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十無品 第二十五 卷五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5. 십무품(十無品)을 풀이함 2
復次,舍利弗!如無有故、空故、離故、性無故,實際無有故、空故、離故、性無故,不可思議性無有故、空故、離故、性無故,菩薩前際不可得。餘如上說。
다시 사리불이여, 여(如)는 있는 바가 없는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공(空)하기 때문에, 여의는 이(離)이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실제(實際)는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공(空)하기 때문에, 여의는 이(離)이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은 무유(無有)이고, 공하고 여의는 이(離)이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밖의 다른 것도 위에서의 설명과 같습니다.
復次,舍利弗!聲聞無有故,菩薩前際不可得;聲聞空故、離故、性無故,菩薩前際不可得。
辟支佛無有故、空故、離故、性無故,菩薩前際不可得。
佛無有故、空故、離故、性無故,菩薩前際不可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有故乃至性無故,菩薩前際不可得。
다시 사리불이여, 성문(聲聞)은 있는 바가 없는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으며,
성문은 공하기 때문에, 여의는 이(離)이기 때문에,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으며,
벽지불(辟支佛)도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공하기 때문에 여의기 때문에,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으며,
부처님은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공하기 때문에, 여의기 때문에,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나아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습니다.
復次,一切種智無有故乃至性無故,菩薩前際不可得。何以故?舍利弗!空,前際不可得、後際不可得、中際不可得,菩薩不可得。
다시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있는 바가 없는 무유(無有)이기 때문에, 또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공(空)에서는 전제를 얻을 수 없고, 후제도 얻을 수 없고, 중제도 얻을 수 없으며, 보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舍利弗!空,不異菩薩,亦不異前際;空、菩薩、前際,是諸法無二無別。以是因緣故,舍利弗!菩薩前際不可得,後際、中際亦如是。”
사리불이여, 공(空)은 보살과 다르지 않고 또한 전제와 다르지도 않으니, 공(空)과 보살(菩薩)과 전제(前際)라는 이 모든 법은 둘이 아닌 무이(無二)이고, 구별도 없는 무별(無別)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사리불이여, 보살의 전제는 얻을 수 없으니, 후제와 중제 또한 그와 같습니다.”
▶論. 問曰:上已說“菩薩、菩薩字不可得,爲誰說般若波羅蜜”,今何以更說?
▷논. 묻나니, 앞에서 이미 “보살과 보살의 명자(名字, 이름)는 얻을 수 없다고 하였거늘, 그 누구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말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다시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不應作是問!須菩提空行第一,常樂說空;若有所說,常以空門利益衆生。
답하나니, 그러한 질문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공행제일(空行第一)이어서 항상 공(空)을 말하기를 좋아하여, 만약 말할 곳이 있으면 항상 공문(空門)으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復次,上略說,是中十種廣分別菩薩不可得。行者若觀諸法空,隨順無相、無作;以無作心故,不欲有所作,尚不能自作利益,何況利益人!
또한 앞에서는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요 여기에서는 열 가지로 “보살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라는 것을 자세히 분별하였으니, 수행하는 이가 만약 제법의 법공(法空)을 관찰하면서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을 따르면, 조작이 없는 무작심(無作心)인 까닭에 조작된 바의 유소작(有所作)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니, 오히려 스스의 이익도 짓지 못하거늘 하물며 남의 이익이겠는가?
若人住我心中,能分別諸法善不善相,集諸善法、捨不善法;今佛說:“般若波羅蜜中,不應計我心,不應分別諸法。”
만약 사람이 '나'라는 아심(我心)에 머무르면 제법의 착하고 착하지 않은 선불선상(善不善相)을 분별하면서 모든 선법은 쌓고, 불선법은 버리게 되므로, 지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나라는 아심(我心)을 헤아리지 않아야 하고, 제법을 분별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但行衆善,是事爲難。行者作是念:‘若無我者,爲誰修善?
先有我,今以般若波羅蜜故無’ 心生憂戚,是故須菩提更重說:“我從本已來無 非先有今無”
단지 여러 가지 착한 선(善)을 행함이 어려워지므로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만약 나가 없는 무아(無我)라면 누구를 위하여 선(善)을 닦는 것인가? 먼저는 나가 있는 유아(有我)였는데, 지금 반야바라밀 때문에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근심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다시 거듭 말하기를 “나(我)는 본래부터 없었으니, 먼저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行者如是如是本來自無,今無所失,故無所憂。譬如深根大樹,不可以一斫能辦,多用斧力乃能斷;菩薩空亦如是,不可一說便得,以是故廣分別。
수행하는 행자(行者)는 이와 같이 본래부터 스스로 없었던 것으로, 지금 잃은 것이 아니기에 근심할 것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뿌리가 깊은 큰 나무는 한 번 찍어서 넘어뜨릴 수 없어서 여러 번 도끼질을 해야 비로소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보살공(菩薩空) 또한 그와 같아서 한 번의 설명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분별하는 것이다.
