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9

 

然心爲因令識所變手等色相,生滅相續,轉趣餘方,似有動作,表示心故假名身表。語表亦非實有聲性,一剎那聲無詮表故,多念相續便非實故,外有對色前已破故。

▷정의한다; 마음을 원인으로 해서 식(識)이 전변하여서 손(手) 등의 색법의 상(相)이 생멸하고 상속하면서 다른 장소에 이동하여서 동작으로 마음을 비슷하게 표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신체의 신표(身表)라 이름하며,

언어의 표색도 역시 실유로서의 소리의 자성인 성성(聲性)이 없으니, 일찰나의 소리는 표현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많은 생각의 다념상속(多念相續)은 곧 실재가 아니니, 외부의 유대색(有對色)은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언어의 표색을 논파함.

 

然因心故識變似聲,生滅相續,似有表示,假名語表,於理無違。表旣實無,無表寧實?然依思願善惡分限,假立無表,理亦無違。

그런데 마음에서 비롯됨으로써 식(識)이 전변하여서 소리로 현현하면서 생멸하고 상속하여 비슷하게 표시함이 있는 것을 가정적으로 언어의 표색인 어표(語表)라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으나,

표색이 지금 참으로 존재하지 않거늘, 무표색이 어떻게 실재일 수 있겠는가?

사(思, cetanā)심소와 원(願)을 일으켜서 선과 악을 짓는 시절의 분한(分限)에 의해서 무표업을 가립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무표색(無表色)의 실유성을 논파하는 것이며, 무표색은 선악상속(善惡相續)의 근본으로서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謂此或依發勝身語,善惡思種增長位立,

이 무표색에 대해서 혹은 뛰어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일으키는 선ㆍ악의 의지의 종자가 증장함에 의해서 건립되며,

사심소사(思, cetanā)심소에 상ㆍ중ㆍ하의 3품(品)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하ㆍ중의 사심소는 무표업을 일으키지 않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或依定中,止身語惡,現行思立,故是假有。

혹은 선정 중에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의 악업을 그치게 하는 현행의 사(思)심소에 의해서 건립되는 것이니,

따라서 이것은 임시적인 존재인 가유(假有)인 것이다.

정공(定共)과 도공(道共)의 무표업을 서술한 것이다.

 

무표업(無表業)에 세 종류가 있으며, 첫째 율의무표업(律儀無表業)은 선(善)이고, 둘째 불율의무표업(不律儀無表業)은 악(惡)이며, 셋째 비율의비불율의무표업(非律儀非不律儀無表業)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 가운데에서 율의무표업에 다시 세 종류가 있어서, 별해탈(別解脫)의 무표업, 정려(靜慮:定)의 무표업, 무루(無漏)의 무표업이며, 첫 번째는 산(散), 두 번째는 정(定, 定共戒라고도 함), 세 번째는 무루(道共戒 도공계)이다.

 

世尊經中說有三業,撥身、語、業豈不違經?

不撥爲無,但言非色。能動身思說名身業,能發語思說名語業,審決二思意相應故,作動意故,說名意業。

▷묻습니다; 세존께서 경전에서 세 가지의 삼업(三業)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와 언어의 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어째서 경전에 위배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색법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능히 신체를 움직이는 사(思)심소를 신업(身業)이라 이름하며, 능히 언어를 일으키는 사(思)심소를 어업(語業)이라 이름하며,

살펴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두 가지 사(思)심소인 심려사(審慮思)와 결정사(決定思)가 의식과 상응하고 의식을 작용하게 하기 때문에 의업(意業)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신업(身業)ㆍ어업(語業)ㆍ의업(意業)의 체(體)를 밝힌 것이다.

 

신구의 3업은 모두 제6식에 상응하는 사심소를 자체로 하며, 그 사심소에 심려ㆍ결정ㆍ동발승(動發勝)의 세 가지가 있어서, 심려사(審慮思)는 제6식에 상응하는 사(思)가 선 또는 악을 짓고자 살피고 사려하는 것이며,

결정사(決定思)는 나아가 선 또는 악을 반드시 이와 같이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며,

여기서 더 나아가 바로 선과 악의 업을 조작하는 것이 동발승사(動發勝思)의 심소이다.

