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福田非不福田(비복전비불복전) 非應供飬(비응공양) 非不應供飬(비불응공양)
복덕을 낳는 밭=福田도 아니요, 복전이 아닌 것도 아니며,
공양을 받을 만한 대상도 아니고 공양을 받지 못할 대상도 아니며,
Neither a field of blessing nor not a field of blessing; neither worthy of worship nor not worthy of worship;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복전이라고 하며,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취할 것이라고도 하며, 형상이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래를 반드시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것도 옳지 않다. 여래는 곧 진제며 법계며 법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칭량을 멀리 벗어나 있다. 칭량으로 다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非取非捨(비취비사) 非有相非無相(비유상비무상) 同眞際等法性(동진제등법성)
취함=取도 아니고 버리는=捨도 아니며, 형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이 없는 것도 아니며, 진제와 동등하며 법성과도 평등하며(같으며)
and is neither seizing nor renouncing. Neither with form nor is formless. Same as the ultimate truth, equivalent to Dharma nature (dharmata).
[同眞際等法性(동진제등법성)= 이 부분을 현장은 “평등평등 진실제(平等平等眞實際)에 같고 법계성(法界性)에 같다” 하였고, 티베트 역에서는 “평등성(平等性)에 의하여 평등하고 법성에 의하여 평등하다”고 하였다
不可稱不可量(불가칭불가량) 過諸稱量(과제칭량)
잴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모든 헤아릴 수 있는 한량을 넘었으며,
Inconceivable, immeasurable, and exceeding all acts of weighing.
非大非小非見非聞(비대비소비견비문) 非覺非知(비가비지) 離衆結縛(이중결박)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며,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느낌도 아니고, 앎도 아니며, 온갖 얽매임에서 벗어났으며, (번뇌를 끓어 버렸으며),
Neither large nor small, not seen nor heard, not perceived, or known, free from all bondage.
[非大非小= 이 부분을 티베트 역에서는 “간 것도 아니며, 든 것도 아니며, 초절(超絶)한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等諸智同衆生(등제지동중생) 於諸法無分別(어제법무분별)
모든 지혜에 평등하며, 중생과 동등하며, 제법에 대하여 분별함이 없으며,
Equal to all wisdom, the same as sentient beings, and is undifferentiated from all Dharmas.
一切無失(일체무실) 無濁無惱(무탁무뇌) 無作無起(무작무기) 無生無滅(무생무멸)
일체를 잃음도 없으며, 흐림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지음도 없고 생김도 없으며,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All is without attaining, without loss, free from defilement, free from vexation, has no action, has no arising, without birth, and without death.
無畏無憂(무외무우) 無喜無厭無著(무희무염무착)
두려움도 없고 근심도 없으며, 기쁨도 없고 싫음도 없으며, 집착함도 없으며,
There is no fear, sorrow, joy, or aversion.
無已有無當有(무기유무당유) 無今有(무금유)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을 것도 아니고, 지금 있는 것도 아니며,
Without existing in the past, future, or present.
不可以一切言說分別顯示(불가이일체언설분별현시)
가히 어떠한 언어=言說로도 분별하여 밝혀 낼 수가 없습니다.(분별하여 나타내 보이지 못합니다. )
There are no words and speeches that can differentiate or illustrate.
世尊(세존) 如來身爲若此(여래신위약차) 作如是觀(작여시관)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如來身,은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이 관찰하여야 합니다.
World Honoured One, the body of the Tathagata is such, and it is as thus do I contemplate.
以斯觀者(이사관자) 名爲正觀(명위정관) 若他觀者(약타관자) 名爲邪觀(명위사관)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바른 관찰=正觀이라 하며, 만약 이와 다르게 관찰하면 삿된 관찰=邪觀이라 합니다.'
If one observes in this way, it is called the right observation. If one does not view it this way, it is called improper observation.
[달리 표현하면 여래는 중도며 중도적 정견으로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관찰하면 그것이 바른 관찰이다. 만약 여래를 이와 다르게 관찰하면 그것은 삿된 관찰이다.]
