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1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다섯째, ‘능가경(楞伽經)'은 5법(五法)과 3자성(三自性)과 8식(八識)과 2무아(二無我)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이 능가경은 남해(南海)의 능가산(楞伽山)에서 설한 것으로, 여래께서 이 산 아래를 지나실 때, 나바나(羅婆那)라는 야차(夜叉)의
왕과 마제(摩諦)보살이 신통조화로 만든 궁전을 타고 와서 부처님께 청한 인연으로 여래께서 이 능가산의 위에서 법을 설하셨다.
이 능가산은 높고 험한 산이었는데, 아래로는 큰 바다가 보이고 옆으로는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어서 신통을 얻은 자라야 올라갈 수가 있었으니, 즉 심지(心地)의 법문이 닦을 것도 없고 증명할 것도 없다는 것을 밝힌 자라야 비로소 오를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아래로 큰 바다가 보인다고 한 뜻은, 마음의 바다인 심해(心海)는 본질적으로 자체가 청정한 것이지만, 경계의 바람(외부 환경 대상)으로 인하여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 경계가 스스로 공(空)하다는 것을 요달한다면, 마음 바다인 심해(心海)는 저절로 고요하여지며, 마음(心)과 경계(境, 환경, 대상)가 모두 고요하여지면 비추지 못할 것이 없으니, 마치 바다에 바람이 그치면 해와 달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확연히 반영되는 것과 같이, 아래로 큰 바다가 보인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뜻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 '능가경'의 뜻은 근기가 성숙한 보살을 위하여 곧바로 진여(眞如)의 일심이 무명(無明)에 의해 처음 가동하게 되는 종자의 업식(業識)이 여래장이 된다는 것을 설한 것으로, 이는 식(識)을 소멸시켜 공적(空寂)으로 나가는 2승(乘)과도 다른 것이며, 공(空)을 닦아 확장시켜 나가는 반야의 가르침과도 다른 것이다.
곧바로 식체(識體)의 본성이 완전히 참된 전진(全眞)이라는 것을 밝혀서 식체(識體)가 곧 지혜(智)의 작용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바다에 풍랑이 잦아들어 잠잠하게 되는 그 즉시 경계의 상(像)이 다시 비추어지는 것과 같이, 마음 바다인 심해(心海)의 법문도 마찬가지이니, 참(眞)을 요달하면 식(識) 그대로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이 '능가경'은 초보자를 위해 따로 9식을 세워서 미혹을 완전히 소진시키지 않고, 그 미혹에 머무르면서 점차적으로 교화하여 대보리를 함양하게 하는 '해심밀경'의 뜻과도 다른 것이니,
즉 마음으로 하여금 공(空)에 종자를 심게 하지도 않아서, 공(空)을 닦는 보살이 유별나게 공을 즐기는 것과는 다르며,
마음으로 하여금 종자를 없애게 하지도 않아서, 식(識)을 소멸시켜 공적으로 나가는 2승과는 다른 것이나,
해심밀경은 바로 미혹(迷惑)에 드는 첫 문이요,
ㅡ8식의 미망(迷妄)이 순정식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조해서 도를 닦기 때문에 미혹에 드는 문이라 한 것이다.
'능가경'과 '유마경'은 곧바로 미혹의 본질적 진실을 제시한 것이다.
ㅡ8식이 바로 여래장이니, 미혹 외에 따로 보리를 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미혹의 본질적 진실을 보였다고 한 것이다.
'능가경'은 8식이 여래장이 된다는 것을 밝혔고,
'유마경'은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은 부처를 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여서, '능가경'과 '유마경'은 같다고 하겠으나,
'해심밀경'의 글은 이 두 경전과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화엄경'은 불신(佛身)과 경계(境界)와 법문(法門)이 이루어진 모습이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능가경'의 설법은 화신(化身)이 설법한 것이고, 경계도 예토(穢土)의 산 봉우리에서 거처했으며, 법문도 식(識)의 경계가 참이라는 것을 설했고, 문답도 대혜(大慧, 마제보살)보살로 수장(首長)을 삼았으니,
화신(化身)으로 가르침을 밝힌 것은 바로 방편이고,
'화엄경'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도리는 묘용이 자재롭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취사선택이 없으나, 능가경의 대혜보살 역시 간택(簡擇, 선택)을 논하였다.
'화엄경'의 가르침은 불신(佛身)이 곧 본원의 진실인 법신(法身)과 보신(報身)이고,
경계도 화장(華藏)세계를 거처로 삼고 있으며,
법문도 불과(佛果)의 법계(法界)로 그 문(門)을 삼고 있다.
