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報應品 第二 卷三十五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 보응품(報應品)을 풀이함 6
問曰:般若功德尊重,若佛廣讚有何不可?
묻나니, 반야의 공덕은 존중(尊重)한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널리 찬탄하시는 것이 어찌 안 되는 것입니까?
答曰:讚歎般若聞者歡喜尊重,則增其福德;若聞說般若,則增其智慧。不但以福德因緣故可成佛道,要須智慧得成;是故不須但讚歎。人聞讚歎,心已淸淨,渴仰欲得般若;如爲渴人,廣讚歎美飮,不解於渴,卽便應與之。如是等因緣故,舍利弗今問行般若。
답하나니, 반야를 찬탄하는 것을 듣는 이가 만약 기뻐하면서 존중한다면 곧 그 복덕이 늘어나게 되며, 만약 반야의 설법을 들으면 곧 그 지혜를 증장하게 되는 것이나,
복덕의 인연만으로는 부처님의 도를 이룰 수 없으니, 그것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찬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찬탄함을 듣고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지면서 간절히 우러러 반야를 얻고자 하게 되나니,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맛있는 물을 널리 찬탄하는 것만으로는 그 갈증이 해소되지 않으니, 곧 그 물을 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등의 인연 때문에 사리불은 지금 반야를 행함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問曰:如人有眼見,方知所趣處,然後能行。菩薩亦如是,先念佛道,知般若,見己,身然後應行;今何以言“不見菩薩及般若”?若不見,云何得行?
묻나니,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야 방향를 보고 나아갈 곳을 알고 갈 수 있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먼저 부처님의 도를 생각하고 반야를 알고, 스스로를 본 후에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 때문에 “보살과 반야를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만약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答曰:此中不言常不見,但明入般若觀時,不見菩薩及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爲令衆生知實法故出。此菩薩名字,衆緣和合假稱。如後品中廣說。
답하나니, 여기서는 항상 못 본다는 상불견(常不見)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반야에 들어가서 관찰할 때에 보살과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음을 밝힐 뿐이니, 반야바라밀은 중생으로 하여금 진실한 법을 알게 하기 위하여 출현한 것이요, 이 보살의 명자(名字, 이름)란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임시로 칭하는 것이니, 마치 후품(後品)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般若波羅蜜名字亦如是,衆法和合故,假名爲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雖是假名,而能破諸戲論;以自性無故,說言“不可見”。如火從衆緣和合,假名爲火,雖無實事而能燒物。
반야바라밀의 명자(名字, 이름) 또한 그와 같아서 여러 법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가명(假名)을 붙여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일 뿐이니, 반야바라밀이 비록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이라 하여도 모든 쓸모없는 이론을 능히 파하며,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불가견(不可見)'이라 설명하는 것이니, 마치 불이 여러 인연을 좇아 화합한 것을 임시로 이름하여 불이라 하며, 비록 진실함이 없을지라도 물건을 태울 수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若入般若中不見,出則便見,何者可信?
묻나니, 만약 반야에 들면 보지 못하고 나오면 보게 된다는 것에서 어느 것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上言“般若爲實法故出”,是則可信;出般若波羅蜜,不實,故不可信。
답하나니, 앞에서 “반야는 진실한 법이기 때문에 출현했다.”고 한 것은 곧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에서 나오게 되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問曰:若“入般若中不見,出則見”者,當知非法常空,以般若力故空!
묻나니, 만일 반야에 들면 보지 못하고 나오면 본다고 한다면, 법은 항상 공한 것이 아닐지라도 반야의 힘 때문에 공한 것이라고 알아야 할것입니다.
答曰:世俗法故,言行言入般若波羅蜜;諸觀戲論滅故,無出、無入。若諸賢聖不以名字說,則不得以敎化凡夫;當取說意,莫著語言!
답하나니, 세속의 법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으로, 모든 관(觀)과 쓸모없는 희론(戲論)이 소멸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도 없는 무출(無出)이고 들어가는 것도 없는 무입(無入)이다. 만약 모든 성현들이 명자(名字, 이름)로써 말하지 않으면 범부를 교화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니, 그 말의 뜻을 취할 뿐, 그 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問曰:若般若中貴一切法空,此中何以先說衆生空破我?
묻나니, 만일 반야 가운데서 일체법공(一切法空)을 귀하게 여긴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먼저 중생공(衆生空)을 말하여서 나(我)라를 파하는 것입니까?
