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說法과 波羅蜜莊嚴
菩薩이 如是爲諸衆生하야 而演說法하고 則自修習하야 增長義利호대 不捨諸度하야 具足莊嚴波羅蜜道니라
菩薩이 如是爲諸衆生(여시위제중생)하야,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들을 위해
而演說法(이연설법)하고, 법을 설하고 則自修習하야, 곧 스스로 닦아 익혀서
[修習= 수행. 설법이 수행이고, 포교가 수행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론공부도 정확하게 잘해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 큰 수행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增長義利(증장의리)호대, 이치에의 예리함을 더욱 키워내고
不捨諸度(불사제도)하야, 모든 법도를 버리지 않아서
具足莊嚴波羅蜜道(구족장엄바라밀도)니라. 바라밀의 도를 구족히 장엄합니다.
(1) 布施波羅蜜
是時에 菩薩이 爲令衆生으로 心滿足故로 內外悉捨호대 而無所着하나니 是則能淨檀波羅蜜이니라
是時에 菩薩이 그 때 보살이 爲令衆生(위령중생)으로 心滿足故(심만족고)로,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內外悉捨(내외실사)호대, 안팎으로 다 버리되 而無所着(이무소착)하나니, 집착하지 않으니
[內捨=안 보시= 법 보시도하고 外捨= 바깥보시= 재물을 悉捨= 다 보시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게 하나니,]
是則能淨檀波羅蜜(시즉능정단바라밀)이니라. 이것이 곧 단바라밀=보시 바라밀을 청정히 하는 것이요
[보시= 법보시ㆍ재보시ㆍ무외시와 무재칠시가 있습니다]
[3 보시= 베품= 보시는 6바라밀의 으뜸이 되는 덕목으로 보시에는 물질을 베푸는 재시(財施), 설법 등을 통해 진리의 가르침를 베푸는 법시(法施), 두려움을 없애고 편안케 해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다.
무외시에는 ‘물질없이 베품’ 즉 재물없이 할 수 있는 7가지라는 뜻의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있다.
① 안시(眼施)= 부드러운 눈으로 대하는 ②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미소띤 얼굴로 기쁘게 대하는
③ 언사시(言辭施)= 좋은 말로 대하는 ④ 신시(身施)= 예의 바르고 친절한 행동의
⑤ 심시(心施)= 착한 마음으로 대하는 ⑥ 상좌시(床座施)= 남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⑦ 방사시(房舍施)= 가족이나 남에게 잠자리를 편안하게 제공하는]]
② 持戒波羅蜜
具持衆戒호대 而無所着하야 永離我慢하나니 是則能淨尸波羅蜜이니라
具持衆戒(구지중계)호대, 모든 계율을 구족히 지키되
而無所着(이무소착)하야, 집착하지 않고
永離我慢(영리아만)하나니, 영원히 아만을 여의니,
[계를 잘 지키는데 왜 아만이 없다고 합니까? 계를 특별히 잘 지키는 사람들치고, 아만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것 참 신기해요. 율원에 있는 사람들 보면, 지금 같은 이런 세상에 특별히 율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데, 그래도 또 자기가 계를 지키는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아만이 있는 겁니다.]