따라서 심려사와 결정사는 의업에, 동발승사는 신업과 어업에 통하며,

세 가지의 사(思)심소 중에서 제3의 동발승사가 바로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신업ㆍ어업의 자체이며, 또한 심려사ㆍ결정사가 의업의 자체가 된다.

 

起身語思,有所造作,說名爲業。是審、決思所遊履故,通生苦樂異熟果故,亦名爲道,故前七業道亦思爲自性。或身語表由思發故,假說爲業,思所履故說名業道。

몸의 행동과 언어를 일으키는 사(思)심소가 짓는 바가 있음을 업(業)이라고 이름하며,

이것은 살펴서 생각하는 심려사(審慮思)심소와 결정하는 결정사(決定思)심소가 경유한 것이기 때문이고,

공통적으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숙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역시 도(道)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따라서 앞부분의 일곱 가지 업도(業道)인 신삼업(身三業)과 어사업(語四業)도 역시 사(思)심소를 자성으로 하며,

혹은 신체와 언어의 표색인 신표(身表)와 어표(語表)는 사(思)심소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업(業)이라고 가설하며, 사(思)심소가 경유하는 것이므로 업도(業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로 지어지는 10선악에서 몸으로 짓는 살생ㆍ도둑질ㆍ사음의 세 가지는 신삼(身三)ㆍ입으로 짓는 거짓말ㆍ기어ㆍ양설ㆍ욕설의 세 가지는  어사(語四)ㆍ뜻으로 짓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세 가지는 의삼(意三)으로 나누며, 10선업은 10악업의 반대가 되는 것이다.

의업은 사업(思業), 신업ㆍ어업은 사이업(思已業)이라고도 하며, 사(思)라고 하면 오직 의업(意業)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일곱 가지 업도 역시 그 자체가 사(思)라는 것이다.

 

由此應知實無外色,唯有內識,變似色生。不相應行亦非實有,所以者何?得、非得等非如色、心及諸心所體相可得,非異色、心及諸心所作用可得,由此故知定非實有,但依色等分位假立。

▷정의한다;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외부의 색법은 실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만이 있어서 그것이 변하여 색법으로 현현하는 것이며,

불상응행법도 역시 실유(實有)가 아니니, 왜 그러한가?

득(得, prāpti)과 비득(非得, aprāpti) 등은 색법과 심왕법 및 모든 심소법과 같이 체상을 얻을 수 없으니, 색법과 심왕법 및 모든 심소법과 달리 작용이 있을 수 없으므로, 따라서 결정적인 실유가 아닌, 다만 색법 등의 분위(分位)에 의해서 가립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불상응행법에서, 먼저 득(得)ㆍ비득(非得)의 실유성을 주장하는 여러 부파를 논파한 것이다.

 

불상응행법의 정식 명칭은 비색비심불상응행법(非色非心不相應行法)이며, 색법도 심법도 아니고 또한 무위법도 아닌 것으로서, 행(行), 즉 변천(變遷)의 뜻으로서 무상(無常)을 나타 내는 것이다. 소승에서는 14가지를 건립하고 모두 실법(實法)이라고 주장하고, 대승은 24가지를 건립하고 모두 심법ㆍ심소법ㆍ색법의 분위(分位)에서 가립된 가법(假法)이라고 말한다.

 

소승에서는 득(得)과 비득(非得)을 실재라고 말하며, 

득(得, prāpti)은 사물을 나의 몸에 계속(繫屬)시키는 것을 말는 것으로, 예를 들면 성자가 성도(聖道)를 증득할 때, 곧 득이 실재이므로 그것이 성도를 그 사람에게 이끌어 붙여서 증득케 한다고 말하며,

비득(非得, aprāpti)은 득의 반대작용을 가진 실재물로써, 예를 들자면 성자가 번뇌를 단진(斷盡)할 때 곧 비득이 실재이므로 그것이 번뇌를 그의 몸으로부터 이끌어 떨어지게 함으로써 단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此定非異色、心、心所有實體用,如色、心等許薀攝故。或心、心所及色、無爲所不攝故,如畢竟無定非實有。或餘實法所不攝故,如餘假法非實有體。

이것은 반드시 색법ㆍ심왕법ㆍ심소법과 달리 실재의 본체와 작용이 없는 것으로, 색법ㆍ심왕법 등과 같이 온(蘊), 즉  행온(行蘊)에 포함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며, 

혹은 심왕법ㆍ심소법ㆍ색법ㆍ무위법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없는 필경무(畢竟無)와 같이 반드시 실유가 아니며,

혹은 나머지 실법(實法)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가법(假法)과 같이 실유의 본체인 실유체(實有體)가 없는 것이다.

