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畢定品 第八十三 第九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3. 필정품(畢定品)을 풀이함 ① 2
問曰:若菩薩皆畢定,佛何以故種種呵二乘,不聽菩薩取二乘證?
묻나니, 만약 보살이라면 모두가 반드시 정해진 필정(畢定)일 것이거늘,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갖가지로 이승(二乘)을 꾸짖는 것이며, 보살에게는 이승의 증득을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答曰:求佛道者應遍知法性,是人畏老、病、死故,於法性少分取證,便自止息,捨佛道、不度衆生,諸佛菩薩之所呵責:“汝欲捨去,會不得離,得阿羅漢證時,不求諸菩薩深三昧,又不廣化衆生,是則迂迴,於佛道稽留。”
답하나니,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이라면 마땅히 법성(法性)을 두루 알아야 하나니, 이 사람은 늙고ㆍ병들고ㆍ죽는 노병사(老病死)가 두렵기 때문에 법성(法性)의 작은 부분으로 증득을 취하는 것이니,
곧 스스로 그치고 그만두는 것이라서 부처님의 불도를 버리고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 것이므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나무라고 질책하는 것이니, “너는 아무리 버리고 떠나려 하여도 마침내 여읠 수 없는 것이다. 아라한을 증득한 때에는 모든 보살의 깊은 심삼매(深三昧)를 구하지 않으며, 또한 중생들을 널리 교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곧 부처님의 불도(佛道)에서 멀리 돌아가 지체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問曰:阿羅漢先世因緣所受身必應當滅,住在何處而具足佛道?
묻나니, 아라한이 전생의 인연으로 받게 된 몸은 반드시 소멸되어야 하거늘, 어느 곳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불도를 완전히 갖추는 것입니까?
答曰:得阿羅漢時,三界諸漏因緣盡,更不復生三界,有淨佛土,出於三界,乃至無煩惱之名,於是國土佛所,聞『法華經』,具足佛道。如『法華經』說:“有羅漢,若不聞『法華經』,自謂得滅度;我於餘國爲說是事,汝皆當作佛。”
답하나니, 아라한을 얻었을 때에는 삼계(三界)의 모든 번뇌인연이 다하여 다시는 삼계에 태어나지 않게 되지만,
깨끗한 부처님의 정불토(淨佛土)에서는 삼계를 벗어난 곳이라서 번뇌라는 이름도 없나니, 이 국토의 부처님 처소에서 법화경을 듣고 부처님의 불도를 두루 갖추는 것이니, 마치 법화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나한(羅漢)이라도 만약 법화경을 듣지 않고 스스로 멸도(滅度)를 얻고자 한다면, 나는 다른 나라에서 그들에게 이러함을 설하겠나니, 너희는 그 때에서야 모두 부처님이 될 것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若阿羅漢往淨佛國土受法性身,如是應得疾作佛,何以言迂迴、稽留?
묻나니, 만약 아라한이 깨끗한 부처님의 정불토(淨佛土)에 가서 법성신(法性身)을 받는다면, 빨리 부처님이 될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멀리 돌아가게 되어 지체되고 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是人著小乘因緣,捨衆生、捨佛道,又復虛言得道;以是因緣故,雖不受生死苦惱,於菩薩根鈍,不能疾成佛道,不如直往菩薩。
답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소승에 집착한 인연으로 중생을 버리고 부처님의 불도를 버리면서 또 다시 “도를 얻었다”고 헛된 말까지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비록 생사의 고뇌는 받지 않을지라도, 보살보다는 근기가 둔하여 불도를 빨리 이룰 수가 없는 것으로, 곧장 나아가는 보살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復次,佛法於五不可思議中最第一,今言“漏盡阿羅漢還作佛”,唯佛能知。論議者正可論,其事不能測知,是故不應戲論。若求得佛時,乃能了知;餘人可信而不可知。
畢定菩薩墮三惡道中不者,須菩提聞佛說無量本生因緣,或象、鹿、龜、鴿、孔雀、鸚鵡等受種種苦,是故問佛:“世尊!若菩薩受如是等畜生身,云何言一切菩薩畢定?”畢定者,卽是阿鞞跋致;阿鞞跋致者,不墮三惡趣。
또한 불법은 다섯 가지의 오불가사의(五不可思議) 가운데에서 제일 첫 번째이니,
지금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곧 부처님이 된다’는 말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므로 논의 하는 논의자(論議者)는 그러한 것을 바르게 논해야 되는 것으로, 추측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희론을 펴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만약 부처님이 되기를 구한다면 그때에서야 비로소 환히 알 수 있을 것이니,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믿을 수는 있어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반드시 정해져 있는 필정보살(畢定菩薩)도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입니까’라고 함이란,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무량한 본생(本生)의 인연에서 혹은 코끼리나 사슴이 되고, 비둘기나 공작새나 앵무새가 되어서 갖가지 고통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등의 축생의 몸을 받는다면, 어찌하여 일체 보살이 반드시 정해져 있는 필정(畢定)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반드시 정해진 필정(畢定)’이라 함이란, 곧 아비발치(阿鞞跋致)를 말하는 것이니, 아비발치를 얻은 이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취(三惡趣,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오불가사의(五不可思議), ①중생의 많고 적음, ②업의 과보. ③좌선하는 사람의 힘. ④모든 용(龍)의 힘. ⑤모든 부처님의 힘.