是則能淨尸(시즉능정시)波羅蜜이니라. 이것이 곧 시(尸)바라밀= 지계 바라밀을 청정히 하는 것이며,
③ 忍辱波羅蜜
悉能忍受一切諸惡호대 於諸衆生에 其心平等하야 無有動搖가 譬如大地가 能持一切하나니 是則能淨忍波羅蜜이니라
悉能忍受一切諸惡(실능인수일체제악)호대, 일체의 모든 악을 능히 다 참아내되
於諸衆生(어제중생)에 其心平等(기심평등)하야, 모든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고
無有動搖(무유동요)가, 흔들림 없는 것이 譬如大地(비여대지)가, 마치 대지와 같아서
能持一切(능지일체)하나니, 모두 지켜낼 수 있으니
是則能淨忍波羅蜜(시즉능정인바라밀)이니라. 이것이 곧 인(忍)바라밀=인욕 바라밀을 청정히 하는 것이며,
④ 精進波羅蜜
普發衆業하야 常修靡懈하며 諸有所作에 恒不退轉하며 勇猛勢力을 無能制伏하며
於諸功德에 不取不捨하야 而能滿足一切智門하나니 是則能淨精進波羅蜜이니라
普發衆業(보발중업)하야, 여러 사업을 널리 일으켜 常修靡懈(상수미해) 항상 닦기에 게으르지 않고
諸有所作(제유소작)에, 모든 행한 일에 恒不退轉(항불퇴전)하며, 항상 퇴전치 않으며
勇猛의 勢力(용맹세력)을, 용맹한 세력은 無能制伏(무능제복)하며, 아무도 굴복시킬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못 말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비록 조금 고집스럽고, 편협한 것 같아도 자기가 못 따라가니까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대중 생활을 해보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편협 되고 고집스럽긴 한데, 내가 못 따라가니까 그 사람을 이래라ㆍ저래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於諸功德(어제공덕)에 不取不捨(불취불사)하야, 모든 공덕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而能滿足一切智門(이능만족일체지문)하나니, 일체지혜의 문을 능히 만족히 하니
是則能淨精進波羅蜜(시즉능정정진바라밀)이니라. 이것이 곧 정진(精進)바라밀을 청정히 하는 것이며,
⑤ 禪定波羅蜜
於五欲境에 無所貪着하며 諸次第定을 悉能成就하며 常正思惟하야 不住不出하며 而能銷滅一切煩惱하며
出生無量諸三昧門하며 成就無邊大神通力하며 逆順次第로 入諸三昧하며 於一三昧門에 入無邊三昧門하며
悉知一切三昧境界하며 與一切三昧와 三摩鉢底智印으로 不相違背하며 能速入於一切智地하나니
是則能淨禪波羅蜜이니라
於五欲境(어오욕경)에, 오욕의 경계에 無所貪着(무소탐착)하며, 탐착하지 않고
[오욕경 = 眼ㆍ耳ㆍ鼻ㆍ舌ㆍ身.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이 하고자 하는 좋은 것만 다 하려고 하는 경계에]
[오욕락을 財色身名壽라고 하는것은 일반적인 오욕락이고, 불교의 오욕락은 꼭 眼耳鼻舌身입니다. 몸은 늘 부드러운 걸 좋아하고 또 몸이 좀 덥다고 에어컨 틀고 추우면 또 히터 틀어야 되는 이것이 몸이 하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눈 귀 코는 말할 것도 없고, 다 좋은 것만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諸次第定(제차제정)을, 모든 순차적 정= 구차제정을 悉能成就(실능성취)하며, 능히 성취하여
常正思惟(상정사유)하야, 언제나 바르게 사유하고 不住不出(불주불출)하며, 머물지도 벗어나지도 않으며
[8정도의 正思惟가 진짜 선정입니다. 바르게 볼 줄 알고ㆍ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而能銷滅一切煩惱(이능소멸일체번뇌)하며, 모든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어서
出生無量諸三昧門(출생무량제삼매문)하며, 한량없는 삼매문을 출생시키고
成就無邊大神通力(성취무변대신통력)하며, 가이없는 큰 신통력을 성취하며,
逆順(역순)의 次第(차제)로 入諸三昧(입제삼매)하며, 역과 순의 차례로 모든 삼매에 들고
[12인연법을 관하는 것도 역으로 관하고, 순으로 관하고, 어떤 계획을 세워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음으로 그려보고, 또 뒤에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생각해보면서 ‘빠진 것이 없는가?’ 일일이 살필 줄 아는 것이 선정입니다.]
[[모든 차제(次第)의 선정'이란, 색계의 4선(禪)에 보살이 차례대로 능히 들어가고, 무색계의 4선에 보살이 다 능히 순조롭게 들어가는 것이며, 혹은 간격을 초월해서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다. 마치 {열반경} [사유분]에서 초선으로부터 들어가서 3선의 정(定)에서 나오고, 공처(空處)에 들어가서 무소유처에서 나오고, 비상처(非想處)에 들어가서 공처에서 나오는 것이 이같은 간격을 초월함이며 이같은 차제(次第)인데, 이 경전에서는 방망삼매(方網三昧)가 일방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시방에서 일어나고, 시방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일방(一方)에 일어나는 등과 같은 것이니, 자세히는 10신위에서 설명하였다.]]
