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第七 無着行 方便波羅密(무착행 방편바라밀).
無着行은 방편바라밀을 體로 삼고, 55행의 경문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불자야” 이하 “그러나 불법에 또한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까지는 보살이 불찰을 청정히 장엄하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도 마음이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分이다.
둘째 “이 보살” 이하 “능히 이처럼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까지는 보살이 부처님께 공양하는 데 물리는 일이 없어서 事法에 처해 늘 행하면서도 그 가운데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분이다.
셋째 “불법 속에서 마음에 장애가 없으니” 이하 “모든 선근으로 집착하는 바가 없다”까지는 중생의 고통을 관해서 대자비를 길이 양육함을 밝힌 분이다.
넷째 “보살이 이때” 이하 “왜냐 하면”까지는 보살이 생사에 상주하여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집착이 없음을 밝힌 분이다.
다섯째 “보살이 이런 생각을 지어서” 이하 ‘마음에 물림이 없다“까지는 중생을 교화하는 데 법이 꼭두각시[幻]와 같다고 관함을 밝힌 분이다.
여섯째 “물림이 없기 때문에” 이하 “집착이 없는 행”까지는 보살이 아직 조복되지 않은 중생을 보고 그곳에 가서 태어남을 밝힌 분이다.
(1) 世界에 對한 無執着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無着行고 佛子야 此菩薩이 以無着心으로
於念念中에 能入阿僧祗世界하야 嚴淨阿僧祗世界호대 於諸世界에 心無所着이니라
佛子야 불자여, 何等(하등)이 어떤 것이 爲菩薩摩訶薩(위보살마하살)의 보살마하살의 無着行(무착행)고? 무착행이겠는가
佛子야 불자여, 此菩薩(차보살)이 이 보살은 以無着心(이무착심)으로, 집착없는 마음으로
於念念中(어염념중)에, 순간순간마다 能入阿僧祗世界(능입아승지세계)하야, 능히 아승지 세계에 들어가
[우리가 살면서 하루 중에 만나는 상황ㆍ상황이 하나의 세계입니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화장실 가는 그 하나 하나가 상황입니다. 법당에서 예불하고, 신도님들 만나러 가고 오고하면서 우리가 만나는 상황 상황마다가 하나의 세계입니다. 아승지세계 그대로입니다. 무슨 지구같은 별이 아승지 숫자만큼가 있다고 떠올릴 필요없이, 우리 모두는 하루에도 무수한 세계를 접하면서 사는 것, 그것입니다.]
嚴淨阿僧祗世界(엄정아승지세계)호대, 아승지 세계를 엄정= 청정하게 장엄 하지만
於諸世界(어제세계)에 心無所着(심무소착)이니라. 그 모든 세계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습니다.
[동쪽나라 우리나라는 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듣고, 공자가 우리나라에 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이, 그 東夷” 그 사람들은 중국 중앙 이외에는 전부 오랑캐라고 해서 東夷族(동이족)인데요.
“그 오랑캐 사는 곳인데, 그 곳까지 가실 것 있습니까?” 제자들이 그러니까,
“아니다. 거기는 君子(군자)가 사는 곳이다. 何陋之有(하루지유)리요?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 군자가 살면 그 곳은 바로 장엄이 된 곳이다.” 군자로서 장엄 된 나라라는 말입니다. 금강경에도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가? 보살이 있음으로 해서 그 국토를 장엄한다. 그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의 격이 높아지는 그것이 장엄입니다.
여기도 아승지 세계를 장엄한다.
사실 제대로 된 수행자가 가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그대로 장엄입니다. 사실 신심 있는 신도님들은요?
여기 嚴淨阿僧祗世界라는 것이 그 많고 많은 세계 즉 우리가 하루 동안 접하는 모든 상황들에 수행자가 참여함으로 해서, 수행자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그대로 장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근사한 자리에 안 올 사람이 왔다면, 그 한사람으로 인해서 그 자리 버리는 수가 있고, 또 “그런 스님이 왔더라. 그런 사람이 왔더라.”해서 그 상황이 장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십시오.”라는 말이 다 그런데서 근거한 겁니다. 수행자가 가면 자리가 빛나게 되어있고, 자리가 장엄되게 되는 것이 嚴淨阿僧祗世界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서 그 곳을 내가장엄 했다.’는 상황에 대해서 마음에 집착이 없어야한다. 心無所着이니라.]
