보인 행(行)이 다르다는 것은,

유마힐은 대자비심을 나타내고자 짐짓 생사에 들어가 병치레를 보였지만,

화엄경의 비로자나는 대자비로 생사에 들어가 정각(正覺)을 이루는 행실을 보였으니, 이는 위대한 지혜가 세상을 초월할 수 있음을 드러낸 것임을 말한다.

 

여덟째, 천양한 법문의 처소가 다르다는 것은,

유마경을 설한 곳은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암라수원(菴羅樹園)과 유마힐의 방이었으며,

화엄경은 마가다국의 보리도량 안과 일체 세계와 일체의 티끌 속에서 설한 것임을 말한다.

 

아홉째, 부처님을 항상 따르는 대중들이 다르다는 것은,

유마경을 설했을 때에는 성문(聲聞)이 항상 부처님을 따르는 대중이 되었는데, 단 5백 명이었다.

그러나 화엄경을 설했을 때에는 모두 일승(一乘)인 대보살들이 부처님을 항상 따르는 대중으로서 10불찰(佛刹)에 있는 미진수의 대중들이었으며, 모두 보현과 문수의 체(體)와 용(用)을 갖춘 무리들이었음을 말한다.

 

열째, 부촉한 법장(法藏)의 유통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유마경의 '촉루품(囑累品'에서는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계시니, 

“미륵아, 내 이제 무량한 오랜 세월의 아승기겁(阿僧祇劫) 동안 모은 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의 개달음의 최고 지혜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 또는 무상정변지 無上正遍知)의 법을 네게 부촉하노라” 하시니, 그러므로 곧 그 경전을 이미 성취한 보살과 이미 부처님 집안에 태어난 자에게 부촉하신 것이나, 

 

화엄경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안에 부촉과 유통이 있으니, 즉 화엄경은 처음으로 도(道)를 보아서 부처님 집안에 태어난 범부로서의 초심자에게 부촉되고 있다.

왜냐 하면 이 경전은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당사자가 능히 증득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증(自證)을 삼기 때문이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 설법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옛 조사가 말하기를 “증득을 말한다면 남에게 보일 수 없지만, 이치[理]를 설하는 것은 증득이 아니면 요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3승은 방편을 나타낸 것이니, 단지 성인이 수행으로 증득하기를 권한 것일 뿐 얻은 법이 유공용(有功用)이므로 실답지 않으며,

법을 강설한 것도 화신불이 법을 설한 까닭에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법을 설하고 있으니, 

“이 경전의 진귀한 보배는 여래 법왕(法王)의 참된 자식으로서 여래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래 종자의 모든 선근(善根)을 심은 자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일체 중생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불자(佛子)야, 이와 같이 부처님의 참된 진불자(眞佛子)가 없다면, 이같은 법문은 오래지 않아 흩어져 사라지리라.”

 

이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차된 자식이 시방세계에 한도 없고 끝도 없어서 세계의 미진(微塵)으로도 그 수효를 알지 못함을 인정한다면, 어째서 이 경전에서, ‘만약 참된 자식이 없다면 이내 흩어져 사라지리라’고 염려한 것입니까?”

질문에 답한다.

“이 경전의 뜻은 범부에게 부촉함으로써 그들이 깨달음을 통해 이 법문에 들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집안에서 태어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된)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을 굴려서 부처님의 종자(불교의 전승)를 끊기지 않게 하니, 이는 범부들도 참된 경지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만약 대보살들에게만 부촉한다면, 범부는 인연이 없고 성인은 스스로 밝힐 것이니, 범부로서는 배우고 닦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범부의 길에서 부처의 종자인 불종(佛種)이 그대로 끊어져서 이 경전은 흩어져 사라벼 버릴 것이니,

바로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에게 부촉해서 닦게 한 것이며, 이미 도(道)를 본 대보살들에겐 부촉하지 않은 것이다.”

 

'유마경'과 '화엄경'의 한 가지의 같은점이란,  

도(道)에 들어가는 방편이 같다는 것은,

'유마경'에서는 “법을 구하는 자는 일체법에 대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와

“자신의 실상을 관하는 것은 부처님을 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내가 여래를 관해 보니, 전제(前際, 과거)가 오는 것도 아니요 후제(後際, 미래)가 가는 것도 아니요 지금 현재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를 강설하고 있다.

이는 처음 관지(觀智, 관찰하는 지혜)의 문은 대략 같은 것이지만, 도(道)에 들어가는 행상(行相)의 문호(門戶)와 단계는 기준이 전혀 다른 것이니, 앞으로 상세히 밝혀 나가겠다.

 

일곱째, 방편을 회통해서 진실(實)에 들어가는 것으로 종지를 삼았다는 것이란,

'법화경'은 저 3승의 사람을 인도해서 1승(乘)의 진실한 가르침인 실교(實敎)로 돌아가게 한 것이니, 마치 온갖 지류(支流)의 강물이 모두 커다란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하나가 되는, 귀일(歸一)하는 것과 같이, 3승을 거두어서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장(藏)법사 등 과거의 대덕(大德, 고승)들이 회통한 공통적인 가르침의 공교(共敎)를 1승으로 삼았으니, 이는 3승이 다 함께 법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를 자세히 탐구해서 두 문을 회통한다면,

법화경은 방편의 근기를 인도해서 진실(眞)로 돌아가게 한 것이요,

화엄경은 단박에 대근기에게 게시하여 곧바로 부여한 것이다.

비록 1승이란 이름을 공유해서 법사(法事)가 대략 같긴 하지만, 그 궤범(軌範)을 논한다면 차이점이 많으니, 그 차이점 전부를 열거하고 싶지만, 내용이 광범위해서 다 들기가 힘든 까닭에 열 가지의 십문(十門)만으로 그 대강의 강목(綱目)을 알리겠으니, 열 가지의 내용이란, 
첫째, 교주(敎主, 가르침의 주체)가 다르며, 

둘째, 방광(放光, 광명의 방출)이 다르르며,

셋째, 국토가 다르며,

넷째, 법을 청한 주체가 다르며,

다섯째, 대회(大會)를 장엄하는 진신(眞身)과 화신(化身)이 다르며,

여섯째, 서분(序分) 속에서 열거한 대중이 다르며,

일곱째, 용녀(龍女)가 몸을 바꾸어 성불(成佛)한 것이 다르며,

여덟째, 용녀가 성불해서 거처한 국토가 다르며,

아홉째, 육천 대중이 발심(發心)한 것이 다르며,

열째, 모든 성문(聲聞)들에게 주는 원겁의 수기(授記)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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