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佛母品 第四十八 卷六十九 卷六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역.  

48. 불모품(佛母品)을 풀이함① 3

 

問曰:如餘經說:“五衆破壞,故名世閒。”此中何以言“般若波羅蜜示五衆無破壞生滅”等?

묻나니, 그 밖의 경에서는 ‘오중(五衆, 오온)은 파괴되기 때문에 세간이라 한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5중이 파괴되거나 생멸(生滅) 등이 없다는 것을 보인다’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彼是小乘事,此是大乘事。小乘法多說無常,大乘法中多說法空。小乘法中先說無常,後說法空;大乘法中初便說法空。小乘法中說無常,令衆生怖畏;大乘則不然,是故說無破壞等。此中佛自說因緣:“空、無相、無作,終不破、不壞。”般若波羅蜜示如是等世閒相。

답하나니, 그것은 소승(小乘)이요, 여기에서는 바로 대승(大乘)이라. 소승법에서는 무상(無常)함을 많이 말하지만, 대승법에서는 법공(法空)을 많이 말하며, 소승법에서는 먼저 무상을 말한 뒤에 법공을 설명하지만, 대승법에서는 처음부터 바로 법공을 말하며, 소승법에서는 무상을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지만, 대승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파괴 등이 없다’고 설명하며,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은 결코 파괴되지 않으니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은 등으로 세간상(世閒相)을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復次,五衆名世閒,衆生身形色易知,餘心數法無形故難知。是故佛語須菩提:“無量阿僧祇衆生心所行皆知。”深般若中雖無衆生及色等法乃至一切種智,以般若方便力而能知衆生心所行。是般若波羅蜜中畢竟空故,不示色等法乃至一切種智。此中佛說因緣:“般若波羅蜜中尚無般若相,何況色等法!”

중(五衆)을 세간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몸은 형색이 있어서 알기 쉽지만, 그 밖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알기가 어렵나니,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한 바를 모두 아나니, 깊은 심(深)반야에서는 비록 중생과 물질(色) 등의  내지는 일체종지가 없다 할지라도 반야의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하는 심소행(心所行)을 아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필경공이 때문에 물질(色) 등의  내지는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를 내보이지 않는 것이며,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반야의 상(相)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물질(色) 등의 법이겠는가”라고 하셨다.


復次,“般若波羅蜜示世閒”者,一切衆生,若色、若無色。色者,欲、色界衆生;無色者,無色界衆生。有想者,除無想天及非有想非無想天,餘者是有想;無想者,是無想衆生;非有想非無想者,是有頂處天。此閒世界者,是三千大千世界;遍十方者,餘無量無邊阿僧祇世界。是世界六道中三世衆生,佛悉知其攝心、亂心。

 ‘반야바라밀이 세간을 보인다는 시세간(示世閒)’이라 함이란, 빛깔(色)이 있거나 빛깔이 없는 무색(無色)의 일체 중생 중에서 ‘빛깔(色)이 있는 것’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중생이요, 

‘빛깔이 없는 무색자(無色者)’란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을 말하며,

‘생각이 있는 유상(有想)’은 무상천(無想天)과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을 제외한  밖의 생각이 있는 중생을 말하며, 

‘생각이 없는 무상(無想)’이란 바로 생각이 없는 무상중생(無想衆生)이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바로 유정처천(有頂處天)이며, 

‘이 세계라는 차세계(閒世界)’은 바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요, 

‘시방에 두루하다는 편시방(遍十方)’은  밖의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세계에 있는도(六道) 중의세(三世) 중생의 거두어진 마음의 섭심(攝心)과 어지러운 마음의 난심(亂心)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아신다는 것이다.


須菩提聞已,心疑怪:“諸佛常樂行寂滅諸法空,今云何遍知無始無邊衆生攝心、亂心?佛心 一衆生心無量種,云何一時知一切衆生心?”以是故問:“佛云何知?”

佛答:“諸法實相智慧故,知衆生攝心、亂心。”

須菩提問:“何等是諸法實相?”