佛反問答:“於汝意云何?八人等聖人爲墮三惡道不?”
須菩提思惟:“是諸聖人入聖道故,無墮三惡道因緣。”思惟已,答言:“不也!”
佛言:“菩薩亦如是,墮三惡道因緣盡故,云何墮三惡道?”
부처님께서 반문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팔인(八人, 八忍)등의 성인이 삼악도에 떨어지는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이 모든 성인들은 성도(聖道)에 들어간 까닭에 삼악도에 떨어지는 인연이 없다’고 사유하면서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삼악도에 떨어지는 인연이 다하였거늘, 어떻게 삼악도에 떨어지겠는가!”라고 하셨다.
墮三惡道因緣者,所謂諸不善法。是菩薩從初發心已來,修習布施、持戒等諸善法,斷諸殺生等十不善道;若是人墮三惡道,無有是處!何以故?滅諸惡法、增益善法故。
不善道有上、中、下:上者墮地獄,中者墮畜生,下者墮餓鬼。是菩薩三種已盡,深心悲念衆生,是故不墮。
‘삼악도에 떨어지는 인연’이란 이른바 모든 착하지 못한 불선법(不善法)을 말하는 것으로, 이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킨 초발심에서부터 보시와 지계 등의 모든 착한 선법을 닦아 익히면서, 살생(殺生) 등의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심불선도(十不善道)을 끊었으니, 만약 이러한 사람임에도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조차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악한 악법(惡法)을 없애고 착한 선법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다.
착하지 못한 불선도(不善道)에는 상ㆍ중ㆍ하가 있으니, 상(上)은 지옥에 떨어지고, 중(中)은 축생에 떨어지며, 하(下)는 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 보살은 이러한 세 가지가 이미 다하였으며, 깊은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곳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問曰:若爾者,三惡道可不於中生;是菩薩福德多,何以不於長壽天中生?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삼악도는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생기지 않아야 하며, 이 보살은 복덕이 많거늘 무엇 때문에 장수천(長壽天)에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是菩薩憐愍衆生,行六波羅蜜;雖能入禪波羅蜜,和合慈悲行,不著禪味,命欲終盡,念欲界法故退禪道。以彼中無苦惱、深著禪味,難可得度,故不生長壽天。
답하나니, 이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6바라밀을 행하여 비록 선(禪)바라밀에 들었을지라도, 자비의 행에 화합하여 선정의 선미(禪味)에 집착하지 않으며,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는 욕계(欲界)의 법을 생각하기 때문에 선도(禪道)에서 물러나나, 그 가운데에서는 고뇌가 없어서 선미(禪味)에 깊이 집착하여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장수천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以邊國障㝵,不得修善法,故不生。所以者何?是菩薩拔出悋法根本;悋法因緣故,生邊國不知法處。
復次,是菩薩常好中道、捨離二邊故,不生邊國。邊國者,無三寶之名,不識七衆,但貴今世現事不貴福德道法,故名邊地,不但生邊國故名爲邊地。若識三寶,知罪福相續因緣,解諸法實相,是人雖生閻浮提外,不名爲邊,何況生閻浮提中!
변두리 나라인 변국(邊國)에는 장애가 있어서 착한 선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법을 아끼는 린법(悋法)의 근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니, 법을 아끼는 린법(悋法)의 인연으로 변국(邊國)과 같이 법을 모르는 곳에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보살은 항상 중도(中道)를 좋아하며 치우친 소견의 이변(二邊)을 버린 까닭에 변국(邊國)에는 태어나지 않나니,
변국(邊國)에는 불법승의 삼보(三寶)라는 이름도 없고,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ㆍ사미ㆍ사미니ㆍ식차나마의 칠중(七衆)도 알지 못하며, 다만 이 세상에서 현재 보이는 일만을 귀히 여기고 복덕의 도법(道法)을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변두리의 땅인 변지(邊地)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단 변국(邊國)에 태어난 까닭으로 변지(邊地)라고 하지는 않나니,
만약 삼보를 알게 되면 죄와 복이 상속(相續)하는 인연도 알게 되면서 제법의 실상(實相)을 알게 되므로, 이러한 사람이라면 비록 염부제(閻浮提) 밖의 땅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변두리라고 하지 않거늘, 하물며 염부제 가운데에 태어나는 것이겠는가!
