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燈炷品 第五十七之餘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7. 등주품(燈炷品) 풀이함② 2

 

“若心生,是滅相不”者,上問過去心已,今問:“現在心相當滅不?”

是故答:“是滅相。”何以故?生滅是相待法,有生必有滅故,先無今有、已有還無故。

‘만약 마음이 생긴다면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멸상(滅相)이던가?’라고 함이란, 

위에서 과거심(過去心)을 묻고 나서, 여기에서는 ‘현재심의 상(相) 소멸하는 것인가’를 물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멸상(滅相)이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생멸(生滅)하는 것은 바로 상대되는 법이으로서, 생기는 생(生) 있으면 반드시 소멸하는 멸(滅)이 있기 때문이니, 앞에서는 없다가 지금은 있게 되고,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心滅相是滅不”者,若心滅相卽是滅耶?更有滅耶?

答言:“不也!世尊!”何以故?若卽是滅,則一心有兩時:生時、滅時。

說無常者,心不過一念時。如『阿毘曇經』說:“有生法,有不生法;有欲生法,有不欲生法;

有滅法,有不滅法;有欲滅法,有不欲滅法。”生法現在一心中有二種:一者、生,二者、欲滅。

生非欲滅相,欲滅相非生。是事不然,故言“不也”。

‘마음의 소멸하는 심멸상(心滅相), 이것이 바로 멸(滅)하는 것이더냐?’고 함이란, 

‘마음의 소멸하는 멸상(滅相)  멸(滅)하는 것인가? 다시 멸(滅)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니,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것은, 왜냐하면 만일 마음의 멸상(滅相)  멸이라면 하나의 마음에는 생기는 때와 소멸하는 때의 양시(兩時, 두 가지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無常)'을 말하는 이의 마음은  생각의 일념(一念)의 순간에 지나지 않나니,

마치 '아비담경(阿毘曇經)'에서 “생법(生法)이 있고, 생기지 않는 불생법(不生法)이 있으며, 생기려고 하는 욕생법(欲生法)이 있고, 생기려고 하지 않는 불욕생법(不欲生法)이 있으며, 

소멸하는 멸법(滅法)이 있고 소멸하지 않는 불멸법(不滅法)이 있으며, 소멸하려고 하는 욕멸법(欲滅法) 있고, 소멸하려고 하지 않는 불욕멸법(不欲滅法)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생기는 생법도 현재의 일심 속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生)기는 것이요, 둘째는 멸하려는 욕멸(欲滅)이다. 

생(生)기는 것은 소멸하려는 욕멸(欲滅)의 상(相) 아니요, 욕멸(欲滅)의 상 생기는 것이 아니니, 이러한 일은 그렇게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當如是住不”者,若滅相非卽是滅者,應常住不?若常住,卽是不滅相。

佛如是翻覆難,須菩提理窮故,作是念:“我若言滅相卽是滅,則一心墮二時;若言不滅,實是滅相,云何言不滅?”

以上二理有過故,須菩提自以所證智慧答:“世尊!如是住,如如住。”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는가?’라고 한 것은,

 “만약 소멸하는 멸상(滅相)  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소멸하지 않는 불멸상(不滅相)이지 않은가?”라고, 부처님께서 되물으신 것이며, 

수보리 존자가 이론에 궁하여졌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제가 만약 소멸하는 멸상(滅相)  멸하는 것이라 한다면, 하나의 마음에 두 개의 때(時)가 있음에 떨어지고, 만약 멸상(滅相)이 곧 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로 소멸하고 있는 멸상(滅相)이거늘 어떻게 멸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위의  가지 이론에는 허물이 있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는 자신이 증득한 지혜로써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머무르되 한결같이 여여하게 머무르는 여여주(如如住)입니다”라 한 것이다.


“若是心如如住,當作實際不”者,若說“心相同如住”者,如卽是實際;若爾者,心可卽作實際不?

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須菩提久尊重是實際;

心是虛誑法,小乘智慧力少,不能觀心卽 作實際,是故言:“不也!”

‘만약  마음이 여여하게 머무르는 여여주(如如住)라면 실제(實際)가 되어야 하지 않는 것인가?’라 함은, 

만약 마음의 심상(心相)이 다 같이 여(如)에 머무른다면, 이 여(如)가  바로 실제이니, 만약 그러하다면 “마음은  실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수보리 존자는 오랫동안  실제를 존중하면서 마음 이것은 거짓된 허광법이라고 여겼으며, 소승(小乘)은 지혜의 힘이 적어서 마음이  실제가 된다고 관찰할  없기 때문에 “아닙니다”라고  것이다.


