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 十八不共法釋論 第四十一 卷二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1. 초품 중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의 뜻을 풀이함 1

 

十八不共法者,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 하는 것은

一者 諸佛身無失, 첫째는 모든 부처님의 몸에는 과실이 없는 신무실(身無失)이요

二者 口無失, 둘째는 입으로 인한 과실이 없는 구무실(口無失)이요,  

三者 念無失, 셋째는 생각하심에 과실이 없는 염무실(念無失)이요

四者 無異想, 넷째는 다른 생각이 없는 무이상(無異想)이요

五者 無不定心, 다섯째는 산란하여 집중하지 못함이 없는 무불정심(無不定心)이요

六者 無不知已捨, 여섯째는 버리지 않음이 없는 무불지이사(無不知巳捨)요

七者 欲無減, 일곱째는 의욕이 감소되지 않는 욕무감(欲無減)이요

八者 精進無減,여덟째는 정진하심에 감소함이 없는 정진무감(精進無減)이요,

九者 念無減, 아홉째는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 감소함이 없는 염무감(念無減)이요,

十者 慧無減, 열째는 지혜의 감소함이 없는 혜무감(慧無減)이요,  

十一者 解脫無減, 열한 번째는 해탈에 감소함이 없는 해탈무감(解脫無減)이요

十二者 解脫知見無減, 열두 번째는 해탈지견에 감소함이 없는 해탈지견감(解脫知見無減)이요

十三者 一切身業隨智慧行, 열세 번째는 일체의 몸으로 짓는 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는 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이요, 

十四者 一切口業隨智慧行, 열네 번째는 일체의 입으로 짓는 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는 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이요

十五者 一切意業隨智慧行, 열다섯 번째는 일체의 의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는 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이요

十六者 智慧知過去世無㝵, 열여섯 번째는 지혜로 과거의 세상을 아심에 막힘이 없는 지혜지과거세무애(智慧知過去世無礙)요

十七者 智慧知未來世無㝵, 열일곱 번째는 지혜로 미래의 세상을 아심에 막힘이 없는 지혜지미래세무애(智慧知未來世無礙)요,

十八者 智慧知現在世無㝵. 열여덟 번째는 지혜로 현재의 세상을 아심에 막힘이 없는지혜지현재세무애(智慧知現在世無礙)이다.

 

問曰; 是三十六法 皆是佛法, 何以故獨以十八爲“不共”?

묻나니, 이 불공법(不共法, 십력, 사무소외, 사무애지와 위의 18가지)은 36가지의 법(法)으로, 모두가 부처님의 특성=법(法)이거늘, 무엇 때문에 단지 열여덟 가지만을 함께하지 않는 불공(不共)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前十八中 聲聞 辟支佛有分 於後十八中無分。如舍利弗 能分別諸法 暢演一句 通達無佛讚言, “善通法性”, 阿泥盧豆天眼第一。如是等 諸聲聞皆有分。

답하나니, 앞의 18종은 성문이나 벽지불도 소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나, 뒤의 18종은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마치 사리불(舍利弗) 존자가 능히 제법을 잘 분별하여 한 구절의 일구(一句)로써 연창하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자, 부처님께서 칭찬하시어 “법의 성품을 잘 통달하였구나”라고 하신 것과 같으며,

아니로두(阿泥盧豆, 아나율) 존자는 천안(天眼) 제일이었으니,

이와 같이 여러 성문들 모두에게는 사무소외(四無所畏)에 그 한계=유분(有分)이 있는 것이다.

 

於四無所畏有分者 如佛說弟子中能師子吼 第一賓徒羅叵羅逝,

舍利弗亦自誓言, “我七日七夜 能演暢一義 令無窮盡 四分別慧"

諸阿羅漢 舍利弗 目揵連 富樓那 阿難 迦栴延等 亦知是義 名字 語言 樂說。

以是故 前十八不名不共。

사무소외(四無所畏)에 한계=유분(有分)이 있다 함이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 가운데서 사자후(師子吼)로 으뜸가는 이는 바로 빈도라파라타서(賓徒羅叵羅埵逝, Piṇḍola Bhāradvāja. 빈두로賓頭盧, 나반존자那畔尊者)이다”고 하셨고,

사리불 존자도 역시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는 밤낮 7일 동안, 한 이치를 펴서 능히 연창을하면서도 네 가지(사무소외)의 분별하는 지혜가 무궁할 수 있도록 하리라”고 한 것과 같으며,

사무소외(四無所畏)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아라한인 사리불ㆍ목건련ㆍ부루나ㆍ아난ㆍ가전연(迦旃延) 존자 등도 역시 이 의(義, 뜻)과 명자(名字, 이름)과 언어(言語)와 요설(樂說)을 아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앞의 18가지는 불공(不共)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問曰; 何以故佛“無身失” “無口失”?