答曰:“所謂畢竟空。是畢竟空,畢竟空性亦不可得,何況攝心、亂心!”

수보리 존자는 이러한 말씀을 듣고 나서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과 모든 법공(法空)을 행하시기를 좋아하시거늘, 지금은 어떻게 시작도 없고 가없는 무시무변(無始無邊) 중생들의 거두어진 섭심(攝心)과 어지러운 난심(亂心)을 아시는 것이며? 부처님의 불심(佛心)과 한 중생의 마음 등의 무량한 종류를 아신다 하시는 것이며? 어떻게 일시에 일체 중생들의 마음을 아시는 것일까?’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떻게 아시는 것인지요?”라고 물었으며,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제법의 실상(實相)을 아는 실상지혜(實相智慧) 때문에 중생들의 섭심(攝心)과 난심(亂心)을 안다”고 하셨으며, 

수보리 존자가 다시 “어떠한 것이법의 실상인지요?”라고 묻자, 

대답하시기를, “이른바 필경공 때문이니라.  필경공에서는 필경에 공한 성(性, 성품)조차도 얻을  없는 불가득이거늘, 하물며 섭심(攝心)과 난심(亂心)이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諸法實相畢竟空中,無分別心心數法,佛云何知其心?

묻나니, 제법의 실상인 필경공 가운데서는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도 분별하지 않거늘,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그러한 마음을 아시는 것입니까?


答曰:此中佛自說:“諸法實相性亦不可得,以是智慧知衆生攝心、亂心。”何以故?若空性可得,應有難;空性不可得,云何作難?今,佛過一切億想分別虛妄法,安住實相,如實知一切衆生心;衆生心住虛妄法中故,不能知他衆生如實。

답하나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제법실상의 성(性, 성품) 또한 얻을  없다”고 하셨으니, 이 지혜로써 중생들의 섭심(攝心)과 난심(亂心)을 아시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공한 공성(空性)으로서 얻을  있는 것이라면 힐난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공한 공성(空性)으로서 얻을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힐난이 있을  있겠는가?

지금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생각과 분별과 허망한 법을 초월하여 실상에 편히 머무르면서, 일체 중생들의 마음을 여실히 아시는 것이지만, 중생들의 마음은 허망한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다른 중생들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先略說“知他心”,次分別衆生攝心、亂心,所謂三毒、無三毒者,廣大,無量,不可見,出、沒,屈、申等。須菩提事事問,初答以諸法實相故,知攝心、亂心。次以盡、無染、滅、斷、寂、離故知。盡者,無常慧;菩薩行是無常慧心,離一切世閒染。用世閒道遮滅結使,是名滅。用無漏道斷,故名斷。斷諸結使已,觀涅槃寂滅、離相。以是因緣,得諸法實相;以諸法實相,知他攝心、亂心皆是實相。

먼저는 간략하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시는 것을 말씀하셨고, 다음에는 중생의 섭심(攝心)과 난심(亂心) 이른바독(三毒)을 분별하신 것이니, 

삼독이 없는 이는 광대하고 무량하여서 나타난 출(出)ㆍ빠져든 몰(沒)ㆍ굽을 굴(窟)ㆍ펼 신(申) 하는 등을   없는 불가견이나, 수보리 존자는 일마다 모두 묻고 있는 것이며, 

처음에는 “제법의 실상 때문에 섭심(攝心)과 난심(亂心) 아는 것이다”고 답하셨으며, 

다음에는 “ 다한 진(盡), 물듦이 없는 무염(無染), 소멸하는 멸(滅), 끊어지는 단(斷), 고요한 적(寂), 여의는 이(離)이기 때문에 안다”고 하셨으니, 

'다한 진(盡)'이란, 무상한 지혜의 무상혜(無常慧)이라. 보살은  무상혜의 마음으로 행하여 일체 세간의 물든 염(染)을 여의게 되며, 세간도(世間道)로써 번뇌의 결사(結使)를 막아 없애는 것을 바로 소멸하는 멸(滅)이라 하고, 

무루도(無漏道)로써 끊기 때문에 끊어질 단(斷)이라 하며, 

모든 번뇌의 결사를 끊은 뒤에 열반적멸(涅槃寂滅)의 이상(離相)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제법의 실상을 얻게 되며, 제법의 실상으로써 다른 이의 섭심(攝心)과 난심(亂心)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실상인 것이다.