(2) 三寶供養에對한無執着 삼보에 공양함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
往詣阿僧祗諸如來所하야 恭敬禮拜하며 承事供養호대 以阿僧祗華와 阿僧祗香과 阿僧祗鬘과
阿僧祗塗香末香과 衣服珍寶와 幢幡妙蓋諸莊嚴具의 各阿僧祗로 以用供養하나니
如是供養은 爲究竟無作法故며 爲住不思議法故니라
於念念中에 見無數佛호대 於諸佛所에 心無所着하며 於諸佛刹에 亦無所着하며
於佛相好에 亦無所着하며 見佛光明하고 聽佛說法에 亦無所着하며 於十方世界와
及佛菩薩所有衆會에 亦無所着하며 聽佛法已하고 心生歡喜하야 志力廣大하야
能攝能行諸菩薩行호대 然於佛法에 亦無所着이니라
往詣阿僧祗諸如來所(왕예아승지제여래소)하야, 아승지의 모든 여래의 처소에 往詣= 나아가
恭敬禮拜(공경예배)하며, 공경 예배하고 承事供養(승사공양)호대, 받들어 섬겨 공양하되
以阿僧祗華와, 아승지의 꽃, 阿僧祗香과, 아승지의 향, 阿僧祗鬘(아승지만)과, 아승지의 화만= 꽃다발과
[화엄경에서는 보살행을 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華嚴= 꽃으로 장엄한다는 것이 보살행으로 세상을 빛나게 하는 것.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꽃으로 장엄하는 일입니다. 여기서는 그냥 식물의 꽃으로 봐도 좋습니다.]
阿僧祗塗香末香(아승지도향말향)과, 아승지의 塗香=바르는 향과 末香=가루향과
衣服珍寶(의복진보)와, 의복, 진귀한 보배와,
[경에 나오는 衣服은 천입니다. 누구 몸 체형에 딱 맞게 맞춘 옷이 아닌 그냥 천입니다. 인도는 지금도 “사리”라고 해서 몸에 감기만 하면 옷이 되고 누가 입어도 맞게 되어있습니다. 天衣無縫(천의무봉) 아무 손질도 하지 않은 천.]
幢幡妙蓋諸莊嚴具(당번묘개제장엄구)의, 깃발, 妙蓋= 아름다운 일산, 諸莊嚴具= 온갖 장엄구를
各阿僧祗로, 각각 아승지의 수량으로 以用供養하나니, 공양드리는데 如是供養은, 이러한 공양은
爲究竟無作法故(위구경무작법고)며, 無作法=지음 없는 법에 究竟=성취하고, 지음이 없는 법을 성취하기 위함이니라.
[불교의 궁극적 법은 無作法이고 無爲法입니다
조작이 있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 有爲法은 권장사항은 아닙니다. 본래 無作法이고 無爲法이지요.]
爲住不思議法故(위주부사의법고)니라. 불가사의한 법에 머물며, 불가사의한 법에 머물기 위한 까닭이니라.
於念念中(어념념중)에 매 순간마다 見無數佛(견무수불)호대, 무수한 부처님을 뵙지만
於諸佛所(어제불소)에 모든 부처님 처소에 대해 心無所着(심무소착)하며,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於諸佛刹(어제불찰)에, 모든 부처님 세계에도 亦無所着(역무소착)하며, 집착하지 않으며,
於佛相好(어불상호)에, 부처님 상호에도 亦無所着(역무소착)하며, 집착하지 않고
[아무리 32상 80종 호가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 것이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으로, 집착할 바 없습니다.]
見佛光明(견불광명)하고,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聽佛說法(청불설법)에, 부처님 설법을 들어도
亦無所着(역무소착)하며, 역시 집착하지 않으며,
於十方世界(어시방세계)와 시방세계와 及佛菩薩所有衆會(급불보살소유중회)에, 불보살의 대중법회에도
亦無所着(역무소착)하며, 집착하지 않고
聽佛法已(청불법이)하고, 부처님 법을 듣고서 心生歡喜(심생환희)하야,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志力廣大(지력광대)하야, 의지의 힘이 광대해져서
能攝能行諸菩薩行(능섭능행제보살행)호대, 모든 보살행을 능히 섭수하고 능히 행하지만
然於佛法(연어불법)에, 그러나 불법에도 亦無所着(역무소착)이니라. 역시 집착하지 않습니다.
