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八空義 第四十八 卷三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8. 초품  십팔공(十八空) 뜻을 풀이함 2

 

問曰:三受皆外入所攝,云何言“觀內受”?

묻나니,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삼수(三受)는 모두 외입(外入) 속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내수(內受) 관한다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六塵初與六情和合生樂,是名外樂;後貪著深入生樂,是名內樂。

답하나니, 색성향미촉법의 육(六)이 처음에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 육정) 화합하여 즐거움이 생기게 하므로 이를 밖의 육경(六境)의 즐거움인 외락(外樂)이라 하고,

그러한 뒤에 탐착이 깊어져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이 빠져드는 육근(六根)의 즐거움이 생기므로 이를 육입(六入)의 즐거움인 내락(內樂)이라 하는 것이.

 

復次,內法緣樂,是名內樂;外法緣樂,是名外樂。

또한 내법(內法, 육입) 즐거움을 반연하는 것 안의 즐거움 내락(內樂, 육입의 즐거움)이라 하고 

외법(外法, 육경)의 즐거움을 반연하는 것 외락(外樂, 육경의 즐거움)이라 하며, 

 

復次,五識相應樂,是名外樂;意識相應樂,是名內樂。麤樂名爲外樂,細樂名爲內樂。如是等分別內外樂。苦受、不苦不樂受,亦如是。

또한 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다섯 가지의 오식(五識, 전오식前五識) 상응(相應)하는 즐거움을 바로 외락(外樂, 육경의 즐거움)이라 하고 

의식(意識) 상응하는 즐거움을 바로 내락(內樂, 육입의 즐거움)이라 하며, 

거친 즐거움을 외락(外樂, 육경의 즐거움)이라 하고 

세밀한 즐거움을 내락(內樂, 육입의 즐거움)이라 하며, 

이와 같은 등으로 안과 밖의 즐거움을 분별하나니, 

괴로운 느낌의 고수(苦受)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의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復次,行者思惟:“觀是內樂實可得不?”卽分別知實不可得,但爲是苦,强名爲樂。何以故?是樂從苦因緣生,亦生苦果報,樂無厭足故苦。

또한 수행하는 이는 사유하기를  내락(內樂, 육입의 즐거움)이란 실로 얻을  없는 것이다 관하면서도 실로 얻을  없음을 분별하여 알지 못하니, 다만  괴로움이 되는 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즐거움이라  뿐이다. 

왜냐하면  즐거움의 낙(樂)이란 괴로움의 고(苦)의 인연에서 생기는 것이고 

또한 고(苦) 과보를 내기 때문이니, 낙(樂)이란 만족할  없 것이 때문에 고(苦)인 것이다.

 

復次,如人患疥,搔之向火,疥雖小樂,後轉傷身,則爲大苦;愚人謂之爲樂,智者但見其苦。

또한 마치 사람이 옴이 올라서  불에 쪼이게 되었을 때에 긁으면 잠깐 동안은 낙(樂) 느끼기는 하나, 긁음으로 인해서 몸을 상하게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더욱 심한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낙(樂)이라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고(苦)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如是世閒樂顚倒病故,著五欲樂,煩惱轉多;以是故行者不見樂,但見苦,如病、如癰、如瘡、如刺。

이와 같이 세간에서는 낙(樂)이라고 하는 전도(顚倒)된  때문에 5욕락(欲樂) 집착하게 되고 번뇌는 더욱더 많아지게 되나니,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낙(樂)으로 보지 않고 다만 괴로운 것이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상처와 같고 가시와 같다고  뿐이다.

 

復次,樂少苦多,少樂不現,故名爲苦;如大河水,投一合鹽,則失鹽相,不名爲鹹。

또한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나니, 즐거움이 적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강물에  홉(일합一合) 소금을 넣었을 때에,  소금의 짠 모습을 잃게 되어서 짜다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復次,樂不定故,或此以爲樂,彼以爲苦;彼以爲樂,此以爲苦;著者爲樂,失者爲苦;愚以爲樂,智以爲苦;見樂患爲苦,不見樂過者爲樂;不見樂無常相爲樂,見樂無常相爲苦;

또한 즐거움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혹되어서 이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저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며, 저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이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서, 집착하는 이는 즐거운 것이라 하고, 상실한 이는 괴로운 것이라고 하나니,

어리석으면 즐거운 것으로 여기지만 지혜로우면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며,

즐거운 것에 우환이 있음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에서 그러한 허물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되는 것이며,

즐거운 것의 덧없음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의 덧없음을 본다면 괴로운 것이 되는 것이.

