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散華品 第二十九 卷五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9. 산화품(散華品)을 풀이함 6
問曰:如來用眼、耳、智慧等能知見者,有何咎?
묻나니, 여래(如來)는 눈과 귀와 지혜 등으로써 능히 알고 보는 이거늘,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荅曰:能見是眼,非是如來。若如來非見相用眼能見者,未取色時,云何知用是眼?亦可用耳見!
답하나니, 능히 보는 것은 바로 눈(眼)이요, 여래가 아니다.
만약 여래가 보는 견상(見相)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라면, 아직 색(色)을 취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이 눈으로써 알수 있겠는가? 또한 귀로써도 볼 수가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問曰:如來用智慧分別能知,眼是能見,餘不能見,以是故用眼,不取餘根!
묻나니, 여래는 지혜로써 분별하여 알 수 있고, 눈(眼), 이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 밖의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으로써는 그 밖의 감관인 여근(餘根)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荅曰:知亦如眼 過知是五衆,非是如來。若用知知眼,復用何事能知此知?
답하나니, 아는 지(知) 또한 마치 눈과 같아서, 아는 지(知)를 지나면, 이것은 오중이요 여래가 아니다.
만약 아는 지(知)로써 눈을 아는 지안(知眼)이라 한다면, 다시 어떠한 것으로써 이 아는 능히 지(知)를 알 수 있겠는가?
問曰:如來用知知眼,以眼知色;若欲知如來,以何得知?若以如來知如來,是則無窮!
묻나니, 여래는 아는 것으로써 눈을 아는 용지지안(用知知眼)이고, 눈으로써 물질을 아는 안지색(眼知色)이나니,
만약 여래를 알고자 한다면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만약 여래로써 여래를 아는 여래지여래(如來知如來)라면 이것은 곧 끝이 없을 것입니다.
荅曰:知相知中住。如來若知,卽是知相;若是知相,則是無常;若無常者,則無後世!
답하나니, 아는 지상(知相)은 아는 가운데에서 머무나니, 만약 여래가 안다면 곧 그것이 아는 지상(知相)이다. 만약 이것이 아는 지상(知相)이라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며, 만약 무상한 것이라면 후세(後世)도 없는 것이며,
復次,離五衆有如來者,如來應是常,如虛空相不應變異受苦受樂,亦應無縛無解,
有如是等過罪。破異故,五衆不在如來,如來不在五衆,亦非如來有五衆。
또한 오중을 여의고도 여래가 있다면, 여래는 바로 항상한 상(常)이니, 마치 허공상(虛空相)과 같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거나 속박 또한 없으며, 해탈도 없어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허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름이 있는 것을 파괴하게 되는 까닭에 오중은 여래에 있지 않고, 여래는 오중에 있지 않으며, 또한 여래가 오중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問曰:應以五衆因緣故有如來;若無五衆,則無如來。
묻나니, 오중의 인연 때문에 여래는 있어야 하는 것으로, 만약 오중이 없다면 여래는 없는 것입니다.
荅曰:若以五衆因緣有如來者,則如來無自性;若無自性,何得從他性生?於五衆中,五種求如來不可得,是故無如來。
답하나니, 만약 오중의 인연 때문에 여래가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자성(自性)이 없으리니,
만약 자성(自性)이 없다면 어찌 다른 성품으로부터 오중 가운데에서 생길 수 있겠는가?
오중의 다섯 가지로 여래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나니, 이 때문에 오중 가운데에 여래는 없는 것이다.
但以戲論故,說有如來;以斷戲論故,無如來。如來是不生不滅法,云何當以戲論求於如來?若以戲論求如來者,則不見如來。
단지 희론(戱論) 때문에 여래가 있다고 설명할 뿐이니, 쓸모없는 희론이 끊어졌기 때문에 여래는 없는 것이다.
여래는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이거늘, 어떻게 쓸모없는 희론으로써 여래를 구하는 것인가?
만약 쓸모없는 희론으로써 여래를 구한다면, 곧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當都無如來,則墮邪見!是故,若以有、無戲論求如來,是則不然!
如來相卽是一切法相,一切法相卽是如來相;如來相卽是畢竟空相,畢竟空相卽是一切法相。
만약 여래가 절대 없어야 한다면, 곧 삿된 사견(邪見)에 떨어지고 말 것이니,
그러므로 있다 없다는 쓸모없는 희론으로써 여래를 구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여래상(如來相)이 곧 일체법상(一切法相)이요, 일체법상(一切法相)이 곧 여래상(如來相)이며,
여래상(如來相)이 곧 필경공상(畢竟空相)이요, 필경공상(畢竟空相)이 곧 일체법상(一切法相)인 것이다.
問曰:此中何以但說二事,言“五衆如中無如來如,如來如中無五衆如”?
묻나니,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에서 “오중여(五衆如) 가운데에는 여래여(如來如)가 없는 것이며,
여래여(如來如) 가운데에는 오중여(五衆如)가 없다.”는 이 두 가지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荅曰:此是略說;說二,則五事都攝。復次,二十種我見,雖一切凡夫人有,不能一時起。
今是會中,或此二事,以是故,但說二事。如五衆,乃至一切種智亦如是。
五衆法相乃至一切種智法相亦如是。五衆如,卽是法相。
답하나니, 이것은 간략한 설명으로, 두 가지를 설명하자면 다섯 가지 모두를 다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20종의 나라는 견해의 이십아견(二十種我見)은 비록 일체 범부인이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한꺼번에 다 같이 일으킬 수 없고, 지금의 이 모임에서는 이 두 가지에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단지 이 두 가지만을 설명할 뿐이니,
오중에서부터, 나아가 일체종지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며, 오중의 법상(法相)에서부터 일체종지의 법상(法相) 또한 그와 같나니, 오중여(五衆如)가 곧 법상(法相)인 것이다.
