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集散品 第九下 卷第四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9. 집산품(集散品)을 풀이함 ② 3
復次,是智慧爲度一切衆生故、爲得佛道故。是智慧相應受、想、行、識,及從智慧起身業、口業,及生、住等心不相應諸行,是諸法和合,名爲波羅蜜。是諸波羅蜜中,智慧多故,名爲般若波羅蜜;念、定等多故,名爲禪波羅蜜;餘波羅蜜義亦如是。如是等種種無量因緣故,名爲般若波羅蜜。
또한 반야바라밀의 지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불도를 얻게 하기 때문에, 이 지혜와 상응한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 및 나아가 지혜로부터 일으키는 신업(身業)ㆍ구업(口業), 생(生)ㆍ주(住, 머무름) 등의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심불상응(心不相應) 모든 행의 제법과 화합하는 것을 바라밀(波羅蜜)이라 하고,
이 모든 바라밀 가운데에서 지혜가 많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마음챙김의 염(念)과 선정(禪定) 등이 많기 때문에 선(禪, 선정)바라밀이라 하며,
그 밖의 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으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무량한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是誰般若波羅蜜?”者。第一義中無知者、見者、得者,一切法無我、無我所相,諸法但空,因緣和合相續生。若爾!般若波羅蜜當屬誰?
“이것은 누구의 반야바라밀인가?”라고 함이란,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지자(智者)와 눈으로 색(色)을 보는 견자(見者)와 얻는 득자(得者)도 없으며,
일체법은 무아(무無我)의 상(相)과, 내 것이 없는 무아소(無我所)의 상(相)도 없나니,
제법은 단지 공(空)일 뿐이니, 인연과 화합하여 상속(相續)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라.
만약 그러하다면 반야바라밀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되겠는가!
제일의(第一義)=제일의제(第一義諦, para- mārtha-satya), 또는 진제(眞諦), parama는 훌륭하고 수승하다는 뜻이고 artha는 의미라는 뜻이다. 세속제는 진제(眞諦)에 대비되는 속제와 같은 말이고 산스크리트어로 saṃvṛti-satya이다. 승의제는 마음의 영원불멸한 실상을 깨닫는 것을 말하고, 속제는 마음의 동요가 빚는 갖가지 생멸의 상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안근(眼根)을 제외한 그 밖의 네 가지 감관인 사근(四根, 이근 비근 설근 신근)으로 아는 바와 의식(意識)으로 아는 바를 통틀어서 아는 지자(知者)라 하는 것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5권 7
佛法有二種:一者、世諦,二者、第一義諦。爲世諦故,般若波羅蜜屬菩薩。凡夫人法種種過罪,不淸淨故,則不屬凡夫人。
부처님의 불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요, 둘째는 첫째가는 이치인 제일의제(第一義諦)라.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보살에게 속하는 것으로,
범부인의 법은 갖가지의 허물이 있고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범부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다
般若波羅蜜畢竟淸淨,凡夫所不樂;如蠅樂處不淨,不好蓮花。
凡夫人雖復離欲,有吾我心,著離欲法故,不樂般若波羅蜜。
반야바라밀은 필경에 청정한 것이므로 범부는 좋아하지 않나니,
마치 파리가 더러운 곳을 좋아하고 연꽃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이,
범부인이 비록 욕망을 여의었다 할지라도 '나(我)'라는 마음이 있고
욕망을 여의고자하는 이욕법(離欲法)에 집착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며,
聲聞、辟支佛,雖欲樂般若波羅蜜,無深慈悲故,大厭世閒,一心向涅槃,是故不能具足得般若波羅蜜。
성문이나 벽지불이 비록 반야바라밀을 얻기를 원하고 좋아한다 하여도, 깊은 자비가 없기 때문에 크게 세간을 싫어하면서 일심으로 열반을 향할 뿐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지 못하는 것이며,
是般若波羅蜜,菩薩成佛時,轉名“一切種智”。以是故,般若不屬佛,不屬聲聞、辟支佛,不屬凡夫,但屬菩薩。
이 반야바라밀은 보살이 성불할 때에는 바뀌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반야는 부처님께도 속하지 않고, 성문과 벽지불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범부에게도 속하지 않고,
오직 보살에게만 속할 뿐이다.
問曰:此經中常說五衆在前、一切種智在後,今何以先說六波羅蜜?