問曰:若須菩提已說“是心如如”,何以不得作實際?

묻나니, 만약 수보리 존자가 이미  마음은 여여하다고 말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실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答曰:如名一切法實相,心實相亦名如。須菩提心謂“凡夫六情所見,虛妄顚倒故有過”,今說“心相如實”無咎,故言“如如住”。今實際卽是涅槃,須菩提久貴涅槃故,不能卽以心爲涅槃,

是故言:“不也!”復次,以實際無相故,不得言“心卽是實際”。

답하나니, 여(如)는 일체법의 실상(實相)이라 하며, 마음의 실상 또한 여(如)라 한다. 

수보리 존자는 마음에 ‘범부가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ㆍ 뜻(意)의 육정(六情)으로 보는 것은 거짓이요, 뒤바뀌어 전도되었기 때문에 허물이 있지만, 여기서의 마음의 심상(心相) 여실(如實)하여 허물이 없다고 때문에 “여여하게 머무르는 여여주(如如住)이다”고 말하였으며, 

여기서의 실제(實際)는  열반(涅槃)이니, 수보리 존자는 오랫동안 열반을 귀히 여겼기 때문에  마음을 열반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때문에 “아닙니다”고 하였으며,

 실제는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마음이  실제라는, 심즉시실제(心卽是實際)’라고 말하지는 못한 것이다.


“是如深不”者,以須菩提言“心如如住”,復言“不得作實際”,

是故問:“如是甚深不?”須菩提不能遍知故,答言:“甚深!

‘이 여(如)는 매우 깊은 것이던가?’라고 함은, 수보리 존자는 마음이 여여하게 머무르는 여여주(如如住)라고 말하지만 다시 ‘실제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 때문에 ‘여(如)는 매우 깊은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요, 

수보리 존자는 두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깊습니다”라 대답하였다.


“但如是心不?”
須菩提答言:“不也!世尊!”

何以故?如是一相、不二相;心憶想分別因緣生故,是二相。

如無所知,心有所知。又復如畢竟淸淨故無所知,心有所覺知故。離如,心亦如是。

何以故?一切法皆有如,云何離如而有心?”

“다만 여(如) 이것만이 마음(心)이던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여(如) 이것은 일상(一相)이요  개의 이상(二相)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한 인연으로 생기는 탓에 이러한 이상(二相)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여(如)에서는 아는 바가 없는 무소지(無所知)이지만, 마음(心)에는 아는 바가 있는 유소지(有所知)이며, 

 여(如)는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에 아는 바가 없는 무소지(無所知)이거니와 마음(心)에는 깨달아 아는 바가 있는 유소지(有所知)이므로 여(如)를 여의면 마음(心) 또한 그와 같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에는 모두 여(如)가 있거늘 어떻게 여(如)를 여의고서 마음(心)이 있겠는가!.


佛問須菩提:“如能見如不?”

答:如中無分別 是知、是可知;是菩薩不住如、法性、實際,眞行深菩薩道。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시되 “여(如)는 여(如)를   있는가?”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여(如) 가운데에서는 ‘이것은 안다, 이것은   있다’라고 분별하는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나니, 이러한 보살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진실로 깊은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다.


佛問須菩提:“若如是行,能行深般若波羅蜜不?”

須菩提自觀小乘淺薄、觀大乘法深故,答言:“如是行,是爲行深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시기를 “만약 이와 같이 행하면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행할  있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 스스로가 소승은 천박(淺薄)하다고 보고, 대승의 법은 깊다고 보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이와 같이 행하면 이것이 바로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고 하였으며, 


爾時,有未得無生法忍菩薩聞是法則心高,自謂:“出小乘,深入大乘。”

佛欲破其高心故,問須菩提:“菩薩如是行,爲何處行?”

須菩提言:“如是行,爲無處所行。”何以故?菩薩住如中,無所分別故。

그때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한 보살들은 이러한 법을 듣고 뽐내면서 스스로가 ‘소승을 벗어나서 깊이 대승에 들어갔다’고 여기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고만(高慢)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하여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시기를 “보살의 이와 같은 행은 어느 곳의 행이 되는 것인가?”라 하셨으며, 

수보리 존자 말씀드리기를 “이와 같은 행은 처소가 없는 무처소행(無處所行)이 됩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보살은 여(如)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분별하는 바가 없는 무소분별(無所分別)이기 때문이다.