또 문답(問荅)도 문수와 보현의 이(理)와 사(事)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오묘한 작용이라서 5위(五位)의 행상(行相)은 인과가 서로 융화하며 10찰(十刹)과 10신(十身)은 체(體)가 서로 사무쳐 들어가는 상입(相入)하는 것이다.
만약 '능가경'과 '화엄경'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논한다면, 이러한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앞으로 지위(位)에 의거해서 자세히 살피겠다.
여섯째, '유마경'은 부사의(不思議)한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는 것은, '유마경'과 '화엄경'은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과 한 가지 같은 점의 일종동(一種同)이 있으니,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이란,
첫째, 정토(淨土)의 장엄이 다르며,
둘째, 불신(佛身)의 여러 모습에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차이가 있으며,
셋째,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의 신통이 다르며,
넷째, 근기에 따른 법문의 설함이 다르며,
다섯째, 법을 듣는 대중들이 다르며,
여섯째, 가르침을 설해서 법문을 세운 것이 다르며,
일곱째, 유마힐보살이 건립한 행(行)이 다르며,
여덟째, 법문을 설한 처소가 다르며,
아홉째, 부처님을 따르는 대중들이 다르며,
열째, 부촉한 법장(法藏)의 유통이 다른 것이다.
한 가지 같은 점은 점의 일종동(一種同)이란, 도(道)에 들어가는 방편이 같은 것이다.
열 가지 다른 점의 십종별(十種別)에서
첫째, 정토의 장엄이 다르다는 것은, '유마경'에서 설법한 정토는 여래가 발가락으로 대지를 누르자, 즉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백천(百千) 가지 진귀한 보배로 장식된 정토로서, 비유하자면 보장엄불(寶莊嚴佛)이 무량한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정토의 무량공덕보장엄토(無量功德寶莊嚴士)와 같은 것이니, 모든 대중들은 이 정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하면서 자신들이 보련화(寶蓮花)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다함 없는 불국토의 불찰(佛刹)을 장엄하는 등등의 일이 하나의 털끝에서나 미진(微塵, 티끌) 속에 있다는 것은 설하지 못했다.
'화엄경'에서는 십불비로자나(十佛毘盧遮那) 경계와 십화장세계해(十華藏世界海), 즉 화장세계는 비로자나불의 정토라는 것을 모두 설하고 있다. 즉 하나하나의 세계해에 다함이 없는 세계해가 겹겹이 겹치면서 서로 상입(相入)하고 있으며,
한 미진(微塵, 티끌) 속에 다함이 없는 세계해가 있어서 시방에 원만한 부처 경계와 중생 경계가 서로 섭입(涉入)하면서도 장애를 일으키지 않으며, 오갖 보배로 마치 빛과 같은 여광(如光), 그림자와 같은 여영(如影)으로 장엄하고 있다.
ㅡ다함이 없는 세계해가……한 티끌 속에 있다’는 이 부분은 고려대장경본에는 없는 내용이나 탄허 스님의 현토본에는 있는 부분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첨가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삼천대천세계의 장엄 청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불신(佛身)의 여러 모습에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유마경'은 서른두 가지 대인(大人)의 상(相)의 32상호(相好)을 갖춘 화신불이 설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은 97 가지의 대인상(大人相)과 십화장세계해의 미진수(微塵數)와 같이 많은 대인의 상(相)을 갖춘 실보여래(實報如來, 비로자나불)가 설한 것이다.
셋째,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의 신통이 다르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유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살의 신통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즉 광대하고 드높은 수미산(須彌山)을 겨자씨 안에 넣으며 사대해(四大海)의 물을 하나의 모공(毛孔)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것과 또한 작은 방 안에 각가의 높이가 8만 4천 유순(由旬)이 되는 3만 2천 개의 사자좌(師子座)와 8천 명의 보살과 5백 명의 성문, 그리고 백천(百千) 명의 천인(天人)을 들여놓을 수 있는데, 유마힐이 이 방을 오른 손바닥 위에 올려서, 대중들을 이끌고 암라수원(菴羅樹園)에 왕림한 것과 또한 동방에 있는 묘희(妙喜)부처님의 나라를 손으로 잘라서 이 땅으로 데려와 대중들에게 보인 뒤에,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 것 등이다.
