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摩訶薩品 第十三 卷四十五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15. 대장엄품(大莊嚴品)을 풀이함 2
▶論. 釋曰:富樓那聞上二大弟子說摩訶薩義,而佛可言:“善哉!”
又富樓那,佛大衆中讚歎法師之上,復欲說摩訶薩義,白佛言:“我亦樂說" 佛卽聽許。
▷논. 해석한다; 부루나 존자는 위의 두 큰 제자(수보리, 사리불 존자)가 마하살의 뜻을 말하자 부처님께서 인가하시면서 “훌륭하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부루나 존자는 부처님의 대중 가운데에서 법사(法師)로서는 제일이라고 찬탄 받는 이로써, 다시 마하살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부처님께 “저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즉시 이내 허락하신 것이다.
問曰:須菩提說般若波羅蜜主,舍利弗應問須菩提,今何以故乃問富樓那?
묻나니, 수보리 존자가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는 주인이시니, 사리불 존자는 당연히 수보리 존자에게 물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부루나 존자에게 물은 것입니까?
答曰:此二人同是婆羅門,俱以母字爲名;此二人佛法中俱大 舍利弗智慧中大;
富樓那說法種種莊嚴,牽引衆情,說法中大。是故二人等等,故於佛前共論。
답하나니, 이 두 분은 똑같이 전에는 바라문이었으며, 다 같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으며,
이 두 분은 부처님 불법 가운데에서도 다 같이 위대한 이로서, 사리불 존자는 지혜가 크고, 부루나 존자는 설법할 때에 갖가지로 장엄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등, 설법에서 가장 뛰어나셨으니,
두 분은 동등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 앞에서 함께 논의하는 것이다.
又富樓那先已共舍利弗論議,善能相答,如『七車譬喩經』中說,已共爲親厚,好共論理;
須菩提無是因緣。又富樓那說摩訶薩義,是故應問,云何乃問須菩提?
또한 부루나 존자는 전에 이미 사리불과는 함께 논의하면서 서로 문답을 잘하기도 하였으니,
'칠거비유경(七車譬喩經)'에 나오는 말과 같이, 이미 친하고 두터운 사이요 함께 이치를 잘 논의하기도 하였지만,
수보리 존자와는 그러한 인연이 없으며,
또한 부루나 존자가 마하살의 뜻을 말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에게 물어야 되거늘, 어떻게 수보리 존자에게 묻겠는가!
所說“摩訶薩”義者,所謂是人大莊嚴。如人遠行,重有資糧;
又如破賊,備諸器仗。是菩薩亦如是,欲破魔入煩惱賊故,行六波羅蜜以自莊嚴。
말한 바의 마하살의 뜻이란 이른바 이 사람이 대장엄(大莊嚴)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멀리 여행을 떠날 때에 양식을 무겁게 많이 지니는 것과 같고, 또한 도둑을 깨뜨릴 때에 무기를 갖추는 것과 같이,
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악마와 번뇌의 도둑을 깨뜨리고자 육바라밀을 행하면서 스스로를 장엄하는 것이다.
是人無量劫來久住生死,集諸福德、智慧以爲資糧,三種乘中爲趣大乘故,發心行六波羅蜜,乘是大乘。
이 사람은 오래도록 무량한 겁 동안 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거듭하면서, 모든 복덕과 지혜를 쌓은 것으로써 양식을 삼았으며, 삼승(三乘) 가운데에서 대승(大乘)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마음을 내어 육바라밀을 행하면서 이 대승에 오른 것이다.
舍利弗問富樓那:“聲聞、辟支佛亦趣道,何以不名大莊嚴,而但說菩薩大莊嚴?”
