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集散品 第九 卷第四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9. 집산품(集散品)을 풀이함 ① 7
▶論. 問曰:此中何因緣說先尼梵志?
▷논. 묻나니, 여기에서는 어떠한 인연으로 선니(先尼, Seniya) 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此經種種因緣說法空,乃至無微相可取。人心疑怪不信,是理難見,以畢竟無相故。以是故須菩提引證小乘中尚有法空,何況行大乘法者而不信法空!
답하나니, 이 경(經)에서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법공(法空)과 나아가 아주 작은 미상(微相)까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나, 사람들은 마음으로 의심하고 이상스럽게 여기면서 믿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야 말로 보기도 어렵고 필경에는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수보리가 인증(引證)한 것이다.
소승(小乘)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법공(法空)이 있거늘 하물며 대승(大乘)의 법을 행하는 이가 법공(法空)을 믿지 않겠는가!
復次,如刪若婆婆羅門,善知一切智人相,見菩薩食乳糜,知今日當成佛。先尼,是其舅也。耆年智德,有大名聞,出家廣讀一切經書,修心坐禪學道。
또 산야(刪若)바라문과 같은 이는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사람의 상(相)을 잘 알았으니,
곧 보살(부처님)이 유미(乳糜, 우유죽)을 드시는 것을 보고 “오늘 당장에 부처님이 되시겠다.”는 것을 알았으니,
선니(先尼, Seniya) 범지는 바로 그의 외삼촌이며, 나이가 많고 지혜와 덕을 지녔으며 크게 유명하였는데,
출가하여 일체의 경서(經書)를 널리 읽고 마음을 닦으면서 좌선(坐禪)하며 도를 배웠다.
時時,欲求智慧故,往詣論議堂。諸梵志言:“六師皆自稱一切智。不蘭迦葉有大名聞,是大衆師;其弟子死,若小、若大,皆不說其生處;餘五師弟子死,若小、若大,皆說其生處。佛亦是大師,有大名聞;其弟子死,小者說其生處,大者不說其生處。”
어느 한 때에 지혜를 구하고자 논의당(論議堂)에 갔었는데 범지(梵志)들이 말하기를
“육사외도(六師外道) 모두는 스스가 일체지(一切智)라고 일컫고 있었는데,
불란가섭(不亂迦葉, Pūraṇa Kaśapa, 푸라나 캇사파)은 크게 유명하였으며, 대중들의 스승이로되 그의 제자들이 죽을 때에는 작은 이나 큰 이거나 간에 모두 그가 태어날 곳을 말하지 않았으며,
그 밖의 다섯의 스승들도 제자들이 죽을 때는 작은 이거나 큰 이거나 간에 모두 그들의 태어날 곳을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 또한 큰 스승으로 크게 유명하신데, 그 제자들이 죽을 때에는 작은 이에 대해서는 그가 태어날 곳을 말씀하시고 큰 이에 대해서는 그가 태어날 곳을 말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외도육사(外道六師, 육사외도)= 원시불교가 흥기하던 무렵에 활약하던 대표적인 6명의 사상가.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들을 ‘육사’가 아닌 ‘육사외도’라 한 이유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의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①푸라나 캇사파(Pūraṇa Kassapa)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악을 행한 것은 아니며, 제사, 보시, 수양 등을 해도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선악의 행위는 도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②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는 모든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나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다는 우연론(偶然論)을 주장하였다.
③아지타 케사캄바린(Ajita Keshakambala)은 인간이 흙·물·불·바람의 4원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죽으면 각 원소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④파쿠다 캇차야나(Kakuda Kātyāyana)는 땅·물·불·바람의 4원소 외에 괴로움·즐거움·생명을 추가하여 7요소를 설하고, 7요소는 불변하기 때문에 비록 사람을 죽이여도 칼은 7요소의 간격을 통과할 뿐이며 살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⑤산자야 벨랏티풋타(Samjayin Vairatīputra)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거나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을 주장하였다
⑥니간타 나타풋타(Nirgrantha Jnātiputra)는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며, 오래전부터 있던 교단의 명칭이었으나, 그가 이 파로 들어간 뒤에 자이나교를 성립하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주의(不定主義) 또는 상대주의(相對主義)를 내세우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오대서(五大誓)를 제정하였다.-다움
先尼聞已,異時詣佛所,問訊已,一面坐。問佛言:“佛聽,當問!”佛言:“恣汝所問。”
선니(先尼, Seniya) 범지는 이런 말을 들은 후 한 때에 부처님께 나아가 문안을 한 뒤에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부처님이시여, 저의 질문을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마음대로 물어 보거라.”고 말씀하셨다.
先尼言:“昔我一時曾到論堂,與諸人論議;如昔所聞,具向佛說。是時我作是念:佛法說弟子小者更生,大者不生,何者爲定?”