 

未離欲人以爲樂,離欲人以爲苦。如是等,觀樂爲苦。觀苦如箭入身,觀不苦不樂,無常變異相。如是等觀三種受,心則捨離,是名觀內受空。觀外受、內外受亦如是。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욕망을 여읜 사람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즐거운 것이 괴로움이라고 관찰하고,

괴로운 것은 마치 화살이  속에 박힌 것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락(不苦不樂) 무상하고 변하여 달라지는 상(相)이라고 관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은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느낌의 삼수(三受)로 마음을 관찰하게 되면  버리고 여의게 되나니, 이것을 안의 느낌이 공함을 관찰하는  관내수공(觀內受空)이라 하며,

밖의 느낌인 외수(外受)와 안팎의 느낌인 내외수(內外受)를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行者作是念:“若樂卽是苦,誰受是苦?” 念已則知心受然。後觀心爲實、爲虛?觀心無常,生、住、滅相;苦受心、樂受心、不苦不樂受心,各各異念。

수행하는 이는 만약 즐거움 그것이  괴로움이라면 누가  괴로움을 받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나면  마음으로 받는다 것임 알게 되나니,

그러한 뒤에는  마음이 진실한 것인가 거짓된 것인가”를 관찰하며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생주멸(滅)의 상(相)이라고 관찰하나니, 

괴롭다고 느끼는 마음의 고수심(苦受心) 즐겁다고 느끼는 마음의 낙수심(樂受心)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마음의 불고불락심(不苦不樂心) 저마다 각각으로 생각이 다를 뿐인 것이.

 

覺樂心滅,而苦心生;苦心爾所時住,住已還滅,次生不苦不樂心;知爾所時不苦不樂心住,住已還滅,滅已還生樂心。三受無常故,心亦無常。

즐겁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괴롭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괴롭다는 마음이 한동안 머무르다가 그 마음이 사라져버리면,

그 다음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한동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머무르다가 그것이 다시 사라지고 나면,

다시 즐겁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나니,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의 삼수(三受)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 역시도 무상한 것이다.

 

復次,知染心、無染心,瞋心、無瞋心,癡心、不癡心,散心、攝心,縛心、解脫心,如是等心,各各異相故,知心無常,無一定心常住。受苦、受樂等心,從和合因緣生;因緣離散,心亦隨滅。如是等,觀內心、外心、內外心無常相。

또한 음욕에 물든 마음과 물들지 않는 마음, 성내는 마음과 성을 내지 않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어리석지 않은 마음, 산란한 마음과 가다듬은 마음, 속박된 마음과 해탈한 마음 등의 저마다의 마음도 다른 모습의 이상(異相)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항상 머무르지 않는 일정심(一定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괴로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등의 마음은 인연(因緣)의 화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인연을 여의거나 흩어지게 되면 마음도 따라서 역시 소멸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내심(內心), 외심(外心), 내외심(內外心)이 무상한 것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問曰:心是內入攝,云何爲外心?

묻나니, 마음은  내입(內入, 육입)에 속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밖의 외심(外心)이라고 하십니까?