於一三昧門(어일삼매문)에서 하나의 삼매문에서
入無邊三昧門(입무변삼매문)하며, 가이없는 삼매문에 들어가 [한 삼매를 통해서 無邊三昧를 다 알아서]
悉知一切三昧境界(실지일체삼매경계)하며, 모든 삼매의 경계를 다 알아내며
與一切三昧(여일체삼매)와, 모든 삼매와 三摩鉢底智印(삼마발저지인)으로, 삼매지혜의 인(印)이
[三摩鉢底= 선정의 定. 삼매는 선정. 毘鉢舍那(비발사나, 위빠사나)는 觀입니다. = 止觀.
三摩鉢底의 智=지혜 印= 定慧. 그래서 정혜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止觀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三摩鉢底智印이란 것은 공적의 작용이 똑같이 일어나 모든 만법을 印쳐서 명료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큰바다의 물로서 만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청정한 지혜가 일체 만법을 널리 印을 쳐서 능히 요달해 알면서도 能과 所가 없으며 작위하는 자도 없음을 밝힌 것]]
[[모든 법을 잘 관해서 실상(實相)의 인(印)을 얻는다'는 작위도 없고 의지함도 없고 상념도 없는 대지혜의 인(印)으로 모든 만법을 인쳐서, 오직 법만이 일어날 뿐 무명의 삼세를 집착하는 것이 없음을 실상의 인이라 이름붙인다.]]
不相違背(불상위배)하며, 서로 위배되지 않아서
能速入於一切智地(능속입어일체지지)하나니, 능히 일체지혜의 자리에 속히 들어가니
是則能淨禪波羅蜜(시즉능정선바라밀)이니라. 이것이 곧 선바라밀=선정 바라밀을 청정히 하는 것이니라.
[[九次第定= 불교의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첫째는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samatha’ ‘止’. 다른 하나는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법을 관찰하는 ‘vipassana’ ‘觀’. 불교의 禪定은 이 둘을 함께 수행하는 것을 의미해서 선정을 다른 이름으로 止觀이라 하며,
‘지’를 통해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정’이라 하고 ‘관’을 통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을 ‘혜’라 합니다. 보조 국사가 주창한 ‘定慧雙修’는 바로 ‘지관’을 바르게 닦자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사유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어떤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를 많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 불교 공부라 생각하지만 이 두가지 모두 바른 불교 공부가 아닙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고 해서 연기의 도리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고 교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지관’을 통해서 연기의 도리를 깨친 후 그 깨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는 ‘지관’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하며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차제정은 부처님께서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한 ‘지관’입니다.
중아함 [分別觀法經]에 구차제정, 즉 四禪과 四無色定을 차례로 닦아 멸진정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서슬되어 있습니다. 경의 제목이 시사하듯 이 경은 법을 관하는 觀法 修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불교를 수행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므로 오늘은 이 경전의 내용을 대조하여 충실하게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류하여 설명하리니, 그것을 잘 듣고, 깊이 생각하여 기억하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은 것을 탐구해야 한다. 밖으로 식이 산란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게 하며 안으로 불안한 집착이 없고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밖으로 식이 산란하지 않고 안정될 때, 내부에 불안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없으며, 미래에 생 . 노사의 괴로움이 集하거나 생기지 않는다.
”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다.--- 이에 비구들이 존자 대가전연의 처소에 가서 대가전연에게 말했다. “원컨대 존자 대가전연께서는 자비로 어여삐 여겨 그 뜻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소서.” 존자 대가전연이 비구들에게 “벗들이여, 어떤 것을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고, 흩어진다고 하는 것일까? 벗들이여, 비구가 눈으로 색을 볼 때, 색의 겉모습을 쫓는 식이 있으면,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에 묶이고,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의 속박에 속박된다. 이것을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고 흩어진다고 말한다.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법을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벗들이여, 어떤 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하는 것일까? 욕탐을 멀리하고 不善法을 멀리하면, 推論이 있고 사찰이 있는 (有學有觀), 욕탐과 불선법에서 분리됨으로써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 된다. 거기에 욕탐에서 분리됨으로써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쫓는 식이 있으면, 분리됨으로써 생긴 기쁨과 즐거움에 집착하고, 그 기쁨과 즐거움에 묶이고, 그 기쁨과 즐거움의 속박에 속박된다. 이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벗들이여, 나아가서 비구가 충분히 탐구하여 마음이 적정해지면, 안으로 조용히 가라앉아 마음이 하나로 집중된, 추론이 없고 伺察사찰이 없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 된다. 거기에서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쫓는 식이 있으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집착하고, 그 기쁨과 즐거움에 묶이고, 그 기쁨과 즐거움의 속박에 속박된다. 이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伺察사찰 남의 행동을 몰래 살핌)
