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 보응품(報應品) 풀이함 5

 

.“譬如幻師、若幻弟子,善知幻法,幻作五欲,於中共相娛樂。於汝意云何?是人於此五欲,頗實受不?”舍利弗言:“不也!世尊!”

▷경. “비유하자면, 마치 환술사나 환술사의 제자가 환술의 법을 잘 앎에, 환술로써 오욕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즐기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이 실제로 이 오욕을 받고 있는 것인가?”

사리불이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以方便力故化作五欲,於中受樂,成就衆生,亦復如是。是菩薩摩訶薩不染於欲,種種因緣,毀訾五欲:欲爲熾然,欲爲穢惡,欲爲毀壞,欲爲如怨!是故,舍利弗!當知菩薩爲衆生故受五欲。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방편의 힘으로써 변화로 오욕을 만들어, 그 가운데에서 즐거움을 받는 것이라. 중생을 성취시키는 일 역시도 그와 같으니, 이 보살마하살은 욕망에 물들지 않은 채 갖가지 인연으로 오욕을 헐뜯으면서 ‘욕망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고, 욕망은 더럽고 악한 것이며, 욕망은 헐어지고 부서지는 것이며, 욕망은 마치 원수와 같은 것이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때문에 사리불아,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오욕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 問曰:三種菩薩中,何以獨爲一種菩薩作譬喩?

▷논. 묻나니, 세 가지의 보살 중에서 무엇 때문에 유독 한 가지의 보살만을 위하여 비유를 드신 것입니까?

 

答曰:一者、如人法、不斷婬欲;二者、常斷婬欲,修於淨行;三者、亦修淨行,現受婬欲——以人不了故,爲作譬喩。

답하나니, 첫째는 마치 인간의 법과 같아서 음욕을 끊지 않는 이이고,

둘째는 항상 음욕을 끊고 청정한 행을 닦는 이이며,

셋째는 역시 청정한 행을 닦으면서도 음욕을 누리는 일을 나타내는 이이라.

사람들이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를 든 것이다.

 

問曰:何以不以夢、化等爲喩?

묻나니, 무엇 때문에 꿈이나 허깨비 등으로 비유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答曰:夢非五情所知,但內心憶想故生;人以五情所見,變失無常,可以得解。化雖五情所知,而見者甚少。

답하나니, 꿈은 오정(五情, 오근)으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요,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 사람이 오정으로 보는 것은 변하여 상실되는, 무상한 것인지라 알 수 있는 것이나, 허깨비는 비록 오정으로 아는 것이라 하여도 이를 볼 수 있는 이들이 아주 적기 때문이다.

 

佛爲度可度衆生,幻是衆人所信,是故爲喩。如幻師以幻術故,於衆人中現希有事,令人歡喜;菩薩幻師亦如是,以五神通術故,於衆生中化作五欲,共相娛樂,化度衆生。

부처님께서는 제도하여야 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러한 비유를 드신 것이니, 환술은 바로 뭇 사람들이 믿는 바이기 때문에 비유를 드신 것이다.

마치 환술사가 환술로써 뭇 사람 가운데서 희유한 일을 나타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게 할 수 있듯이, 보살의 환술도 그와 같아서 오신통의 재주로써 중생들 가운데서 변화로 오욕을 만들어 함께 서로 즐기는 가운데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이다.

 

衆生有二種:在家、出家。爲度出家衆生故,現作聲聞、辟支佛、佛及諸出家外道師;在家衆生,或有見出家者得度,或有見在家同受五欲而可化度。

중생에는 두 종류가 있나니, 집에 있는 재가(在家)의 중생과 집을 떠나 출가(出家)한 중생이다.

