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自在力
佛子汝應觀 如來自在力하라 一切閻浮提에 皆言佛在中이로다
我等今見佛이 住於須彌頂하시며 十方悉亦然하니 如來自在力이로다
佛子 불자들이여, 汝應觀(불자여응관) 그대들은 마땅히 如來自在力(여래자재력)하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을 보라.
一切閻浮提(일체염부제)에 皆言佛在中(개언불재중)이로다. 일체의 염부제가 모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하는데
[부처님 안 계신데 없습니다. 處處佛像(처처불상) 곳곳이 부처님이고 事事佛供(사사불공)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든지 간에 하는 일 마다 모두 불사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심지어 청소 하고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고, 목욕을 하고 하는 일상사도 모두 불사입니다. 왜냐? 법당을 잘 관리하는 것이잖아요. 밥 먹어주고ㆍ세수해주고ㆍ용변 봐주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살아있는 법당을 관리하는 일이니까 사실 그보다 더 좋은 불사 없습니다. 그래 事事 낱낱이 佛事고 佛供입니다. 화엄경이 조건 없이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키는 가장 명확한 가르침입니다.]
我等今見佛(아등금견불)이, 우리가 지금 보거니와 부처님은 住於須彌頂(주어수미정)하시며, 수미산 정상에 계시며
十方悉亦然(시방실역연)하니, 시방 모두에서도 다 그러하니 如來自在力이로다. 이것이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니라.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어떤 특정한 부처님을 등장 시켜놓고, 또 특정한 보살들을 등장 시켜서 실재하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그 내면의 뜻은 법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사사건건 전부 연관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 한 걸음이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뉴욕 월가에서 기침을 하면 우리나라가 감기 걸린다. 그런 것이 법계연기 아니고 뭡니까?]
③擧因現果 원인을 들어 결과를 나타내다
一一世界中에 發心求佛道하시니 依於如是願하야 修習菩提行이로다
佛以種種身으로 遊行徧世間하사대 法界無所礙하시니 無能測量者로다
慧光恒普照하사 世暗悉除滅하시니 一切無等倫이라 云何可測知리오
一一世界中(일일세계중)에, 낱낱의 세계 가운데서 發心求佛道(발심구불도)하시니,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시고
依於如是願(의어여시원)하야, 이러한 서원에 의지하여
修習菩提行(수습보리행)이로다. 보리행= 깨달음의 행을 닦아 익히셨으며,
佛以種種身(불이종종신)으로, 부처님은 갖가지 몸으로 遊行遍世間(유행변세간)하사대, 세간을 두루 다니시며
法界無所碍(법계무소애)하시니, 법계에 걸림이 없으시어 [礙 거리낄 애 = 碍 거리낄 애 俗字]
無能測量者(무능측량자)로다. 그 양을 헤아릴 수 있는 이가 없도다.
慧光恒普照(혜광항보조)하사, 지혜의 광명을 항상 두루 비추시고
世暗悉除滅(세암실제멸)하시니, 세간의 어두움 다 제멸하시니
一切無等倫(일체무등륜)이라. 아무도 대등한 짝이 없는데
云何可測知(운하가측지)리오? 어찌 가히 헤아려 알 수 있으리오.
[그야말로 우리 중생들의 어리석음의 어둠을 소멸 하는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듣고 배웠음에도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려서 그렇지, 사실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내 지혜가 안 되니까 화엄경 펴놓고 거기서 부처님의 지혜를 빌린다면 틀림없이 해결책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제각기 불찰미진수인 이름이 같은 법혜보살과 함께 했다”는 것은 지혜와 解行과 了悟와 遍知가 경계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요달함으로써 일체가 다 마찬가지란 것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하나를 미혹하면 일체가 미혹되고 하나를 깨치면 일체를 깨치는 것이니, 이는 오직 해탈한 자만이 스스로 미혹을 풀기 때문에 지혜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2) 南方의 一切慧菩薩
爾時에 一切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爾時(이시)에 一切慧菩薩이 그때 일체혜보살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시방을 두루 살피며 게송으로 말했다.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지혜의 광명이 항상 널리 비추사,
[[일체혜라 이름붙인 까닭은 지위에 따라 닦아 나가는 가운데 일체법이 體도 없고 성품도 없는 줄을 요달해서 미혹된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제2 治地住의 10 바라밀 중 戒 바라밀을 닦는 데 해당함으로써 일체법의 體도 없고 성품도 없고 오염도 없고 청정도 없는 것으로 계의 體를 삼는 것이니, 이 10주위의 [정행품] 같은 것이 바로 그 계의 체이다.