ㅡ사대해(四大海); 수미산 주위의 4개의 거대한 대륙인 사대주(四大洲)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말하면,
사대주는 남섬부주(南贍部洲)ㆍ동승신주(東勝身洲)ㆍ서우화주(西牛貨洲)ㆍ북구로주(北俱盧洲)이다.
*유순(由旬); 인도에서 쓰는 거리의 단위. 대유순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이다.
*천인(天人); 천상세계의 유정 중생들을 가리키며, 항상 즐거운 경계에서 노니나 그 복이 다하면 5쇠(衰)에 든다고 한다.
*암라수원(菴羅樹園);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장소로 기생 암라팔리가 기증한 곳이다.
이와 같은 신통변화는 권학삼승(權學三乘, 방편의 가르침을 배우는 3승)의 성문과 보살들을 위해 나타낸 것이니, 왜냐 하면 권교(權敎)의 성문과 보살들은 도(道)를 보는 것이 아직 실답지 않으며, 자(自)와 타(他)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타낸 신통변화도 각각의 근기에 따라 보는 것이라서, 모두 왕래(往來)와 분제(分齊)와 한량이 있으며, 또 성스러운 뜻이 한 순간의 신통변화를 통해서 작은 근기들을 고무하여 점차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법 그대로의 법이(法爾)의 힘은 아닌 것이니,
가령 '화엄경'에서는 법 그대로의 법여시(法如是)가 근본 법력(法力)이기 때문에 하나의 미진(微塵, 티끌) 속에 시방의 일체 불국토와 중생의 국토를 다 내포할 수 있으나, 일체의 세계가 모두 티끌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 세계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며 티끌이 커지는 것도 아니니, 시방세계에 있는 티끌이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에서 모두 이와 같다.
경전에서도 “보살은 하나의 작은 중생신(衆生身) 속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지만, 그 작은 중생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알라. 부처님께서 권교(權敎, 방편)을 통해서 작은 근기들을 이끌기 때문에 대중들은 신통력을 나타내면서 오고 가는 부처님을 몸 밖에서 볼 수 있이지만,
실교(實敎)에서는 스스로의 본각(本覺)으로 본심(本心)을 자각하고, 몸과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안과 밖의 내외(內外)라거나, 가고 오는 왕래(往來)라는 등의 여러가지 의견의 제견(諸見)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은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고서도 시방의 일체 도량에 앉아 계시는 것이며,
시방에서 온 대중들도 본래의 처소를 옮기지 않고 화(化, 변화)를 따라가면서도, 가고 옴이 전혀 없으니, 이는 신통력의 신력(神力)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서 경전에서도 “법 그대로이기 때문이라는 법여시고(法如是故)”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신통력인 불신력(佛神力)’과 ‘법 그대로이기 때문이라는 법여시고(法如是故)’라는 말을 자주 하고 있는 이유는, 불신력(佛神力)은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부처님을 추앙해서 으뜸의 존(尊)으로 삼기 때문이며,
법여시고(法如是故)는 분질적인 덕(德)에는 전혀 변화가 없어서 하나하나의 불국토와 몸과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 근본을 의지하고 허망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경계들이 모두 빛과 같은 여광(如光)이라거나, 그림자와 같은 여영(如影)인 듯 서로 비추고 반영하면서 시방에 두루하나, 전혀 왕래도 없고 분제(分齊, 제한)도 없는 것을 추앙한 것이다.
즉 하나하나의 중생의 몸에 있는 모공(毛孔, 털구멍) 속에 시방이 두루하고 있는데, 이를 신통력으로 나누고 잘라내고, 오고 가며, 데리고 왔다가 보내는 것으로, 말하자면 허망한 견해를 이룰 뿐, 본래의 법신(法身)에는 어긋나서 참된 보리의 본각성지(本覺性智)를 가로막는 권교(權敎, 방편)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유마힐 보살은 이러한 신통변화를 나타내고 나서 곧 실교(實敎, 실다운 가르침)를 베푼 것이다.
'유마경'에서 “자신의 실상을 관하는 것은 부처를 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여래를 관(觀)하여 보니, 전제(前際, 과거)가 오는 것도 아니며, 후제(後際, 미래)가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 현재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아촉불품(阿閦佛品)'에서 밝히고 있다.
이처럼 방편의 근기나 짧은 견해를 가진 자는 희귀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보살이 근기에 맞추어 대충 인도를 한 것이니, 이는 먼저 배우려는 마음을 내게 한 뒤에 실교(實敎)를 주기 위한 것이다.
