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聞法(문법)

譬如良沃田에 所種必滋長인달하야 如是淨心地에 出生諸佛法이로다

如人獲寶藏에 永離貧窮苦인달하야 菩薩得佛法에 離垢心淸淨이로다

譬如伽陀藥이 能消一切毒인달하야 佛法亦如是하야 滅諸煩惱患이로다

眞實善知識은 如來所稱讚이시니 以彼威神故로 得聞諸佛法이로다

 

譬如良沃田(비여량옥전), 비유컨데 마치 비옥한 밭에 

所種必滋長(소종필자장)인달하야, 뿌려진 씨앗이 반드시 잘 자라듯이 [滋長= 성장하다 자라듯이]

如是淨心地(여시정심지), 그렇게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出生諸佛法(출생제불법)이로다. 모든 불법이 출생하네.

[갑골문과 금문의 長자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장발이 휘날리는 노인의 모습이다. 長자의 본래 의미는 노인이며, 뜻이 확장되어 尊長을 가리킨다. 즉 항렬이 높고 직위가 높은 사람이며, 또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동사로 쓰이면 長자는 또 나서 자람(生長), 자라다(滋長), 힘을 도와 전보다 더 잘하게 됨(增長), 규모가 커짐(成長) 등의 뜻이 있다. 이외에 길고 짧음(長短)이며, 뜻이 확장되어 길고 멂(長遠)길고 오램(長久) 등의 뜻이다 - 강대준]

如人獲寶藏(여인획보장), 마치 어떤 사람이 보배창고를 얻으면 

永離貧窮苦(영리빈궁고)인달하야, 가난의 고통을 영원히 여의듯이 

菩薩得佛法(보살득불법)보살이 불법을 얻으면   

離垢心淸淨(이구심청정)이로다. 때를 벗어 마음이 깨끗해지네.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청정하리라

 

譬如伽陀藥(비여가타약), 비유컨데 마치 아가타약이  [아가타 약= 온갖 병을 고친다는 인도의 영약]

能消一切毒(능소일체독)인달하야, 모든 독을 제거하듯이 

佛法도 亦如是(불법역여시)하야, 불법도 이와 같아서 

滅諸煩惱患(멸제번뇌환)이로다. 모든 번뇌의 우환을 소멸시키네. 

 

眞實한 善知識(진실선지식)진실한 선지식은 

如來所稱讚(여래소칭찬)이시니, 여래께서 칭찬하시는 바라  

以彼威神故(이피위신고)그 위신력으로 

得聞諸佛法(득문제불법)이로다. 모든 불법을 듣게 되리라.

 

  (3) 捨僞求眞(사위구진) 거짓을 버리고 진짜를 구하다. 

設於無數劫에 財寶施於佛이라도 不知佛實相이면 此亦不名施로다

無量衆色相으로 莊嚴於佛身이나 非於色相中에 而能見於佛이로다

如來等正覺이 寂然恒不動하사대 而能普現身하사 遍滿十方界로다

譬如虛空界가 不生亦不滅인달하야 諸佛法如是하야 畢竟無生滅이로다

 

設於無數劫(설어무수겁)설혹 무수한 겁 동안 

財寶로 施於佛(재보시어불)이라도, 부처님께 재물과 보화를 보시하더라도

不知佛實相(부지불실상)이면, 부처님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此亦不名施(차역불명시)로다. 이 또한 보시라 할 수 없으리라.

[부처님의 실상을 아는 것이 진짜 시주를 잘하는 것입니다. 첫째 시주는 내가 내 자신에게 시주를 잘 하는, 화엄경공부를 잘해서 佛實相을 알아야 됩니다. 不知佛實相= 부처에 대한 실상, 참 훌륭한 부처를 안고 사는, 그것을 알았다면 그 보다 더 큰 보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견성성불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참마음ㆍ참사람 이야기를 무수히 하는데, 그것을

내 정진, 내 공부에 의해서 견성을 했다면 그 보다 더 큰 보시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無量衆色相(무량중색상)으로, 한량없는 여러 색상으로 

莊嚴於佛身(장엄어불신)이나, 부처님 몸을 장엄해도 

非於色相中(비어색상중)그 색상에서 而能見於佛(이능견어불)이로다. 능히 부처님 뵐 수 있는 것이 아니네.