富樓那答言:“聲聞、辟支佛雖行布施等六事,有量有限,自爲度身,及餘衆生可度者度,是故不名大莊嚴。
사리불 존자가 부루나 존자에게 묻기를 “성문과 벽지불도 역시 도(道)에 나아가거늘 무엇 때문에 크게 장엄한다고 하지 않고 단지 보살만이 크게 장엄하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자,
부루나 존자가 대답하기를 “성문이나 벽지불이 비록 보시 등의 육바라밀을 행하기는 하나, 그 분량이 있고 한계가 있으며, 스스로를 제도하며, 나아가 그 밖의 중생으로서 제도할 수 있는 이를 제도하게 될 뿐이니,
그러므로 대장엄(大莊嚴)이라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菩薩所度,不分別、不齊限爲若干衆生故布施乃至智慧,
不作是念:‘我度若干人令得三乘,不能度若干人;
令若干人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若干人不能度。’
보살은 제도할 바를 분별하지도 않고, 약간(若干, 그다지 많지 않은)의 중생을 위하겠다는 제한을 두지도 않기 때문에
보시를 하거나 지혜에 이르기까지 ‘나는 약간(若干)의 중생을 제도하여 삼승(三乘)을 얻게 할 것이며, 약간(若干)의 중생은 제도할 수 없을 것이며, 약간(若干)의 사람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할 것이고, 약간(若干)의 사람은 제도할 수 없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菩薩作是莊嚴,令一切衆生盡入大乘作佛。
菩薩行大莊嚴,自行檀波羅蜜,亦令一切衆生行檀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
보살은 이러한 장엄을 지으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남김없이 대승에 들어가서 부처님이 되게 하고자 하나니,
보살이 대장엄(大莊嚴)을 행하면서 스스로 단바라밀을 행하고, 또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단(보시)바라밀을 행하게 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問曰:云何名“大莊嚴”?
묻나니, 무엇을 크게 장엄한다는, 대장엄(大莊嚴)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爲度衆生故,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行諸善福功德者,略說是六波羅蜜。
如富樓那次第說。
답하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모든 선(禪)과 복과 공덕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간략히 말하자면, 여섯 가지의 바라밀이니, 마치 부루나 존자가 차례로 말씀한 것과 같은 것이다.
若菩薩爲一切智慧故,行檀波羅蜜,是福德共一切衆生。
“共”者,此布施福德,我及衆生共等,我以此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보살이 일체지(一切智)를 위하여 단(보시)바라밀을 행한다면, 이 복덕을 일체 중생들과 함께 하는 공(共)이니,
함께 한다는 공(共)이라 함이란, 이 보시한 복덕을 나와 중생들이 함께 지니는 것이니,
이로써 자신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며,
“迴向”者,於此福德,不求人王、天王、世閒禪定樂;爲衆生,乃至涅槃樂亦不求,
持此果報,盡爲度衆生故求佛法。如是等相,是名“檀波羅蜜大莊嚴”。
회향(廻向)한다 함이란, 이 복덕으로 사람의 왕이나 하늘의 왕이나 세간의 선정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중생들 내지 열반의 즐거움을 위하는 것이요
또한 이 과보를 지니려 하지 않고 남김없이 중생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불법을 구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상(相)을 바로 단바라밀로써 대장엄(大莊嚴)하는 것이라 하며,
是菩薩行布施時,若見諸辟支佛、阿羅漢現大神通,得漏盡,入涅槃,
於中不貪不著,一心修佛道,是名“檀波羅蜜生尸羅波羅蜜”。
이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만약 모든 벽지불이나 아라한이 큰 신통을 나타내고 번뇌를 다한 누진(漏盡)을 얻어서 열반에 드는 것을 보아도, 그러한 것을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일심으로 부처님의 불도를 닦는 것을 단(보시) 바라밀에서 시라(지계)바라밀을 내는 것이라 하며,
布施時,有人惡口罵詈,刀杖毀害,所不應乞者而强乞,不瞋不悔,入諸法相中,
所謂畢竟空,是名“檀波羅蜜生羼提波羅蜜”。
보시를 할 때에 어떤 사람이 거친 말을 하고 매도하고 욕하며, 칼이나 몽둥이로 해하려 하거나, 구걸하지 않아야 할 이가 억지로 구걸하여도 화를 내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면서, 제법의 법상(法相),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에 드는 것을 단(보시)바라밀로써 찬제(인욕)바라밀을 내는 것이라 하며,