칠중(七衆)= 비구(比丘, bhikṣu)ㆍ비구니(比丘尼, bhikṣunī)ㆍ우바새(優婆塞, upāsaka)ㆍ우바이(優婆夷, upāsikā)ㆍ사미(沙彌, śrāmaṇera)ㆍ사미니(沙彌尼, śrāmaṇerī)ㆍ식차나마(式叉摩那 śikṣamāṇā)의 일곱 대중
是菩薩常樂爲他說法,亦深愛善法故,得隨意善衆生共生,所謂爲中國。人於中國不生邪見家。何以故?是菩薩世世常自行正見,亦教他正見,讚正見法,歡喜讚歎行正見者,是故不生惡邪見家。
이 보살은 항상 다른 이를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한 착한 선법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뜻대로 착한 중생들과 함께 살 수 있으니, 이른바 가운데에 위치한 나라인 중국(中國)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운데 위치한 나라에서도 삿된 사견을 지닌 집에 태어나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보살은 세세에서 마다 언제나 자기 스스로가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정견(正見)을 가르치며, 정견(正見)의 법을 찬양하고, 정견(正見)을 지닌 이를 기뻐하며 찬탄하였으니, 그러므로 사악한 견해를 지닌 사견가(邪見家)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問曰:是菩薩大福德、智慧力,應生邊地、邪見家而教化之,何以畏而不生?
묻나니, 이 보살이 큰 복덕과 지혜의 힘으로 마땅히 변두리의 변지(邊地)나 삿된 견해를 지닌 사견가(邪見家)에 태어나서 그들을 교화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그곳에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菩薩有二種:一者、成就大力菩薩,二者、屬因緣新發心菩薩。大菩薩爲衆生隨所應度受身,不避邊地、邪見;新發意菩薩若生是處,旣不能度人,又自敗壞,是故不生。譬如眞金在泥,終不敗壞;銅鐵則壞。
邪見者,所謂無作見。雖六十二種皆是邪見,無作最重。所以者何?無作言不應作功德、求涅槃。若言天作、若言世界始來,雖是邪見,而不遮作福德。以無作大惡、故不生。
답하나니,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큰 힘을 성취한 대력(大力) 보살이요,
둘째는 인연에 의지하여 새로 발심한 신발심(新發心) 보살이다.
대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제도해야 할 바를 따라 몸을 받아서 변지(邊地)나 사견가(邪見家)를 피하지 않지만, 새로 뜻을 낸 신발심 보살이 만약 이러한 곳에 태어나게 되면, 남을 제도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곳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순금은 진흙 속에 있어도 끝내 못쓰게 되지 않지만 구리나 쇠가 진흙 속에 있게 되면, 곧 못쓰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삿된 견해의 사견(邪見)이란 이른바 작용이 없는 견해의 무작견(無作見)이니, 비록 62종은 모두가 사견(邪見)이라 할지라도, 이 작용이 없는 무작견(無作見)이 그 중에서도 가장 중한 것이니,
왜냐하면, 작용이 없다는 무작(無作)이란, “공덕을 지으면서도 열반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천작(天作)’이라 하고 ‘세계시래(世界始來)’라 하는 것도 비록 사견(邪見)이기는 하나 복덕을 짓는 것을 막지 않지만, 이 작용이 없는 무작(無作)은 몹시 나쁜 것이 때문에 그러한 견해를 지닌 집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又初發心菩薩深惡心行十不善道,無有是處!何以故?是菩薩一心迴向,貴重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貴世閒法。是人未離欲因緣故,雖起諸煩惱,終不深心作惡;雖加杖楚,終不奪命,不取他財令其失命。是菩薩斷一切不善法、修集一切善法故,不生八難處,常得八好處。
또한 처음 초발심한 보살이 심히 나쁜 마음으로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십불선도(十不善道)를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으니, 왜냐 하면, 이 보살은 한 마음의 일심(一心)으로 회향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귀하게 여기고, 세간법을 귀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아직 욕탐의 인연을 여의지 못한 까닭에 비록 모든 번뇌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끝내 깊은 마음으로 악을 짓지는 않나니, 아무리 매질을 가할지라도 마침내 그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며, 다른 이의 재물을 취하여 그의 목숨까지 잃게 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이 보살은 일체의 불선법(不善法)을 끊고, 일체의 선법(善法)을 닦아 쌓았기 때문에 여덟 가지의 어려움이 있는 팔난처(八難處)에 나지도 않으며, 언제나 여덟 가지의 좋은 곳인 팔호처(八好處)를 만나는 것이다.