묻나니,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몸의 과실이 없는 무신실(無身失)이고 입의 과실이 없는 무구실(無口失)입니까?

 

答曰; 佛於無量阿僧祇劫來 持戒淸淨故 身口業無失,

餘諸阿羅漢如舍利弗等 極多六十劫 不久習戒故有失。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셨기 때문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에 과실이 없지만, 그 밖의 여러 아라한과 사리불과 같은 이들은 극히 많아도 60겁 동안일 뿐이며, 계율을 익힘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과실이 있는 것이다.

 

佛無量阿僧祇劫 集諸淸淨戒成就故 常行甚深禪定故

得一切微妙智慧故 善修大悲心故 無有失。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 청정한 모든 계율을 쌓아 모아서 성취하셨기 때문이요, 항상 깊은 선정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며, 온갖 미묘한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이요, 대비(大悲)의 마음을 잘 닦으셨기 때문에 과실이 없으신 것이며, 

 

復次 佛拔諸罪根因緣故 無有失。罪根本因緣有四種, 一者 貪欲因緣, 二者 瞋恚因緣, 三者 怖畏因緣, 四者 愚癡因緣., 是罪根因緣及習皆已拔。阿羅漢 辟支佛雖拔罪因緣 習不盡故 或時有失。

또한 부처님께서는 모든 죄의 근본이 되는 인연을 뽑아내셨기 때문에 과실이 없으니,

죄의 근본이 되는 인연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탐욕(貪欲)의 인연이요,

둘째는 성내고 노여워하는 진에(瞋恚)의 인연이요,

셋째는 두려워하는 포외(怖畏)의 인연이며,

넷째는 어리석음의 우치(愚癡)의 인연이라.

이러한 죄의 근본이 되는 인연과 습기를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두 뽑아내셨지만, 아라한과 벽지불은 비록 죄의 인연을 뽑아내었다 하나, 아직 습기가 다하지 않은 까닭에 때로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佛於一切法中 遍滿智慧常成就故, 若不知 故有失。如舍利弗 與五百比丘 遊行至一空寺宿 是時說戒日 不知內界 外界事 白佛. 佛言, “住處乃至一宿 棄捨則無界"

부처님께서는 일체법 가운데서 지혜를 두루하고 원만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이나, 만약 모르는 것이 있게 되면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라. 마치 사리불과 같으니, 그는 오백의 비구들과 함께 여기저기를 다니며 수행하는 유행(遊行) 중에 어느 빈 절에 이르러 묵게 되었는데, 그 때가 바로 설계(說戒, 보름마다 계율을 설명하여 들려주어 사람들이 지난 보름 동안을 반성하게 하는 행사, 포살布薩)하는 날이었다.

그는 내계(內界, antaḥsīmā, 12입)와 외계(外界, bāhyasīmā, 육경)의 일을 몰랐기에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머무르는 곳에서 하룻밤만 자고 떠나 버리게 되면 계(界, 18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셨으며,  

 

又異時 舍利弗 目揵連 將五百比丘還時 高聲大聲故 佛驅遣令出 是爲口失。又如舍利弗 不知等食法. 佛言, “食不淨食!”如是等 身口有失。佛諸煩惱習盡故 無如是失。

또 다른 한 때에 사리불과 목건련이 5백의 비구들과 함께 돌아올 때에 목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떠들었으므로 부처님께서 내쫓으셨으니, 이것이 입의 과실인 구실(口失)이며,

또한 사리불이 출가자는 누구나 똑같은 음식을 제공받아야 한다는 등식법(等食法)을 몰랐으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청정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구나”고 하신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등으로 몸이나 입에 과실이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와 습기를 다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과실이 없으시다. 

 

復次 佛一切 身口業隨智慧行故 身無失 口無失。如是等 種種因緣故 身無失 口無失。

또 부처님께서는 신업과 구업을 지혜를 따라 행하시기 때문에 몸에도 과실이 없고 입에도 과실이 없으시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몸에 과실이 없는 ① 신무실(身無失)이고, 입에도 과실이 없는 ②구무실(口無失)이신 것이다.