*파두마화세계라 이름붙인 까닭은 한역하면 赤蓮華라 한다. 戒의 相이 오염 없이 세간에 처하여 눈부시게 꽃을 피워 만행을 장엄함으로써 그 감응의 果가 볼 만하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지위에 따라 닦아 나가는 불과의 명호를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부처님의 명호가 무진월인 것은 보살의 명칭이 일체혜이기 때문에 불과도 또한 무진월이라 호칭한 것이니, 인과가 서로 같음을 밝힌 것이다. 즉 일체혜는 수행을 통해 일체의 부처님 지혜를 얻은 사람이며, 세계는 닦는 바의 법이며, 불과는 治地住 속에서 얻는 果임을 밝힌 것이니, 능히 일체의 번뇌를 청량케 함을 밝힌 것이다.
*도래한 방면은 남방의 대중이다. 남방은 이위로서 虛無, 文章, 赤色이 빛난다는 듯이니, 마치 태양이 정남쪽에서 만상의 面을 비춰 원만히 밝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보살의 명칭이 일체혜이며, 세계의 명칭이 적련화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무진월인 것이다. 이는 선재동자가 海雲비구를 친견하면서 부처님께서 [普眼經] 설하심을 보는 것이니, 뜻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분명하리라.]]
① 不得見佛
假使百千劫에 常見於如來라도 不依眞實義하야 而觀救世者인댄
是人取諸相하야 增長癡惑網하며 繫縛生死獄하야 盲冥不見佛이로다
假使百千劫(가사백천겁)에 가사 백천 겁 동안 常見於如來(상견어여래)라도, 항상 여래를 본다 해도
不依眞實義(불의진실의)하야, 진실한 의의에 의지하지 않고 而觀救世者(이관구세자)인댄, 구세자로만 본다면
是人取諸相(시인취제상)하야, 이 사람은 상에 집착하여
增長癡惑網(증장치혹망)하며, 어리석음과 미혹의 그물만 키운 것이라
[癡惑網을 增長= 어리석음의 그물을 자꾸 증장시키며]
繫縛生死獄(계박생사옥)하야, 생사의 지옥에 속박되고 [생사의 지옥에 얽히고 얽혀서]
盲冥不見佛(맹명불견불)이로다. 눈이 멀어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개경게에 無上甚深微妙法을 百千萬劫難遭隅인데,
我今聞見得受持,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데 그 다음 과제가
願解如來眞實意(원해여래진실의) 여래의 진실, 정말 부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노이다.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이고, 진짜 부처님이 뭐냐?
여기 그랬잖아요. 假使百千劫에 항상 여래를 본다하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해서 救世者=부처님을 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모든 형상만을 취해서= 형상에 눈이 멀어서 癡惑=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시킨다. 어떻게 보면 천불 만 불 불상을 만들어서, 온갖 눈먼 사람들이 더 많은 눈먼 사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②知法乃見佛 법을 알아야 부처님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 바카리 경]
觀察於諸法컨댄 自性無所有니 如其生滅相하야 但是假名說이로다
★一切法無生이며 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諸佛常現前이로다
法性本空寂하야 無取亦無見이니 性空卽是佛이라 不可得思量이로다
若知一切法이 體性皆如是면 斯人則不爲 煩惱所染着이로다
觀察於諸法(관찰어제법)컨댄, 모든 법을 관찰해 보면 [제법= 모든 존재, 모든 사건]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니, 自性=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모든 사건과 모든 존재가 이 “제법” 이라고 하는 것 속에 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 것도 제법 속에 들고= 시간성. 공간성으로는 모든 형상들, 지금 저렇게 초목이 푸르다 못해서 시커멓게 보일 정도이지만 불과 몇 달 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연녹색으로 장엄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또 멀지 않은 시간에 누른 단풍잎으로 변하는 제법이 自性無所有입니다.