벗들이여, 나아가서 비구는 기쁨과 탐욕에서 벗어난 무관심에 머물면서, 즐거움을 마음 모아 사려 깊게 주의함으로써, 그것이 ‘평온한 무관심에 주의 깊은 사람은 즐겁게 지낸다.’라고 성자가 이야기한 바로 그 즐거움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험한다. 그는 세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 된다. 거기에서 무관심을 쫓는 식이 있으면, 무관심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무관심의 즐거움에 묶이고, 무관심의 즐거움의 속박에 속박된다. 이것을 마음이 안으로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벗들이여, 나아가서 비구가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버리고, 전에 있던 정신적인 안정과 근심을 소멸하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한 무관심에 집중된 청정한 마음인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 된다. 거기에서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마음을 쫓는 식이 있으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마음에 집착하고 묶이고 속박된다. 이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이상이 색계 四禪을 수행하는 과정입니다. 전에 소개한 중아함 [分別六界經]에서 “만약 비구가 세 가지 느낌(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무관심)에 물들지 않고 해탈하면, 청정하고 순수하며, 부드러우며 적당하고 밝은 무관심(捨)이 남는다.”라고 이야기한 ‘무관심’은 사선을 수행한 결과 도달하게 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 부분까지는 중아함[분별관법경]과 [Majjhima-Nikaya, 138경]의 내용이 일치합니다.
그런데 사선을 수행하여 마음을 통일한 후에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중아함 [분별관법경]에는 四無色定, 즉 空處, 識處, 無所有處, 非有想非無想處를 닦아 익힌다고 되어 있는데, [Majjhima-Nikaya, 138경]에는 이 부분이 없습니다.
중아함[분별관법경]에 나오는 사무색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물질에 대한 생각을 초월하면 감관의 대상에 대한 생각이 소멸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滅有對想 不念若干想), 끝없는 공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無量空處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무량공처를 초월하면, 무량한 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무량식처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無量識處를 초월하면, 존재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無所有)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무소유처를 초월하면, 想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想非無想)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이렇게 四無色定이 [중아함경]에 들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 다음의 내용은 중아함 [분별관법경]과 [Majjhima-Nikaya, 138경]이 비슷합니다.
벗들이여, 어떤 것이 집착이 없고, 걱정이 없는 것일까? 벗들이여,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육체를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아’ 속에 육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육체 속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때 육체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육체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육체를 쫓는 식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때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육체를 쫓는 걱정이 생기지 않고, 법의 집이 없으므로, 마음이 [그 법을] 붙잡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붙잡지 않으므로 두려움도 없고 고뇌도 없으며 무관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수 . 상 . 행 . 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벗들이여, 이것을 집착이 없고 걱정이 없다고 한다.
이 경의 내용을 삼계, 칠식주 이처와 비교해 봅시다.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고 흩어지는 상태는 욕계이며, 이와 같이 외부의 대상에 식이 머무는 것을 第一識住라고 합니다.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는 색계를 의미하며,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탐과 不善法에서 분리됨으로써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의 상태인데, 식이 이러한 초선에 머물고 것을 第二識住라고 합니다.
둘째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第二禪의 상태인데, 식이 이러한 제이선에 머물고 있는 것이 第三識住라고 합니다.
셋째는 탐욕에서 벗어난 무관심에 머물면서, 평정한 무관심 捨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마음 모아 사려 깊게 주의함으로써 그 즐거움에 스스로 체험하는 第三禪의 상태인데, 식이 이러한 제삼선에 머물고 있는 것을 第四識住라고 합니다. (색계 = 제이식주, 제이선, 제삼식주, 제삼선)
넷째는 전에 있던 정신적인 안정과 근심을 소멸하여,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평정한 무관심에 집중된 청정한 마음인 第四禪의 상태인데, 식이 이러한 제사선에 머물고 있는 것을 第一處라고 합니다.
색계 四禪을 닦아 평정한 무관심으로 마음이 통일된 제일처에 도달한 후에,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청정하고 평정한 마음으로 공간, 의식, 無, 非有非無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되는 것이 無色界이며, 四無色定입니다.
無量空處定은 물질은 존재하지 않고, 한계가 없는 공간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인데, 이것을 第五識住라고 합니다. (제사선= 제일처, 무색계=사무색정, 제오식주=무량공처정)
無量識處定은 공간도 존재가 아니고, 한계가 없는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를 第六識住라고 합니다.