선니범지가 말하기를, “옛날 한 때에 제가 논당(論堂)에 나아가 여러 사람들과 논의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들었던 바를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 불법에서 수행이 작은 제자는 다시 태어나고, 수행이 큰 제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러함이 어떻게 정해지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佛告先尼:“我法甚深,微妙難解!汝等長夜著諸異見、異欲、異法,汝於我法不能自見!”
그러자 부처님께서 선니 범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은 심히 깊고 미묘하여서 이해하기 어렵나니, 그대들은 온밤 내내 다른 견해와 다른 욕망과 다른 법들에 집착하였으므로 나의 법을 스스로 볼 수가 없었느니라.”
先尼梵志白佛言:“我心敬佛,願加愍念,爲說妙法;令我於坐得眼,無令空起!”
선니 범지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저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공경하고 있사오니,
원컨대 가엾이 여기시어 묘법(妙法)을 설하여 주시어 저로 하여금 이 자리에서 눈을 뜨게 하여 주시어, 이 자리에서 헛되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佛問梵志:“於汝意云何?汝見是色如去不?”答言:“不也!”“受、想、行、識如去不?”答言:“不也!”“色中如去不?”答言:“不也!”“受、想、行、識中如去不?”答言:“不也!”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물으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이 물질(色)이 여거(如去, 여래如來, tathāgathā)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여거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色) 가운데에서 여거를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 가운데에서 여거를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離色如去不?”答言:“不也!”“離受、想、行、識如去不?”答言:“不也!”“汝更見無色,無受、想、行、識如去者不?”答曰:“不也!”“若汝種種門不見如去者,應生疑言:佛法何者爲定?”答曰:“不應!”
“물질(色)을 여읨(離)이 여거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을 여읨(離)을 여거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다시 물질(色)이 없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없음(無)을 여거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대가 갖가지 문(門)에서 여거를 보지 못하거늘,
의심하여서 ‘부처님 불법에서는 어떠한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라고 말해야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佛告先尼:“若我弟子是法中不了了知者,說有後生,本來有我慢等殘故;若我弟子了了解知是義者,不說其生處,本來我慢等無殘故。”
부처님께서 선니범지에게 말씀하셨으니,
“만약 나의 제자로서 이 법 안에서 똑똑히 알지 못한 자는 후생(後生)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니, 본래 아만(我慢) 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라.
만약 나의 제자로서 이 이치를 분명하게 아는 이라면 그의 태어날 곳을 말하지 않나니, 본래 아만 등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니라.”
先尼聞是已,卽時得道;得道已,從坐起,白佛言:“願得出家爲道!”卽時鬢髮自墮,便成沙門,不久得阿羅漢,從佛得眼不虛故。
선니범지는 이 말씀을 듣자 즉시 도를 얻었으며, 도를 얻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원컨대 도를 닦을 있도록 출가를 허락하여 주시오소서.”라고 하자,
바로 그때에 수염과 머리가 저절로 떨어지면서 곧 사문이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서 아라한이 되었으니, 부처님으로부터 눈을 얻음의 종불득안(從佛得眼, 부처님의 설법으로부터 깨닫게 됨)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是經論議:先尼信者,信“佛能令我得道”,是名初信。
然後聞佛破吾我,從本已來,常自無我;
無我故,諸法無所屬、如幻、如夢、虛誑不實,不可得取。
得是信力已,入諸法實相,不受色是如去乃至識是如去。‘오(吾)’와 ‘아(我)’는 서로 통용되는 것.
이 경의 논의에서 선니범지가 믿었다는 것이란, “부처님께서 나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시리라.”고 믿은 것이니,
이것을 처음의 믿음인 초신(初信)이라 하며,
그러한 뒤에 부처님께서 나라는 오(吾)를 깨뜨리는 말씀, 곧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의 나가 없는 상자무아(常自無我)이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제법은 속할 곳이 없는 무소속(無所屬)이니,
마치 여환(如幻 허깨비)과 같고 여몽(如夢, 꿈)과 같으며, 거짓으로 속여서 진실하지 않고,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고 함을 듣고는 이 믿음의 힘인 신력(信力)을 취득하였으며,
그러한 뒤에는 제법의 실상(實相)으로 들어가서 “물질(色)이 곧 여거이고, 나아가 의식(識)이 곧 여거이다.”라고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問曰:梵志何以答佛皆言“不也”?
묻나니, 선니범지는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 모두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한 것입니까가?