 

且彼如何知得、非得異色、心等,有實體用?

契經說故,如說如是補特伽羅成就善惡,聖者成就十無學法。又說異生不成就聖法,諸阿羅漢不成就煩惱,成、不成言顯得、非得。

▷논자의 질문; 득(得)과 비득(非得)은 색법과 심왕법 등과 달리 실재의 본체와 작용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외인이 답하여서; 경전에서 말씀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보특가라(補特加羅, pudgala, 중생)는 선과 악을 얻어서 성취하고, 성자(聖者)는 열 가지의 십무학법(十無學法)을 성취한다고 '아비달마구사론'의 제4권에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범부는 성인의 법을 성취하지 않고, 모든 아라한(阿羅漢, arhat)은 번뇌를 이루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성취의 성(成)과 성취하지 않는 불성(不成)이라는 말은 득(得)과 비득(非得)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하 별도로 다른 주장들 중에서 먼저 설일체유부의 14불상응행법 중의 여섯 가지에서 득과 비득을 논파한다.

 

*보특가라(補特加羅, pudgala)는 구역에서는 인(人) 또는 중생으로, 신역에서는 삭취취(數取趣)로 번역된다. 유정이 거듭거듭 5취(趣)에 취착(取着)해서 윤회하기 때문에 유정 또는 유정의 자아를 말하는 것.

*득(得)의 의미에 획득과 성취의 구분이 있어서, 획득은 사물을 얻는 상태(位)이고, 성취는 이미 얻은 상태이다.

비득(非得)에도 역시 비획득(非獲得)과 불성취(不成就)가 있다.

*십무학법(十無學法)은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 바른 사유의 정사유(正思惟), 바른 언어의 정어(正語), 바른 행동의 정업(正業), 바른 생계수단의 정명(正命), 바른 노력의 정정진(正精進), 바른 기억의 정념(正念), 바른 선정의 정정(正定), 바른 해탈의 정해탈(正解脫), 정지(正智).

*

아라한(阿羅漢, arhat)은 응공(應供)ㆍ불생(不生) 등으로 번역되며, 소승의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한 지위의 명칭으로서 성문(聲聞)의 구경위이다. 또한 대승에서 부처님을 아라한으로 호칭하기도 하나, 여기에서는 전자의 칭호이다.

 

經不說此異色、心等有實體用,爲證不成。亦說輪王成就七寶,豈卽成就他身、非情?若謂於寶有自在力假說成就,於善、惡法何不許然而執實得?若謂七寶在現在故,可假說成,寧知所成善、惡等法離現在有?離現實法理非有故,現在必有善種等故。

▷논파; 경전에서는 이것이 색법과 심왕법 등과 달리 실재의 본체와 작용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므로, 증명으로 삼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장아함경' 제18권 등에서 전륜성왕은 일곱 가지 보배인 칠보(七寶)를 성취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곧 타인의 타신(他身)과 무생물인 비정(非情)을 성취하는 것인가?

만약 보배에 대해서 자재의 힘이 있어서 가정적으로 성취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서 선과 악의 법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실체의 득(得)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인가?

만약 칠보가 지금 있기 때문에 성취하는 것으로 가설할 수 있다면, 성립된 선과 악 등의 법은 현재를 떠나서 실재가 된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현재를 떠난 실법이라는 논리가 없기 때문인 것은 현재에 반드시 선(善)의 종자 등이 있기 때문이다.