 

菩薩聞無處所行,或墮斷滅中,是故佛復問須菩提:“菩薩行般若,爲何處行?”

須菩提言:“第一義中行。”第一義相者,無有二相。

보살은 ‘처소가 없는 무처소행(無處所行)’이라는 말을 듣고 혹은 단멸(斷滅)에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수보리 존자에 물으시기를, “보살이 반야를 행하는 것은 어느 곳의 행이 되는가?”라고 하셨으며,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첫째가는 제일의(第一義) 안의 행입니다”고 하였으며,  

첫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의 상(相)에는  가지의 이상(二相) 없는 것이다.


佛語須菩提:“於汝意云何?若菩薩無念行第一義,是行取相法不?”

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一切法畢竟空,無憶念,卽是不行相。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보살이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의 제일의(第一義)를 행한다면,  행은 상을 취하는 취상법(取相法)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은 필경공이라서 생각이 없는 무억념(無憶念)이니, 이것이  행하지 않는 불행상(不行相)이기 때문이다.


佛問須菩提:“是菩薩壞相得無相不?”

須菩提言:“不也!”相從本已來無,但爲除顚倒故,不壞法相。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이 보살이 무너뜨리면 무상(無相)을 얻는 것인가?”라고 물으셨고,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고 하였나니,

 본래부터 없으나 다만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법상(法相)을 무너뜨리지 않을 뿐이다.


佛語須菩提:“若不壞相,云何行無相行?”

須菩提言:“世尊!菩薩不作是念:‘我當破相故行般若。’是菩薩未具足佛十力等諸佛法,以方便力故,不作有相、不作無相。”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만약 상(相)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상(相) 없는 무상행(無相行)을 행하는 것인가?”라고 하셨으며,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나는 상(相)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반야를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며,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10력(力)  모든 부처님의 불법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방편의 힘으로써 있다는 유상(有相)도 짓지 않고 없다는 무상(無相)도 짓지 않습니다.


何以故?若取相,是相皆虛誑妄語,有諸過失;若破相,則墮斷滅中,亦多過失。

是故不取有相、不取無相。取相卽是有法,不取相卽是無法;方便力故,離是有、無二邊,行於中道。

왜냐하면 만약 상(相)을 취하면  상(相) 모두가 거짓이요 허망한 말이라서 온갖 허물이 있으며, 만약 상(相)을 파괴하면 단멸(斷滅) 가운데에 떨어져서 역시 허물이 많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다는 유상(有相) 취하지 않고 없다는 무상(無相) 취하지 않나니,

상(相)을 취하면 그것이  법이 있는 유법(有法)이요,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 그것은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니, 방편의 힘으로 이러한 있다, 없다는  가지 치우침인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所謂:“知一切法自性空故,不著有無。”

自相空破一切法相,亦自破其相。菩薩住是自相空中起三三昧,利益衆生。

衆生於六道中,種種作願受身。有人不攝心,不能修福,自放恣隨意造業。若墮地獄,臨死時,冷風逼切,則願欲得火,便入地獄等三惡道;若得爲人,貧窮下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며, 

자상공(自相空)이므로 일체법의 상(相) 파괴하고, 또한 스스로  상(相) 파괴하는 것이니, 보살은  자상공(自相空)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삼삼매(三三昧)를 일으키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중생은 육도(六道) 가운데에서 갖가지의 원(願)을 지으면서 몸을 받나니, 어떤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지 않아서 복을 닦지 못하고 제멋대로 굴면서 마음대로 업(業)을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나니, 죽음에 임할 때에 찬바람이 불어 닥치면 불을 얻기를 바라면서  지옥 등의 지옥 축생 아귀의 삼악도(三惡道)에 들어가며, 사람의 몸을 받을지라도 빈궁하고 하천한 곳에 태어나는 것이나, 


有人攝心,能折伏慳貪,行布施、持戒等善行,是人生欲界人天中富樂處。

有人離欲界,除五蓋,因信等五根,得五支等諸禪,則生色界。

有人捨諸色相,滅有對相,不念雜相故,入無邊虛空處無色定等。是諸所作,皆是邪願。

何以故?久久皆當破壞墮落;譬如以繩繫鳥,繩盡復還。菩薩以是無作三昧斷衆生作願。

어떤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어 간탐(慳貪)을  꺾어서 조복하고 보시와 지계 등의 착한행을 행하므로, 이런 사람은 욕계(欲界)의 인간과 천상 안의 부귀하고 쾌락한 처소에 태어나며, 