[보살행을 열심히 하되,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되는데 이 중생은 뭐 좀 했다하면 그저 집착부터 하니까요]
(3) 長劫修行에對한無執着 장겁수행에 대한 무집착
此菩薩이 於不可說劫에 見不可說佛이 出興於世하고 一一佛所에 承事供養을 皆悉盡於不可說劫호대
心無厭足하야 見佛聞法과 及見菩薩衆會莊嚴에 皆無所着하며 見不淨世界호대 亦無憎惡하나니
何以故오 此菩薩이 如諸佛法而觀察故니 諸佛法中에 無垢無淨하며 無闇無明하며 無異無一하며
無實無妄하며 無安隱無險難하며 無正道無邪道니라
此菩薩이, 이 보살은 於不可說劫에, 불가설의 겁 동안 見不可說佛이, 불가설의 부처님이
出興於世(출흥어세)하고, 세상에 출흥하시는 것을 보고 一一佛所에, 낱낱 부처님 처소에서
承事供養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기를 皆悉盡於不可說劫호대, 불가설의 겁이 다 하도록
心無厭足(심무염족)하야, 마음에 厭=싫어함이나 足=만족함이 없이
見佛聞法과, 부처님 뵙고 법을 듣고 及見菩薩衆會莊嚴에, 보살의 대중모임의 장엄을 보는 것에
皆無所着하며, 모두 집착하지 않고
見不淨世界호대,부정한 세계를 보아도 [훌륭한 세계만 보고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亦無憎惡(역무증오)하나니, 또한 증오가 없어야 하나니
[좋은데도 집착하지 말아야 되고,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바람직한 마음자세인데, 우리 중생들은 본색이 탐ㆍ진ㆍ치 3독으로 무장 되어서, 걸핏하면 그 3독이 발동을 해서 싫은 것은 싫다하고, 좋은 것은 그저 집착하기 바쁩니다.]
何以故오 왜냐하면, 此菩薩이 이 보살이
如諸佛法而觀察故(여제불법이관찰고)니, 부처님 법 대로 관찰하기 때문이니
[모든 불법과 같이 관찰하는 연고니 → 불법의 이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실 집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싫어한다고 내 뜻대로 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래서 如諸佛法而觀察故니, 불법과 같이 관찰한다. 그 상황 그대로 관찰한다. 좋다. 나쁘다하는 것은 내 감정이지, 그 일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내가 괜히 감정으로써, 한 생각 일으켜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니까 좋으니 싫으니 하는 것입니다.]
諸佛法中에 無垢無淨(무구무정)하며, 불법 안에는 때 묻음도 깨끗함도 없고
[제불법= 모든 부처님의 법= 깨달음의 법속에= 꿈 깬 세계는 無垢無淨,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으며]
無闇無明(무암무명)하며, 어둠도 밝음도 없으며,
無異無一(무이무일)하며, 다를 것도 하나라 할 것도 없으며,
無實無妄(무실무망)하며, 진실함도 허망함도 없고
無安隱(穩)無險難(무안은(온)무험난)하며, 안은함도 험난함도 없으며,
無正道無邪道(무정도무사도)니라. 바른 길도 삿된 길도 없습니다.
[正道니 邪道니 편안하다느니 험난하다느니 진실하다느니 망령되다느니 하는 차별심은 순전히 3독심을 근거로 한 우리 중생의 마음 작용일 뿐이지, 실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꿈에서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을 만났더라도, 꿈 깨버리면 편안한 침대위에 누워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그 전에 봉암사에 살 때는 거기에 “어허 바위” 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요. 겨울이 지나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그 어허 바위 밑에 죽은 노루나 토끼 등을 주우러 갑니다. 크고 넓은 바위가 보기엔 경사가 별로 진 것 같지 않은데, 지나가다가는 다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아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밤에 꿈을 꾸면 어허 바위 꿈을 꾸게 되는 겁니다. 그 바위를 지나가지 말라고 들었는데도 거기로 지나가다가 미끄러져서 나뭇가지를 딱 잡고는 안 떨어지려고ㆍ안 떨어지려고 애를 쓰다가, 애를 되게 쓰면 꿈 깨집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지요?
