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
維摩詰所說經見阿閦佛品 第十二
Chapter 12. Vision of Akshobyya Buddha.
아축불(阿閦佛)을 친견한다는 뜻을 가진 품으로, 아축불은 무동불(無動佛)로 번역합니다. 묘희국(妙喜國)이라는 나라에 계시는 부처님이며, 유마거사가 사바세계에 오기 전에 살던 세계입니다. 앞에서는 중향국의 향적불을 등장시켜 무진법문을 펼쳤으며, 여기에서는 다시 묘희국의 아축불을 등장시켜 견불(見佛), 즉 부처를 보는 관점에 대한 설법이 전개됩니다. 석가모니불, 향적불, 아축불, 유마거사, 사리불 모두 본체의 입장에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나,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다만 경전을 결집한 사람의 마음은 부처님을 등장시키고 보살을 등장시켜서 중생들에게 존재의 바르고 참된 이치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如來의 實相(여래의 실상)
爾時世尊問維摩詰(이시세존문유마힐) 그 때 부처님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At this moment, the World Honoured One asked Vimalakirti,
汝欲見如來(여욕견여래) 爲以何等觀如來乎(위이하등관여래호)?
'그대는 여래를 만나고자 한다며 어떻게 여래를 보는가?'(무엇으로 여래를 관찰하는가?)
when you wish to see the Tathagata, with what view do you regard the Tathagata?
[그대가 여래를 보고자 하니 무엇으로서 여래를 관찰하는 것을 삼는가?]
維摩詰言(유마힐언) 如自觀身實相(여자관신실상) 觀佛亦然(관불역연)
유마힐은 대답하였다. '제 스스로의 몸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관찰하듯이, 부처님을 관찰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Vimalakirti, said, Likewise, as one would view the true reality of oneself, so also do I view the Buddha.
[관신실상(觀身實相) 관불역연(觀佛亦然)도 유마경의 유명한 문구이다. 우리들 자신이나 부처님이나 그 실상에 있어서는, 외형을 육안을 가지고 보는 것도 같은 수준이지만, 심안으로써 실상을 보는 것 그 역시 사람을 보나 부처님을 보나 보살을 똑같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我觀如來(아관여래) 前際不來(전제불래) 後際不去(후제불거) 今則不住(금즉불주)
제가 여래를 관찰하니, 여래는 과거로부터 오신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시는 것도 아니며, 현재에 머무신 것도 아닙니다.
I see the Tathagata does not arrive upon the past, not depart upon the future, not abide in the present.
[부처님께서 유마거사에게 “무엇으로 여래를 보는가?”라고 하였다. 이 질문을 통해서 유마거사가 여래를 관찰하는 법을 밝혔다. 즉 여래의 실다운 모습=實相을 관찰하는 법이다. “육신의 실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이 부처를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부처를 관찰하는 눈으로 이 육신과 아울러 모든 존재를 관찰하는 것은 모두가 같다. 부처의 존재원리나 육신의 존재원리나 일체 사물이 존재하는 원리나 같기 때문이다. 육신도 여래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텅 비어 공하다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공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느 지점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不觀色不觀色如(불관색불관색여) 不觀色性(불관색성)
(저는 여래를) 색으로도 관찰하지 않고, 색과 같은 모습=色如으로도 관찰하지 않고, 색의 성품=色性으로도 관찰하지 않습니다.
Not to perceive as form, not to look upon as the suchness of form, nor to view as nature of form.
[色如=색의 여여함이란 색, 사물의 변함없는 불변의 본질을 뜻한다.
色性= 색의 본성이란 형상의 이면을 뜻한다.
변함없는 불변의 본질이나 형상의 이면이나 형상 그 자체나 모두가 여래는 아니다 ]
不觀受想行識(불관수상행식) 不觀識如(불관식여) 不觀識性(불관식성)
非四大起(비사대기) 同於虛空(동어허공)
수(vedan), 상(saj), 행(saskra), 식(vijna)으로도 관찰하지 않으며, 식과 같은 모습=識如이라고도 관찰하지 않으며, 식의 성품으로도 관찰하지 않으며, 4대로부터 생긴 것도 아니어서 허공과 같으며,
Does not view as sensation, perception, mental formations, nor consciousness; not to perceive as the suchness of consciousness; same as the vast emptiness not arising from the four great elements.