어떤 사람은 욕계를 여의고 탐욕개(貪欲蓋), 진에개(瞋恚蓋), 수면개(睡眠蓋), 도회개(掉悔蓋), 의개(疑蓋)의 오개(五蓋) 제거하며,

신근(信根) 정진근(精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의 오근(五根)으로 인하여 다섯 갈래의 오지(五支) 등의 모든 선정을 얻으면 색계(色界)에 태어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모든 빛깔 있는 색상(色相) 버리고 대상 있는 상(相) 없애면서 여러 가지 잡상(雜相)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의 무색정(無色定) 등에 들어간다.

이렇게 하는 일은 모두 삿된 사원(邪願)이니, 왜냐하면 오래된 뒤에는 모두가 파괴되어서 타락하여 되돌아 오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줄로 새를 매어 놓아서, 그 줄이 다하면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으니,  

보살은  무작삼매(無作三昧)로써 중생들의 삿된 사원(邪願) 끊게 하는 것이다.


又復是身皆空,但有筋骨、五藏,血塗、皮裹,不淨充滿,風隨心動作;是心生滅不住,如幻如化,無定實相。

衆生見是來去、語言諸相故,謂有人、有我、有我所,起顚倒心,但憶想分別故,有是錯謬。

菩薩以空三昧斷衆生我、我所心,令住空中。

또한  몸은 모두 공한 것이니, 다만 힘줄ㆍ뼈ㆍ오장과 혈관이 있을 뿐이요, 가죽 속에는 부정(不淨)한 것이 가득  있으며 바람(風)은 마음(心)의 동작을 따르고 있으나,  마음은 생멸하면서 머무르지 않나니,

마치 허깨비의 환(幻)과 같고 변화(化)와 같아서 일정하고 진실한 실상(實相) 없는 것이나,

중생은 이러한 오고 가고, 말을 하는 모든 상(相) 보기 때문에 ‘사람이 있는 유인(有人)이고, 나(我)가 있으며  것의 아소(我所)가 있다’고 여기는 뒤바뀐 전도심(顚倒心)을 일으키는 것이니, 다만 생각과 분별 때문에 이러한 착오가 있을 뿐이니, 

보살은 공삼매(空三昧)로써 중생들의 나와  것이란 마음을 끊으면서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又復衆生取諸男女、色聲香味、好醜、脩短相,以取相故,生種種煩惱,受諸憂苦。

菩薩以是無相三昧斷衆生諸相,令住無相。

 중생들은 모든 남자ㆍ여자와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와 아름답고 추한 호추(好醜)와 길고 짧은 수단(脩短) 상(相) 취하며, 상(相)을 취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번뇌를 내면서 모든 근심과 고통을 받는 것이니, 

보살은  무상삼매(無相三昧)로써 중생들의 모든 상(相) 끊으면서 무상(無相)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問曰:若教化衆生令得空便足,何用無相、無作三昧?

묻나니, 만약 중생을 교화하면서 공(空)을 얻게 하면족하거늘,  무상삼매와 무작삼매가 필요한 것입니까?


答曰:衆生根有利、鈍。利根者聞空,卽得無相、無作。鈍根者聞空破諸法,卽取空相,是故說“無相”。若人雖知空、無相,因是智慧,更欲作身;是有爲法,有種種過患,是故不應作身,如經說:“離菩薩身,餘身彈指頃不可樂,何況久住!”是故說“無作”。以是因緣故,具說三三昧,教化衆生。

답하나니, 중생들의 근기에는 예리한 것과 둔한 것이 있으니,

근기가 예리한 이는 공(空)을 들으면 곧 무상과 무작을 얻거니와 근기가 둔한 이는 공(空)을 듣고 제법을 파괴하면서 곧 공상(空相)을 취하게 되기 때문에 무상 등을 설명하는 것이며, 

만약 사람이 비록 공(空)하고 무상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이 지혜로 인하여 다시 몸을 지으려고 하나니, 이러한 유위(有爲)의 법에는 갖가지의 허물이 있기 때문에 몸을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마치 경에서 “보살의 몸을 여의면 그 밖의 몸은 손가락을 튕기는 탄지(彈指) 동안조차도 좋아하지 않거늘, 하물며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이랴”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지음 없음는 무작(無作)을 설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삼매(三三昧)를 빠짐없이 설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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