묻나니, 이 경 가운데에서는 항상 말하기를 “오중(五衆)이 앞에 있고 일체종지는 나중에 있다.”고 하셨거늘,
지금 어찌하여 먼저 “육바라밀”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舍利弗問須菩提無所有義解,五衆種種因緣觀,强令無所有,難解;般若波羅蜜卽是無所有,易解。譬如水中月,易明其空;天上月,難令無所有。
답하나니, 사리불존자가 수보리존자에게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뜻(義)’을 물었을 때에
오중의 갖가지 인연관(因緣觀)으로써 억지로 있는 바가 없게 한다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야바라밀이 곧 있는 바가 없다.”고 하면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물속에 있는 달을 헛것이라고 밝히기는 쉽지만, 천상에 있는 달을 없는 무소유(無所有)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이다.
五波羅蜜與般若波羅蜜同名、同事,是故續說五波羅蜜,然後續說五衆乃至一切種智無所有、不可得。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의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과 이름을 같이하고 같이 일을 하기 때문에 계속 언급하는 것이나, 그런 다음에는 계속하여 “오중 내지 일체종지는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고 설하는 것이다.
菩薩入是門,觀諸法實相,不恐不怖者,當知是菩薩不離般若波羅蜜。”不離”者,常行般若波羅蜜不虛,必有果報。
보살이 이 문(門)으로 들어가 제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면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여의지 않는다는 불리(不離)라 함이란,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므로 헛되지 않아서 반드시 과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此中須菩提自說不離因緣,所謂“色離色性,色中無色相,虛誑無所有。”菩薩能如是知,不離實智慧;乃至實際亦如是。菩薩能行是無障碍道,得至薩婆若,一切法不生、不出故。
이 가운데에서 수보리존자는 스스로 여의지 않는 인연에 대하여 설하기를
“이른바 물질은 물질의 성품인 색성(色性)을 여읜지라 물질 가운데에는 물질의 상이 없는 색중무색상(色中無色相)이고, 거짓의 허광(虛誑)된 것이며,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라.
보살이 이와 같이 여의지 않는 불리(不離)임을 안다면 이는 진실한 지혜이니, 실제(實際)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보살은 이러한 장애가 없는 무장애도(無障碍道)를 행하여 살바야 이르게 되나니,
일체법은 나지도 않는 불생(不生)이고 나오지도 않는 불출(不出)이기 때문이다.
舍利弗問須菩提:“云何一切法不生?”須菩提答:“色,色相空,故色無生、無成就,乃至實際亦如是。”若菩薩能如是行,是淸淨第一,無上無比故,漸近薩婆若。
사리불존자가 수보리존자에게 묻기를 “어떻게 일체법은 나지 않는 불생(不生)입니까?”라고 하자,
수보리존자가 대답하기를 “물질(色)은 물질의 모양인 색상이 공한 색상공(色相空)이기 때문에 물질은 나는 것도 없는 색무생(色相生)이고 성취되는 것도 없는 무성취(無成就)이며, 나아가 실제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 청정함은 제일(第一)이요, 위없는 무상(無上)이며, 견줄 데가 없는 무비(無比)이기 때문에 점차로 살바야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漸近薩婆若故,心不生邪見煩惱戲論,卽時得心淸淨;心淸淨果報故,得身淸淨;三十二相、八十隨形好,莊嚴其身。得三種淸淨故,破諸虛誑取相之法,受法性生身,所謂常得化生,不處胞胎。
살바야에 점점로 가까워지므로 마음으로 삿된 견해나 번뇌나 희론을 내지 않으니 곧 마음이 청정한 심청정(心淸淨)이 되며,
심청정(心淸淨)의 과보로 몸의 청정함인 신청정(身淸淨)을 얻게 되고, 32상호(相好)과 80수형호(隨形好)로 그 몸을 장엄하게 되며,
세 가지의 청정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거짓된 허광(虛誑)된 상(相)을 취하는 법을 깨뜨리고,
법의 성품에서 태어난 부처의 법성생신(法性生身)을 받게 되나니,
이른바 언제나 화생(化生)하면서 모태 안에 들지 않는 것이다.
問曰:若有力如此,何用化生,貪著其身而不取涅槃?
묻나니, 만약 그러한 힘이 있다면 화생(化生)이 왜 필요하며, 그 몸을 탐착하면서 열반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有二事因緣故:以諸佛是衆生中寶,欲供養無厭故:有本願度衆生、淨佛世界未滿故。是菩薩福德、方便力故,常不離諸佛。
답하나니, 그러함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 안의 보배를 공양 받되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본래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려는 본원(本願)이 아직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 보살은 복덕의 방편의 힘 때문에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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