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大智度論釋 三假品 第七 卷第四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8. 권학품(勸學品)을 풀이함 2
▶經. “欲得具足如是善根,常不墮惡趣;欲得不生卑賤之家,欲得不住聲聞、辟支佛地中,欲得不墮菩薩頂者,當學般若波羅蜜!”
▷경. “이와 같은 선근(善根)을 구족하여 항상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고자 하거나, 비천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자 하거나,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자 하거나, 보살의 정상(頂上)에서 떨어지지 않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爾時,慧命舍利弗問須菩提:“云何爲菩薩摩訶薩墮頂?”須菩提言:“舍利弗!若菩薩摩訶薩不以方便行六波羅蜜,入空、無相、無作三昧,不墮聲聞、辟支佛地,亦不入菩薩位,是名菩薩摩訶薩法生,故墮頂。”
그 때에 혜명 사리불 존자가 수보리 존자에게 묻기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정상(頂上)에서 떨어지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까?”
수보리 존자가 답하기를,
“사리불이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방편으로써 육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에 들어가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또한 보살의 지위에 들지 못한다면, 이를 일컬어 보살마하살에게 법(法)이 생(生)한 것이기 때문에 보살의 정상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生)은 무생법인(無生法忍, anutpattika dharma-kṣānti)의 반대개념. 일체법의 생함이 없는 이치를 인정하고 안주하지 못한 채 일체법에 대해서 애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함.
舍利弗問須菩提:“云何名菩薩生?”須菩提荅舍利弗言:“生名愛法。”
사리불존자가 수보리 존자에게 묻기를, “무엇을 보살에게 생(生)한 것이라 합니까?”
수보리존자가 사리불존자에게 답하여,
“생(生)하는 것이란 자신이 깨달아서 얻은 선법(善法)에 애착하는 법애(法愛, dharma-tṛṣṇā, 10지 가운데 제4지에서 사라지게 된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舍利弗言:“何等法愛?”
사리불존자가 묻기를, “무엇이 법애(法愛)인지요?”
須菩提言:“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色是空,受念著;受、想、行、識是空,受念著。舍利弗!是名菩薩摩訶薩順道法愛生。
수보리존자가 답하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은 공한 색시공(色是空)이라고 받아들여서 염착(念著)을 일으키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은 공(空)한 것이라고 염착을 일으킨다면,
사리불이여, 이를 보살마하살이 도(道)를 따르면서도 법애(法愛)가 생(生)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色是無相,受念著;受、想、行、識無相,受念著。色是無作,受念著;受、想、行、識無作,受念著。色是寂滅,受念著;受、想、行、識寂滅,受念著。色是無常,乃至識;色是苦,乃至識;色是無我,乃至識——受念著,是爲菩薩順道法愛生。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물질은 모양이 없는 색시무상(色是無相)이라고 염착을 일으키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도 무상(無相)이라고 염착을 일으키며,
물질은 조작이 없는 색시무작(色是無作)이라고 염착을 일으키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도 무작(無作)이라고 염착을 일으키며,
물질은 고요히 사라진 색시적멸(色是寂滅)이라고 염착을 일으키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도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라고 염착을 일으키며,
물질 내지 의식을 무상(無相)한 것이라고 하거나, 물질 내지 의식을 괴로운 고(苦)라고 하거나, 물질 내지 의식을 무아(無我)라고 하여 염착을 일으킨다면, 이러함을 보살이 도를 따르면서도 법애가 생한 것이라 하는 것이며,
是苦應知、集應斷、盡應證、道應修,是垢法、是淨法,是應近、是不應近,是菩薩所應行、是非菩薩所應行,是菩薩道、是非菩薩道,是菩薩學、是非菩薩學,是菩薩檀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是非菩薩檀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是菩薩方便、是非菩薩方便,是菩薩熟、是非菩薩熟。
나아가 ‘이것은 괴로운 고(苦)이니 알아야 하고, 쌓임의 집(集)이니 끊어야만 하며, 다함의 진(盡)이니 증득해야 하고, 도(道)이니 닦아야만 하는 것이며,
이것은 더러운 구법(垢法)이고 이것은 깨끗한 정법(淨法)이며,
이것은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보살로서 행해야 할 바요 이것은 보살로서 행해서는 안 될 바이며,
이것은 보살의 도이고 이것은 보살의 도가 아니며,
이것은 보살의 배움이고 이것은 보살의 배움이 아니며,
이것은 보살의 단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이고 이것은 보살의 단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이며,
이것은 보살의 방편이고 이것은 보살의 방편이 아닌 것이며,
이것은 보살이 구체적으로는 실상의 지혜가 무르익어 성숙(成熟)한 것이고 이것은 보살이 성숙하지 않은 것이라고 염착하기도 하는 것이니,
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是諸法受念著,是爲菩薩摩訶薩順道法愛生。”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렇게 제법에 염착(念著)을 일으킨다면, 이를 보살마하살이 도를 따르면서도 법애가 생한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論. 問曰:何等善根故,不墮惡道、貧賤及聲聞、辟支佛,亦不墮頂?
