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佛母品 第四十八之餘 卷七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소역.
48. 불모품(佛母品)을 풀이함② 1
▶經. “復次,須菩提!佛因深般若波羅蜜,衆生心數出、沒、屈、申如實知。”
▷經.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깊은 심(深)반야바라밀로 인하여 나온 출(出), 빠진 몰(沒), 굽히는 굴(屈), 펴는 신(伸), 중생이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과 마음에 상응하는 마음작용인 심수(心數, caitasiki. 심소心所)를 여실히 아시느니라.”
심소(心所)= 마음작용(caitta, caitasika)의 작용의 준말이며,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법들'을 뜻하며, 심소유법(心所有法), 심소법(心所法) 또는 심소(心所)라고 하며, 또한, 마음작용을 의식작용(意識作用) 또는 심리작용(心理作用) 또는 정신작용(精神作用)이라 부르기도 한다. - 위키
“世尊!云何佛因般若波羅蜜,衆生心數出、沒、屈、申如實知?”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나온 출(出), 빠진 몰(沒), 굽히는 굴(屈), 펴는 신(伸)을 중생이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 작용의 심수(心數, caitasiki. 심소心所)를 여실히 아시는지요?”
佛言:“一切衆生心數出、沒、屈、申等皆依色受想行識生。須菩提!佛於是中知衆生心數出、沒、屈、申,所謂神及世閒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神及世閒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神及世閒常亦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神及世閒非常非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오는 출(出), 빠지는 몰(沒), 굽히는 굴(屈), 펴는 신(伸) 등의 일체 중생의 심수(심소)는 모두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가운데에서 나온 출(出), 빠진 몰(沒), 굽히는 굴(屈), 펴는 신(伸)의 중생의 심수를 아느니라. 이른바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다는 상견(常見)으로서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무상(無常)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아트만(Atman)은 브라만교에서 개별적인 자아 또는 영혼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로, 각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를 나타낸다.
아트만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아트만은 물질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개인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신념을 담고 있다.
아트만의 특성은 영원성과 불변성, 개별성이다.
영원성이란, 아트만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불멸의 실체임을 말한다.
불변성이란, 아트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외부 환경이나 육체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개별성이란, 아트만은 각 개인의 독특한 자아를 나타내며, 모든 존재가 각기 다른 아트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아미산
神及世閒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受;神及世閒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受;神及世閒常亦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受;神及世閒非常非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受;神及世閒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想;神及世閒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想;神及世閒常亦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想;神及世閒非常非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想。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느낌(受)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느낌(受)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느낌(受)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느낌(受)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생각(想)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생각(想)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생각(想)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생각(想)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神及世閒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行;神及世閒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行;神及世閒常亦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行;神及世閒非常非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行;神及世閒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識;神及世閒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識;神及世閒常亦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識;神及世閒非常非無常是事實,餘妄語,是見依識。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지어감(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지어감(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지어감(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지어감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분별(識)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분별(識)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분별(識)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과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분별(識)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世閒有邊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世閒無邊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世閒有邊無邊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世閒非有邊非無邊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依受、想、行、識亦如是。
세간은 끝이 있는 유변(有邊)한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한 것이라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에 의지하는 견해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神卽是身,是見依色;神異身異,是見依色。依受、想、行、識亦如是。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은 곧 몸(身)이라고 보는 견해도 물질(色)에 의지하는 것이요,
신(神, 정신, 실체로서의 ātman)이 다르고 몸(身)이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바로 물질(色)에 의지하는 것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에 의하여 보는 견해도 그와 같은 것이다.
死後有如去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死後無如去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死後或有如去或無如去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死後非有如去非無如去是事實,餘妄語,是見依色。依受、想、行、識亦如是。如是,須菩提!佛因般若波羅蜜,衆生出、沒、屈、申如實知。”
사후(死後)에 그러하게 가는 여거(如去, tathāgata. 여래如來)가 있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사후(死後)에 그러하게 가는 여거(如去, tathāgata. 여래如來)가 없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혹 사후(死後) 그러하게 가는 여거(如去, tathāgata. 여래如來)가 있기도 하고 혹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사후(死後)에 그러하게 가는 여거(如去, tathāgata. 여래如來)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망어(妄語)라고 하나니,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에 의하는 견해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나온 출(出), 빠진 몰(沒), 굽히는 굴(屈), 펴는 신(伸)하는 심수를 여실히 아시느니라.
復次,須菩提!佛知色相。云何知色相?如如不壞、無分別、無相、無憶、無戲論、無得,色相亦如是。
須菩提!佛知受想行識相。云何知受想行識相?如如相不壞、無分別、無相、無憶、無戲論、無得受想行識相亦如是。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물질의 색상(色相)을 아시느니라. 어떻게 물질의 색상(色相)을 아시는가? 마치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는 파괴되지도 않는 불괴(不壞), 분별도 없는 무분별(無分別), 무상(無相), 기억도 없는 무억(無憶), 쓸모없는 이론이 없는 무희론(無戲論), 얻음도 없는 무득(無得)인 것과 같이 물질의 색상(色相) 또한 그와 같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상(相)을 아시느니라. 어떻게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상(相)을 아시는 것인가? 마치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는 파괴되지도 않는 불괴(不壞), 분별도 없는 무분별(無分別), 무상(無相), 기억도 없는 무억(無憶), 쓸모없는 이론이 없는 무희론(無戲論), 얻음도 없는 무득(無得)인 것과 같이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상(相) 역시 그와 같기 때문이니라.