푸른 것이 그대로 푸르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녹색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 自性이 無所有=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법=제법은 自性無所有입니다]
如其生滅相(여기생멸상)하야, 그 생멸하는 모양 대로
[자연현상을 보고 우리 육신과 내 마음의 변화를 깨달으면, 즉 비추어서 보는 공부가 제일 큰 선지식입니다.
사실은 자연변화가 제일 큰 선지식입니다. 그래서 聲聞ㆍ緣覺(성문연각) 할 때 緣覺은 뭡니까? 자연변화의 현상을 보고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을 緣覺이라고 하잖아요.]
但是假名說(단시가명설)이로다. 단지 거짓 이름을 세워 말한 것이로다.
一切法無生(일체법무생)이며 일체법은 생겨남도 없고 [모든 존재 = 諸法= 一切法]
一切法無滅(일체법무멸)이니 일체법은 멸함도 없나니
若能如是解(약능여시해)하면 만약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諸佛常現前(제불상현전)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항상 그 앞에 계시리라
[★일체법은 生한 것이 없고 一切法은 無滅입니다. 반야심경에서 諸法空相 不生不滅(제법공상불생불멸)입니다.
若能如是解면,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일체 존재가 不生不滅이라고하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諸佛常現前이라. 모든 부처님이 항상 그 앞에 나타나 있음을 본다.
법화경에서는 是法이 主法位(시법주법위)하야 世間相常住(세간상상주)라. 했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습이 상주한다.
이 꽃. 금방 시들어버릴 이 꽃도 항상 있다= 常住한다. 그것이 不生不滅입니다. 不生不滅을 常住라 표현했습니다.
물론 모습은 변하지만 그 실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不生不滅이다. 생긴 바도 없고ㆍ소멸한 바도 없고ㆍ변하는 바도 없다. 그러면서 무한히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해가고 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中道性(중도성).
中道적인 안목을 가지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의 一切法無生이며 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諸佛常現前이로다 구절과, 반야심경의 不生不滅,
법화경의 是法이 主法位하야 世間相常住. 세 구절을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존재의 불멸성과 空性(공성)을 깔고 있습니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면서 본질에 있어서는 不生不滅이고, 不生不滅이면서 또한 空한 겁니다. 공하기 때문에 역시 不生不滅이라는 이치입니다.]
法性本空寂(법성본공적)하야,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여
無取亦無見(무취역무견)이니, 취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性空卽是佛(성공즉시불)이라.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라
[법의 성품= 일체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해서 취할 것도 없고 또한 볼 것도 없다.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다.
일체 존재의 본성이 공한 자리가 그대로 부처자리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사람보다 조금 더 우수한 특정한 어떤 존재로써 머리에 그리고 있는 그 의식이 도대체 지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이런 법문을 무수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만 문제 있으면 부처님한테 매달리고, 관세음보살에게 매달리는데, 부처님이나ㆍ관세음보살이나ㆍ지장보살이나, 우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性空卽是佛= 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한 그 이치가 그대로 부처입니다.]
不可得思量(불가득사량)이로다. 사량= 생각으로는 얻을 수 없느니라.
若知一切法(약지일체법)이 만약 일체법의 體性皆如是(체성개여시)면, 체성이 모두 이와 같음을 알면
[體性= 본체의 성품]
斯人則不爲(사인즉불위) 이 사람은 곧 煩惱所染着(번뇌소염착)이로다. 번뇌에 물들지 않으리라.
[번뇌에 染着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다. 번뇌에 끄달리지 않는다.]
③ 隨相不見佛 상을 따라가면 부처님을 못 본다.
凡夫見諸法에 但隨於相轉하고 不了法無相일새 以是不見佛이로다
[금강경의 이치 상을 따라가면 부처님을 못 본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해야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봐야 부처님을 본다.]
凡夫見諸法(범부견제법)에, 범부는 모든 법 보기를 但隨於相轉(단수어상전)하고, 단지 모양[相]을 좇아 보고
不了法無相(불요법무상)일새. 법은 모양이 없는 줄 알지 못하니
以是不見佛(이시불견불)이로다. 이로써 부처님을 보지 못하느니라.