[태국에 가면 금으로 덕지덕지 불상에 칠해 놓고, 그것이 큰 복을 짓는 것인 줄 아는 겁니다. 그러나

莊嚴於佛身= 불신을 장엄하나, 非於色相中= 그 금박 중에는 부처님을 볼 수 없다.

크게 보면 불상에 바를 필요 없이, 광산에 있는 금 그대로도 부처님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고 보통 凡人(범인)이 하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如來等正覺(여래등정각)여래 등정각께서 寂然恒不動(적연항부동)하사대, 고요히 항상 부동하시되  

而能普現身(이능보현신)하사, 능히 널리 몸을 나타내시어 

遍滿十方界(변만시방계)로다.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시네

[遍滿十方界= 역사적인 부처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떤 특정한 현상ㆍ특정한 사람ㆍ특정한 장소ㆍ특정한 등상 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譬如虛空界(비여허공계)비유컨데 마치 허공계가 

不生亦不滅(불생역불멸)인달하야,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듯이 

諸佛法如是(제불법여시)하야, 모든 부처님 법도 이와 같아서 

畢竟無生滅(필경무생멸)이로다. 필경에는 생멸이 없도다. 

[허공은 不生不滅,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아서 필경에는 생멸이 없다.

남방불교의 신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이런 차원 높은 화엄경이 없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승불교는 불법이 어떤 것인가를 보는데, 남방불교는 ‘부처님이 누구냐?’ 석가모니부처님, 그것도 역사적인 부처님만 고집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어떠냐?’ 를 가지고 따지지 않고, 부처님 그 자체를 따져서 그 분의 親說(친설)인지 아닌지를 많이 따지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우리 나라에도 남방 불교가 많이 소개 되고, 번역도 많이 됐습니다.]

 

4. 北方(북방)의 光明幢菩薩(광명당보살)

   (1) 敎化(교화)의 作用(작용)이 廣大(광대)함

爾時에 光明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人間及天上 一切諸世界에 普見於如來 淸淨妙色身이로다

 

[光明幢보살= 대자비가 정진의 體가 됨에 근거한 것이니, 생사의 밤에 길이 처해서 지혜로써 광명을 발하기 때문이다.]

[교화의 작용이 廣大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여래 없는 곳이 없다= 진리 아님이 없다는 뜻] 

爾時(이시)그 때 光明幢菩薩(광명당보살)承佛神力(승불신력)하사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시방세계를 널리 관찰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게송으로 설해 말씀하사대,

 

人間及天上(인간급천상) 인간과 천상과 一切諸世界(일체제세계), 일체의 모든 세계에서 

普見於如來(보견어여래) 淸淨妙色身(청정묘색신)이로다. 널리 여래의 청정하고 아름다운 색신을 보도다.

[淸淨= 깨끗하다, 텅 비었다.] 

[청정하면서 아주 미묘한 색을 가진 부처님의 몸을 널리 다 보게 된다.  이것이 아주 의미 깊습니다.

부처님을 인간 세상에서 보고, 천상에서도 보고, 모든 세상에서 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산하대지, 삼라만상, 두두 물물, 산천초목에서 곧 여래를 본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고, 한마음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이 드넓은 우주 안의 모든 존재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래의 몸= 진리라는 뜻입니다. 여래는 곧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有形ㆍ無形. 그 어디에도 그 존재의 진실한 바른 이치가 다 있습니다. 그것을 如來라 했습니다.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佛身=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다. 법계 그대로가 佛身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딱 한명의 중을 꼽으라면 나는 춘성스님을 꼽겠습니다. 