 

復次,是心念念生滅,未來無故不可知;現在念念滅,住時無故不可知。凡夫人取相分別,於三世中憶想妄見,謂知心念。以盡門觀,卽是畢竟空;畢竟空故無所著,是時得道,知諸法實相,於一切法不妄想分別,則如實知他心。

또한  마음은 생각생각마다 생멸하나니, 미래는 아직 없기 때문에   없는 불가지(不可知)이고, 현재는 생각생각마다 멸하여 머무름이 때문에   없는 불가지(不可知)이나, 범부는 상(相) 취하여 분별하면서 세(三世) 가운데에서 생각과 허망한 소견의 망견(妄見)으로 마음에 생각하는 바의 심념(心念)을 안다고 여기나,  

다하는 진문(盡門)으로써 관찰한다면, 그것이  필경공이니, 필경에는 공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는 무소착(無所著)이고, 이 때에 도를 얻어서 제법의 실상을 아나니, 일체법에 대하여 허망한 망견(妄見)으로 분별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마음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染心者,一切法入法性中皆淸淨,是故說:“染心實相,是中無染心。何以故?如實中無心無心數法,何況染心!”瞋心、癡心亦如是。無染心相中,是中無有染心相,染心從本來無故;亦無不染心,無染心是寂滅相,無所分別。

‘물든 마음의 염심(染心)’이라 함은, 일체법이 법성(法性) 가운데에 들어가게 되면 모두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염심(染心) 실상에는 물든 마음이 없는 무염심(無染心)이다’고 한 것이니, 왜냐하면 여실(如實)한 가운데에서는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심수법도 없거늘, 하물며 물든 염심이겠는가? 

성내는 진심(瞋心)과 어리석은 치심(癡心) 또한 그와 같으며, 

물듦이 없는 무염심(無染心)의 상(相) 가운데에는 염심(染心)의 상(相) 없는 것은, 염심이 본래부터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물들지 않은 무염심도 없으며, 물듦이 없는 무염심 바로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라서 분별할 것도 없는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須菩提!二心不俱故。”衆生法,心心次第生,無染心時則無染心。何以故?過去染心已滅,未來未有,現在無染心,則無有染心;染心無故,亦無不染心,相待法無故。是故無染實相中無有染心、不染心。無瞋心、無癡心亦如是。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마음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의 법은 마음과 마음이 차례대로 생기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물듦이 없는 무염심이 생길 때에는 물든 염심이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과거의 물든 염심 이미 사라진 이멸(已滅)하였고, 미래는 아직 있지 못한 미유(未有)이며, 현재에 물든 염심 없다면  염심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든 염심이 없기 때문에 또한 물들지 않은 마음도 없나니, 상대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물듦이 없는 무염(無染)의 실상 가운데에는 물든 염심이나 물들지 않는 불염심 없는 것이니, 성냄이 없는 무진심(無瞋心) 어리석음이 없는 무치심(無癡心)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廣狹、增減心,皆是衆生取相分別。佛不如是知。何以故?是心無色無形、無住處,念念滅,則無廣狹增減差別。此中佛自說因緣:“心性相無故,廣狹等不可得。”廣狹、增減、大小義,如四無量心中說。

넓거나 좁은 광협심(廣狹心), 더하거나 덜하는 증감심(增減心)은 모두 중생이 상(相) 취하여 분별한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이 아시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마음은 무색무형(無色無形)이며, 머무는 곳도 없는 무주처(無住處)이고, 생각생각마다 멸하는 염념멸(念念滅)하는, 즉 넓고 좁음이 없는 무광협(無廣狹)과 더하고 덜함이 없는 무증감(無增減)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성품의 성상(性相)이 없기 때문에 넓거나 좁은, 불광불협(不廣不狹) 등은 얻을  없다”고 하셨으니, 넓고 좁은 광협(廣狹) 더하고 덜한  증감(增減) 크고 작은 대소(大小) 이치는무량심(四無量心)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無量心”者,廣心、大心卽是無量。又緣無量衆生故名無量,又緣涅槃無量法故名無量,又心相不可取故名無量。如有眼、有色因緣故,眼識生,是識不在眼、不在色、不在中閒、不在此、不在彼,是故無住處。若實無住處,云何能有所作若好、若醜? 如夢所見事,不可求其實定相。心亦如是,無依止故無定相,故名無量。廣、大,亦應如是隨義分別說。

