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校量舍利品 第三十七 卷五十九   第五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7. 교량사리품(校量舍利品) 풀이함 8

 

▶論. 問曰:何因緣故說是有爲法、無爲法相?

▷논. 묻나니, 어떠한 인연으로 이 유위법과 무위법의 상(相)을 말하는 것입니까?


荅曰:帝釋讚歎般若波羅蜜攝一切法,此中欲說因緣。有爲法相,所謂十八空,三十七品乃至十八不共法;略說善、不善等,乃至世閒、出世閒,是名有爲法相。

답하나니, 제석은 반야바라밀이 일체법을 포섭한다는 것을 찬탄하는 가운데에서 인연을 설명하면서

“유위법의 법상(法相)은 이른바 18공(十八空)과 37조도품(助道品)과 18불공법(不共法)까지 포섭하며, 간략하게 말한다면 선(善)ㆍ불선(不善) 등과 세간과 출세간까지이니, 이것을 유위법의 법상(法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何以故?是作相,先無今有、已有還無故。與上相違,卽是無爲法相。是二法,皆般若波羅蜜中攝。

왜냐하면 이것은 조작되는 작상(作相)이라서, 앞에 없었던 것이 지금은 있으며,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니, 위와 반대되는 것이 곧 무위법의 법상(法相)이며, 이 두 가지의 법 모두는 반야바라밀 가운데 속하는 것이다.


有爲善法是行處,無爲法是依止處;餘無記、不善法,以捨離故不說。此是新發意菩薩所學。若得般若波羅蜜方便力,應無生忍,則不愛行法、不憎捨法,不離有爲法而有無爲法,是故不依止涅槃。

유위의 선법(善法)은 바로 행할 곳의 행처(行處)요,

무위법은 바로 의지할 곳의 의지처(依止處)이나,

그 밖의 무기(無記)와 불선법(不善法)은 버리고 여읠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새로이 뜻을 낸 신발의(新發意) 보살이 배울 바이니,

만약 반야바라밀의 방편이 힘을 얻어서 무생인(無生忍)과 상응하게 된다면 곧 행하는 법도 사랑하지 않는 불애행법(不愛行法)이고, 버릴 법도 미워하지 않는 불증사법(不憎捨法)이며, 유위법을 여의지 않으면서 무위법이 있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是以經中說:“般若波羅蜜中,廣說三乘,用無相法故,無生無滅等。以世諦故作是說,非第一義諦。”

그러므로 경전 안의 반야바라밀을 설명하는 가운데에서 삼승(三乘)을 널리 말하면서도 상이 없는 무상법(無相法)이기 때문에 무생무멸(無生無滅) 등도 없으며,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짐짓 이렇게 말하는 것이므로 첫째가는 제일의(第一義)가 아닌 것이다.


菩薩行是諸法實相,雖能觀一切衆生心,亦不得衆生;雖能行一切法,亦不得一切法。何以故?以得無所得般若波羅蜜故。

보살은 이 제법의 실상(實相)을 향하면서, 비록 모든 중생을 관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역시 중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비록 일체법을 행한다 할지라도 역시 제법을 얻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 반야바라밀을 얻기 때문이다.


佛可其所歎:“菩薩常習是行,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可得,何況餘法!”帝釋意念:‘若般若是究竟法者,行人但行般若波羅蜜,何用餘法?’

부처님께서 그의 찬탄을 옳다고 하시면서 “보살은 언제나 이러한 행(行)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를 익히면서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법이겠는가?”라고 하시자,

제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반야가 곧 마지막의 구경법(究竟法)이라면, 수행하는 사람은 오직 반야바라밀만을 행할 뿐, 그 밖의 다른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佛荅:“菩薩行六波羅蜜,以般若波羅蜜用無所得法和合故,此卽是行般若波羅蜜。”若但行般若,不行五法,則功德不具足,不美不妙。譬如愚人不識飮食種具,聞鹽是衆味主,便純食鹽,失味致患。

부처님께서 대답하시되 “반야바라밀의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법(無所得法)으로써 화합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만약 단지 반야만을 행하고 다섯 가지 오법(五法, 나머지 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면 공덕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하며, 아름답지도 못하고 묘하지도 않은 것이다.”고 하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어리석은 사람이 음식이 여러 가지로 갖추어진 것을 알지 못하고, 소금이 모든 맛의 주인이라고 듣고서 소금만 먹다가 맛을 잃고 병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行者亦如是,欲除著心故,但行般若,反墮邪見,不能增進善法;若與五波羅蜜和合,則功德具足,義味調適。雖衆行和合,般若爲主。

수행하는 행자도 그와 같아서, 집착하는 마음을 제거하고자 단지 반야만을 행한다면 도리어 삿된 사견에 떨어져서 착한 선법에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되나, 만약 다섯 가지 오바라밀(五波羅蜜)과 화합한다면 공덕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의미(義味)가 조화되고 적합하게 되는 것이니, 비록 여러 행의 중행(衆行)이 화합한다 할지라도 반야가 주(主)가 되는 것이다.

 

若布施等諸法離般若波羅蜜,則有種種差別;至般若波羅蜜中,皆一相無有差別。譬如閻浮提阿那婆達多池,四大河流,一大河有五百小川歸之,俱入大海,則失其本名,合爲一味,無有別異。又如樹木,枝葉華果,衆色別異,蔭則無別。

만약 보시 등의 제법에서 반야바라밀을 여읜다면 갖가지의 차별이 있게 되지만, 반야바라밀에 이르러서는 모두 하나의 일상(一相)이라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니, 

비유컨대 마치 염부제의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 지(池, 못)은 네 개의 큰 강인 사대하(四大河)로 흐르고, 하나의 큰 강마다 5백의 작은 시내가 거기로 돌아와 흘러가나니, 그 모두가 함께 큰 바다로 들어가게 되면 그 본래의 이름을 상실하면서 합하여 일미(一味)가 되고 차별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며,

또한 마치 수목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며 뭇 빛깔은 다르지만 그 그늘에는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蔭亦有差別,樹大則蔭大,枝葉華果大小種種異形,云何無差別?