[술보다 진한 명예와 이익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가와 사회가 정상 궤도에 올라 있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필요가 없으니, 관직을 차지하고 있을 필요 없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다. 만일 관직에 연연하여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아무 공헌하는 바도 없이 녹봉만 받아먹고 지낸다면, 그것이 바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다음으로, 국가와 사회가 정상궤도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그 자리에 앉아 아무 공헌도 하지 않고 녹봉만 받아먹는 것 역시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결론적으로 지식인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까? 먹고 살 수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서인데, 만일 공헌하는 바가 없다면 안정된 사회에서건 어지러운 사회에서건 다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울 치’(恥)를 면하는 공부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한나라의 광무제 유수(劉秀)와 엄광(嚴光;子陵)은 유년 시절의 학우이자 사이좋은 친구였는데, 뒷날 황제가 된 유수가 옛 친구 엄자릉을 찾고자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엄자릉은 벼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숨어 버렸습니다. 뒷날 엄자릉은 절강성(浙江省) 동로현(桐盧縣)에 있는 부춘강(富春江)에서 모피로 안을 댄 옷을 입고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동로현 현령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광무제는 보고서를 보자마자, 그 사람이 틀림없이 옛 학우 엄자릉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광무제는 서둘러 그를 찾아 조정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엄자릉이 여전히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자, 광무제는 “그대는 내가 황제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학우이니 오늘밤에도 예전 학우 때처럼 함께 자면서 이야기나 하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엄자릉은 그날 밤을 황제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잠버릇이 좋지 않아 다리를 황제의 배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객성이 황제의 자리를 범한 것”(客星犯帝座)을 태사공이 발견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엄자릉이 낚시질했던 곳에는 후세에 엄자릉 사당이 세워졌습니다. 역대 이래 지식인들은 엄자릉을 몹시 추앙하고, 그가 진정한 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지식인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엄자릉의 사당을 지나면서, 그곳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놓아 엄자릉을 추앙했습니다.
'그대는 명리 때문에 숨었건만 君爲名利隱
나는 명리를 위해서 왔구료 吾爲名利來
선생의 얼굴 뵙기 부끄러워하며 羞見先生面
깊은 밤 낚시터를 지나가오 夜半過釣台'
이와 반대로 청나라의 어떤 사람은 시로 엄자릉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한 벌의 양모피 옷 입음 딴 마음 있었는데 一襲羊裘便有心
헛된 명성이 지금까지 전해 오네 虛名傳誦到如今
당시에 도롱이를 걸쳤더라면 當時若著蓑衣去
안개 낀 강 아득한데 어디서 찾았을꼬 煙水茫茫何處尋'
이는 엄자릉이 실제로는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일부러 고상한 은사를 표방하여 역사에 고상한 미명(美名)을 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본 일면입니다.- 논어강의에서
6바라밀은 여러분이 다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어느 정도나 실천했습니까? 팔을 드는 정도의 수고인데도 남을 도와주지 않으려 한다면 부처님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불법에서는 서원[願]과 실천행[行]을 말하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처음 발심해서 부처님을 배울 때는 그런대로 좋은데, 오래 지나다 보면 사람됨의 그림자조차도 안 보입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6바라밀 중에서 어느 한 바라밀을 전일하게 닦아 성취가 있을 때에는 나머지 바라밀들도 다 관통하게 될 겁니다. 진정으로 성취가 있게 되면 역량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컨대 보시의 힘ㆍ지계의 힘ㆍ인욕의 힘 등등 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배우면서 정좌ㆍ염불ㆍ예불[拜佛]을 해도 성취가 없는 것은 역량을 형성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수행의 선념(善念)의 염력(念力)이 형성되지 않아서 여전히 수시로 자기가 자신의 금생 혹은 과거생의 각종 선악의 업력습기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수행성취가 있는 보살은 방편력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6바라밀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으로는 드러내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방편력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6바라밀에 도달하고 방편의 힘을 성취하여 한 가지도 원만하게 구비하지 않음이 없습니다.-홍남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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