[금강경의 凡所有相 皆是虛妄하고,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음성이나 형상 쫓아가면 결국 여래를 못 볼 것이다.]
④佛法一如 부처님과 법은一如하다.
牟尼離三世하사 諸相悉具足하시며 住於無所住하사 普徧而不動이로다
牟尼離三世(모니이삼세)하사, 모니께서는 삼세를 여의시고
諸相을 悉具足(제상실구족)하시며, 모든 상호를 다 구족하시어
[초월한 상태에서 모든 상을 다 구족한 것 → 중도의 이치]
住於無所住(주어무소주)하사,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시며
[無所住에 머무사→ “상이 없다고 하면 거기에 또 떨어지니까, 중도적인 안목을 이야기하는 것]
普遍而不動(보변이부동)이로다. 널리 두루하시되 부동하시니라.
⑤了法見佛 법을 알아야 부처님을 본다.
我觀一切法하고 皆悉得明了하니 今見於如來에 決定無有疑로다
我觀一切法(아관일체법)하고, 내가 일체법을 관찰하여
皆悉得明了(개실득명료)하니, 모두 분명히 알거니와
[모든 존재, 꽃을 보면 꽃을 보고ㆍ산을 보면 산을 보고ㆍ하늘을 보면 하늘을 보고, 보는 대로 그 실상을 환하게 봐서 환하게, 명료하게 안다는 것은 공성까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칼럼리스트가 쓴 불교 책에서 컵을, “이 컵이 깨져있다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표현했습니다. ‘이 컵은 내가 사용하지만, 이것은 깨져있는 컵이다.’ 라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을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이렇게 번역이 돼야 세상 사람들이 접근이 잘되고ㆍ소통이 잘되는데, 우리식으로 말만 가지고 자꾸 읊조려 대니까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종교의 가르침이 다른 나라에 전파될 때, 그 교리를 번역하는 것이 참~~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웃 종교에서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神을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서 얼마나 큰 소득을 봅니까? 순전히 그 번역하나 잘 해서, 神은 神인데 그냥 神인데 하나님이라고 번역 해버렸어요. 아주 근사한 번역입니다. 그래서 그 번역하나 때문에 그 종교가 그렇게 활개를 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관세음보살을 “어머니” 라고 번역을 해도 좋습니다. 또 그렇게 번역한 스님들도 더러 있습니다. “어머니” 물론 설명이 약간 필요하지만, 그것이 훨씬 더 잘 다가 오잖아요.]
今見於如來(금견어여래)에, 지금 보는 여래에 대해
決定無有疑(결정무유의)로다. 결정코 아무런 의혹이 없도다.
[지금 여래를 봄에, 여래의 가르침을 봄에,→ ‘여래의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함에 있어서’ 그 이치를 알고 보니까 전혀 의심이 없더라. 일체 법을 관하는데 明了하게 본다. 그 실상까지 다 꿰뚫어 본다. ‘컵이 깨져있는 것으로 알고 사용한다.’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하루가 보너스입니다. 얼마나 가뿐해요?
감기 좀 걸리고 어디 좀 아프고 해도 그것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화엄경 한 구절 이것보고 호흡 한번하고, 산천초목을 바라보고, 귀로써 온갖 소리 다 듣고, 텔레비전도 보고 듣는, 이것 전부 덤이고 그대로 횡재입니다.]
⑥推德法慧 一切慧菩薩이 그 덕을 법혜 보살에게 미루는것.
法慧先已說 如來眞實性일새 我從彼了知 菩提難思議로다
法慧先已說(법혜선이설) 如來眞實性(여래진실성)일새.
법혜보살이 이미 앞서 여래의 진실하신 성품을 설하여
我從彼了知(아종피요지) 나는 그로부터 菩提難思議(보리난사의)로다. 부사의한 보리를 알았노라.
[我從彼= 법혜 보살로부터 菩提 難思議= 깨달음에 대한 불가사의한 이치]
(3) 西方의 勝慧菩薩
爾時에 勝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 승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했다.