答曰:初聞般若,不得便說一切法空。我,不可以五情求得,但憶想分別生我想,無而謂有。又意情中無有定緣,但憶想分別、顚倒因緣故,於空五衆中而生我想。若聞無我,則易可解。色等諸法,現眼所見;若初言空無,則難可信。
답하나니, 반야를 처음 듣는 이에게 바로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설하지는 못하나니, 나(我)는 오정(五情)으로 구한다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나라는 생각의 아상(我想)을 내어서 없는 것인데도 있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또한 뜻의 의정(意情)에도 정해진 인연이 없으나, 다만 생각으로 분별하는 전도(顚倒)된 인연 때문에 오중(五衆)이 공한 가운데에서 나(我)라는 생각을 낼 뿐이라. 만약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을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눈으로 보고 있는 물질 등이 공한 것으로 없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말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今先破我,次破我所法;破我、我所法故,則一切法盡空。如是離欲,名爲得道。復次,般若波羅蜜,無一定法故。故不見我行般若。
이에 먼저 나(我)를 파하고, 그 다음에 내 것이라는 아소(我所)의 법을 파하는 것이니, 나와 내 것의 법을 파하였기 때문에 제법은 모두 공한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서 욕망을 여읨을 일컬어 도를 얻는 득도(得道)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반야바라밀은 정해진 일정법(一定法)이 없기 때문에 나(我)가 반야를 행함을 보지 못하는 불견아행반야(不見我行般)'이다.
“不見不行”者,如凡夫不得般若,故名“不行”;菩薩則不然,但行空般若,故說“不見不行。”
'행하지 않는 것도 보지 못하는 불견불행(不見不行)'이라 함이란, 마치 범부는 반야를 얻지 못하였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으나,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다만 공한 반야를 행할 뿐이므로 “행하지 않는 것도 보지 못하는 불견불행(不見不行)이다"고 하는 것이며,
復次,佛爲法王,觀餘菩薩其智甚少,雜諸結使,不名爲行。譬如國王雖得少物,不名爲得;佛亦如是敎諸菩薩,雖有少行,不名爲行。
또 부처님께서는 법왕(法王)이시라, 그 밖의 다른 보살을 관찰하시어서 그 지혜가 심히 적고 모든 결사(結使)가 뒤섞였으므로 행한다고 하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국왕은 비록 적은 물건을 얻었을지라도 얻었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이,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모든 보살을 가르치되 비록 조그마한 행이 있다 하여도 행한다고 하지 않는 것이며,
復次,行般若波羅蜜者生憍慢,言“我有般若波羅蜜”,取是相;若不行者,心自懈沒而懷憂悴。是故言“不見我行與不行”。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가 교만하여져서 “나에게는 반야바라밀이 있다.”고 하면서 상(相)을 취하며, 만약 행하지 않는 이라면 마음이 스스로 게을러져서 근심을 품게 되기 때문에 “나(我)의 행함과 행하지 않음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신 것이다.
復次,“不見我行般若波羅蜜”者,破著有見;“不見我不行般若波羅蜜”者,破著無見。
또한 “내가 반야바라밀을 행함을 보지 못한다.”고 함이란, 있다는 소견의 유견(有見)에 대한 집착을 파하고,
“내가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도 보지 못한다.” 함이란 없다는 소견의 무견(無見)에 대한 집착을 파하는 것이다.
復次,不見我行般若波羅蜜者,止諸法戲調;不見我不行者,止懈怠心故。譬如乘馬,疾則制之,遲則鞭之。如是等分別“行”、“不行”。
또한 “내가 반야바라밀을 행함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제법에 대한 희롱이 그치게 되고,
“내가 행하지 않는 것도 보지 못한다.”고 하면 게으른 마음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말을 타면서 너무 빠르면 제지하고, 너무 느리면 채찍질을 하는 것과 같이 행(行)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을 분별하는 것이며,
復次,佛自說因緣,所謂“菩薩、菩薩字性空”。是中雖但說菩薩字空,而五衆亦空。
또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의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보살과 보살이라는 이름의 성품의 공(空)함이라. 여기에서는 비록 “보살의 명자(名字, 이름)이 공하다.”고만 말씀하셨을 뿐이라 할지라도 오중(五衆) 역시도 공한 것이다.
“空中無色,離色亦無空”者,“空”名法空,法空中乃無一毫法,何況麤色!“空亦不離色”,所以者何?破色故有空,云何言離色!受、想、行、識亦如是。何以故?佛自更說因緣,所謂“但有名字謂爲菩提,但有名字謂爲菩薩,但有名字謂爲空”
공한 가운데에는 물질의 색(色)이 없는 공중무색(空中無色)이고 색(色)을 여의고도 역시 공이 없는 이색역무공(離色亦無空)이니, 이러한 공을 법공(法空)이라 하며, 법공(法空) 안에는 일호(一毫)의 법도 없거늘, 하물며 거친 물질이겠는가!