방편으로 보인 신통변화를 참된 것으로 생각헤서 집착하여 지혜의 눈인 지안(智眼)을 잃어선 안 될 것이니, 방편임을 알아서 진실에 나아가 법계의 문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작위(作爲)가 있는 법은 성취하기가 어렵지만, 오직 연(緣)만 따르며서 작위가 없다면 이루기가 쉽다.
작위하는 작자(作者)는 수고롭기만 할 뿐 공(功)이 없고, 작위하지 않는 불작자(不作者)는 연에 따라 저절로 성취하게 된다.
공이 없는 공의 무공지공(無功之功)은 공(功, 노력)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지만,
공이 있는 공의 유공지공(有功之功)은 공(功, 노력)이 다 무상(無常)해서 여러 겁(오랜 세월) 동안 쌓는다 해도 결국은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는 일념(一念)의 연기(緣起)가 무생(無生)에서 저 3승 권학(權學)의 견해들을 초월하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넷째, 근기에 따른 법문의 시설이 다르다는 것이란,
이 '유마경'은 2승(乘)의 근기를 위한 것이니, 2승을 보살의 보리(菩提)로 회향시켜 대승에 들게 하기 때문이며,
대승의 근기 중에서는, 정토에 얽매여 보살의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지 못한 자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중향(衆香)세계에서 온 보살들이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서 부처인 세존께 조그만 법이라도 내려주길 청하자, 여래는 근기에 의거해 그 보살들이 정토에 얽매인 채 자비와 지혜의 마음이 낮은 것을 보시고는 이내 법을 설해서 유진(有盡, 유위법)과 무진(無盡, 무위법)의 해탈문(解脫門)을 배우게 한 것 등이다.
ㅡ유진(有盡)은 유위법이고 무진(無盡)은 무위법이다. 자비심이 낮기 때문에 유위법 속에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고, 지혜가 낮기 때문에 무위법 속에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다. 그래서 유진과 무진의 해탈 법문을 배우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 경문에서도 “크나큰 사랑의 대자(大慈)와 크나큰 버림의 대사(大捨)와 크나큰 연민의 대비(大悲)를 떠나지 말고,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길이 일으켜서 잠시라도 잊지 말 것이며,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도 끝까지 싫증내지 말아야 한다.
4섭법(四攝法)도 항상 조화로운 실천의 순행(順行)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온갖 선정(禪定)에 있는 것을 지옥에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며, 생사(生死) 속에 있더라도 원관(園觀)과 같이 생각하고, 찾아와서 도(道)를 구하는 자를 보면 훌륭한 스승으로 생각하라”고 했으니, 자세히는 '유마경'에 설해져 있다.
이 '유마경'은 2승, 그리고 3승 중에서도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지 못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자비와 지혜를 키워나가게 하는 경전이다.
그래서 단박에 직접 부처의 불문(佛門)을 보이지 못하고, 아직 10주(十住)에서의 초발심(初發心)이 문득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것을 설하지 못하며, 아직 '화엄경'과 같이 광대하고 묘한 묘사(妙事)를 보이지 못하나니, 모두가 그 분수에 따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ㅡ4섭법(四攝法); 보살이중생 구제를 위해 그들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는 네 가지 방법으로,
첫째는 보시섭(布施攝), 재물을 좋아하는 자에겐 재물을, 법을 좋아하는 자에겐 법을 보시하여 친애하는 마음을 내게 해서 도를 받들게 한다.
둘째는 애어섭(愛語攝), 중생의 근기에 따라 부드러고 착한 말로 친애의 마음을 내게 해서 도를 받들게 한다.
셋째는 이행섭(利行攝), 몸과 말과 말뜻으로 선행을 해 중생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친애하는 마음을 내게 해 도를 받들게 한다.
넷째는 동사섭(同事攝), 법안(法眼)으로 중생의 근기를 살피고, 그 근기에 맞춰 행동을 같이하면서 중생에게 이익을 주어 도를 받들게 한다.
ㅡ원관(園觀), 생사에 처한 것을 정원이나 누대(樓臺)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보살이 영겁토록 생사에 빠져 중생을 구제할지언정 소승의 해탈 선정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엄경(華嚴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화엄경(華嚴經) 제3권. 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 12 (0) | 2025.11.18 |
|---|---|
| 화엄경(華嚴經) 제3권. 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 11 (0) | 2025.11.18 |
| 화엄경(華嚴經) 제3권. 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 10 (0) | 2025.11.17 |
| 화엄경(華嚴經) 제3권. 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 9 (3) | 2025.11.16 |
| 화엄경(華嚴經) 제3권. 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 8 (2) | 2025.11.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