須菩提問佛時,作是念:‘若定有菩薩法,應三世通有。今前世中無有菩薩。何以故?前世無初故。未來世亦如是,未有因緣故。前後相待故有中閒,若無前後則無中閒。’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물으실 때에 생각하기를 ‘만약 결정코 보살법이 있는 것이라면 3세(삼世)도 공통되게 있어야 하는 것이라. 지금 전세(前世)에 보살이 없으니, 왜냐하면 전세는 처음이 없기 때문이며, 미래세 또한 그와 같음은 아직 인연이 있지 않은 때문이며, 전후(前後)가 상대(相待)하기 때문에 중간이 있는 것인데 만일 전후(前後)가 없다면 중간도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若謂“五衆是菩薩”;五衆無邊,如先種種因緣說五衆畢竟空故無量無邊,無量無邊故同無爲法。若菩薩無邊者,是事不然!以此因緣故,菩薩不可得,當爲誰說?
만약 5중(五衆), 이것을 보살이라 한다면 오중은 무변(無邊)이니, 앞에서 갖가지의 인연으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오중은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무량하고 무변하며, 무량하고 무변하기 때문에 무위법(無爲法)과 같거니와 만약 보살이 무변하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은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누구를 위하여 말하여야 하는 것인가?
常一切處、一切種、一切時求菩薩不可得,當爲誰說?如我畢竟不生、空無所有,五衆亦如是畢竟不生、無所有。旣無衆生及五衆法,云何有菩薩?
항상 일체 처소와 일체 종류와 일체의 때에 보살을 구한다 하여도 얻을 수 없거늘,
그 누구를 위하여 말하여야 하는 것인가?
마치 나는 필경에 불생(不生)이며,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인 것과 같이, 오중 또한 그와 같아서 필경에는 불생(不生)이며,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이미 중생과 오중법(五衆法)조차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보살이 있는 것인가?
問曰:衆生及五衆法畢竟不生,解是法者,卽是菩薩?
묻나니, 중생과 오중법(五衆法)은 필경에 불생(不生)이니, 이 법을 아는 이가 곧 보살인 것입니까?
答曰:“畢竟不生”不名爲色,不名爲受想行識。何以故?五衆是生相,畢竟不生中無是分別。五衆畢竟不生,不可以敎化;離畢竟不生,亦無菩薩行道,當敎誰?菩薩聞是不怖、不畏,是爲能行菩薩道。
답하나니, 필경에 불생(不生)이므로 물질(色)이라 하지 못하며, 필경에 불생(不生)이므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오중 이것은 나는 생상(生相)이어서 필경에 불생(不生)하는 가운데에서는 이러한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중이 필경에 불생(不生)이면 교화할 수도 없거니와 필경에 불생(不生)임을 여의면 또한 보살로서 도를 행하는 이가 없거늘,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보살이 이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보살의 도를 행하는 이이다.
問曰:我與菩薩是一物,云何以我喩菩薩?
묻나니, 나와 보살, 이것은 하나인 일물(一物)이거늘 어떻게 나(我)로써 비유를 삼는 것입니까?
答曰:是般若波羅蜜中一切法空,初學不得便爲說空!先當分別罪福,捨罪修福德;福德果報無常,無常故生苦,是故捨福厭世閒,求道入涅槃。
답하나니,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일체법이 공한 일체법공(一切法空)이라.
처음 배우는 초학자(初學者)는 아직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공(空)을 말하는 것이니, 먼저 마땅히 죄와 복을 분별하면서 죄는 버리고 복덕은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덕의 과보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나기 때문에 복을 버리고 세간을 싫어하여 도(道)를 구하여서 열반에 드는 것이다.
爾時,應作是念:“因我故生諸煩惱,是我於六識中求不可得,但以顚倒故著我。”是故解無我易,易可受化。
그 때에는 생각하기를 “나로 인하여 모든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이 나를 6식(六識) 가운데에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다만 뒤바뀜 때문에 나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고 해야 하나니,
이 때문에 무아(無我)임을 알기도 쉽고 교화받기도 쉬운 것이다.