출가(出家)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서는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부처님이나, 혹은 모든 출가한 외도의 스승인 외도사(外道師)를 나태내며,

재가(在家)의 중생은 혹은 출가한 이를 보고 제도되기도 하며, 혹은 재가자와 똑같이 오욕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교화되고 제도되기도 하나니, 

 

菩薩常以種種因緣,毀訾五欲。“欲爲熾然”者,若未失時,三毒火然;若其失時,無常火然。二火然故,名爲“熾然”,都無樂時。

보살은 항상 종종의 인연으로써 오욕을 헐뜯으면서 '오욕은 활활 타는 불인 욕위치연(欲爲熾然)'이라 하나니, 만약 아직 버리지 못하였을 때에는 탐진치 삼독(三毒)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만약 그것을 잃었을 때에는 무상(無常)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니,

삼독(三毒)의 불과 무상(無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에 '활활 타는 치연(熾然)'이라고 하는 것이며, 도무지 즐거울 때가 없는 것이다.

 

“欲爲穢惡”者,諸佛、菩薩、阿羅漢等,諸離欲者,皆所穢賤。譬如人見狗食糞,賤而愍之不得好食,而噉不淨;受欲之人,亦復如是,不得內心離欲之樂,而於色欲不淨求樂。

'욕망은 더럽고 악한 것인 욕위예악(欲爲穢惡)이다'라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아라한 등의 모든 욕망을 여읜 이 모두가 더럽고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개가 똥을 먹는 것을 보고는 천하게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음식을 얻지 못한 까닭에 그러한 부정(不淨)한 것을 먹는 것이니, 오욕을 받는 사람 역시도 그와 같아서 마음 속에 욕망을 여읜 즐거움을 얻지 못한 까닭에 색욕의 부정함에서 쾌락을 구하는 것이다.

 

“欲爲毀壞”者,著五欲因緣故,天王、人王、諸富貴者,亡國、危身,無不由之!

 '욕망을 헐어 무너뜨린다는 욕위훼괴(欲爲毀壞)'라 함이란, 오욕의 인연에 집착한 까닭에 천왕(天王)이나 인간의 왕이나 또는 모든 부귀한 자가 나라를 망치고 스스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니, 이러한 욕망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으며, 

 

“欲如怨”者,失人善利;亦如刺客,外如親善,內心懷害;五欲如是,喪失善心,奪人慧命。五欲之生,正爲破壞衆善、毀敗德業故出。

'욕망은 마치 원수와 같다는 욕여원(欲如怨)'이라 함이란, 사람의 좋은 이익을 잃게 하는 것이 마치 자객(刺客)이 겉으로는 친하고 착한 척하면서 내심으로는 해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오욕 또한 그와 같아서 착한 마음을 상실하게 하고 사람의 지혜 목숨인 혜명(慧命)을 빼앗아 가는 것이니, 오욕이란 것은 바로 온갖 선행을 파괴하고 덕(德)의 업을 파괴하기 위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又知五欲如鉤賊魚、如弶害鹿、如燈焚蛾,是故說“欲如怨”。怨家之害,不過一世;著五欲因緣,墮三惡道,無量世受諸苦毒。弶 덫 강, 蛾 나방 아

또한 오욕은 마치 갈고리가 고기를 죽이는 것과 같고, 마치 덫으로 사슴을 해치는 것과 같으며, 마치 등불이 불나방을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욕망은 마치 원수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원수의 해침은 한 세상만으로 그칠 수 있지만 오욕에 집착하는 인연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무량한 세상 동안 모든 고통을 받는 것이다.

 

. 舍利弗白佛言:“菩薩摩訶薩云何應行般若波羅蜜?”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으니,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菩薩,不見菩薩字,不見般若波羅蜜,亦不見我行般若波羅蜜,亦不見我不行般若波羅蜜。何以故?菩薩、菩薩字性空。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보살을 보지 않으며, 보살의 이름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느니라. 내(我)가 반야바라밀을 행함을 보지 않으며, 또한 내(我)가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음도 보지 않으니, 왜냐하면 보살과 보살이란 이름의 성품이 공(空)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空中無色,無受、想、行、識;離色亦無空,離受、想、行、識亦無空。空卽是色,色卽是空;空卽是受、想、行、識,受、想、行、識卽是空。

공(空)한 가운데에서는 물질의 색(色)이 없고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지어감의 행(行)ㆍ분별의 식(識)도 없으니,

공이 곧 물질인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물질이 곧 공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空)이 곧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요,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곧 공(空)이니라.