무소유ㆍ무소유해도 정말 그 스님같은 무소유가 없습니다. 80객인데 당신 방이 따로 없고, 당신 이부자리 따로 없는,

큰 방에서 같이 정진하다가 3경 치면 어정어정 걸어서 탁자 밑에 가서, 거기에서 당신 목침하나 들고 와서 당신 깔고 앉았던 방석 배에 착 걸치면 그대로 주무십니다. 80객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80먹은 노인이 대중들하고 한방에서 목침하나 뿐이고 당신 깔고 앉았던 방석 딱 배에 걸치면 주무시는 겁니다. 그것도 한 시간쯤 누웠다가 대중들이 다 잠 들었다 싶으면 다시 일어나서 마당에 나간다든지 법당에 올라가서 한 두시까지 정진하다가 대중들이 깨기 전에 다시 내려와서 누웠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가서 누워서 자는 척하는 겁니다. 

정말 탈속하고, 진정 무소유로 살았던 스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스님의 법문이 "봄 바람이 시원하게 코끝을 스치니까 살아있는 석가가 코끝을 스치는구나!

그야말로 春風끝에= 봄바람 끝에 석가가 춤을 춘다고 옛 禪詩와 같이 설법하시더라고요. 사실 설법도 아닌, 그냥 앉아서 평소 말하듯 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2) 敎化(교화)의 作用(작용)이 甚深(심심)함

譬如一心力이 能生種種心인달하야 如是一佛身이 普現一切佛이로다

菩提無二法이며 亦復無諸相이로대 而於二法中에 現相莊嚴身이로다

了法性空寂하사 如幻而生起하시니 所行無有盡이라 導師如是現이로다

三世一切佛이 法身悉淸淨하사대 隨其所應化하야 普現妙色身이로다

如來不念言 我作如是身이라하고 自然而示現하사 未嘗起分別이로다

法界無差別이며 亦無所依止로대 而於世間中에 示現無量身이로다

佛身非變化며 亦復非非化니 於無化法中에 示有變化形이로다

 

譬如一心力(비여일심력), 비유하자면 마치 한 마음의 힘이 

能生種種心(능생종종심)인달하야, 갖가지 마음을 내듯이 

如是一佛身(여시일불신)그렇게 한 부처님 몸으로 

普現이 一切佛(보현일체불)이로다. 일체의 부처님을 나타내시네. 

[우리가 어제ㆍ그제 쓴 것과 작년ㆍ재작년에 쓴 마음은 그만 두고라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쓴 마음이 무수히 많습니다. 경계를 만날 때마다,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일으키지 않으려 해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것이 우리마음의 구조입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 쓴, 그 마음의 종류, 숫자가 무수히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한마음의 작용입니다. 

能生種種心= 한마음의 힘으로 여러 가지마음을 다 표현하고 있다.

如是= 이와 같이 一佛身= 한 부처의 몸이 一切佛= 일체 부처님을 普現= 널리 나타낸다.

중생근기 따라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편을 다 써서 무슨 부처ㆍ무슨 부처, 천 부처ㆍ만 부처ㆍ3000불ㆍ만 불ㆍ10만 불ㆍ억만 불의 그 많은 부처가 한 부처에서 표현된 것이다. 

예컨대 장갑을 끼고 사물을 만질 경우, 무엇을 만지든, 누구의 몸을 만지든지 나는 그저 장갑을 만질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계를 분별해서 이해하고, 거기서 어떤 작용을 하더라도 전부 내 한마음이 들어서 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一切唯心造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이 없는 사물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그 사물을 내 마음이 인식함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의 세계에서는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비로소 존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인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도 나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저~ 산천초목을 인식함으로부터 있는, 그것이 一切唯心造입니다.

한사람이 하루 가운데 별별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한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菩提無二法(보리무이법)이며 보리는 두 법이 없고 亦復無諸相(역부무제상)이로대, 또한 어떤 상도 없지만 

[여기는 무차별과 차별의 관계입니다.

