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大智度論釋 三假品 第七 卷第四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7. 삼가품(三假品) 풀이함  5

 

“色作是菩薩義不?”“不也!世尊!”“受、想、行、識作是菩薩義不?”“不也!世尊!”“色無作是菩薩義不?”“不也!世尊!”“受、想、行、識無作是菩薩義不?”“不也!世尊!”乃至老死亦如是。

“물질의 조작인 색작(色作)이 보살의 이치인 보살의(菩薩義)가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조작인 수상행식작(受想行識作), 이것이 보살의(菩薩義)가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의 조작 없는 색무작(色無作)이 보살의(菩薩義)가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조작 없는 수상행식무작(受想行識無作), 이것이 보살의(菩薩義)가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佛告須菩提:“汝觀何等義言‘色非菩薩義,受、想、行、識非菩薩義;乃至色、受、想、行、識無作非菩薩義;乃至老死亦如是’?”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는 어떠한 이치를 보았기에 ‘물질(色)이 보살의(菩薩義)가 아니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보살의(菩薩義)가 아니며,

또한 수상행식무작(受想行識無作)이 보살의(菩薩義)가 아니며,

나아가 노사(老死) 또한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須菩提白佛言:“世尊!色畢竟不可得,何況無色是菩薩義!受、想、行、識,亦如是。世尊!色常畢竟不可得,何況色無常,是菩薩義!乃至識亦如是。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으니, 

“세존이시여, 물질(色)은 끝내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이 없는 무색(無色)이 어찌 보살의(菩薩義)가 되겠습니까!

수상행식(受想行識) 또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물질(色)의 항상함은 필경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의 무상함이 보살의(菩薩義)가 되겠습니까!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世尊!色樂畢竟不可得,何況色苦是菩薩義!乃至識亦如是。世尊!色我畢竟不可得,何況色非我是菩薩義!乃至識亦如是。

세존이시여, 물질의 즐거움인 색락(色樂)도 필경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의 괴로움인 색고(色苦)가 보살의(菩薩義) 이겠습니까.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의 '나'인 색아(色我)는 필경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의 '나'가 아닌 비색아(色非我)가 보살의(菩薩義) 이겠습니까!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世尊!色有畢竟不可得,何況色空是菩薩義!乃至識亦如是。世尊!色相畢竟不可得,何況色無相是菩薩義!乃至識亦如是。世尊!色作畢竟不可得,何況色無作是菩薩義!乃至識亦如是。”

세존이시여, 물질의 존재인 색유(色有)는 필경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의 공함인 색공(色空)이 보살의(菩薩義)겠습니까.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의 모양인 색상(色相)은 필경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의 모양 없는 색무상(色無相)이 보살의(菩薩義) 이겠습니까.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의 조작인 색작(色作)은 필경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늘, 하물며 물질의 조작 없는 색무작(色無作)이 보살의(菩薩義) 이겠습니까.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佛告須菩提:“善哉!善哉!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色義不可得,受、想、行、識義不可得;乃至無作義不可得,當作是學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의 이치인 색의(色義)도 얻을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이치인 수상행식의(受想行識義)도 불가득(不可得)이며,

나아가 조작이 없는 무작의(無作義)까지도 불가득(不可得)이나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須菩提!汝言:‘我不見是法名菩薩。’須菩提!諸法不見諸法。諸法不見法性,法性不見諸法。法性不見地種,地種不見法性;乃至識種不見法性,法性不見識種。

수보리야, 그대는 말하기를 ‘나는 이 법에서 보살이라 불리우는 법을 보지 못하는 아불견시법명보살(我不見是法名菩薩).’이라 하였는데,

수보리야, 제법은 제법을 보지 못하는 불견제법(不見諸法)이니라.

제법은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고, 법성(法性)은 제법을 보지 못하며,

법성(法性)은 땅의 요소인 지종(地種)을 보지 못하고, 땅의 요소인 지종(地種)은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느니라.

나아가 의식의 요소인 식종(識種)은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며, 법성(法性)은 의식의 요소인 식종(識種)을 보지 못하느니라.

 

法性不見眼、色、眼識性,眼、色、眼識性不見法性;乃至法性不見意、法、意識性,意、法、意識性不見法性。

법성(法性)은 눈의 대상인 색(色)과 안식(眼識)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눈의 대상인 색(色)과 안식(眼識)도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법성(法性)은 뜻과 법의 법의식(法意識)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뜻의 법과 의식(意識)의 성품은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느니라.