[수 상 행 식의 그 자체나 불변의 본질이나 그 이면이나 모두가 색의 이치와 같이 동일하다. 여래는 그 모두를 초월하였으며, 그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존재 즉 중도적 존재다.]
六入無積(유입무적) 眼耳鼻舌身心已過(안이비설신심이과)
6입이 쌓인 것도 아니며, 눈․귀․코․혀․몸․마음을 이미 초월하였으며,
The six entrances without accumulation, beyond the eye, ear, nose, tongue, body, and mind.
不在三界(불재삼계) 三垢已離(삼구이리)
삼계(tridhtuka)에 있지도 않고, (탐진치) 세 가지 번뇌=三垢를 이미 떠났으며,
Not being within the three realms, free from the three defilements following the three gates of liberation,
[금강경에 “만약 색으로 부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부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헤매는 것이라고 했다. 색으로는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여래는 지수화풍도 초월하였으며, 6근도 초월하였으며, 삼계도 초월하였으며, 삼구(三垢)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초월하였면, 그 모두를 함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順三脫門(순삼탈문) 具足三明(구족삼명) 與無明等(여무명등)
삼해탈문에 수순하며, 삼명을 모두 갖추었으나 무명과 동일하며,
complete with the three insights, and equal to ignorance.
[삼해탈문(三解脫門)= 공(空)해탈, 무상(無相)해탈, 무아(無我)해탈
삼명(三明)= 육통(六通) 가운데 천안통(天眼通)의 천안명(天眼明), 숙명통(宿命通)의 숙명명(宿命明), 누진통(漏盡通)의 누진명(漏盡明)의 세가지]
[여래는 삼해탈, 삼명을 구족하였으나, 그와 반대되는 무명(無明)으로 더불어 평등하다. 서로 상반되지만 여래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과 더불어 하나의 모양도 아니고 다른 모양도 아니고 자와 타와 차안과 피안과 중류까지도 초월하였으며, 한편 그들과 함께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여래다.]
不一相不異相(불이상불이상)
하나의 상=一相(공통된 상)도 아니며, 다른 모습=異相(다양한 상)도 아니며,
Not singular in form, different in form,
不自相不他相(불자상불타상)
자신만의 모습=自相(고유한 상)도 아니며, 남의 모습=他相도 아니며,
individual in form, other in form,
非無相非取相(비무상비취상) 모습이 없는=無相도 아니며, 모습을 취하는=取相도 아니며,
neither formless, nor is receiving form.
不此岸不彼岸(불차안불피안) 不中流而化衆生(불중류이화중생)
차안=이 언덕에 있는 것도, 피안=저 언덕에 있는 것도 아니며, 中流=중간의 흐름에 있는 것도 아니나, 중생을 교화하고 계시며,
Not on this shore, other shore, midstream, yet transform beings.
觀於寂滅亦不永滅(관어적멸역불영멸) 不此不彼(불차불피)
적멸을 관찰하지만 영원히 멸하지 않으시며, 此=이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彼=저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Appears in nirvana, but is not perpetually in extinction. Neither this nor that,
[“중생을 교화하고……영원히 멸한 것은 아니며”까지는 현장이나 티베트 역에는 없다.]
[불교는 적멸을 말한다. 그래서 적멸이 낙이 된다=寂滅爲樂이라고 말하지만 한편 모든 존재는 항상(恒常)하다고도 말한다. 치우치지 않으면서 두루 수용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있음과 없음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있음도 수용하고 없음도 수용하는, 이것이 불교의 궁극이고, 중도적인 안목이다.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이나 우리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나 천지만물 삼라만상을 이해하는 것도 똑같은 입장이다.]
不以此不以彼(불이차불이피) 不可以智知(불가이지지) 不可以識識(불가이식식)
이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아니고, 저것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로써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neither with this nor with that. Not possible to understand with wisdom, nor possible to perceive with consciousness.
[치우치지 않으면서 두루 수용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피차의 문제도 역시 같다. 그래서 궁극의 경지 곧 여래의 경지는 “지혜로써 아는 것도 아니며 의식으로써 인식하는 것도 아니라=不可以智知 不可以識識”이다. 이 구절도 유마경의 명언이다.]
無晦無明(무회무명) 無名無相(무명무상) 晦 그믐 회
晦=어둠도 아니고, 明=밝음도 아니며, 이름도 없고 相=형상도 없으며,
Neither obscure, nor bright. Nameless and formless.