菩提= 깨달음 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없다= 차별이 없는 경계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상도 없으나]

而於二法中(이어이법중), 두 법 가운데서 [두 가지 법 가운데 현상은 또 전부가 차별해서 천차만별하는 가운데]

現相莊嚴身(현상장엄신)이로다. 장엄한 몸의 상을 나타내시네.

[상을 나타내서 몸을 장엄한다. 여러 가지 각양각색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요.  

오늘에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 내일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 어제 나타낸 내 모습 다른 그것은

유위법= 유차별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了法性空寂(요법성공적)하사법의 성품이 공적함을 아시고  

如幻而生起(여환이생기)하시니, 환영처럼 일어나시며 

[법성은 본래 공적한데 如幻= 환과 같이 生起, 일어나는 것을 아시니,]

所行無有盡(소행무유진)이라. 행하시는 바가 다함 없으시니 

導師如是現(도사여시현)이로다도사=여래는 이렇게 나타나시네.

[여래는 법성이 공적한 그 당체입니다. 眞空妙有(진공묘유)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는 것이고 또 空寂靈知(공적영지)= 공적해서 찾아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 다 압니다. 추운지 더운지 다 알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다 알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압니다. 그 작용이 활발발 하고 왕성하게 있지만 그 실체를 찾아보면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渾大有(혼대유)입니다. 이 세상에 꽉 차게 있는 이것을 석가모니가 無我라고 한번 이야기 했다고 소승 불교에서는 불교는 無我라 그러는데, “無我” 라고 주장하는 그 당체는 부정 못하잖아요. 我가 있어서 無我ㆍ無我하는겁니다. 無我는 소승불교에서 하는 주장이지, 불교의 궁극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근본불교, 상좌부불교라고도 하고, 대승불교 권에서는 소승불교라고 일컫는, 소승 불교의 無我觀(무아관), 내가 없다.’고 관찰해버리는 것이 자신의 괴로움을 없앤다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좋은 치료법이긴 합니다.] 

[대승불교의 일심ㆍ불성ㆍ진여, 참나는 선불교의 주장과 아주 일맥상통합니다. 대승불교 사상이 중국에 와서 선불교에서는 “如來禪(여래선)은 보았지만 祖師禪(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는 선문들,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훨씬 높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석가모니 멸후 5ㆍ600년 이후에 대승불교에서 정립한 보살대승불교가 훨씬 수준이 높은 불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선불교에 와서 여래선보다 조사선이 더 높다고 발전된 것입니다.

그럼 불자라면,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보살을 따를 것인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조사를 따를 것인가? 하는 시시비비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럴 때, 대승불교 권에서나 조사선 쪽에서는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를 것이냐?” 이렇게 되묻습니다. 

사람을 따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진리를 따른다면 당연히 대승불교를 따라야 옳다.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다.”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선불교 이 세 가지가 중요한 주류입니다.] 

[如來禪(여래선)= 여래의 말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 여래의 깨달은 경지]

[祖師禪(조사선)= 달마의 문하에 전해오는 선, 부처님의 경전보다는 조사의 말씀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선]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法身悉淸淨(법신실청정)하사대, 법신이 다 청정하시되

[과거부처님이나, 현재부처님이나, 미래부처님이나 모두가 그 법신은 悉淸淨= 다 텅 비었습니다. 텅 비었다고 해서 그냥 없다는 뜻이 아니라 眞空妙有, 空寂한 데서 靈知한 것이 淸淨입니다.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것! 그것이 참 나ㆍ참사람ㆍ참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든지, 깨닫지 못한다든지, 아니면 근본불교를 많이 배워서 그것을 부정 한다든지 하는 것은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원효스님은 神解(신해)! 신비로울 神ㆍ이해할 解. “신비하게 안다.” 그랬습니다.

손해 보는지 이익 보는지 계산해서 금방 알아내는 그야말로 神解하는 한 물건이 있습니다.]