이십아견(二十種我見), 20살가야견(二十薩迦耶見) 또는 20종살가야견(二十種薩迦耶見)은 살가야견 즉 유신견(有身見)을 5온 또는 5취온에 근거하여 세분하였을 때의 5가지 오아견(五我見)과 15가지 아소견(我所見)을 통칭하는 낱말이다. 전통적인 용어로는 20구살가야견(二十句薩迦耶見)이라 한다.- 위키
問曰:若如卽是法相,何以重說?
묻나니, 만약 여(如)가 곧 법상(法相)이라면 무엇 때문에 거듭 설명하는 것입니까?
荅曰:行者旣到五衆如,心驚,法相何以畢竟空無所有!是故說五衆法法相自爾。如人觸火燒手,則無慍心,以其火相自爾故;若人執火燒之,則忿然而怒,以其執火燒故。
답하나니, 수행하는 행자가 이미 오중의 여(如)에 도달한 뒤에, 마음으로 놀라면서 “법상(法相)은 무엇 때문에 필경공이면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인가?”라고 하기 때문에 “오중의 법상(法相)은 저절로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의 손이 불에 닿아서 불에 데이면 성내는 마음없이 그 불의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불을 들고 와서 그의 손을 태우면 발끈 성을 내나니, 그가 불을 가지고 와서 태우기 때문이다.
“如來五衆如中、五衆法相中,不合不散”者,除五衆如無如來,卽是一相,所謂無相。所以者何?一法無合無散故,二法故有合有散。離五衆法相,亦無合無散。所以者何?離五衆法相,如來不可得故。
“여래는 오중여(五衆如)에서와 오중의 법상(法相)에서 합하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불합불산(不合不散)이다.”고 함이란,
오중여(五衆如)를 제외하고는 여래가 없는 것이니, 곧 그것은 하나의 일상(一相)으로, 이른바 무상(無相)이니,
왜냐하면 하나의 일법(一法)은 합하고 흩어짐도 없는 무합무산(無合無散)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합하고 흩어짐이 있는 유합유산(有合有散)이거니와 오중의 법상(法相)을 여의고는 합하거나 흩어짐이 없는 무합무산(無合無散)이니,
왜냐하면 오중의 법상(法相)을 여의고는 여래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如來如、法相,五衆如、法相無二無別,故言:“離五衆如、五衆法相,亦不合不散。”乃至一切種智亦如是。能如是知諸法如、法相不合不散故,有是神力。
여래여(如來如)와 법상(法相)과 오중여(五衆如)와 법상(法相)은 둘이 아니고 구별도 없는 무이무별(無二無別)기 때문에 “오중여(五衆如)와 오중법상(五衆法相)을 여의고는 또한 합하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불합불산(不合不散)이라고 하나니, 일체종지 또한 그와 같으니,
이와 같이, 제법의 여(如)와 법상(法相)은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불합불산(不合不散)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력(神力)이 있게 되는 것이다.
“當於何處求”者,上來因佛神力說般若相,今直說云何求般若。論者言:五衆虛誑無常,本無今有,已有還無,如幻如夢。
“반드시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 것인가?”함이란, 위에서 부처님의 신력으로 반야상(般若相)을 설명했거니와 지금은 곧장 “어떻게 반야를 구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 논자(論者)는 말하기를 “오중은 거짓이고 무상함이며 본래는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요, 이미 있었다가 다시 없게 된 것이니, 마치 환과 같고 마치 꿈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般若波羅蜜是諸佛實智慧,云何當於五衆中求?譬如求重寶,必於大海寶山中求,
不應在溝瀆臭穢處求。離五衆則無生無滅、無作無起、無有法相,是中云何可求?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실지혜(實智慧)이거늘, 어떻게 오중 가운데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귀중한 보배를 구할 때에는 큰 바다나 보배산 가운데에서 구하고, 도량이나 더러운 악취 나는 곳에서 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오중을 여의면 나고 멸함이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지음이나 일으킴도 없는 무작무기(無作無起)이어서, 법상(法相)이 없거늘, 이 가운데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復次,五衆、般若波羅蜜,不一不異、不合不散,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
또한 오중과 반야바라밀은 동일하지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이며, 합하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불합불산(不合不散)이며, 무색(無色)이고,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한 일상(一相)이라,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問曰:般若波羅蜜,是智慧心數法故,可應無色、無形、無對;五衆中色衆,云何當說無形、無對?
묻나니, 반야바라밀은 바로 지혜와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색(無色)이고,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라 할 수 있겠지만, 오중 가운데의 색중(色衆)이 어떻게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荅曰:聖人以慧眼觀諸法平等皆空,一相,所謂無相;以是故,色衆無形、無對。復次,凡夫人所見色非實,種種如先破。
답하나니, 성인은 혜안(慧眼)으로써 제법은 평등하고 모두가 공하며, 일상이어서 이른바 무상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물질은 무형(無形)이고,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이며,
또한 범부인이 보는 바의 색(色)은 진실이 아니니, 그 갖가지에 대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復次,有因緣,般若波羅蜜不卽是如凡夫人所見五衆;破凡夫人所見五衆故,卽是般若波羅蜜,故言不離。乃至一切種智亦如是。如相、法相相,如先說。
다시 인연이 있으니, 곧 반야바라밀, 그것이 범부인이 보는 바와 같은 오중이 아니니, 범부인이 보는 바의 오중을 깨뜨리는 까닭에 곧 반야바라밀이며, 그러한 때문에 “여의지 않는 불리(不離)”라 하는 것으로, 나아가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고, 여상(如相)과 법상상(法相相)도 앞에서의 설명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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