“애를 되게 쓰면 다 꿈 깬다.” 이것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精進 열심히 하면 깨닫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꿈도 그렇고 우리현실도 똑같이 애 많이 쓰면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꿈 깬 세계에서, 於諸佛法 가운데서는 無垢無淨하며 無闇無明하며 無異無一하며
無實無妄하며 無安隱(穩)無險難하며 無正道無邪道니라. 이런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4) 種種萬行에 對한 無執着
菩薩이 如是深入法界하야 敎化衆生호대 而於衆生에 不生執着하며 受持諸法호대
而於諸法에 不生執着하며 發菩提心하야 住於佛住호대 而於佛住에 不生執着하며 雖有言說이나
而於言說에 心無所着하며 入衆生趣호대 於衆生趣에 心無所着하며
了知三昧하야 能入能住호대 而於三昧에 心無所着하며 往詣無量諸佛國土하야 若入若見하고
若於中住호대 而於佛土에 心無所着하며 捨去之時에 亦無顧戀하나니라
菩薩이 如是深入法界(여시심입법계)하야, 보살이 이와 같이 법계=진리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敎化衆生(교화중생)호대, 중생을 교화하되 而於衆生(이어중생)에, 중생에게 不生執着(불생집착)하며, 집착하지 않고
受持諸法(수지제법)호대, 모든 법을 수지= 받아 갖되, 而於諸法(이어제법)에, 모든 법에
不生執着(불생집착)하며, 집착하지 않으며,
發菩提心(발보리심)하야, 보리심을 발하여 住於佛住(주어불주)호대, 부처님 머무시는 데에 머물되
[보리심을 발한다= 發菩提心= 發心이 곧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는데 사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발심만 제대로 하면 곧바로 그 순간 부처님이 사는 곳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發菩提心하야 住於佛住.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 제대로 발심만 하면 바로 부처님의 삶이구나! 이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而於佛住(이어불주)에, 부처님 머무시는 데에 不生執着(불생집착)하며, 집착함이 없고
雖有言說(수유언설)이나, 비록 언설이 있더라도
而於言說(이어언설)에 心無所着(심무소착)하며, 그 언설에 대해 마음에 집착이 없으며,
[言說에 엄청난 가르침이 있다하지만 그 言說에 집착이 없으며]
入衆生趣(입중생취)호대, 중생의 갈래에 들어가되 於衆生趣(어중생취)에 중생의 갈래에
心無所着(심무소착)하며,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了知三昧(요지삼매)하야, 삼매를 요지하여 能入能住(능입능주)호대, 능히 들고 능히 머물지만
而於三昧(이어삼매)에 삼매에 心無所着(심무소착)하며, 마음이 집착하지 아니하며,
[남해 보리암 어느 암자에 있는 우리 도반 스님이, 지금도 간혹 해제 때 되면 연락도 오고, 찾아오기고 하는데요.
모든 도반들이 그 스님보고, 2ㆍ30대에 해인사에서 볼 때의 그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겁니다. 사정없이 말을 해서 “여태 그 사고를 버리지 않느냐?”고 하면 그 스님 워낙 착한 스님이라 “야 나도 그것을 알고는 있는데 내 것이라서 아까워서 버리기가 싫다.” 이 겁니다. 내 깨달음이 사실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도 믿는데 그것을 버리기가 참~ 아깝다. 뭔가 조금 삿된 기가 있는 스님이라 그 삿된 소견 버리라고 하면, 그것 얻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것을 버리기가 아깝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합니다. 사실 자기의 어떤 안목이나 어떤 사상, 소견, 불교관이 성립이 되면, 쉽게 못 버립니다. 얼른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 발전도 빠른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心無所着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往詣無量諸佛國土(왕예무량제불국토)하야, 한량없는 불국토에 나아가
若入若見(약입약견)하고, 들어가거나 보거나 若於中住(약어중주)호대, 그 안에 머물기도 하지만
而於佛土(이어불토)에, 그 불국토에 心無所着(심무소착)하며,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捨去之時(사거지시)에, 버리고 떠날 때에도
亦無顧戀(역무고연)하나니라. 마음에 맺혀 잊지 못함이 없습니다.
[顧戀= 돌아본다. 그리워서, 아쉬워서 뒤 돌아보는 마음.]
[그전에 통도사 극락 암에 경봉스님 밑에서 살 때, 마당에서 쭉 내려가서 커브를 돌면 서로가 안 보이는 겁니다.
경봉스님은 그 커브에서는 누구 없이 뒤로 한번 돌아보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볼 때, 경봉스님은 뒤에서 손을 척~~ 흔들어 줍니다. 그것이 참~ 매력 있습니다. 그 커브 딱 돌때 누구든지 돌아보는 그것이 顧戀입니다. 미련이 있어서 척~ 한번 돌아보는 겁니다. 스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 아무 상관없이 돌아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큰스님이 미소 지으면서 손 한번 흔들어주는 거기에 그만 또 안 오고 못 배기는 것이지요.