▷논. 묻나니, 어떠한 선근 때문에 악도(惡道)와 빈천(貧賤)한 곳과 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고 또한 보살의 정상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荅曰:有人言:行不貪善根故,愛等諸結使衰薄,深入禪定;行不瞋善根故,瞋等諸結使薄,深入慈悲心;行不癡善根故,無明等諸結使薄,深入般若波羅蜜。如是禪定、慈悲、般若波羅蜜力故,無事不得,何況四事!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탐내지 않는 불탐선근(不貪善根)을 행하기 때문에 애욕 등의 모든 결사(結使)가 약해지고 얇아지면서 깊은 선정에 들게 되고,
성내지 않는 불진선근(不瞋善根)을 행하기 때문에 성냄 등의 모든 결사가 얇아지면서 깊이 자비심에 들게 되며,
어리석지 않은 불치선근(不癡善根)을 행하기 때문에 무명 등의 모든 결사가 얇아지면서 깊은 반야바라밀에 들어게 되는 것이다.”고 하나니,
이와 같이 선정과 자비와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일마다 얻지 못함이 없거늘 하물며 악도(惡道)ㆍ빈천(貧賤)한 곳ㆍ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거나 보살의 정상에서 떨어지는 네 가지의 사사(四事)이겠는가!
問曰:何以四事中但問墮頂?
묻나니, 무엇 때문에 사사(四事) 가운데에서 단지 정상에서 떨어지는 것만을 물은 것입니까?
荅曰:三事先已說,墮頂未說故問。
답하나니, 악도(惡道)ㆍ빈천(貧賤)한 곳ㆍ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 삼사(三事)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지만, 정상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물은 것이다.
問曰:“頂”者是法位,此義先已說,今何以重說?
묻나니, 정상의 정(頂)이라 함이란 바로 법의 지위인 법위(法位)이니, 이 이치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이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거듭 설명하는 것입니까?
答曰:雖說其義,名字各異。無方便入三解脫門及有方便,先已說。
답하나니, 비록 그 이치는 설명하였을지라도 이름이 각각 다르나니, 방편없이 삼해탈문(三解脫門)에 들어가는 것과 방편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이다.
法愛,於無生法忍中,無有利益,故名曰“生”。譬如多食不消,若不療治,於身爲患。菩薩亦如是,初發心時,貪受法食,所謂無方便行諸善法,深心繫著,於無生法忍是則爲生、爲病。
법애(法愛)는 무생법인(無生法忍) 가운데에서 이익이 없기 때문에 생(生)한 것이라 하나니,
비유하자면, 음식을 많이 먹어서 소화가 되지 않을 때에 만약 치료하지 않으면 몸에 병이 되는 것과 같이,
보살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할 때에 법식(法食)을 탐하여 이른바 방편이 없이 모든 선법을 행하면서 깊은 마음으로 무생법인에 얽매여 집착한다면, 이러한 것이 곧 법애가 생한 것이 되며, 병이 되는 것이다.
以著法愛故,於不生不滅亦愛。譬如必死之人,雖加諸藥,藥反成病;是菩薩於畢竟空不生不滅法忍中而生愛著,反爲其患!法愛於人天中爲妙,於無生法忍爲累。
법애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에도 역시 애착하는 것이니,
비유자면, 반드시 죽을 사람에게는 비록 약을 더 먹인다 하여도 그 약이 오히려 병이 되는 것과 같이, 이 보살은 필경공(畢竟空)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인(法忍)에 애착을 내게 되므로, 그것이 도리어 우환이 되나니,
법애는 인간ㆍ천상에서는 묘한 것이 되지만, 무생법인에서는 번뇌의 누(累)가 되는 것이다.
一切法中憶想分別,諸觀是非,隨法而愛,是名爲“生”,不任盛諸法實相水。與“生”相違,是名“菩薩熟”。
일체법 가운데에서 모든 관(觀)과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법을 따르면서 애착하는 것을 생(生)한 것이라 하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의 물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生)과 반대되는 것을 바로 보살의 실상의 지혜가 무르익은 숙(熟)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是一事,何以故名爲“頂”、名爲“位”、名爲“不生”?
