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燈炷品 第五十七 卷七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7. 등주품(燈炷品)을 풀이함① 4
“世尊!不可說義有增有減不?”
佛言:“不也!須菩提!不可說義無增無減。”
“세존이시여,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不可說)의 이치에는 더하는 증(增)이 있고 덜 하는 감(減)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수보리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義)에는 더하는 것도 없는 무증(無增)이고 덜하는 것도 없는 무감(無減)이니라.”
“世尊,若不可說義無增無減,檀波羅蜜亦當無增無減,乃至般若波羅蜜亦當無增無減;
四念處乃至八聖道分亦當無增無減;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五神通、八背捨、八勝處、九次第定、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亦當無增無減。
世尊!若菩薩摩訶薩六波羅蜜不增乃至十八不共法不增者,云何菩薩摩訶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세존이시여, 만약 말로는 설할 수 없는 이치가 무증(無增)과 무감(無減)이라면 단바라밀 역시도 무증(無增)과 무감(無減)이어야 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에도 역시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하며, 사념처 내지는 팔성도분 역시도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5신통(神通)ㆍ8배사(背捨)ㆍ8승처(勝處)ㆍ9차제정(次第定)과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에서도 역시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에게 6바라밀이 더하지도 않고 나아가 18불공법이 더하지도 않는다면,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지요?”
佛言:“如是!如是!須菩提!不可說義無增無減。菩薩摩訶薩習行般若波羅蜜,
有方便力故,不作是念:‘我增般若波羅蜜,乃至增檀波羅蜜。’
當作是念:‘但名字故,名檀波羅蜜。’是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是心及善根,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迴向;乃至行般若波羅蜜時,是心及善根,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迴向。”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의 이치에는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지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하여 방편의 힘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반야바라밀을 더하며, 나아가 단바라밀을 더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시 생각하기를 ‘다만 이름 때문에 단바라밀이라 부른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러한 마음과 선근(善根)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과 같이 회향(迴向)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도 이러한 마음과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과 같이 회향해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言:“一切法如相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一切法如相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일체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이라서, 그것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 것인지요?”
佛告須菩提:“色如相,受想行識如相,乃至涅槃如相,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如相亦不增不減。
須菩提!是菩薩摩訶薩不離般若波羅蜜,常觀是如法,不見有增有減。以是因緣故,
須菩提!不可說義無增無減,檀波羅蜜亦不增不減,乃至十八不共法亦不增不減。
須菩提!菩薩摩訶薩以是不增不減法故,應般若波羅蜜行。”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의 여여한 색여상(色如相)과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여여한 여상(如相) 내지는 열반의 여여한 여상(如相)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이 여여한 여상(如相) 역시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항상 이 여여한 여법(如法)을 관찰하면서 더하는 것이 있다거나 덜하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수보리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의 이치에는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으며, 단바라밀에도 역시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으며, 나아가 18불공법에서도 역시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부증불감법(不增不減法)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
▶論. 釋曰:離般若波羅蜜,恒河沙劫供養三寶,不及一日行般若。
又復有人住壽如恒河沙等劫供養須陁洹等,亦不及一日行般若。
此中佛自說因緣:“菩薩行般若,過二地,入菩薩位,成無上道。”
▷논. 해석한다. 반야바라밀을 여의고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겁 동안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공양하여도 하루 동안 반야를 행하는 이보다 못한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겁 동안 살면서 수다원 등을 공양하여도 역시 하루 동안 반야를 행하는 이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반야를 행하여 두 지위를 넘어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이룬다”고 하신 것이다.
又復遠離般若,恒河沙等劫行布施等六法,亦不及一日如所說住般若中行布施等六法。
是中說勝因緣:“般若是諸佛母,住是般若中,能具足諸佛法。”財施章若遠離般若,如恒河沙等劫行法施,不及一日住般若中行法施。
復次,遠離般若,用聲聞、辟支佛法修行四念處如恒河沙等劫,不如一日如所說住般若中修四念處;乃至一切種智。此中自說勝因緣,所謂:“不離般若,於薩婆若轉者,無有是處。”
또 반야를 멀리 여의고 항하강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의 여섯 가지 육법(六法)을 행하여도 하루 동안 말씀하신 바 그대로 반야 가운데 머무르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의 여섯 가지 육법을 행하는 이보다 못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그 수승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반야는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니, 이 반야 안에 머무르면 모든 부처님의 불법을 두루 갖추게 된다”고 하셨으며,
다시 “만약 반야를 멀리 여의고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겁 동안 법시(法施)를 행할지라도, 하루 동안 반야 가운데 머무르면서 법 보시를 행하는 이보다 못하다. 또 반야를 멀리 여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써 4념처를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겁 동안 수행한다 하여도 하루 동안 말씀하신 바 그대로 반야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사념처 내지는 일체종지를 닦는 이보다는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그 뛰어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를 여의지 않고도 살바야에서 물러나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復次,菩薩離般若,如恒河沙等劫財施、法施、禪定生福德,迴向無上道,不如一日應般若財施、法施、禪定生福德,迴向無上道。何以故?般若波羅蜜無雜毒,正迴向故。
復次,若菩薩離般若,壽如恒河沙劫等,十方三世諸佛功德,隨喜迴向無上道,不如一日應般若隨喜迴向。
또한 보살이 반야를 여의고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겁 동안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와 선정으로 생긴 복덕을 위없는 무상도에 회향할지라도, 하루 동안 반야에 상응한 재시ㆍ법시ㆍ선정으로 생긴 복덕을 위없는 무상도에 회향하는 이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는 여러 가지 섞인 잡독(雜毒)이 없어서 바르게 정(正)회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보살이 반야를 여의고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겁 동안 살면서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는 수희(隨喜)하면서 위없는 무상도에 회향하여도, 하루 동안 반야와 상응하며 따라 기뻐하는 수희하면서 회향하는 이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爾時,須菩提難佛:“如佛說一切有爲法,虛誑不實、如幻,不能生正見、入正位,云何菩薩一日福德勝?”