行布施時,和合財物、守護施彼身心不懈不息,是名“檀波羅蜜生毘梨耶波羅蜜”。
보시를 행할 때, 재물을 화합하여 그를 수호하고 보시하되 몸과 마음이 게으르지도 않고 쉬지도 않나니,
이를 단바라밀로써 비리야(정진)바라밀을 내는 것이라 하며,
布施時,一心念佛,念諸佛法,不令聲聞、辟支佛心入, 因是布施,卽入禪定,是名“檀波羅蜜生禪波羅蜜”。
보시할 때에 일심으로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불(念佛)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法)을 생각(念)하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이 들지 않게 하고, 이 보시로 인하여 곧 선정에 들어가나니,
이를 단바라밀로써 선바라밀을 내는 것이라 하며,
布施時,菩薩作是念:施者、受者、財物,因緣和合生故無自性,無自性故空,如幻、如夢,
衆生空故,無受者、無施者;法空故,無財物,是名“檀波羅蜜生般若波羅蜜”。
보시할 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보시하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와 재물(財物)은 원인인 인(因)과 조건의 연(緣)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인 까닭에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공(空)하여 마치 환(幻)과 같고 마치 꿈과 같으며,
중생이 공한 중생공(衆生空)이기 때문에 받는 수자(受者)도 없고 보시하는 시자(施者)도 없으며, 법이 공한 법공(法空)이기 때문에 재물(財物)도 없다.’고 하나니, 이러함을 단바라밀로써 반야바라밀을 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若菩薩爲一切智故,不取諸波羅蜜相,而能行諸波羅蜜,是名“菩薩大莊嚴”。
此中一波羅蜜備生諸波羅蜜,此經中自分別其義。古今語異,義不了故,助分別說,開論議門。
餘五波羅蜜,亦應如是隨義說。
만약 보살이 일체지를 위하여 모든 바라밀의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바라밀을 행할 수 있다면,
이를 보살의 대장엄(大莊嚴)이라 하나니, 이러한 가운데에서 하나의 바라밀이 모든 바라밀을 갖추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이 경에서 스스로 그 뜻을 분별하고 있지만 고금(古今)의 말이 다르고 뜻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과 설명을 도우면서 논의문(論議門)을 열어 두는 것이니, 나머지의 다섯 바라밀도 이와 같이 그 이치에 따라 설명되는 것이다.
問曰:何以但檀波羅蜜中說生六波羅蜜,餘波羅蜜中但說生五?
묻나니, 무엇 때문에 오직 단(보시)바라밀 가운데에서만 육바라밀을 낸다 하시고, 그 밖의 바라밀 가운데에서는 단지 다섯 가지만을 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若後五波羅蜜中各各生六,亦無咎。
六波羅蜜非一時、非一念法,無量劫中集六種功德和合名爲六波羅蜜。
先生小,後生中、大,有何咎?一切諸法皆初小後大,以是故,諸餘波羅蜜各各應生六。
답하나니, 설령 뒤의 다섯 바라밀 가운데에서 저마다 여섯 바라밀을 낸다 하여도 허물이 없나니,
육바라밀은 한 때의 일시(一時)가 아니요, 한 생각의 일념법(一念法)도 아닌 것으로,
무량한 겁 동안 여섯 가지의 공덕을 쌓아서 화합한 것을 육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라.
먼저 작은 것을 내고 나중에 중간과 큰 것을 내는 것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일체 법들 모두가 처음에는 작고 나중에는 큰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나머지의 다른 바라밀들도 저마다 여섯 가지를 내는 것이며,
復次,一切諸佛說法時,檀波羅蜜爲初門。
如經中說:“佛常初爲衆生說布施、說持戒、說生天,說五欲味,先說世閒苦惱、
道德利益,後爲說四諦。”以是故,初說檀。
또한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는 단(檀)바라밀을 초문(初門, 첫 문)으로 삼으시니,
마치 경에서의 설명과 같이,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에 중생들을 위하여 보시할 것을 말씀하시며,
그리고는 계율 지닐 것을 말씀하시고 하늘에 가서 날 것을 말씀하시며 오욕의 맛을 말씀하시며,
먼저 세간의 고뇌와 도덕의 이익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들을 위하여 네 가지 진리인 사제(四諦)를 말씀하시나니,
이 때문에 맨 처음에 단(檀, 보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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