팔난(八難, aṣṭa akṣaṇāḥ)부처님을 못 보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여덟 가지 경우를 말하며,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존재를 받는 경우와 수명이 너무 길어서 괴로움을 모르는 장수천(長壽天)에 태어나는 경우, 변방의 변지(邊地)에 태어나는 경우, 보고 말함에 있어서 장애가 있는 경우, 세속적 지혜가 지나치게 뛰어난 경우, 부처님이 세상에 안 계실 때 태어나는 경우이다.
須菩提問:“若菩薩有如是善根成就,云何本生因緣作鹿、馬等?”佛答:“菩薩實有福德善根成就,爲利益衆生,故受畜生形,亦無畜生罪。”此中佛自說因緣,所謂:“菩薩在畜生中慈愍怨賊,阿羅漢、辟支佛所無有。”阿羅漢、辟支佛,怨賊來害,雖不加報,不能愛念供養供給。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선근을 성취함이 있다면, 어찌하여 본생인연(本生因緣)에 사슴이나 말 등으로 태어나는 일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실로 복덕이 있고 선근을 성취하였으므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축생의 형태를 받기는 하지만, 역시 축생으로서의 죄는 없는 것이다”고 하셨다.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보살은 축생 가운데에 있을 때에도 원적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지만,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이런함이 없다”라고 하셨으니,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원적이 와서 해칠 때, 비록 그에게 보복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를 사랑하고 공양하며 베풀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如菩薩本身作六牙白象,獵師以毒箭射胸!爾時,菩薩象以鼻擁抱獵者,不令餘象得害,語雌象言:“汝爲菩薩婦,何緣生惡心?獵師是煩惱罪,非人過也!我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當滅除其煩惱罪;譬如鬼著人,呪師來但治鬼而不瞋人。是故莫求其罪!”徐問獵者:“汝何以射我?”答言:“我須汝牙。”象卽就石罅,拔牙與之,血肉俱出,不以爲痛;供給糧食,示語道徑。如是等慈悲,阿羅漢、辟支佛所無有。如是好心,云何受畜生身?當知是變化,度於衆生。
보살이 옛날 여섯 개의 어금니를 가진 흰 코끼리인 육아백상(六牙白象)의 몸을 받아 태어났을 때, 사냥꾼이 독화살로 그의 가슴을 쏘았을 때에 보살 코끼리는 코로써 그 사냥꾼을 감싸 안으면서 다른 코끼리들이 해칠 수 없게 하였으며, 그리고는 암컷 코끼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보살의 부인이거늘 무슨 인연으로 나쁜 마음을 낸단 말이오. 이 사냥꾼은 번뇌의 죄 때문에 그러한 것이니, 이 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당연히 그의 번뇌의 죄를 없애 줄 것이오.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귀신에게 홀렸을 때에 주술사(呪術師)가 와서는 그 귀신만을 다스릴 뿐, 그 사람에게는 성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오. 그러니 그의 죄를 추궁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그러한 뒤에 천천히 그 사냥꾼에게 묻기를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쏘았는가?”라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너의 어금니가 필요하다”고 하자, 코끼리는 곧 갈라진 돌틈으로 가서는 어금니를 빼어서 그에게 주었다. 피와 살이 섞여서 줄줄 흘러 내렸으나 아파하지도 않은 채, 그에게 양식을 주고는 지름길까지 가리켜 주었다.
이와 같은 등의 자비가 아라한이나 벽지불에게는 없으니, 이처럼 좋은 마음의 호심(好心)이거늘 어떻게 축생의 몸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변화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問曰:何以不作人身而爲說法,而作此獸身?
묻나니,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이 되어서 그들에게 법을 설하지 않고 이러한 짐승의 몸인 수신(獸身)이 되는 것입니까?
答曰:有時衆生見人身則不信受,見畜生身說法則生信樂,受其教化。又菩薩欲具足大慈悲心,欲行其實事;衆生見之驚喜,皆得入道。
답하나니, 때로는 중생들이 사람을 보면 믿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축생의 몸으로써 설법하는 것을 보면 곧 믿고 좋아하면서 그 교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보살이 대자비심을 두루 갖추고자, 그 진실한 실사(實事)를 행하고자 한다면, 중생들은 그러함을 보고는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하면서 모두가 도(道)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三 終 대지도론 93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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