묻나니, 이 하나의 일을 무엇 때문에 정상의 정(頂)이라 하고, 지위의 위(位)라 하며, 나지 않는 불생(不生)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於柔順忍、無生忍中閒所有法,名爲“頂”;住是頂,上直趣佛道,不復畏墮。譬如聲聞法中,煖、忍中閒名爲頂法。
답하나니, 유순인(柔順忍)과 무생인(無生忍)의 중간에 있는 법의 이름을 정(頂)이라 하나니, 이 정상(頂上)에 머무르게 되면 곧장 부처님의 불도에 나아가서 다시는 두려워하며 떨어지지는 않나니,
비유하자면, 성문의 법에서 무루지혜의 불에 다가가면서 유루의 선근을 낳는 지위의 난(煖, uṣma)과
이치를 명료히 알아챈 무루의 마음의 인(忍, kṣānti)의 중간을 정법(頂法)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순인(柔順忍)은 사람이 항상 참기를 많이 하면 저절로 조복되어서 역경이나 순경을 만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무생인(無生忍)은 참고 견디어 보살의 지위에 오른 사람의 인욕행으로서, 인생이 무상하며 세상이 허황함을 깨닫고 일체만법이 인연으로 흩어지는 진리를 깨닫고 보면, 별로 성낼 것도 없고 참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욕(忍辱)은 참는다는 뜻도 있지만 욕됨을 용서한다는 뜻도 내포한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받는다는 적극적인 뜻과, 모든 일에 대하여 희로애락함이 없고 동요됨이 없이 사물의 본성이 평등무이(平等無二)함을 깨닫는다는 해탈에까지 확산된다. 즉, 이 인욕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 다움
問曰:若得頂不墮,今云何言“頂墮”?
묻나니, 만일 정(頂)을 얻으면 떨어지지 않거늘, 어찌하여 지금은 정(頂)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垂近應得而失者,名爲“墮”;得頂者,智慧安隱,則不畏墮。譬如上山,旣得到頂,則不畏墮;未到之閒,傾危畏墮。
답하나니, 거의 얻어야 할 순간에 잃게 되는 것을 떨어지는 타(墮)라고 하는 것이며,
정(頂)을 얻은 이는 지혜가 안온하므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비유하자면, 산을 올라 이미 정상에 도달했으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나, 아직 도달하기 전에는 몸이 기울거나 위태로울 때에는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頂增長堅固,名爲“菩薩位”。入是位中,一切結使、一切魔民不能動搖,亦名“無生法忍”。所以者何?異於“生”故。愛等結使雜諸善法,名爲“生”。
정(頂)이 더욱 자라면서 견고하여 지는 것을 보살위(菩薩位)라 하며, 이 보살위(菩薩位)에 들게 되면 일체의 결사(結使)와 일체의 악마무리가 동요시킬 수 없으므로 역시 무생법인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生)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니, 탐애 등의 결사가 모든 선법에 뒤섞이는 것을 생(生)함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無諸法實相智慧火,故名爲“生”;有諸法實相智慧火,故名爲“熟”。是人能信受諸佛實
相智慧,故名爲“熟”;譬如熟甁能盛受水,生則爛壞。
또한 제법의 실상(實相)의 지혜의 불이 없기 때문에 생(生)한 것이라 하며, 제법의 실상 지혜의 불이 있기 때문에 무르익은 숙(熟)이라 하나니,
숙(熟)의 사람은 능히 모든 부처님의 실상 지혜를 신수(信受)하였기 때문에 숙(熟)이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잘 구워진 병(甁)은 물을 담을 수 있지만, 굽지 않은 날 흙의 병은 잘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復次,依止生滅智慧故得離顚倒,離生滅智慧故不生不滅,是名“無生法”。能信、能受、能持故,名爲“忍”。
또한 생멸(生滅)하는 지혜에 의지한 까닭에 뒤바뀜의 전도(顚倒)를 여의게 되고,
생멸(生滅)하는 지혜를 여의었기 때문에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나니,
이를 무생법(無生法)이라 하며,
능히 믿고 능히 받고 능히 지니기 때문에 인(忍)이라 하는 것이며,
復次,“位”者,拔一切無常等諸觀法故名爲“位”;若不如是,是爲順道法愛生。
또한 지위의 위(位)라 함이란, 일체의 무상(無常)함 등의 모든 관법(灌法)을 뽑아 버렸기 때문에 위(位)라 하는 것으로,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도(道)를 따르면서도 법애(法愛)가 생(生)한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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