공도 역시 색(色)을 여의지 않나니, 왜냐하면, 색(色)을 파하기 위하여 공이 있기 때문이니, 어떻게 색(色)을 여읜다고 말하겠는가.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와 같으니,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다시 인연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른바 “다만 명자(名字, 이름)만이 있는 것을 일컬어 보리라 하고, 명자(名字, 이름)만이 있는 것을 일컬어 보살이라 하며, 명자(名字, 이름)만이 있는 것을 일컬어 공(空)이라 한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先已說此事,今何以重說?
묻나니, 앞에서 이미 이러함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지금 거듭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先說“不見菩薩,不見菩薩字,不見般若波羅蜜”;今說“不見”因緣,所謂“但有名謂爲菩提,但有名謂爲菩薩,但有名謂爲空”。上菩薩、此菩薩義同。“菩薩字”,卽如“菩薩”中說。
답하나니, 앞에서는 “보살도 보지 못하고, 보살이라는 이름도 보지 못하며, 반야바라밀도 보지 못한다.” 함을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그 인연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른바 “다만 명자(名字, 이름)만이 있는 것을 일컬어 보리라 하고, 명자(名字, 이름)만이 있는 것을 일컬어 보살이라 하며, 명자(名字, 이름)만이 있는 것을 일컬어 공(空)이라 한다.”고 하심이 그것이니,
앞에서의 보살은 여기에서의 보살의 뜻과 같으며, 보살의 이름에 대해서는 곧 보살(菩薩)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般若波羅蜜分爲二分:成就者名爲“菩提”,未成就者名爲“空”。“生相”實不可得故,名爲“無生”。所以者何?若先生後法,若先法後生,若生法一時,皆不可得,如先說。
반야바라밀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성취하는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공(空)'라 하는 것이며, 낢의 생상(生相)은 실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낢이 없는 무생(無生)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혹 먼저 생(生)하고 뒤에 법이 되거나, 혹 먼저 법이 있다가 뒤에 생(生)하는 것이거나, 혹 생(生)하는 것과 법이 같은 때이거나 간에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다.
無生故“無滅”若法不生不滅如虛空,云何有垢有淨?譬如虛空,萬歲雨亦不濕、大火燒不熱、煙亦不著。所以者何?本自無生故。
낢이 없는 무생(無生)이기 때문에 멸함도 없는 무멸(無滅)이나니, 만약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마치 허공과 같을 것인데 어떻게 더러운 때의 구(垢)가 있고, 깨끗한 정(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허공은 만 년 동안 비가 내린다 하여도 축축하게 젖지 않고, 큰 불로 태운다 하여도 뜨거워지지 않으며, 연기도 앉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본래부터 스스로 낢이 없는 무생(無生)이기 때문이다.
菩薩能如是觀,不見離是不生不滅法有生有滅、有垢有淨。何以故?佛自說因緣:“一切法皆憶想分別,因緣和合故,强以名說。”
보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면서 불생(不生)과 없어지지도 않는 불멸(不滅)의 법을 떠나서, 낢이 있다거나 멸함이 있다거나, 더러운 것이 있다거나 깨끗한 것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스스로의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일체법 모두는 생각하고 분별하는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말하는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不可說者是實義,可說者皆是名字。“菩薩行般若波羅蜜,不見一切名字”者,先略說名字,所謂菩薩、菩薩字,般若波羅蜜、菩提字;今廣說一切名字皆不可見,不見故不著。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이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명자(名字, 이름)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일체의 명자(名字, 이름)을 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먼저 간략히 명자(名字, 이름)을 설명하자면 이른바 보살과 보살의 이름과 반야바라밀과 보리의 이름이다. 지금은 일체의 이름은 모두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볼 수 없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不著者,不可得故。如諸眼中,慧眼第一;菩薩以慧眼遍求不見,乃至不見細微一法,是故不著。
“집착하지 않는 불착(不著)이다.” 함이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눈 가운데서 혜안(慧眼)이 으뜸인 것과 같으니, 보살은 혜안으로써 두루 구한다 하여도 보지 못하고, 나아가 미세한 일법(一法)까지도 보지 못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집착하지 않는 불착(不著)인 것이다.
問曰:若菩薩一切法中不著,何得不入涅槃?
묻나니, 만약 보살이 일체법 가운데에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열반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是事處處已說,今此中略說:大悲心故,十方佛念故,本願未滿故,精進波羅蜜力故,般若波羅蜜、方便二事和合故,所謂不著於不著故。如是等種種因緣故說“菩薩雖不著諸法,而不入涅槃”。
답하나니, 이러함은 곳곳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나 여기서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대비심(大悲心) 때문이고, 시방의 부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본래의 서원이 아직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진(情進)바라밀의 힘 때문이고, 반야바라밀과 방편이라는 두 가지가 화합하였기 때문이며, 이른바 집착하지 않는 불착(不著)에도 집착하지 않는 불착(不著)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여러 인연 때문에 “보살은 비록 제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여도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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