 

‘식(識)이란 요별하는 것으로, 오로지 경계대상의 상(相)을 전체적으로 취한다[總取]는 뜻으로, 그러그러한 경계대상의 상을 각기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을 일컬어 ‘각기 요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식’은 오로지 경계대상의 상을 능히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으로, 그 같은 경계대상의 상을 차별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니, 세존께서 “요별하는 것을 일컬어 식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아비달마장현종론』 2권 - 불교 갤러리

 

須菩提!有爲性不見無爲性,無爲性不見有爲性。何以故?離有爲不可說無爲,離無爲不可說有爲。

수보리야, 유위(有爲)의 성품은 무위(無爲)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무위(無爲)의 성품도 유위(有爲)의 성품을 보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말할 수 없고, 무위를 여의고는 유위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於諸法無所見,是時不驚、不畏、不怖,心亦不沒、不悔。何以故?是菩薩摩訶薩不見色、受、想、行、識故,不見眼乃至意,不見色乃至法,不見淫、怒、癡,不見無明乃至老、死。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제법에 대하여 보는 바가 없나니,

이 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며, 마음이 위축되거나 후회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보지 않기 때문이며,

눈 내지 뜻을 보지 않고, 빛깔 내지 법을 보지 않고,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보지 않고,

무명 내지 노사(老死)를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不見我乃至知者、見者,不見欲界、色界、無色界,不見聲聞心、辟支佛心,不見菩薩、不見菩薩法,不見佛、不見佛法、不見佛道。是菩薩一切法不見故,不驚、不畏、不怖、不沒、不悔!”

또한 '나'와 지자(知者)ㆍ견자(見者)를 보지 않고,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보지 않고,

성문의 마음ㆍ벽지불의 마음을 보지 않고, 보살을 보지 않고, 보살의 법을 보지 않고,

부처님을 보지 않고, 부처님의 불법을 보지 않고, 부처님의 불도를 보지 않기 때문이니,

이 보살은 일체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며, 마음이 위축되거나 후회하지 않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因緣故是菩薩心不怖、不沒、不悔?”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一切心心數法不可得、不可見,以是故,菩薩摩訶薩心不怖、不沒、不悔。”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으니,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이 보살은 마음으로 두려워하거나 위축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보살마하살은 온갖 마음인 일체심(一切心)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볼 수도 없는 불가견(不可見)이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마음으로 두려워하거나 위축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라.”

 

“世尊!云何菩薩心不驚、不畏、不怖?”佛告須菩提:“是菩薩意及意界不可得、不可見。以是故不驚、不畏、不怖。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一切法不可得故,應行般若波羅蜜。須菩提!菩薩摩訶薩一切行處,不得般若波羅蜜,不得菩薩名,亦不得菩薩心,卽是敎菩薩摩訶薩。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은 마음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보살의(菩薩意)와 의계(意界)는 불가득(不可得)이고 불가견(不可見)이니,

이 때문에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일체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해야만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행처(行處)에서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고, 보살의 이름을 얻지 못하며, 또한 보살의 마음도 얻지 못하나니, 곧 이것이 보살마하살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치는 것이니라.”

 

▶論. 釋曰:菩薩行般若波羅蜜,觀色法名字非常、非無常,乃至有爲無爲性中,不見有菩薩、菩薩字;如先說。

논. 해석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의 법인 색법(色法)의 이름이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며, 나아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성품 가운데에서 보살이나 보살의 이름이 있다고 보지 않나니, 앞에서의 설명과 같은 것이다.

 

一切法中不作憶想分別,菩薩住不壞法中,行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以諸法實相智慧,於諸法中求,不見一定法,所謂般若波羅蜜,亦不見般若波羅蜜名字,又不見菩薩及菩薩名字。

일체법 가운데에서 생각으로 분별을 짓지 않고,

보살은 무너지지 않는 불괴법(不壞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육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不共法)을 구족하며, 제법의 실상지혜(實相智慧)로써 제법 가운데에서 구하여도, 어느 하나의 정해진 법을 보지 못하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보지 못하고 또한 반야바라밀의 이름도 보지 못하며, 또한 보살이나 보살의 이름을 보지 못하나니, 

 

用是智慧故,破無明等諸煩惱,用是不見亦不見智慧故,破著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名字、菩薩、菩薩名字。諸法實相淸淨,通達無碍。菩薩得如是智慧。