隨其所應化(수기소응화)하야, 그 교화에 응하는 바에 따라, 응당히 교화할 바를 따라서,

普現妙色身(보현묘색신)이로다. 널리 오묘한 색신을 나타내시네.

[형상으로 나타내게 되면 또 허망한 형상으로도 나타냅니다] 

 

如來不念言(여래불념언) 我作如是身(아작여시신)이라하고,여래는 '내가 이러한 몸을 짓노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念言=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自然而示現(자연이시현)하사자연히 나타내 보이시어, 저절로 나타내 보이사,

未嘗起分別(미상기분별)이로다. 분별을 일으키신 적 없네.

[“나는 이러한 몸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나타내 보이지만 분별을 짓지 않는다.]

 

法界는 無差別(법계무차별)이며, 법계에 차별함도 없고 [진리의 세계, 법의 세계는 차별이 없으며]

亦無所依止(역무소의지)로대또 의지하는 일도 없이 [法界= 법성= 진여= 참나]

而於世間中(이어세간중)세간 가운데서 

示現無量身(시현무량신)이로다.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시는 도다. 

 

佛身非變化(불신비변화)부처님 몸은 변화한 것이 아니고 

亦復非非化(역부비비화), 또 변화가 아닌 것도 아니로되   

於無化法中(어무화법중)변함없는 법에서 

示有變化形(시유변화형)이로다. 어떤 변화한 모습을 보이시네. 

 [변화가 없는 법 가운데서 변화하는 형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천 100억 화신, 천변만화, 千變萬化性입니다. 우리들 본성은, 진여자성은 하나인 것 같지만, 그 하나는 천변만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가운데 우리가 표현하는 삶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바뀌고 또 여러 가지로 바뀌어야 마땅합니다. 그야말로 굳어있으면, 변화가 없으면, 작용이 없으면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어떤 상황에 맞춰서 제대로 정확하게 변화해야합니다. 그래서

   佛身은 변화가 아니고, 변화 아닌 것도 아니나, 변화 없는 법 가운데 천변만화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의 실체, 참마음의 실체를 잘 표현했지 않습니까?] 

 

(3) 敎化(교화)의作用(작용)이深廣(심광)함 교화의 작용이 깊고 넓다.

正覺不可量이라 法界虛空等하야 深廣無涯底하니 言語道悉絶이로다

如來善通達하사 一切處行道하시니 法界衆國土에 所往皆無碍으로다

 

正覺不可量(정각불가량)이라. 바른 깨달음은 헤아릴 수 없고   

[正覺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우리 중생들이 조금 아는 것도 그 앎의 양을 헤아릴 수 없는 하물며 큰 깨달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헤아릴 수가 없지요.]

法界虛空等(법계허공등)하야, 법계의 허공과 같아서

[법계와 허공과 혼연일체가 되니까 그 양이 법계와 같고, 허공과 같지요.]

深廣無涯底(심광무애저)하니, 깊고 넓고 끝이 없으니 [涯底= 변두리가 없다. 밑이 없다.] 

言語道悉絶(언어도실절)이로다. 언어의 길이 다 끊어졌네. 

[우리가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언어도단심행처멸)이라는 말을 곧잘 쓰잖아요. 불법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제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言語道가 다 끊어졌다. 말로 표현이 안 되지만 音聲敎體(음성교체)라, 어떤 이치를 표현하는데는 언어가 제일입니다.

언어가 교화의 체입니다. 그것이 불합리하지만 그래도 제일 가까운 것이 언어입니다.

꽃 한 송이 들고ㆍ손가락 한 번 세우는 것도 좋은 표현이긴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적 없습니다.

拈華示衆(염화시중)도 선불교에서 만든 이야기지요.]

 

如來善通達(여래선통달)하사여래는 모든 곳의 

一切處에 行道(일체처행도)하시니, 다니는 길에 통달하시어, 일체 처에서 도를 행하시니

法界衆國土(법계중국토)법계의 모든 국토에 

所往皆無碍(소왕개무애)으로다. 나아가시기에 걸림이 없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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