無所有處定은 의식도 존재가 아니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인데, 이것을 第七識住라고 합니다.
非有想非無想處定은 유무를 사유하는 想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인데, 이것을 第二處라고 합니다. (무량식처정=제육식주, 무소유처정=제칠식주, 비유상비무상처정=제이처)
滅盡定은 칠식주 이처가 허망한 생각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삼계를 벗어난 경지입니다. 이와 같이 삼계와 칠식주 이처라고 하는 중생의 세계와 생사가 없는 열반의 세계는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구차제정을 수행하여 중생 세계의 실상과 그 원인이 되는 集을 깨닫고, 집을 멸하여 열반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의 내용을 중생들에게 열어 보인 것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입니다. 부처님은 구차제정을 수행하면 여덟 단계의 해탈, 즉 八解脫이 있다고 말합니다.]]
⑥ 般若波羅蜜
於諸佛所에 聞法受持하며 近善知識하야 承事不倦하며 常樂聞法하야 心無厭足하며 隨所聽受하야 如理思惟하며
入眞三昧하야 離諸僻見하며 善觀諸法하야 得實相印하며 了知如來의 無功用道하며 乘普門慧하고
入於一切智智之門하야 永得休息하나니 是則能淨般若波羅蜜이니라
於諸佛所(어제불소)에,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聞法受持(문법수지)하며, 법을 듣고 받아 지니며
[화엄경공부 하는 것= 법을 듣고 수지하는 것.]
近善知識(근선지식)하야,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承事不倦(승사불권)하며, 받들어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常樂聞法(상락문법)하야, 늘 법 듣기를 즐겨 心無厭足(심무염족)하며, 마음에 싫증이 없으며
隨所聽受(수소청수)하야, 들은 대로 받아서 如理思惟(여리사유)하며, 이치대로 사유하고
[예를 들어 반야심경에서 無 眼耳鼻舌身意다.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그것을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안목을 따라잡기 위해서 사유하는 겁니다. 사유가 제일 중요합니다.]
入眞三昧(입진삼매)하야, 참된 삼매에 들어가
[['입진삼매(入眞三昧)는 삼계 및 3승에 오염과 청정, 가라앉음과 들뜸이 없는 것이 해당된다.]]
離諸僻見(이제벽견)하며, 僻見= 편벽한 소견ㆍ치우친 소견, 모든 경박한 견해에서 벗어나며
[['온갖 편벽된 견해를 여읜다'는 것은 유(有)와 무(無)의 두 견해가 이에 해당되며, 내견(內見)과 외견(外見), 신견(身見)과 변견(邊見), 계취(戒取)와 견취(見取)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되며, 나아가 62견(見)이 이에 해당된다.
62견이란 일체법 위에 계교로 인한 네 가지 견(見)이 있으니, 첫째 상(常), 둘째 무상(無常), 셋째 상(常)이면서 무상(無常), 넷째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님이며, 5음(陰) 위에 각각 이 네 가지 견(見)이 있어서 4와 5로써 20개가 되는데 삼세의 5음을 합해서 모두 60개가 되고, 여기에 근본 2견(見)을 더해 62견이 된다.
일체의 편벽된 견해는 이 62견을 벗어나지 못한다.]]
善觀諸法(선관제법)하야, 제법을 잘 관찰하여 得實相印(득실상인)하며, 실상인을 얻고
[공부하는 사람이 치우친 소견을 갖게 되는 것이 아주 문제지요. 그래서 모든 법을 잘 관찰해서실상의 도장ㆍ진리의 도장. 모든 것이 진실한 모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이 無 眼耳鼻舌身意라고 했는데, 無 眼耳鼻舌身意가 진실한 모양인겁니다. 진실한 모양이 無기 때문에 無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無 眼耳鼻舌身意가 진실한 모양이 아니라면, 無로 안 돌아가야 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금방 無로 돌아가는 것을 유추해서 잘 사유해보면 ‘아~! 그래서 無 眼耳鼻舌身意라고 했구나!!’ 그런 결과를 보고, 또 그 결과를 생각하고 아는 것은 우리처럼 둔한 사람들의 사유이고, 좀 영리한 사람들의 사유는 거기까지 생각 안하고 바로 ‘아, 無 眼耳鼻舌身意 맞아! 안이비설신의 없는 거야.’ 뭐 그렇게 깊이 생각 안 해도 됩니다. 연기라고 생각 안 해도 됩니다. 무상하다고 생각 안 해도 바로, 그래 즉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卽空= 곧 바로 공이지, 인연으로 만들어진 空(연기공)도 아니고 또 하나ㆍ하나분석해 보니까 空(분석공)도 아닙니다.