 

“念無失”者 四念處心長夜善修故, 善修甚深禪定 心不散亂故, 善斷欲愛及法愛 諸法中心無著故, 得第一心安隱處故。若心悤悤 念有忘失, 佛心無得失 以是故無失。

懅 부끄러울 거, 조급히 굴 거. 悤悤총총= 1. 편지를 쓸 때, 내용을 마무리함을 나타내는 말. 2. 무척 급하고 바쁜 모양을 나타내는 말

생각에 과실이 없는 ③염무실(念無失)이라 함은, 사념처(四念處)의 마음을 오랜 세월 동안 잘 닦았기 때문이요, 매우 깊은 선정(禪定)을 잘 닦았기 때문이며, 마음이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요, 욕애(欲愛)와 법애(法愛)를 잘 끊으셨고,

제법 가운데 마음으로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며, 으뜸가는 마음으로 조용하고 편안함을 얻었기 때문이라.

만약 마음이 조급하고 바쁜 총총(悤悤)이면 기억을 잃는 망실(忘失)이 있게 될 것이나, 부처님께는 얻고 읽음의 득실(得失)이 없으므로 무실(無失)인 것이다.

 

復次 佛宿命通 明 力三種莊嚴念故 念則成就無失 念多在過去用故。

또한 부처님께는 숙명통(宿命通)과 숙명지명(宿命智明) · 천안지명(天眼智明) · 누진지명(漏盡智明)의 삼명(三明)과 십력(十力)의 세 가지로 기억을 장엄하셨기 때문에 곧 기억이 성취되어 과실이 없나니, 기억은 대개 과거세에 대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復次 念根力無邊無盡故 念無失。復次 佛一切意業隨智慧行故 念無失,

一一念隨意行故。如是等名爲念無失。如『天問經』中說;

또 염근(念根)의 힘이 무량하여 다함이 없기 때문에 기억에 과실이 없는 염무실(念無失)이며,

또한 부처님의 일체 의업(意業)은 지혜에 따라서 행해지기 때문에 염무실(念無失)이며,

이 낱낱의 기억은 의(意, 뜻)을 따라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을 염무실(念無失)이라고 하나니, 천문경(天問經, Devaparipṛchā-sūtra. 잡아함경雜阿含經)의 제22권(581경)의 이러한 게송과 같으니; 

 

何人無過失 何人不失念, 何人常一心 應作者能作。

어떠한 사람이 과실이 없고, 어떠한 사람이 기억을 잃지 않으며

어떠한 사람이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마땅히 지어야 할 것을 능히 짓는가!

 

正知一切法 一切障得脫 諸功德成就 唯有佛一人。

일체법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일체의 장애에서 해탈을 얻었으며

모든 공덕을 성취한 이는 오직 부처님 한 사람뿐이시다.

 

無異想”者 佛於一切衆生無分別 無遠近異想, 是貴可爲說 是賤不可爲說。如日出普照萬物 佛大悲光明 一切憐愍等度, 恭敬者 不恭敬者 怨親貴賤 一切悉等。

다른 생각이 없는 ④ 무이상(無異想)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 대하여 분별하거나 멀리하거나 가까이하는 등의 다른 생각이 없으심을 말하는 것이니, 곧 “이는 귀한 것이라 그를 위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나, 이는 천한 것이라 그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분별하는 생각이 없으신 것이다.

마치 해가 나와서 만물을 두루 비추는 것처럼 부처님의 대비(大悲)의 광명도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면서 평등하게 제도하시니, 공경할 이나 공경하지 않을 이나, 원수나 친한 이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에게 평등하신 것이다.

 

如客除糞人名尼佛化度之 得大阿羅漢。亦如德護居士 火坑毒飯 欲以害佛, 卽以其日除其三毒 滅邪見火。如是等 無有異想。

마치 남의 똥을 퍼주는 니타(尼陀, Nītha) 같은 사람도 부처님께서 제도하시어 큰 아라한이 되게 하셨고, 또한 덕호거사(德護居士, Śrīgupta 왕사성의 장자)와 같은 이는 불구덩이를 만들고 밥에 독을 섞어서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으나, 바로 그 날에 그의 삼독(三毒)을 제거하고 삿된 소견의 불을 꺼 주신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음이 무이상(無異想)이신 것이다.