如是,須菩提!佛知衆生如相及衆生心數出、沒、屈、申如相。五衆如相,諸行如相,卽是一切法如相。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한결같은 여여한 여상(如相)과 중생의 마음작용닌 심수(心數, 심소)가 나타나고 숨고 굽어지고 펴지는 한결같은 여상(如相)과 이 오중(五衆)의 한결같은 여상(如相)과 제행(諸行)의 한결같은 여상(如相), 곧 일체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을 아시느니라.
何等是一切法如相?所謂六波羅蜜如相,六波羅蜜如相卽是三十七品如相,三十七品如相卽是十八空如相,十八空如相卽是八背捨如相,八背捨如相卽是九次第定如相,九次第定如相卽是佛十力如相,佛十力如相卽是四無所畏、四無㝵智、大慈大悲乃至十八不共法如相,十八不共法如相卽是一切種智如相。
어떠한 것이 일체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인가, 이른바 6바라밀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니,
6바라밀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37조도품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37조도품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18공(空)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며,
18공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8배사(八背舍)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니라.
8배사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구차제정(九次第定)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구차제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부처님 십력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며,
부처님의 십력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사무소외ㆍ사무애지ㆍ대자대비 내지는 18불공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18불공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일체종지(一切種智)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니라.
一切種智如相卽是善法不善法、世閒法出世閒法、有漏法無漏法如相,無漏法如相卽是過去、未來、現在法如相,過去、未來、現在法如相卽是有爲法、無爲法如相,有爲法、無爲法如相卽是須陁洹果如相,須陁洹果如相卽是斯陁含果如相,斯陁含果如相卽是阿那含果如相,阿那含果如相卽是阿羅漢果如相,阿羅漢果如相卽是辟支佛道如相。
일체종지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착한 선법(善法)ㆍ착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ㆍ세간법(世間法)ㆍ출세간법(出世間法)ㆍ유루법(有漏法)ㆍ무루법(無漏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유루법ㆍ무루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과거ㆍ미래ㆍ현재 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며,
과거ㆍ미래ㆍ현재 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유위법(有爲法)ㆍ무위법(無爲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니라.
유위법ㆍ무위법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수다원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수다원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사다함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며,
사다함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아나함의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아나함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아라한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며,
아라한 과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벽지불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니라.
辟支佛道如相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相,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相卽是諸佛如相,諸佛如相皆是一如相,不二不別、不盡不壞,是名一切諸法如相。佛因般若波羅蜜得是如相,以是因緣故,般若波羅蜜能生諸佛、能示世閒相。如是,須菩提!佛知一切法如相,非不如相,不異相;得是如相故,佛名如來。”
벽지불도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곧 모든 부처님의 한결같은 여상(如相)며,
모든 부처님의 한결같은 여상(如相)은 모두가 하나의 한결같은 여상인 일여상(一如相)이라서,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구별되지 않는 불별(不別)이며, 다하지도 않는 불진(不盡)이고, 파괴되지도 않는 불괴(不壞)이나니,
이러함을 바로 일체 제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러한 여상(如相)을 얻으셨나니, 이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낳고(生), 능히 세간상(世閒相)을 보이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은 한결같지 않은 불여상(不如相)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불이상(不異相)도 아니라는 것을 아나니, 이 여상(如相)을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래(如來)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是諸法如相,非不如相,不異相甚深!
世尊!諸佛用是如,爲人說阿耨多羅三藐三菩提。
世尊!誰能信解是者?唯有阿鞞跋致菩薩及具足正見人、漏盡阿羅漢。何以故?是法甚深故。”
“須菩提!是如無盡相故甚深。”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제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은 한결같지 않지도 않은 비불여상(非不如相)이며, 다르지 않은 상도 아닌 불이상(不異相)이라서 매우 깊은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것으로써 사람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 누가 능히 이를 믿고 이해하는 능신해(能信解)하는 것인지요?”
“오직 아비발치(阿鞞跋致, 불퇴전)의 보살과 바른 정견(正見)을 완전히 구족하여 갖춘 사람과 번뇌가 다한 아라한만이 믿고 이해하나니, 왜냐하면 이 법은 심히 깊은 심심(甚深)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여(如)는 다함이 없는 무진상(無盡相)이기 때문에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것이니라.”
須菩提言:“何法無盡相故甚深?”
佛言:“一切法無盡故。如是,須菩提!佛得是一切諸法如已,爲衆生說。”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법이 다함이 없는 무진상(無盡相)이기에 매우 깊은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법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이 일체 제법의 여(如)를 얻고 나서야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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