 

答曰:觀內身名爲內心,觀外身名爲外心。復次,緣內法爲內心,緣外法爲外心。復次,五識常緣外法,不能分別,故名爲外心;意識能緣內法,亦分別好醜,故名爲內心。

답하나니, 몸 안의 내신(內身)을 관찰하면 내심(內心)이 하고 

몸 밖의 외신(外身)을 관찰하면 외심(外心)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내법(內法, 육입)을 반연하면 내심(內心)이라 하고 

외법(外法, 육경)을 반연하면 외심(外心)이라 하며, 

또한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의 오식(五識)은 항상 외법(外法) 반연하면서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심(外心)이라 하고, 

의식(意識)은 내법(內法) 능히 반연하면서 또한 아름답고 추함 등을 분별하기 때문에 내심(內心)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意識初生,未能分別、決定,是爲外心;意識轉深,能分別取相,是名內心。如是等分別內、外心。

또한 의식이 처음에 생겨났으나 아직 분별하고 결정하지 못하면 이를 외심(外心)이라 하고, 

의식이 점차로 깊이 분별하게 되어서 상(相) 취하게 되면 이를 내심(內心)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안과 밖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다.

 

行者心意轉異,知身爲不淨相,知受爲苦相,知心不住爲無常相;結使未斷故,或生吾我。如是思惟:“若心無常,誰知是心?心爲屬誰?誰爲心主而受苦樂?一切諸物,誰之所有?”

수행하는 이는 심의(心意)가 차츰차츰 달라지면서, 

몸은 깨끗하지 않은 부정상(不淨相)이라는 것을 알고, 

느낌은 괴로움의 고상(苦相)이라고 알며, 

마음은 머무르지 않는 무상상(無常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결사(結使, 번뇌)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나'를 고집하는 오아(吾我)의 마음을 내어서 생각하기를 만약 마음이 무상한 것이라면 누가  마음을 아는 것이며, 이 마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누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것이며, 

일체의 물건은 누가 소유(所有)하는 것인가! 하기도 하나니, 

 

卽分別 知無有別主,但於五衆取相故,計有人相而生我心,以我心故生我所。我所心生故,有利益我者生貪欲;違逆我者而生瞋恚;此結使不從智生,從狂惑生故,是名爲癡三毒爲一切煩惱之根本。

이렇게 분별하다가,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5(衆, 오온)에서 상(相) 취하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인상(人相)이 있게 되었음 헤아리게 되어서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 있기 때문에  것이라는 아소(我所)의 마음 생기는 것이고 

 것이라는 아소(我所)의 마음이 생긴 때문에 '나'를 이익되게 하고자 하여 탐욕을 내고, 나를 거스르는 것에 화를 내게 되는 것이라. 

이러한 번뇌는 지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미치고 미혹된 광혹(狂惑)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함을 어리석은 치(癡)라 하는 것이, 탐진치 삼(三) 일체 번뇌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

 

亦由吾我故,作福德,爲我後當得;亦修助道法,我當得解脫。初取相故名爲想衆;因吾我起結使及諸善行,是名行衆。是二衆則是法念處。

모두가 '나'를 고집하는 오아(吾我) 말미암아 짐짓  복덕을 지으면서, “훗날 내가 반드시 얻게 될 것이 하는 것이며,

또한 조도법(助道法) 닦으면서 나는 반드시 해탈을 얻을 것이”라 하면서 처음부터 상(相) 취하기 때문에 상중(想衆)이라 하며, 

'나'를 고집하는 오아(吾我)로 말미암아 번뇌 모든 선행 일으키게 되는 것을 바로 행중(行衆)이라 하나니, 

  가지의상중(想衆)과 행중(行衆)바로 법념처(法念處)가 되는 것이다.

 

於想、行衆法中求我不可得。何以故?是諸法皆從因緣生,悉是作法而不牢固,無實我法。行如芭蕉,葉葉求之,中無有堅;相如遠見野馬,無水有水想,但誑惑於眼。如是等,觀內法、外法、內外法。

상중(想衆)과 행중(行衆)의 법 안에서 나를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왜냐하면 이 법들 모두는 인연(因緣)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모두 조작된 법이라서 견고하지도 않은 것이며, 진실로 '나'라는 법과 행도 없는 것이니,

마치 파초의 잎사귀를 떼어낼 때마다 실속을 구한다 하여도 그 속에는 단단함이 없는 것과 같으며, 마치 멀리서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 없는데도 물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는 다만 눈이 미혹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내법(內法)과 외법(外法)과 내외법(內外法)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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