하나ㆍ하나분석해 보니까 空인줄 아는 것은 세속적인 관점이고, 또 이런ㆍ저런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부 합성품이라고, 인연소치로 생각하는 것은 소승들의 견해=성문과 연각의 因緣觀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色卽是空 空卽是色이잖아요. 卽空, 그대로 두고 바로 空한 줄로 보는 겁니다. 1분 1초도 옮기지 아니하고, 촌보도 움직이지 아니한 상태로 그대로 본 그런 관점이 보살의 卽空觀입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空이다.’ 하는 것은 소승들의 관점입니다.
분석해서 보니까 ‘空이다.’ 하는 것은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공으로 보고 무상으로 보는 것도, 그 세 가지 단계로 보는 것도 경전에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부 空이야기할 때, 반야심경 공은 卽空인데, 인연 공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대개 사람들이 전부 인연 공으로, 공을 평생 연구한 사람도 인연 공, 인연이기 때문에 空이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그것이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반야심경은 色卽是空 空卽是色. 卽空입니다. 인연 때문에 空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연이기 때문에 空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 되지만 즉공은 이해가 안되는 것은 보살의 차원이라서 그대로 놔둬야 됩니다. 그렇지만 반야심경의 卽空을 인연으로 설명해서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차원이 달라져 버립니다.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안 봤습니다. 관자재보살은 觀이 自在한데 연기까지 동원 안 해도 그냥 空인 直觀입니다. 그래서 공도 直空으로 色卽是空= 물질이 그대로 空입니다.
그것을 이것하고ㆍ이것하고 합성품이다. 이런ㆍ이런 인연에 의해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과 저것, “地水火風이 합해서 우리 육신이 존재한다. 또 마음도 色 受想行識. 색 = 물질과, 수상행식 = 마음이 합해서 완전한 사람으로 구성 되어있다. 그래서 이것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空이다.” 이렇게는 설명하기 좋고 이해하기도 쉽지만, 그것은 관세음보살의 공은 아닙니다. 보살 차원의 공은 卽空입니다.
그냥 그대로 두고 하나도 안 건드리지 아니한 상태 그대로 두고 공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분석공은 이해하기 더 쉽고, 연기공은 조금 우리는 다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 즉공은 이해가 안 된다. 이해 잘 안 되지요.
이해가 안 돼야 옳아요. 왜냐? 관세음보살의 차원이기 때문에요. 언젠가 또 그것도 이해가 될 때가 있겠지요. 如理思惟, 그리고 入眞三昧, 그리고 離諸僻見, 그래서 善觀諸法하야, 실상의 진실한 모습, 진실한 모습의 도장을 얻으며,]
了知如來 無功用道하며, 여래의 무공용도(無功用道)를 요지하여
[여래의 공용이 없는 도. → 하되 함이 없는 이치. 우리는 뭘 해도 다 함이 있는 것인데, 如來는 無功用道입니다.
말하자면 태양이 하루 종일 비추지만, 태양이 비춘다고 무슨 생색내고 상 내서 자랑하나요? 그것이 없잖아요.
쉽게 말해서 무공용입니다. 여래나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되 항상 功用道 절대 중생제도 했다고 하는 상이 없습니다.]
乘普門慧(승보문혜)하고, 보문의 지혜에 오르고 [[보문혜(普門慧) 중생의 모든 근기와 법을 두루 아는 지혜]]
入於一切智智之門(입어일체지지지문)하야, 일체 지지의 문에 들어가
永得休息(영득휴식)하나니, 영원한 휴식을 얻으니
是則能淨般若波羅蜜(시즉능정반야바라밀)이니라. 이것이 곧 반야(般若)바라밀을 청정히 하는 것이니라.
[入於一切智智之門 일체 지혜와 지혜의 문. 지혜와 지혜, 둘이 함께 있는 것은 평등한 것을 이해하는 평등지와 차별한 것을 이해하는 차별지. 평등만 이해해도 안 되고 차별만 이해해도 안 되는 것이, 평등한 면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우리 눈앞에 보이는 대로 차별한 면이 있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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