아~ 그런 참, 경봉스님한테 그런 매력이 있었습니다. 亦無顧戀하나니라.]
(5) 無執着의 自利
菩薩摩訶薩이 以能如是無所着故로 於佛法中에 心無障碍하야 了佛菩提하며
證法毘尼하며 住佛正敎하며 修菩薩行하며 住菩薩心하며 思惟菩薩解脫之法하며
於菩薩住處에 心無所染하며 於菩薩所行에 亦無所着하며 淨菩薩道하며 受菩薩記하니라
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은 以能如是無所着故(이능여시무소착고)로, 이렇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於佛法中(어불법중)에, 불법 안에서 心無障碍(심무장애)하야, 마음에 아무런 장애 없이
[불법 가운데 마음에 장애가 없으려면 최소한도 돼야 됩니다.]
了佛菩提(요불보리)하며, 불보리에 요달하고
證法毘尼(증법비니)하며, 법의 근원을 증득하며, 부처님의 毘尼= 계율을 증득하며,
住佛正敎(주불정교)하며,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머물러
[화엄경 같은 이런 大經을 공부하는 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못하고 百千萬劫難遭隅라는 불법, 정말 正敎를 만나야 되고, 最上乘의 가르침을 만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적당히 조금 알고는 그만 주저앉아서 더 이상 불교를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제일 안타까운 것입니다. 불교와 인연 맺지 못한 사람들에게야 그런 마음도 안 나겠지만, 불교와 인연 맺어놓고 저 정도 상태에서 어떻게 저렇게 머물고 마는가?’ 그런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修菩薩行(수보살행)하며, 보살행을 수행하고 住菩薩心(주보살심)하며, 보살심에 머물러서
思惟菩薩解脫之法(사유보살해탈지법)하며, 보살의 해탈법을 사유하며,
於菩薩住處(어보살주처)에 보살의 머무는 데에서 心無所染(심무소염)하며, 마음이 물듦이 없고
於菩薩所行(어보살소행)에 보살이 행하는 바에도 亦無所着(역무소착)하며, 집착하지 않으며
淨菩薩道(정보살도)하며, 보살도를 청정히 하여 受菩薩記(수보살기)하니라. 보살의 수기를 받습니다.
(6) 無執着의 利他
得受記已에 作如是念호대 凡夫愚癡하야 無知無見하며 無信無解하며 無聰敏行일새
頑嚚貪着하야 流轉生死하야 不求見佛하며 不隨明導하며 不信調御하고 迷誤失錯하야 入於險道하며
不敬十力王하고 不知菩薩恩하야 戀着住處하며 聞諸法空하고 心大驚怖하며 遠離正法하고 住於邪法하며
捨夷坦道하고 入險難道하며 棄背佛意하고 隨逐魔意하야 於諸有中에 堅執不捨로다하야
菩薩이 如是觀諸衆生하고 增長大悲하야 生諸善根호대 而無所着이니라
得受記已(득수기이)에, 수기를 받고서 作如是念(작여시념)호대, 생각하기를,
凡夫愚癡(범부우치)하야, 범부는 어리석어서 無知無見(무지무견)하며, 지식도 견해도 없고
無信無解(무신무해)하며, 믿음도 이해도 없으며, 無聰敏行(무총민행)일새, 총명함과 민첩한 행도 없어서
頑嚚貪着(완은탐착)하야,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탐욕에 집착하여
[頑 완구할 완. 嚚 어리석을 은. 너무너무 어리석어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정신 상태]
流轉生死(유전생사)하야 생사를 흘러 돌면서
不求見佛(불구견불)하며, 부처님 보기를 원하지 않고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을 보려고 않는다.]
不隨明導(불수명도)하며, 밝은 인도를 따르지도 않으며, [화엄경 등이 아주 밝은 明導.]
不信調御(불신조어)하고, 부처님[調御]을 불신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도 아니하고,
迷誤失錯(미오실착)하야, 미혹하여 잘못 빠져 [失錯= 잃어버리고 그르쳐서, 錯 = 그르칠 착.]