 

何以故?舍利弗!但有名字故謂爲菩提,但有名字故謂爲菩薩,但有名字故謂爲空。所以者何?諸法實性,無生、無滅、無垢、無淨故。

왜냐하면 사리불아, 다만 명자(名字, 이름)만 있을 뿐이니 보리(菩提)라 하는 것이요

다만 명자(名字,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는 것이며,

다만 명자(名字,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제법의 진실한 성품인 실성(實性)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기 때문이니라.

 

菩薩摩訶薩如是行,亦不見生,亦不見滅;亦不見垢,亦不見淨。何以故?名字是因緣和合作法,但以分別憶想假名說。是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一切名字,不見故不著。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행하면서도 역시 생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멸하는 것도 볼 수 없으며, 더러운 것도 볼 수 없고 깨끗한 것도 볼 수 없으니, 

왜냐하면 명자(名字, 이름)란 곧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지어진 작법(作法)이요, 다만 분별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에 임시로 이름을 붙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일체의 명자(名字, 이름)을 볼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까닭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 問曰:是事,舍利弗上已問,今何以重問?

 ▷논.  묻나니, 이것은 사리불이 앞에서 이미 물었던 것인데 지금 무엇 때문에 거듭 다시 묻는 것입니까?

 

答曰:先因佛說“欲以一切種知一切法,當學般若波羅蜜”故問,非自意問。

답하나니, 먼저 부처님께서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일체법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까닭으로 인하여 묻게 된 것이지 스스로의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다.

 

復次,今舍利弗聞上種種讚般若功德,心歡喜,尊重般若故,問“云何應行”;如病人聞歎良藥,便問“云何應服”。

또한 지금 사리불은 앞에서 갖가지로 반야의 공덕을 찬탄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반야를 존중하는 까닭에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니, 마치 병든 사람이 좋은 약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先已問“住不住法,行檀波羅蜜,施者、受者、財物不可得故,如是等爲行般若”,今何以復問行?

묻나니, 앞에서 이미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 법인 주불주법(住不住法)으로 행하는 단(檀, 보시)바라밀을 물었을 때에 보시하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 모두가 재물(財物)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함이 바로 반야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다시 행(行)함을 묻는 것입니까?

 

答曰:上摠問諸波羅蜜 諸波羅蜜,此但問般若;上廣讚歎般若爲主,此直問行般若。

답하나니, 앞에서는 모든 바라밀을 묻는 총문(上摠)이었고,

여기에서는 다만 반야만을 묻는 것이며, 

앞에서는 반야를 널리 찬탄함으로 주(主)를 삼았고,

여기에서는 곧장 반야를 행하는 행반야(行般若)만을 물은 것이다.

 

復次,上雖廣歎般若波羅蜜,時會渴仰欲得;是故舍利弗爲衆人故,問“行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功德無量無盡,佛智慧亦無量無盡;若舍利弗不發問,則佛讚歎無窮已;若舍利弗不問者,則無因緣故則不應止。

또한 앞에서 비록 반야바라밀을 널리 찬탄하였다 할지라도,  당시의 모임에서 간절히 우러르며 얻고자 하는 때문이니, 이에 사리불이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묻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의 공덕은 무량하고 무변한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 역시도 무량하고 무변한 것이니, 만약 사리불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찬탄은 끝이 없었을 것이요, 만약 사리불이 묻지 않았다면 곧 인연이 없기 때문에 응하지 않고 중지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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