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集散品 第九下 卷第四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9. 집산품(集散品)을 풀이함 ② 2
▶論. 問曰:上來廣說般若波羅蜜,今須菩提何以作是言“菩薩摩訶薩應如是思惟:何者是般若波羅蜜”?
▷논. 묻나니, 앞에서 반야바라밀을 자세히 설명하셨거늘, 수보리존자는 무엇 때문에 묻기를 “보살마하살은 무엇이 반야바라밀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가”라고 한 것입니까?
答曰:須菩提上來“謙讓門”說,次“不住門”說,今明般若波羅蜜體
답하나니, 수보리존자는 앞에서는 겸양문(謙讓門)으로 설명하였고,
다음에는 머무르지 않는 불주문(不住門)으로 설명하였으며,
지금은 반야바라밀의 체(體)를 밝히는 것이다.
何等是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者,是一切諸法實相,不可破,不可壞;若有佛、若無佛,常住諸法相、法位,非佛、非辟支佛、非菩薩、非聲聞、非天人所作,何況其餘小衆生!
무엇이 반야바라밀인가?
반야바라밀이라 함이란, 곧 일체법의 실상(實相)은 깨뜨릴 수 없는 불가파(不可破)이고, 파괴할 수 없는 불가괴(不可壞)이니,
만약 부처님이 계시는 유불(有佛)이거나, 계시지 않은 무불(無佛)이거나 간에 항상 상주(常住)하는 제법의 법상(法相)이고, 법위(法位)이니,
부처님이나 벽지불이 만든 바도 아니요, 보살이 만든 바도 아니요, 천인(天人)이 만든 바도 아니니,
하물며 그 밖의 조그마한 중생이 만들었겠는가!
復次,常是一邊,斷滅是一邊 離是二邊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又復常無常、苦樂、空實、我無我等,亦如是。
또한 항상하다는 상(常)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고,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도 한쪽에 치우친 일변(一邊)이니,
이러한 상(常)과 단멸(斷滅)의 두 치우침인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또한 항상하다, 무상하다, 괴롭다, 즐겁다, 공이다, 실아(實我)이다, 나(我)이다, 무아(無我)이라고 하는 것 등도 역시 그와 같으며,
色法是一邊、無色法是一邊,可見法、不可見法,有對無對,有爲無爲,有漏無漏,世閒出世閒等諸二法,亦如是。
물질의 색법(色法)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고,
물질이 없다는 무색법(無色法)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볼 수 있는 가견법(可見法)과 볼 수 없는 불가견법(不可見法),
대할 수 있는 유대(有對)와 대할 수 없는 무대(無對),
지어진 유위(有爲)와 지어지지 않은 무위(無爲)와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와 번뇌가 다한 무루(無漏)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등의 모든 상대적인 이법(二法) 역시 그와 같으며,
復次,無明是一邊,無明盡是一邊;乃至老死是一邊,老死盡是一邊;諸法有是一邊,諸法無是一邊 離是二邊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
또한 무명(無明)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무명이 다한 무명진(無明盡)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노사(老死)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늙어 죽음이 다한 노사진(老死盡)도 한쪽에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제법이 있다는 유(有)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제법이 없다는 무(無)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니,
이러한 상대적인 두 치우침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菩薩是一邊,六波羅蜜是一邊;佛是一邊,菩提是一邊——離是二邊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
보살이라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고,
육바라밀이라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며,
부처님이라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고,
보리라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니,
이 두 치우침인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略說內六情是一邊,外六塵是一邊;離是二邊行中道,是名般若波羅蜜。
간략하게 말하여,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뜻(意)의 내육정(內六情, 6근)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고,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밖의 외육진(外六塵, 6경)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니,
이 두 치우침의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此般若波羅蜜是一邊,此非般若波羅蜜是一邊——離是二邊行中道,是名般若波羅蜜。如是等二門,廣說無量般若波羅蜜相。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고,
이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일변(一邊)이니,
이 두 치우침의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두 가지의 이문(二門)으로 무량한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널리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復次,離有、離無、離非有非無,不墮愚癡而能行善道,是爲般若波羅蜜。如是等三門,是般若波羅蜜相。
또한 있다것도 여의고 없다는 것도 여의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여의어,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착한 선도(善道)를 잘 행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이유(離有)、이무(離無)、이비유비무(離非有非無)의 세 가지의 문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며,
復次,須菩提此中自說:“是法無所有、不可得。”是般若波羅蜜空故無所有;常無常等諸觀,求覓無定相故不可得。
또한 수보리존자는 이 가운데에서 스스로 설하기를 “이 법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라 하였나니,
이 반야바라밀은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모든 관(觀)으로 구하고 찾아도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復次,“無所有”者,此中須菩提自說:“般若波羅蜜乃至五波羅蜜法無所有。”不可取、不可受、不可著故。
또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고 하는 것이란, 여기에서 수보리존자 스스로 설하기를
“반야바라밀과 그 나머지 다섯 바라밀의 법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취할 수도 없는 불가취(不可取)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수(不可受)이며, 집착할 수도 없는 불가착(不可著)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復次,十八空故,是六波羅蜜無所有、不可得。譬如大風能破散諸雲,亦如大火燒乾草木,如金剛寶摧破太山,諸空亦如是能破諸法。
또한 십팔공(十八空) 때문에 이 육바라밀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세차게 부는 바람이 모든 구름을 흩어 버리는 것과 같고,
마치 큰 불이 마른 초목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
마치 금강(金剛) 보석이 큰 산을 꺾어 깨뜨리는 것과 같이,
모든 공(空)도 그와 같아서 제법을 능히 깨뜨리는 것이다.