소승인이 말하기를, 과거의 법은 이미 가버렸고, 미래의 법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며, 현재는 오직 법이 현전(現前)하는 한 찰나뿐이거늘, 어디에 선ㆍ악이 있다는 말인가! 라고 한 것을 논파하는 것으로, 선악의 법이 현재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종자는 반드시 제8식 중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은 고대 인도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으로, 몸에 32상을 구족하고 수미사주(須彌四洲)를 통솔한다. 무력(武力)이 아니라 윤보(輪寶)를 굴려서 일체를 위험으로부터 항복받으므로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왕위에 즉위할 때 하늘로부터 감득(感得)하는 윤보(輪寶)의 종류에 따라 금륜왕(金輪王:수미 사천하 통솔)ㆍ은륜왕(銀輪王:동ㆍ서ㆍ남 三洲 통솔)ㆍ동륜왕(銅輪王:동ㆍ남 二洲 통솔)ㆍ철륜왕(鐵輪王:남염부제 통솔)으로 구분한다.

*전륜성왕의 칠보(七寶)는 전륜성왕이 출현할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며, 흰 코끼리인 백상보(白象寶), 감색 말의 감마(紺馬寶), 뛰어난 군사의 주병보(主兵寶), 단정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옥녀보(玉女寶), 재정업무의 거사보(居士寶), 신령스러운 청색 구슬의 신주(神珠), 금륜보(金輪寶)이다. 이 가운데에서 앞의 다섯 가지는 타신유정(他身有情)이고, 뒤의 둘인 신주(神珠), 금륜보(金輪寶)는 비정(非情)이다.

여기에서는 득(得)이 타신(他身)과 무생물인 비정(非情)은 성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까닭에 이러한 예를 들어 논파한 것이다.

 

又得於法有何勝用?若言能起,應起無爲,一切非情應永不起,未得已失應永不生。

또한 득(得)은 법에 대해서 어떠한 뛰어난 작용의 승용(勝用)이 있는 것인가?

만약 능히 일으키는 능기(能起)라고 한다면, 무위법도 일으켜야 하며, (일체의 무생물인 비정법非情法에는 득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모든 비정(非情, 무생물)은 영원히 생겨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아직 이루지 못한 미득(未得)과 이미 소멸된 이실(已失)은 영원히 생겨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득(得)의 작용으로서 능기(能起)와 불실(不失)을 말하는 것에서, 능기를 논파한다.

 

若俱生得爲因起者,所執二生便爲無用,又具善、惡、無記得者,善、惡、無記應頓現前。若待餘因,得便無用。

만약 선천적으로 함께하는 득(得), 즉 그림자처럼 몸에 따르는 여영수신득(如影隨身得)으로써 능득(能得)과 소득(所得)이 동시에 오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난다고 한다면, 집착된 이생(二生)은 곧 쓸모없는 것이 되며,

또한 선ㆍ악ㆍ무기의 득(得)을 갖춘 사람에게는 선ㆍ악ㆍ무기가 단박에 현전해야 하는 것이니, 만약 다른 원인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면, 득(得)은 곧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생(二生), 크고 작은 두 가지 생상(生相)을 가리키며,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사물의 변화하는 모습을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4상(相)으로 하고, 그것을 대상(大相 또는 本相:生ㆍ住ㆍ異ㆍ滅)과 소상(小相 또는 隨相:生生ㆍ住住ㆍ異異ㆍ滅滅)의 둘로 나눈다. 이러한 대소의 이상(二相)으로써 만물 변화의 원리로 하며,

만물이 변화하는 것은 대상(大相)의 4상이 있기 때문이고, 대의 4상이 천류(遷流)하는 것은 소상(小相)의 4상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소의 4상이 천류하는 것은 대의 4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팔일공능(八一功能)이라 하며, 무릇 법이 생멸할 때는 반드시 9법(본법, 4本相, 4隨相)이 함께 일어나고, 그 중에 4본상이 각각 8법(본법, 자신을 제외한 3본상, 4수상)에 작용을 미치고, 4수상이 각각 일법(4본상 중의 하나)에 작용을 미친다고 한다.

 

若得於法是不失因,有情由此成就彼故,諸可成法不離有情。

만약 득(得)이 법에 대해서 잃지 않음의 원인이며, 유정은 이것에 의해서 그것을 성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모든 성취될 수 있는 법은 유정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득(得)의 작용 중에서 불실(不失)을 논파한 것.

 

若離有情實不可得,故得於法俱爲無用。得實無故,非得亦無。

만약 유정을 떠나는 것이라면, 실로 득(得)일 수가 없으니, 따라서 득(得)은 법에 대해서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며, 득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득(非得) 역시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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