入於險道(입어험도)하며, 험난한 길에 들어가며,
[성인의 가르침을 잘 대입시켜서 평탄한 인생을 살도록 해야 되는데, 험한 길을 가려고한다]
不敬十力王(불경십력왕)하고, 부처님[十力王]을 공경하지 않고
不知菩薩恩(불지보살은)하야, 보살의 은혜를 알지 못하여 戀着住處(연착주처)하며, 사는 데에만 연연하고 집착하며,
聞諸法空(무제법공)하고, 모든 법= 諸法이 공하다 들으면 心大驚怖(심대경포)하며, 마음에 큰 공포를 느끼고
遠離正法(원리정법)하고, 바른 법을 멀리하고 住於邪法(주어사법)하며, 삿된 법에 머물러
捨夷坦道(사이탄도)하고, 평탄한 길을 버리고 入險難道(입험난도)하며, 험난한 길에 들어서며,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면, 아주 쉽게, 홀가분하게 사는 길이 있는데, 아주 험한 길을 스스로 찾아들어가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있는 탐 진 치 다 부려가면서 그냥 탐 진 치 싸움하면서 험한 길로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것이= 入險難道.]
棄背佛意(기배불의)하고, 부처님 뜻을 포기해 등지고 隨逐魔意(수축마의)하야, 마구니의 뜻을 뒤쫓아
於諸有中(어제유중)에, 있는 모든 것들에 堅執不捨(견집불사)로다하야, 굳게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는구나.' 하나니
[모든 있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있다.’ 그 다음에 ‘좋다.’ 좋다고 생각하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내 것으로 쉽게 안 만들어 지면 화낸다. 뜻대로 안되면 치심이 발동해서 화를 내는 겁니다. 그리고는 무리하게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숫한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菩薩이 보살은 如是觀諸衆生(여시관제중생)하고, 이와 같이 중생을 관찰하고
增長大悲(증장대비)하야, 대 자비심을 증장= 더욱 키워 生諸善根(생제선근)호대, 모든 선근을 내지만
而無所着(이무소착)이니라. 집착하지 않습니다.
(7) 大悲心으로 衆生濟度
菩薩이 爾時에 復作是念호대 我當爲一衆生하야
於十方世界 一一國土에 經不可說不可說劫토록 敎化成熟하고
如爲一衆生하야 爲一切衆生도 皆亦如是호대 終不以此로 而生疲厭하야 捨而餘去라하며
又以毛端으로 遍量法界하야 於一毛端處에 盡不可說不可說劫토록 敎化調伏一切衆生하고
如一毛端處하야 一一毛端處에 皆亦如是하니라
菩薩이 爾時(이시)에 보살은 이 때 復作是念(부작시념)호대, 또 다시 이런 생각하되,
我當爲一衆生(아당위일중생)하야, 나는 마땅히 한 중생을 위해
於十方世界 一一國土에, 시방세계의 낱낱 국토에서
經不可說不可說劫(경불가설불가설겁)토록, 불가설 불가설의 겁이 지나도록
敎化成熟(교화성숙)하고, 교화 성숙할 것이며, 如爲一衆生(여위일중생)하야, 그 한 중생을 위하듯이
爲一切衆生(위일체중생)도, 일체중생을 위해서도 皆亦如是(개역여시)호대, 또한 이와 같이하되,
終不以此로, 그로써 결코 而生疲厭(이생피렴)하야, 피로나 싫증을 내
捨而餘去(사이여거)라하며,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지 不= 않을 것이요,
又以毛端(우이모단)으로, 또 한 털끝에서 遍量法界(변량법계)하야, 또 법계를 두루 두루 헤아려서
於一毛端處(어일모단처)에, 한 털끝에서 盡不可說不可說劫토록, 불가설 불가설 겁이 다하도록
敎化調伏一切衆生(교화조복일체중생)하고, 일체중생을 교화 조복하고
如一毛端處(여일모단처)하야, 그 한 털끝에서와 같이 一一毛端處(일일모단처)에, 낱낱의 털끝에서도
皆亦如是(개역여시)하니라. 모두 그와 같이 하니라.
[3독으로 그냥 찌들려 있어서 그렇지 우리는 본래 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의 법문도 “마음에 허물이 없는 것이 본래 戒다.” 우리 마음에는 본래 아무 허물이 없는 그것이 戒律입니다.
본래 허물이 없는, 우리 진여자성, 본심이 본래로 맑고 선량한 존재, 10선ㆍ6바라밀ㆍ4섭 법ㆍ4무량 심ㆍ인의예지를 본래 갖춘 존재라고 생각하면 보살행으로 무장되는 것도 그렇게 긴 세월이 안 걸린다는 내용입니다.]