“何以故名般若波羅蜜”者,“般若”者秦言智慧,一切諸智慧中最爲第一,無上、無比、無等,更無勝者,窮盡到邊;如一切衆生中佛爲第一,一切諸法中涅槃爲第一,一切衆中比丘僧爲第一。
어째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인가?
반야(般若) -진(秦, 중국)나라 말로 지혜(智慧)라 한다.- 는 일체 지혜 가운데에서 제일(第一)이고, 위 없는 무상(無上)이고, 견줄 데 없는 무비(無比)이고, 동등한 것이 없는 무등(無等)이며,
다시는 그보다 수승한 것이 없으면서 궁극까지 다함이 없으며, 가장 끝까지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라.
마치 일체의 중생 가운데에서 부처님이 으뜸이시요, 일체법 가운데서 열반이 으뜸이며,
일체의 대중 가운데서 비구승(比丘僧)이 으뜸인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汝先說諸法實相是般若波羅蜜,所謂法位、法住,有佛、無佛常住不異;今何以說“諸智慧中般若波羅蜜第一,譬如諸法中涅槃爲第一”?
묻나니, 앞에서 당신께서는 “법의 실상(實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니, 이른바 법위(法位)와 법의 머무름의 법주(法住)와 부처님이 계시는 유불(有佛)이거나, 계시지 않은 무불(無佛)이거나 간에 항상 상주(常住)하면서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모든 지혜 가운데 반야바라밀이 제일(第一)이니, 마치 제법 가운데 열반이 제일(第一)인 것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世閒法,或時因中說果,或時果中說因,無咎。如人日食數匹布,布不可食,從布因緣得食,是名因中說果;如見好畫而言好手,是名果中說因。因諸法實相生智慧,是則果中說因。
답하나니, 세간법에서는 간혹 원인 가운데에서 결과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결과 가운데에서 원인을 말하기도 하나니, 잘못되지 않은 것이니,
마치 사람이 “날마다 몇 필(匹)의 포(布, 베)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으니,
곧 포(布, 베)는 먹을 수 없는 것이나 베의 인연으로부터 음식을 얻는다는 말이니,
이를 원인 가운데에서 결과를 말하는 것이라 하고,
또한 좋은 그림을 보면서 “좋은 손(好手호수)”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은 결과 가운데에서 원인을 말하는 것이라.
제법의 실상으로 인하여 지혜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곧 결과 가운데에서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復次,是菩薩入不二入法門,是時能直行此般若波羅蜜,不分別是因是果、是緣是知、是內是外、是此是彼等,所謂一相,無相。以是故不應難。
또한 이 보살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게 된 때에는 곧장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것은 원인이다ㆍ이것은 결과다ㆍ이것은 연(緣)이다ㆍ이것은 지(知, 지혜)이다ㆍ이것은 안(內)이다ㆍ이것은 바깥(外)이다ㆍ이것은 차(此, 차안)이다ㆍ이것은 피(彼, 피안)이다.” 등으로 분별하지 않나니,
이른바 한 모양의 일상(一相)이며, 상이 없는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復次,世閒三種智慧:一者、世俗巧便,博識文藝,仁智禮敬等;二者、離生智慧,所謂離欲界乃至無所有處;三者、出世閒智慧,所謂離我及我所,諸漏盡聲聞、辟支佛智慧。般若波羅蜜爲最殊勝,畢竟淸淨、無所著故,爲饒益一切衆生故。
또한 세간에는 세 가지의 지혜가 있나니,
첫째는 세속의 교묘한 방편인 교편(巧便)과 학식이 많은 것과 문예(文藝)ㆍ인(仁)ㆍ지(智)ㆍ예(禮)ㆍ경(敬) 등이며,
둘째는 생멸(生滅)을 여읜 지혜이니, 이른바 욕계(欲界) 내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출세간의 지혜이니, 이른바 나와 내 것의 아아소(我我所)를 여의고 모든 번뇌가 다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이다.
하지만 반야바라밀이야말로 가장 수승하나니, 필경에는 청정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聲聞、辟支佛智慧,雖漏盡故淸淨,無大慈悲,不能饒益一切故不如;何況世俗罪垢不淨、欺誑智慧!三種智慧不及是智慧故,名爲般若波羅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는 비록 번뇌가 다하여서 청정하다 하여도 대자비(大慈悲)가 없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보다 못하거늘,
하물며 세속의 죄와 때가 끼고 청정하지 못한 속임수의 기광지혜(欺誑智慧)이겠는가!
세 가지 지혜로는 반야바라밀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컬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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