묻나니, 그늘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고,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크고 작은 것이 갖가지로 다르거늘 어떻게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荅曰:蔽光故影現,無光之處卽名爲蔭,蔭不以大小異形爲義。

답하나니, 빛을 가리기 때문에 그림자가 나타나고 빛이 없는 곳을 바로 그늘이라 하나니, 그늘의 크고 작음이나 그 형상이 다른 것으로써 뜻을 삼지 않는다.


問曰:行般若波羅蜜,受誦乃至正憶念,此事爲難;書持般若經卷與他人爲易,功德尚不應等,云何言勝?

묻나니,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받아서 외우고, 나아가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등의 일들은 어려운 것이요,

반야의 경전을 서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오히려 쉬운 것으로, 그 공덕조차도 오히려 같지 않아야 하거늘, 어떻게 뛰어나다고 하는 것입니까?


荅曰:獨行讀、誦、正憶念雖難,或以我心,故功德小。以經卷與他者,有大悲心,作佛道因緣,無吾我故,功德爲大。如佛問帝釋:“若人自供養舍利,復有人以舍利與他令供養,其福何所爲多?”荅曰:“與他人令供養得福多。”以無吾我、慈悲心與故。

답하나니, 혼자 행하면서 읽고 외우고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혹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공덕이 작은 것이지만,

경전을 다른 이에게 주는 이에게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으며, 부처님 불도의 인연을 지으면서 나라는 아심(我心)이 없기 때문에 공덕이 큰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제석에 물으시되 “만약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사리에 공양하고, 다시 다른 어떤 사람은 사리를 다른 이에게 주어서 공양하게 한다면, 어느 편의  복이 더 많겠느냐”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공양하게 하는 이의 복이 더 많습니다.”고 한 것과 같나니,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없고 자비로운 마음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佛雖不用福德,見有如是大利益衆生故,是以入金鋼三昧,自碎其身。

부처님께서는 비록 복덕과 관계없다 할지라도, 중생에게 이와 같은 큰 이익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셔서 스스로 그 몸을 부수시는 것이다.


問曰:若福德在心,佛何用碎身如芥子,令人供養?

묻나니, 만약 복덕이 마음에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몸을 겨자씨만큼 부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양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荅曰:信淨心從二因緣生:一者、內正憶念,二者、外有良福田。譬如有好穀子,田又良羙,所收必多。是故心雖好,必因舍利,然後得大果報。

답하나니, 믿음이 청정한 신정심(信淨心)은 두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첫째는 안으로 바르게 기억하는 내정억념(內正憶念)이요,

두 번째는 밖으로 좋은 복전이 있는 외유양복전(外有良福田)이라.

비유하자면, 마치 좋은 씨앗이 있으며, 밭이 좋고 비옥하다면 반드시 그 수확이 많은 것과 같으니,

비록 마음이 좋을지라도 반드시 사리(舍利)로 인한 뒤에야 큰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佛旣可其言,復更自說:“有人書寫經卷與人,復有人於大衆中廣解其義,其福勝前。視是人如佛,若次佛。”如佛、若次佛義,如先說。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다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은 경전을 서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시 어떤 사람은 대중 가운데에서 그 뜻을 널리 해설한다면, 그 복이 앞의 사람보다 뛰어나나니, 이 사람을 마치 부처님과 같이 보고, 부처님 다음가는 이로 보야야 한다.”고 하신 것이니,

부처님 같은 이와 부처님 다음가는 이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佛以二種因緣,證般若波羅蜜爲勝:“一者、三世聖人從中學,成聖道;二者、我以此法故得成無上聖,我今還師仰此法。法者,諸法實相,所謂般若波羅蜜。憍尸迦!我更無所求,而猶推尊般若供養,何況善男子不以種種供具供養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의 인연으로써 반야바라밀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시기를

“첫째는 삼세(三世)의 성인들이 반야에서 배워서 성인의 성도(聖道)를 이루는 것이요,

둘째는 나도 이법으로써 위없는 무상(無上)의 성인(聖人)이 되었으며, 나는 이제 도리어 이 법을 스승으로 우러러나니, 이 법이란 바로 제법의 실상(實相)이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니라.

교시가야, 나는 다시는 더 구할 바가 없으나, 오히려 반야를 높이 받들어 우러르는, 추존(推尊)하고 공양하거늘, 하물며 선남자들이 갖가지의 공양 거리로써 반야바라밀을 공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此中說因緣:“般若是菩薩根本因緣,菩薩是諸佛根本因緣,諸佛是一切世閒大利益安樂因緣。是故聲聞、辟支佛人欲疾安隱入三解脫門者,猶尚供養般若波羅蜜,何況菩薩!”

이 가운데에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반야는 바로 보살이 되는 근본 인연이요,

보살은 바로 모든 부처님이 되는 근본이며, 모든 부처님은 일체 세간을 크게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인연이다.”고 하셨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사람으로서 안온하게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三解脫門)에 신속히 들어가고자 하는 이도 오히려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供養具者,所謂以一心聽受乃至正憶念,及以華香乃至幡蓋。

“공양 거리인, 공양구(供養具)”라 함이란, 이른바 일심(一心)으로 듣고 받는 청수(聽受)하며 또한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것이요, 그리고 꽃과 향과 또한 번기와 일산을 말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五十九 대지도론 59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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