그때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와 같은지라,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을 내어 바른 지위의 정위(正位)에 들 수 없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보살이 하루 동안 닦은 복덕이 뛰어나다고 하시는지요?”라고 하였다.
佛可其言:“如是!如是!有爲法皆虛誑,不得以虛誑法入正位、得聖道。菩薩行般若波羅蜜時,所作福德,知皆虛誑、空、無堅固,心不著是福德。是福德淸淨故,勝餘福德。”如金剛雖小,能摧破大山。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유위법은 모두 거짓이므로 그 거짓된 법으로써 바른 정지위에 들 수 없고 성인의 성도(聖道)를 얻을 수 없다”고 하셨으며,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짓게 되는 복덕은 모두가 거짓이요 공(空)이어서 견고함이 없음을 알아서, 마음으로 이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복덕이 청정하여서 그 밖의 복덕보다 뛰어나나니, 마치 금강(金剛)이 비록 작을지라도 큰 산을 꺾어 부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此中佛說:“菩薩善學十八空。”雖觀空,而能行諸功德;雖知涅槃無上道,而憐愍衆生故修集福德。
雖知一切法相不可說,而爲衆生種種方便說法;雖知法性中無有分別、一相無相,而爲衆生分別是善是不善、是可行是不可行、是取是捨、是利是失等。
若菩薩雖觀畢竟空,而能起諸福德,是名“不離般若波羅蜜行”。
若菩薩常不離般若波羅蜜,漸得無數、無量、無邊功德。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18공(空)을 잘 배우므로 비록 공(空)을 관찰할지라도 모든 공덕을 능히 행한다”고 하셨으며,
비록 열반의 위없는 무상도를 알지라도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복덕을 닦아 쌓으며,
비록 일체법의 법상(法相)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의 방편으로 법을 설하며,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에서는 분별이 없는 한 모양의 일상(一相)이고,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임을 안다 하여도 중생들을 위하여 ‘이것은 착하다, 이것은 착하지 않다, 이것은 행할 수 있다, 이것은 행할 수 없다, 이것은 취한다, 이것은 버린다, 이것은 이익된다, 이것은 손실이다’라고 분별하며,
만약 보살이 비록 필경공(畢竟空)을 관찰할지라도 모든 복덕을 일으킨다면, 그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 행이라 하나니,
만약 보살이 항상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다면 점차로 무수(無數)하고, 무량(無量)하고, 무변(無邊)한 공덕을 얻나니,
何以故?若菩薩初學般若時,煩惱力强,般若力弱;
漸漸得般若力,斷諸煩惱、滅諸戲論,是故得福德無數、無量、無邊。
無數、無量、無邊義,佛自分別說。所謂無數者,不墮若有爲性中、若無爲性中。
三世量不可得,故名無量。十方邊不可得,故名無邊。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처음 반야를 배울 때에는 번뇌의 힘이 강하고 반야의 힘이 약하지만, 점차로 반야의 힘을 얻게 되면 모든 번뇌가 끊어지고 모든 쓸모없는 희론이 없어지기 때문이므로 복덕을 얻음도 무수(無數)하고, 무량(無量)하고, 무변(無邊)한 것이다.
‘무수(無數), 무량(無量), 무변(無邊)’의 뜻을 부처님께서 직접 분별하여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무수(無數)’ 라 함은 유위의 성품이나 무위의 성품 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요,
삼세의 양(量)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량(無量)하다고 하셨으며,
시방의 변(邊, 끝) 역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변(無邊)이라는 것이다.
須菩提問佛:“五衆頗有因緣亦無數、無量、無邊耶?”
佛答:“有!以五衆空故,亦無數、無量、無邊。”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오중(五衆)에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역시 무수(無數), 무량(無量), 무변(無邊)한 것인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오중이 공하기 때문에 역시 무수(無數), 무량(無量), 무변(無邊)하느니라”고 하셨으며,
須菩提問:“世尊!但五衆空,非一切法空耶?”
佛答:“一切法空。”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다만 오중만이 공할 뿐, 일체법은 공한 것이 아닌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일체법은 공하느니라”고 하셨으며,
須菩提言:“是空法卽不可盡,不可盡故卽是無數,無數卽是無量,無量卽是無邊。是故空中,盡不可得故名無盡,數不可得故名無數,量不可得故名無量,邊不可得故名無邊。”
四事名雖異,義是一,所謂畢竟空。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이 공한 공법(空法)은 곧 다할 수 없는 불가진(不可盡)입니다. 다할 수 없는 불가진이기 때문에 곧 수(數)가 없는 무수(無數)이고, 무수이면 곧 한량이 없는 무량(無量)이며, 무량하면 곧 끝이 없는 무변(無邊)입니다.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서는 다한다는 진(盡)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라 하고, 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수없는 무수(無數)라 하며, 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량(無量)이라 하고, 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수 무량 무변 무진, 이 네 가지는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義)은 하나이니,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인 것입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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