答曰:梵志本摠相爲我,佛今一一別問,以是故答佛言:“不也。”
답하나니, 선니범지는 본래 전체의 총상(總相)으로써 '나(我)'를 삼았으나, 부처님께서 하나하나 분별하여 물으셨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復次,梵志聞人二種說我:或有說五衆卽是我,或有說離五衆別有我。若五衆卽是我,則無別我。所以者何?我是一,衆是五,一不作五,五不作一。
또한 선니 범지는 사람들이 두 종류로 '나(我)'를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혹 어떤 이는 “오중(五衆)이 곧 '나(我)'이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혹 어떤 이는 “오중을 여의고 따로 '나(我)'나가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으니,
만약 오중이 곧 '나(我)'라면 따로 '나(我)'나가 없을 것이니,
왜냐하면 '나(我)'는 바로 하나요 중(衆)은 곧 다섯이기 때문이니, 하나는 다섯이 되지 못하고 다섯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復次,五衆無常生滅相,五衆是我亦應生滅;若生滅者,則失罪福。是五衆從因緣和合生,不自在;我若爾者,何用我爲!不自在故。如是等過罪故,不得說言“色如去,受、想、行、識如去”。
또 오중은 무상하여 나고 없어지는 생멸상(生滅相)이니, 오중이 '나(我)'라면 역시 나고 없어지는 생멸상(生滅相)이 있어야 하며, 만약 생멸(生滅)하는 것이라면 곧 죄와 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오중은 인연으로부터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라 자재(自在)하지 않은 것이니,
'나(我)'도 만약 그러하다면 무엇으로써 '나(我)'를 삼겠는가! 자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허물 때문에 “물질(色)이 여거(如去)요,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여거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離五衆亦不應有我,無相故。若知、見、受等,是皆五衆相,非是我相,智者云何說“離五衆而有我”?以是故言“不也”。
오중을 여의고 또한 '나(我)'가 있다고도 하지 않아야 하나니,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느낌(受) 등을 알고 보면 이 모두는 오중의 상(相)이요, 이것은 '나(我)'의 상(相)이 아니거늘, 지혜로운 이가 어떻게 “오중을 여의고서 '나(我)'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이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若有言“別更有我,無五衆”,是亦不然,皆是顚倒妄見分別。如是種種因緣知無我,“我”卽是“如去”。諸法亦爾,皆同如去;以無主故,法無所屬。
만일 “따로 다시 '나(我)'가 있고 오중은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나니, 이 모두는 뒤바뀌고 허망한 견해로 분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갖가지의 인연으로 무아(無我)임을 아는 것이다.
'나(我)'가 곧 여거(如去)라면 제법도 또한 그러하여서 모두 똑같이 여거일 것이나, 주인(主)이 없기 때문에 법으로서 속하는 곳이 없는 무소속(無所屬)인 것이다.
復次,梵志推求得道智慧,於四處求之,皆無定相,所謂觀自身五衆名爲內,
外觀他身名爲外,彼此名爲內外是三種 智慧不得道,無智慧亦不得道。
또한 선니 범지는 도(道)를 얻는 지혜를 추구(推求)하되 네 가지 경우(四處사처)에서 그것을 구했으나, 모두가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었다.
이른바 자기 몸의 오중(五衆)을 관찰하는 것을 안(內)이라 하고, 바깥과 다른 이의 몸을 관찰하는 것을 밖(外)이라 하며, 그것과 이것을 안팎(內外)이라 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지혜로도 도(道)를 얻지 못하고,
지혜가 없는 무지혜(無智慧)로도 또한 도(道)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復次,內者內六入,外者外六入。復次,內名能觀智慧,外名所觀處。是先尼知諸觀皆有過罪。何以故?內以智慧力故,謂外諸法是常、無常、有、無等,非外法有定相;若有定相,則無智用。
또 안(內)이라 함이란 은 내육입(內六入)이요, 밖(外)이라 함이란, 외육입(外六入)이다.
또 안(內)을 주관적으로 관찰하는 능관지혜(能觀智慧)라 하고 밖(外)을 관찰하는 바의 소관처(所觀處)라 한다.
이 선니범지는 모든 관(觀)에는 허물이 있음을 알았으니,
왜냐하면 안(內)의 지혜의 힘 때문에 바깥(外)의 제법이 항상하다ㆍ무상하다ㆍ있다ㆍ없다는 등으로 여기기 때문이며,
바깥(外)의 법은 일정한 정상(定相)이 있는 것이 아니니, 만약 정상(定相)이 있다면 지혜의 작용이 없는 것이다.
又此智慧從外法因緣生,外法相不定故,智慧亦不定;
如稱爲物故、物爲稱故,二事相待,若離物無稱、離稱無物。
無量教智名得道方便,得名得聖道果。
또한 이 지혜는 외법(外法)의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며, 외법(外法)의 상(相)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 또한 일정하지 않으니, 마치 저울은 물건을 필요로 하고, 물건은 저울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이 두 가지는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만약 물건을 떠나면 저울은 없고 저울을 떠나면 물건도 없는 것이다.