 

復次 佛於舍利弗 彌勒菩薩等 順佛法行亦不愛 提婆達多 富羅那 外道六師邪見等亦不憎。是爲佛於無量阿僧祇劫 修熏心故 是衆生中寶 如眞金不可令異。

또한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존자나 미륵보살 등의 불법(佛法)에 순응하여 행하는 이에게도 역시 애착하지 않으시고, 제바달다(提婆達多)나 부루나(富樓那, 육사 외도 가운데 한 사람인 Pūraṇa Kassapa) 같은 육사 외도(六師外道) 등의 삿된 소견을 지닌 이들도 역시 미워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닦아서 깊이 베이게 훈수(熏修)하신 때문이니, 이러함은 중생 중의 보배로서 마치 순금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외도육사(外道六師, 육사외도)= 원시불교가 흥기하던 무렵에 활약하던 대표적인 6명의 사상가.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들을 ‘육사’가 아닌 ‘육사외도’라 한 이유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의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①푸라나 캇사파(Pūraṇa Kassapa)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악을 행한 것은 아니며, 제사, 보시, 수양 등을 해도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선악의 행위는 도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②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는 모든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나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다는 우연론(偶然論)을 주장하였다.

③아지타 케사캄바린(Ajita Keshakambala)은 인간이 흙·물·불·바람의 4원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죽으면 각 원소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④파쿠다 캇차야나(Kakuda Kātyāyana)는 땅·물·불·바람의 4원소 외에 괴로움·즐거움·생명을 추가하여 7요소를 설하고, 7요소는 불변하기 때문에 비록 사람을 죽이여도 칼은 7요소의 간격을 통과할 뿐이며 살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⑤산자야 벨랏티풋타(Samjayin Vairatīputra)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거나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을 주장하였다

⑥니간타 나타풋타(Nirgrantha Jnātiputra)는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며, 오래전부터 있던 교단의 명칭이었으나, 그가 이 파로 들어간 뒤에 자이나교를 성립하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주의(不定主義) 또는 상대주의(相對主義)를 내세우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오대서(五大誓)를 제정하였다.-다움

 

復次 佛以佛眼 一日一夜各三時 觀一切衆生誰可度者 無令失時,

等觀衆生故 無有異想。

또 부처님께서는 불안(佛眼)으로써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각각 삼시(三時)에 온갖 중생들을 관찰하시어 “누구라도 제도될 수 있는 자라면 때를 잃게 하지 않겠노라”하시며 중생을 평등하게 관찰하시기 때문에 무이상(無異想)이시며, 

 

復次 佛種種因緣讚善法 種種因緣呵不善法, 亦於善於惡心無增減

但爲度衆生故有是分別 是爲無有異想。

또한,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인연으로 착한 법은 칭찬하고, 갖가지 인연으로 나쁜 법을 꾸짖으시나, 역시 착한 것에나 나쁜 것에 대한 마음에 덜함이나 더함이 없으시나, 다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러한 분별을 하실 뿐이니, 이것이 다른 생각이 없다는 무이상(無異想)이며,

 

復次 如『一切不行經』中說 “佛觀一切衆生如己身 所作已辦

無始 無中 無終” 是名無異想。

또 마치 『일체불행경(一切不行經)에서 하신 말씀과 같으니,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마치 당신의 몸과 같이 관찰하시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되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고 마지막도 없나니, 이러함을 이름하여 다른 생각이 없는 무이상(無異想)이라고 하며,  

 

復次 佛觀一切衆生及諸法 從本已來至不生不滅 常淸淨如涅槃 是名無異想。

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과 일체법을 관찰하시어, 본래부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청정하여 마치 열반과 같음이라 하시나니, 이를 바로 무이상(無異想)이라고 하며, 

 

復次 不二入法門 是諸法實相門, 異相卽是二法 二法卽是邪道。佛是無誑法人 不應行誑法 常行不二入法門, 誑法卽是異相。如是等名無異想。

또 둘이 아님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제법의 실상의 실상문(實相門)이나,

다른 모양의 이상(異相)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법이라는 것으로, 두 가지의 법은 곧 삿된 사도(邪道)이라.

부처님께서는 남을 기만하는 특성의 광법(誑法, amāyāvin. 곧 환각, illusion이나 주술적 힘, magical powers을 부리는 사람이)이 없는 분이시니, 따라서 남을 기만하는 법을 행하시지 않으시어 항상 둘이 아닌 데로 들어가는 법문을 행하시나, 기만하는 법은 곧 다른 모양의 이상(異相)인 것이다.

이러한 것 등을 일컬어 ‘다른 생각이 없는 무이상(無異想)이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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