(8) 種種에 不執着
乃至不於一彈指頃도 執着於我하야 起我我所想하며 於一一毛端處에 盡未來劫토록 修菩薩行호대 不着身하며
不着法하며 不着念하며 不着願하며 不着三昧하며 不着觀察하며 不着寂定하며 不着境界하며
不着敎化調伏衆生하며 亦復不着入於法界하나니라
乃至不於一彈指頃(내지불어일탄지경)도, 나아가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라도
執着於我(집착어아)하야, 나(我)라는 데 집착하여
起我我所想(기아아소상)하며,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不=않을 것이며,
於一一毛端處(어일일모단처)에서 낱낱의 털끝에서 盡未來劫(진미래겁)토록, 미래의 겁이 다하도록
修菩薩行(수보살행)호대, 보살행을 수행하되 不着身(불착신)하며, 몸에도 집착하지 않고
不着法(불착법)하며, 법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不着念(불착념)하며, 생각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不着願(불착원)하며, 소원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不着三昧(불착삼매)하며 삼매에도 집착하지 않고
不着觀察(불착관찰)하며 관찰에도 집착하지 않고 不着寂定(불착적정)하며 적정에도 집착하지 않고
不着境界(불착경계)하며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不着敎化調伏衆生(불착교화조복중생)하며, 중생의 교화와 조복에도 집착하지 않고
亦復不着入於法界(역불착입어법계)하나니라. 또 법계에 들어가는 데도 집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나니
(9) 無執着의 因由
何以故오 菩薩이 作是念호대 我應觀一切法界가 如幻하며 諸佛이 如影하며 菩薩行이 如夢하며
佛說法이 如響하며 一切世間이 如化하야 業報所持故며 差別身이 如幻하야 行力所起故며
一切衆生이 如心하야 種種雜染故며 一切法이 如實際하야 不可變異故라하나니라
[나의 탐 진 치 3독을 충족시켜주니까 너무 기분 좋은데도 왜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하는가? 그 이유입니다.]
何以故오? 어째서인가 하면 菩薩이 보살이 作是念호대, 생각하기를,
我應觀一切法界(아응관일체법계)가, 나는 마땅히 모든 법계가 如幻(여환)하며, 환상과 같고
諸佛이 如影(여영)하며, 모든 부처님은 그림자 같으며,
菩薩行이 如夢(여몽)하며, 보살행은 꿈과 같고,
佛說法이 如響(여향)하며, 부처님 설법은 메아리 같음을 보거니와
一切世間이 일체 세간이 如化(여화)하야, 요술같음은 [여화= 변화되는 것. 변했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
業報所持故(업보소지고)며, 지닌 업보 때문이요
[업으로 인해서 어떤 동물은 바람이 눈에 보인대요. 바람이 안 불 때는 텅 비었는데, 바람이 불 때는 꽉 차게 보이는 것이, 전부 자기 업으로 유지하는 바입니다. 이 세계를 내가 보는 것과 똑 같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 사고는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差別身(차별신)이 서로 다른 몸이 如幻(여환)하야, 환상과 같음은
行力所起故(행력소기고)며, 일으킨 행의 힘 때문이며, [行力= 행하는 바 힘으로서 일어나는 바이며,]
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如心하야, 마음과 같음은
種種雜染故(종종잡염고)며, 갖가지로 물들기 때문이며, [마음처럼 물잘 드는 것이 없습니다.]
一切法이 일체법이 如實際(여실제)하야, 실제와 같음은 [空性이므로, 공성과 같아서]
不可變異故(불가변이고)라하나니라. 변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我= 보살 應觀= 관찰합니다.
[無執着의 이유는 一切法界가 부처님까지도 그림자이고, 보살행은 꿈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은 메아리와 같은데, 그 나머지 속된 일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지요.]
(10) 無執着行의 廣大함
又作是念호대 我當盡虛空遍法界하야 於十方國土中에 行菩薩行호대
念念明達一切佛法하야 正念現前하야 無所取着이라하나니라
又作是念(우작시념)호대, 또 생각하기를,
我當盡虛空遍法界(아당진허공변법계)하야 나는 마땅히 온 허공과 법계에 두루하여
於十方國土中(어시방국토중)에, 시방의 국토 안에서 行菩薩行호대, 보살행을 행하면서
念念明達一切佛法(염념명달일체불법)하야, 매 순간마다 일체의 불법에 명달= 발게 통달해서
正念이 現前(정념현전)하야, 바른 생각이 나타나서
[바른 생각으로 바로 보는 것= 正念= 사띠, 실상을 예의 관찰하는 것입니다. 허망하게 포장되어 있는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 물, 실상을 예의주시하는 것이 正念입니다.]