무량한 가르침의 지혜를 도를 얻은 득도(得道)라 하며,
방편을 얻는 것을 거룩한 도의 과위인 성과위(聖道果)를 얻었다고 하며,
復次,略說實智慧義,所謂不見內五衆中,不見外五衆中,亦不見內外五衆中,亦不見離五衆中,見是智慧爲實。
또한 간략하게 진실한 지혜의 이치를 말하자면, 이른바 안의 내오중(內五衆)을 보지 못하고,
밖의 외오중(外五衆)을 보지 못하며, 또한 안팎의 내외오중(內外五衆)도 보지 못하고,
또한 오중을 여읜 이오중(離五衆)도 보지 못하나니, 이 지혜를 보는 것이 진실인 것이다.
以無常智慧觀五衆無常,是智慧從因緣和合故有不實。著觀者邪見,不著者得道;若無常相是實者,何故著而不得道?以是故,一切內外不見定智慧。
무상(無常)한 지혜로써 오중의 무상함을 관찰하되, 이 지혜는 인연이 화합한 때문에 있는 것이요 진실하지가 않으니,
관(觀)에 집착하는 이는 삿된 견해을 얻고, 집착하지 않는 이는 도를 얻나니,
만약 무상한 상(相)이 진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집착하는데도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인가!
이 때문에 일체의 안팎에서는 결정코 지혜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若離是無常等觀得道者,一切凡人亦應得道,以是故說“離是智慧,亦無所得”。
만약 이 무상함 등을 관찰하는 것을 여의고 도(道)를 얻는다면 일체의 범부들도 당연히 도를 얻어야 할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이 지혜를 여의면 또한 얻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爾時,梵志以是智慧,於一切法中心得遠離,於智慧亦復遠離;
一切我見等取相邪見,一切皆滅,亦不從無智得。爾時,梵志歡喜,觀無量法性相,佛眞爲大師!
그 때에 선니범지는 이 지혜로써 일체법 가운데에서 마음으로 멀리 여의는 원리(遠離)를 얻었고,
지혜에서도 역시 멀리 여의게 되어 일체의 나라는 아견(我見) 등과 모양을 취하는 일체의 사견(邪見) 모두가 소멸되었으며,
또한 지혜 없는 무지(無智)로부터도 얻지 않았으니, 그 때에 범지는 기뻐하면서 무량한 법성상(法性相)을 관하면서 부처님을 진실한 스승으로 삼았다.
“不捨”者,諸法中皆有助道力故。“不受”者,諸法實相畢竟空無所得故不受。
버리지 않는 불사(不捨)라 함이란, 제법에는 모두가 도를 돕는 조도(助道)의 힘이 있기 때문이며,
받지 않는 불수(不受)라 함이란, 제법의 실상(實相)은 필경공(畢竟空)이어서 얻는 바가 없기 때문에 불수(不受)라고 하는 것이며,
復次,諸結使煩惱,顚倒虛妄故無所捨;但知諸法如實相,無相,無憶念故。是名“菩薩不受、不捨波羅蜜”,名爲般若波羅蜜。
또한 모든 결사(結使)와 번뇌는 뒤바뀌고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버릴 바 조차도 없으며,
다만 제법의 여실한 제법여실상(諸法如實相)은 상이 없는 무상(無相)이고 기억도 없음을 아는 까닭이니,
이를 보살의 받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불수불사바라밀(不受不捨波羅密)이라 하며, 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此彼岸不度故,世閒卽是涅槃相,涅槃相卽是世閒相,一相,所謂無相。
이 언덕의 차안(此岸)에서 저 언덕의 피안(彼岸)으로 건너지 않기 때문에 세간이 곧 열반상(涅槃相)이요
열반상(涅槃相)이 곧 세간상(世閒相)이라. 곧 하나의 일상(一相)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若如是知,應當滅;以未具足諸功德故不滅,大慈悲、本願力故不滅。
雖求佛道,於此法中亦無好醜相及受捨相。以是故,非法亦非非法。
是名“菩薩般若波羅蜜,一切相不受”。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당연히 소멸되어야 하겠지만 아직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멸되지 않았고,
대자비(大慈悲)의 본래 서원의 힘 때문에 소멸되지 않았나니,
비록 부처님의 불도를 구한다 하여도 이 법 안에서는 역시 아름답거나 추한 호추상(好醜相)도 없고 받거나 버리는 수사상(受捨相)도 없는 것이라.
이 때문에 법이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니, 이를 일컬어 보살이 반야바라밀에서 일체상(一切相)을 받지 않는 불수(不受)라고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四十二終 대지도론 제 42 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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