[[승혜라 이름붙인 것은 지위에 따라 닦아 나가면서 더욱 밝고 청정하기 때문에 한 법도 옮기지 않고 이전의 지위보다 뛰어남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명칭; 寶華세계란 忍바라밀이 이미 일체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導體로서 능히 忍行을 행함을 밝힌 것이다. 華란 것은 행이니, 인행으로 지혜의 법신을 장엄함을 밝힌 것이다.
*불과의 명호를 설명하면; 부처님의 명호를 不動月이라 한 것은 理를 얻어 행을 성취함으로써 마음과 경계를 요달해 흔들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능히 참아 견디어 냄을 밝힌 것이다. 月이란 청량의 뜻이다.
*도래한 방위를 설명하면; 이는 서방의 대중이다. 서방은 가을이 되고, 殺이 되고, 苦諦가 되니, 자비의 지위로써 中에 위치한다. 가령 10회향 중에서 선재동자가 금강산 서쪽에 계신 觀音을 보는 것은 金이 殺位가 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온갖 고통의 처소로써 자비와 인내 닦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보살의 명칭이 승혜이며, 세계의 명칭이 보화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부동월인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법을 얻어 忍을 성취한 능력의 작용이 뛰어남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화의 뜻이며, 이것이 바로 修行住의 대치법이며, 이것이 바로 선재동자가 善住비구를 보고 無碍 법문을 얻음으로써 능히 참아 견디어 내는 것이다.]]
① 如來의 智慧
如來大智慧가 希有無等倫하시니 一切諸世間이 思惟莫能及이로다
如來大智慧(여래대지혜)가 여래의 크신 지혜는 希有無等倫(희유무등륜)하시니, 희유하여 짝할 이 없어
一切諸世間(일체제세간)이 일체의 모든 세간이 思惟莫能及(사유막능급)이로다. 생각으로는 미칠 수가 없도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사유하고 궁리 한다 하더라도 여래의 지혜에 미칠 수가 없다.]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의 지혜가 생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세상 사람이 다 동원이 되어 70억 인구가 다 짜내더라도, 문수보살 한사람의 지혜를 당할 길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교훈으로써 아주 멋진 말이잖아요.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의 지혜가 생긴다.” 고 했으니까, 어린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공양주에게도 물어보고, 부모에게도 물어보고, 행자에게도 물어보고, 不恥下問(불치하문)이라고, 밑에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세가 있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쏟아지는 겁니다.]
② 凡夫의 迷惑
凡夫妄觀察하야 取相不如理하나니 佛離一切相이라 非彼所能見이로다
迷惑無知者는 妄取五蘊相하야 不了彼眞性하나니 是人不見佛이로다
凡夫妄觀察(범부망관찰)하야, 범부는 망령되이 관찰하고
取相不如理(취상불여리)하나니, 모양만 취하여 이치에 이르지 못하거니와
[상은 금방 변하는 것! 아니, 이미 변해 있는 것인데... 컵은 이미 깨져있는 것인데... 그것을 애지중지해서 가슴에 응어리지고, 본래 깨져있는 컵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고, 이미 송장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如理= 이치와 같이 보는 것이고, 상을 취하면 이치와 같지 못하게 됩니다]
佛離一切相(불리일체상)이라. 부처님은 모든 모양을 여의시었으니
[금강경에 離一切相이 卽名諸佛(이일체상즉명제불) 상 떠난 것이 부처다. 부처가 딴 것이 아니라 상 떠나면 바로 부처다. 그것을 본래의 취지에서 백보 양보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을 안 내고 살면 부처대접 받는다고 설명해요.]
非彼所能見(비피소능견)이로다. 저들이 볼 수 있는 바가 아니로다.
迷惑無知者(미혹무지자)는, 미혹하여 무지한 이들은
妄取五蘊相(망취오온상)하야, 망령되이 오온의 모양만 취하여[色 受 想 行 識(색수상행식)=몸과 마음= 오온을 취해서]
不了彼眞性(불요피진성)하나니, 그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니
是人不見佛(시인불견불)이로다. 이런 사람은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이치와 아주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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