無所取着(무소취착)이라하나니라. 취하고 집착하지 않으리라.' 합니다.
[取. 집착하면 취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자기 것으로 못 만들면 그 때부터 화가 나서 그 화를 성취시키려고 별별 궁리ㆍ별별 수작을 다 부리는 것이지요.]
11) 無執着行의 滿足
菩薩이 如是觀身無我하며 見佛無碍하고 爲化衆生하야
演說諸法하야 令於佛法에 發生無量歡喜淨信하야 救護一切호대 心無疲厭이니라
無疲厭故로 於一切世界에 若有衆生이 未成就未調伏處어든 悉詣於彼하야 方便化度호대
其中衆生의 種種音聲과 種種諸業과 種種取着과 種種施設과 種種和合과 種種流轉과
種種所作과 種種境界와 種種生과 種種歿에 以大誓願으로 安住其中하야 而敎化之하고
不令其心으로 有動有退하며 亦不一念도 生染着想하나니
何以故오 得無所着無所依故로 自利利他가 淸淨滿足이니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七無着行이니라
菩薩이 보살이 이처럼 如是觀身無我(여시관신무아)하며, 몸이 '나'랄 것 없음을 보고
[四念處. 근본불교에서 수행의 요체; 身,受,心,法으로 1. 身念處 ; 觀身無常. 無常= 無我, 觀法無我 나의 몸은 더러운 것으로서 執着할 것이 못된다고 보는 것이다. 2. 受念處 ; 어떠한 느낌을 받아도 그것을 모든 괴로움의 근원으로 본다. 3. 心念處 ; 나의 마음은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4. 法念處 ; 觀法無我.모든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하나로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
見佛無碍(견불무애)하고, 부처님의 걸림 없음을 보고서 爲化衆生(위화중생)하야, 중생 교화를 위해
演說諸法(연설제법)하야 법을 연설하여 令於佛法(어제불법)에, 불법에서
發生無量歡喜淨信(발생무량환희정신)하야, 한량없는 기쁨과 청정한 믿음을 내게하여
救護一切(구호일체)호대, 모든 이를 구호하기를 心無疲厭(심무피렴)이니라. 마음에 피로나 싫증이 없이 하니
無疲厭故(무피렴고)로, 피로나 싫증이 없는 까닭에 於一切世界(어일체세계)에 일체 세계에서
若有衆生(약유중생)이, 만약 어떤 중생이 未成就未調伏處(미성취미조복처)어든, 성취하지도 조복하지도 못하였다면
悉詣於彼(실예어피)하야, 다 그곳에 나아가서 方便化度(방편화도)호대, 방편으로 교화하여 제도하되
其中衆生(기중중생)의 그 중생의 種種音聲(종종음성)과 갖가지 음성, 種種諸業(종종제업)과, 갖가지 업,
種種取着(종종취착)과, 갖가지 집착, 種種施設(종종시설)과, 갖가지 시설, 種種和合(종종화합)과, 갖가지 화합,
種種流轉(종종유전)과, 갖가지 유전, 種種所作과, 갖가지 작업, 짓는 바와
種種境界(종종경계)와, 갖가지 경계, 種種生과, 갖가지 태어남, 種種歿(종종몰)에, 갖가지 죽음에
以大誓願(이대서원)으로, 큰 서원으로 安住其中(안주기중)하야, 그 안에 안주하여
而敎化之(이교화지)하고, 교화하고 不令其心(불령기심)으로, 그 마음이
有動有退(유동유퇴)하며, 변하거나 물러나지 않게 하며, 亦不一念(역불일념)도, 또 한 순간도
生染着想(생염착상)하나니,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는데, 何以故오? 왜 그러냐?
得無所着無所依故(득무소착무소의고)로, 그것은 집착함도 의지함도 없어서
自利利他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함에, 자리이타의 행이 淸淨滿足(청정만족)이니 청정하고 만족하기 때문이니
是名, 이것의 이름을 菩薩摩訶薩의 第七 無着行이니라. 보살마하살의 제 7 무착행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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