若言“色空”,則難解;雖耳聞說空,眼常見實。是故先破惡罪中我,後破一切諸法。
만약 물질(色)이 공(空)하다고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우니, 비록 귀로는 공하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눈으로는 항상 그 실제를 보고 있기 때문에, 먼저 죄악 가운데에서 나를 깨뜨리고, 그 뒤에 일체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一切佛弟子,得道者自知自證無我,未得道者信餘法空,不能如信無我,是故以無我爲喩。
일체의 불제자로서 도를 얻은 이는 무아(無我)임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았거니와,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는 그 밖의 법공(法空)을 믿으면서 무아(無我)를 믿음이 그 보다 못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로써 비유를 삼은 것이다.
此中須菩提說一切法空,推無菩薩,用無我爲喩;以小喩大,如石蜜喩甘露。
이 가운데에서 수보리 존자가 말하기를 “일체법공(一切法空)이므로 아무리 추구(推求)하여도 보살은 없는 것이다.”고 하면서 무아(無我)로써 비유를 삼나니, 작은 것으로써 큰 것에 비유함은 마치 석밀(石蜜)을 감로(甘露)에 비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舍利弗知空無我義,何以故事事致問?
묻나니, 사리불 존자는 공과 무아의 이치를 알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이것 저것을 묻는 것입니까?
答曰:須菩提聲聞人,德不如菩薩,而於佛前說深般若,新學菩薩心或生疑。上佛雖言“汝說摩訶衍隨順般若”,猶謂佛將順須菩提。舍利弗欲斷此疑,故發問。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성문의 사람이라 그 덕이 보살보다 못하나, 부처님 전에서 깊은 반야을 설하고 있으므로 새로 배우는 보살이 혹 마음으로 의심을 내면서 “위에서 부처님께서는 비록 ‘그대가 말한 마하연은 반야를 따르고 있다.’고 말씀하셨을지라도 오히려 부처님이 수보리를 따르고 있다.”고 여길 수 있으므로 사리불 존자가 이러한 의심을 끊게 하고자 짐짓 질문하는 거이다.
復次,佛欲共須菩提說般若,乃至終竟;是故舍利弗事事質問,令須菩提善分別深義,使衆人敬信。以是故問:“過去世中菩薩不可得,乃至不恐不怖。”須菩提答義:我、衆生、人卽是一物。
또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와 함께 반야를 마지막까지 설하시고자 하시는 때문에 사리불 존자가 이것 저것을 질문하면서 수보리 존자로 하여금 깊은 이치를 잘 분별하게 하여, 뭇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믿게 하나니,
이 때문에 과거세에서 보살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나아가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데에 이르기까지를 묻는 것이요, 수보리 존자가 그 뜻을 대답하면서 “나와 중생과 사람은 곧 일물(一物)이다.”고 한 것이다.
未得道時,名凡夫人;初入道乃至阿羅漢,名聲聞人;觀因緣法悟空小深,少愍衆生,名辟支佛人;深入空法,行六波羅蜜,大慈大悲,是名菩薩人 功德別異故,名字亦異。如我、衆生、人一事,以眼見事故名見者,意得故名知者,受苦樂故名受者。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미득도(未得道)의 때에는 범부인(凡夫人)이라 하고,
처음 도에 들어서부터 아라한까지를 성문인(聲聞人)이라 하며,
인연법(因緣法)을 관찰하면서 공을 깨친 오공(悟空)은 조금 깊은 것으로, 중생을 조금 가엾이 여기는 벽지불인(辟支佛人)이라 하고,
공법(空法)에 깊이 들어가, 육바라밀과 대비를 행하는 이를 바로 보살인(菩薩人)라 하나니,
그 공덕이 다르기 때문에 이름 또한 다른 것이다.
마치 나와 중생과 사람은 같은 하나의 일사(一事)이지만, 눈으로 일을 보기 때문에 보는 견자(見者)라 하고,
뜻으로 얻기 때문에 아는 지자(知者)라 하며, 고통과 쾌락을 받기 때문에 받는 수자(受者)라 하는 것이다.
是我、衆生、人等,先已說種種因緣無故,菩薩亦應無。是故須菩提語舍利弗:“衆生無故,三世中無菩薩。”
이 나(我)와 중생(衆生)과 사람(人) 등에 대해서는 이미 갖가지의 인연으로써 없는 무(無)라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보살 또한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수보리 존자는 사리불 존자에게 말하기를 “중생이 없는 중생무(衆生無)이기 때문에 3세(三世) 가운데에서 보살이 없는 무보살(無菩薩)이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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