이러한 지혜로써 무명(無明) 등의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이 보지 못하고 또한 보지 않는 지혜로써 반야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의 이름, 보살과 보살의 이름에 대한 집착을 부수게 되어서, 

제법의 실상에 청정하게 통달하여 막힘이 없게 되나니, 보살은 이러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며,

 

若見、若聞、若念,皆如幻化;若聞、見、念,皆是虛誑。以是故,不著色等。住是無碍智慧中,增益六波羅蜜,入菩薩位,得如是等利益。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허깨비와 같은 여환화(如幻化)이며, 듣고 보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이것은 거짓이니,

이 때문에 물질(色) 등에 집착하지 않고, 이 막힘없는 지혜안에 머물러서 육바라밀을 더욱 늘리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등의, 이러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是一章,佛自敎菩薩作如是觀。次後章,人謂佛多說法空,故反問須菩提:“若諸法不空,頗有一法定是菩薩不?所謂色是菩薩不?乃至如是菩薩不?”

이 장(章)에서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보살로 하여금 이러한 관(觀)을 짓게 하시고,

다음 장인 후장(後章)에서는 부처님께서는 거의 법공(法空)만을 말씀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수보리에게 반문하시기를, “만약 제법이 공하지 않다면, 어느 하나의 일법(一法)도 결정코 보살이 되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물질(色)이 보살인가?”라는 말씀에서 “여(如)가 보살인가?”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가 그것이다.

 

須菩提作是念:‘諸法和合故有菩薩,我云何言一法定是菩薩?’以是故言:“不也!世尊!”須菩提善得衆生空故,佛言:“善哉!善哉!”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제법이 화합한 까닭에 보살이 있는 것이거늘, 내가 어떻게 어느 한 법만이 결정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것이며,

수보리 존자가 중생공(衆生空)을 잘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菩薩知衆生空不可得故,應行般若波羅蜜。色是菩薩義,乃至無作,畢竟空亦如是。

보살은 중생이 공한 중생공(衆生空)이기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임을 알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며,

“물질(色)이 보살의(菩薩義)”라는 것에서 “조작 없는 무작(無作)인 것은 마침내 공하다.”라고 함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須菩提入諸法深空中不疑故,能益諸菩薩,故佛讚言:“善哉!善哉!菩薩法應如是學一切法不可得空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는 제법의 깊은 공에 들어가서 의심이 없기 때문이며, 능히 모든 보살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구나”라고 칭찬하신 것이니, 보살은 이와 같이 일체법은 얻을 수 없는 공한 것이라는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如須菩提說“我不見是法名爲菩薩”,佛言“非但菩薩獨不可見,都無有法見法者”。法性無量不可見故,是故“諸法不見法性”。

마치 수보리존자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저는 이 법에서 보살이라 불리우는 이름을 보지 못합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단지 보살만이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법도 볼 수 있는 법이란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법성(法性)은 무량하여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법도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諸法因緣和合生,無有自性,畢竟空故,法性不見諸法。色性不見法性,法性不見色性;乃至識性亦如是。五衆性與法性同名故名爲性。十二處、十八界、有爲法、無爲法亦如是。

제법은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고, 자성(自性)이 없어서 필경에는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법성은 제법의 물질의 색성(色性)을 보지 못하고, 색성(色性)은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며, 

법성(法性)이 색성(色性)과 의식의 성품인 식성(識性)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오중성(五衆性)은 법성과 동일한 이름이기 때문에 성(性)이라 하며,

12처(處)ㆍ18계(界)ㆍ유위법(有爲法)ㆍ무위법(無爲法)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略說因緣:離有爲性,不得說無爲性;離無爲性,不得說有爲性。是二法中攝一切法故。

간략하게 인연을 설명하자면, 유위성(有爲性)을 여의고는 무위성(無爲性)을 설명할 수 없고

무위성(無爲性)을 여의고는 유위성(有爲性)을 설명할 수 없나니,

이 두 법으로 일체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是菩薩雖不見一切法,亦不怖畏。何以故?有所見、有所不見,則有恐畏;若都無所見,則無所畏,所謂五衆乃至十八不共法。

이 보살은 비록 일체을 보지 않는다 하여도 역시 두려워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보는 바가 있거나 보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두려움이 있지만,

전혀 보는 바가 없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오중(五衆)에서 18불공법(不共法)에 이르기까지도 모무지 보거나 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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