無强無弱(무강무약) 非淨非穢(비정비예) 不在方不離方(불재방불리방)
强=강한 것도 아니고, 弱=약한 것도 아니며, 淨=깨끗함도 아니고 穢=더러움도 아니며, 在方=어떤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離方=어떤 장소를 떠난 것도 아니며,
Without strength and without weakness. Neither pure nor unclean. Not in this direction, not apart from this direction.
非有爲(비유위) 非無爲(비무위) 無示無說(무시무설) 不施不慳(불시불견)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보이는 것도 아니고, 설해지는 것도 아니며,
(보시 바라밀) 施=보시도 아니고 慳=인색함도 아니며,
Neither the conditioned nor unconditioned. Nothing to reveal, nothing to speak of. Neither generous nor stingy;
不戒不犯(불계불범) 不忍不恚(불인불에) 不進不怠(불진불태)
(지계 바라밀) 戒=계를 지킴도 아니고, 犯=파계도 아니며,
(인욕 바라밀) 인욕=忍도 아니고 恚=성냄도 아니며,
(정진 마라밀) 進=정진도 아니고 怠=게으름도 아니며,
neither keeping the precepts nor transgressing the precepts; not tolerant nor hostile; neither diligent nor slack;
不定不亂(불정불란) 不智不愚(불지불우) 不誠不欺(불성불사)
(선정 바라밀) 定=선정도 아니고 亂=산란함도 아니며,
(반야 바라밀) 智=지혜도 아니고 愚=우둔함도 아니며, 誠=성실함도 아니고 欺=속임도 아니며,
not determinate nor disorderly; neither wise nor foolish; not sincere nor deceiving;
[다른 차원에서 6바라밀을 본 것으로, 베풀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끼지도 않으며, 계를 가지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으며, 참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고, 정진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선정을 닦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않으며,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은, 바람직하지 않은 6 바라밀도 보인 것입니다.]
不來不去(불래불거) 不出不入(불출불입) 一切言語道斷(일체언어도단)
來=오는 것도 아니고, 去=가는 것도 아니며, 出=나가는 것도 아니고 入=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일체의 말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言語道斷입니다.'
(언어로서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여래의 실상이다.)
not coming or departing; without leaving, without entering; and is beyond the expression of words.
[決定無我(결정무아) 無有眾生(무유중생) 而於因緣果報(이어인연과보) 無違無諍(무위무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면 절대로 아상이 없고 중생상이 없습니다. 인연과보에 대하여 또렷이 보게 되어 몹시 두려워합니다. 조금도 편차가 나지 않고 감히 논쟁하지 않습니다. 만약 공(空)해지면 인과가 없어진다고 말한다면 큰 삿된 견해입니다.
‘무생법인을 증득한 것은 공성을 증득한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해졌다면 그래도 인과가 있는가? 없는가?’ 저는 당연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공한데 어떻게 인과가 있는가?’ 저는 공(空)이 인(因)이요. 열반이 과(果)라고 말했습니다.
노스님은 듣고서 자리에서 내려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비로소 통과되었습니다. 노스님은 자비로워서 제가 공성을 깨닫고는 인과의 도리를 부정할까[撥無因果] 걱정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엄중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공을 깨달으면 인과가 도리어 더욱 뚜렷해집니다. 왜일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공해지면 약간의 것만 있어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부 중생은 공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 과보에 대해서 도리어 또렷이 보지 못하고 오염에 가로막혀 버립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반야의 공종(空宗)을 배운 보살은 얼음 모서리를 걸어가고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冰棱上走, 劍刃上行]처럼 한다.’고 했습니다. 얼음이 얼어 있는 산 모서리를 걸어가고 칼날 위를 밟고 걸어가는 것은 모두 위험합니다. 한 번 신중하지 못하면 한 생각 사이에 막을 수 없어 바로 떨어져서 당신이 배워 얻은 것이 무슨 보살 경계이든 예전대로 6도에 윤회하게 됩니다-홍남서원]
'유마경(維摩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12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3 (0) | 2023.05.24 |
---|---|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12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2 (0) | 2023.05.24 |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11 보살행품(菩薩行品)5 (1) | 2023.05.21 |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11 보살행품(菩薩行品)4 (1) | 2023.05.20 |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11 보살행품(菩薩行品)3 (1) | 2023.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