‘한량없는 무량심(無量心)’이라 함이란, 넓은 광심(廣心)과 큰 마음의 대심(大心)은  무량하다 것이며, 또한 무량한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무량하다 하며, 또한 열반의 무량한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무량하다고 하며, 마음의 심상(心相)은 취할  없는 불가취(不可取)이기 때문에 무량하다고 하며, 

눈(眼)이 있고 빛깔(色)이 있어서 인(因)과 연(緣)이 되기 때문에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이니,  식(識)은 눈(眼)에 있지도 않고 빛깔(色)에 있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고, 이것에 있지도 않으며 저것에 있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에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니, 만약 진실로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라면 어떻게 지음이 있어서 아름답거나 추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꿈에서  일은  실체로서의 정해진 정상(定相) 구할  없는 것과 같이, 마음 또한 그와 같아서 의지하는 바가 없고 정해진 정상 없기 때문에 무량하다고 하는 것이며,

광대(廣大)하다는 것도 이러한 이치에 따라 분별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問曰:若知心不可見,佛何以故說“如實知不可見心”?

묻나니, 만약 마음이   없는 불가견(不可見)이라고 안다면,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볼  없는 마음을 여실히 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有坐禪人憶想分別,見是心如淸淨珠中縷;觀白骨人中,見心次第相續生;或時見心在身;或見在緣,如無邊識處,但見識無量無邊。破如是等虛妄故,佛言:“如實知衆生心,衆生心自相空故無相相。”

답하나니, 어떤 좌선(坐禪)하는 사람이 기억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을 아는 것이 마치 청정한 구슬 안의 꿰어진 누(縷, 실)을 보고,  뼈만 남은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과 같아서, 차례로 이어지면서 생기는 차제상속생(次第相續生)이니, 혹 때로는 마음은 몸에 있다고 보기도 하며 혹은 연(緣)에 있다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무변식처(無邊識處)에서는 의식이 무량하 무변하다고만 보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은 등의 허망함을 파괴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실히 중생의 마음을 아나니, 중생의 마음은 스스로의 자상(自相) 공(空)하기 때문에 무상상(無相相)이다”고 하신 것이다.


復次,佛以五眼觀此心不可得肉眼、天眼緣色故不見。慧眼緣涅槃故不見。初覺法眼,分別知諸法善不善、有漏無漏等;是法眼入實相中則無所分別,如先說:“一切法無知者、無見者。”是故不應見。佛眼觀寂滅相故不應見。衆生心見者,如實見;不如凡夫人憶想分別見。

또한 부처님께서는안(五眼)으로써  마음을 관찰하셔도 얻을  없으며,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은 빛깔(色)을 반연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나니, 처음 배우는 초학(初學)의 법안(法眼)은법의 착함과 착하지 않은 선불선(善不善)과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등을 분별하며 알되,  법안이 실상(實相) 가운데에 들어가면 분별이 없는 것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으며, 

일체법은 아는 지자(知者)도 없고 보는 견자(見者)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지 못해야 하고, 

불안(佛眼)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 관찰하기 때문에 보지 못해야 하는 것이며,

‘중생심을 본다’는 것은 여실히 보되 범부들이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보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復次,五眼因緣和合生,皆是作法,虛誑不實,佛不信不用。是故言:“不以五眼見。”

또한 5안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니, 이 모두는 짓는 작법(作法)이라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나니, 부처님께서는 믿지도 않고 이용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5안으로써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大智度論卷第六十九 終 대지도론 69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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