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行相品 第十 卷第四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10. 행상품(行相品)을 풀이함 1
▶經. 爾時,須菩提白佛言:“世尊!若菩薩摩訶薩無方便欲行般若波羅蜜,若行色爲行相,若行受、想、行、識爲行相;若色是常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常行爲行相;若色是無常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無常行爲行相。
▷경. 그 때에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방편이 없는 무방편(無方便)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혹은 물질(色)을 행하는 것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을 행하는 것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은 항상하다는 상행(常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은 항상하다는 상행(常行) 것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무상(無常)하다 하는 행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행으로 행상(行相)을 삼습니다.
행상(行相, ākāra)은 마음 혹은 마음작용에 나타난 형상(形相)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소연(所緣, alambana) 즉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말한다. 즉, 마치 거울에 사물이 비추이듯이 가지게 되는 이미지 즉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영상(影像)을 말한다. 또는 이러한 영상을 가지는 마음 또는 마음작용의 인식작용 또는 이러한 영상을 가진 마음 또는 마음작용의 인식상태를 말한다.
한편, 행상(行相)은 예를 들어 4제 16행상(四諦十六行相)의 경우처럼, 단순히 부분 · 세부[局部] 또는 측면[相狀]을 뜻하기도 한다. 이 뜻은 마음에 나타난 형상(形相) 또는 마음의 인식작용이라는 의미에서의 행상(行相)과는 구분하여야 한다.
행상(行相)에서 행(行)은 행해(行解)를 뜻하고, 상(相)은 상모(相貌) 즉 마음 또는 마음작용 위에 나타난 이미지 즉 형상(形相)을 뜻한다.
행해는 소연 즉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이미지 즉 형상(形相)를 가진 후, 마음이 마음작용과의 협동 작업하에 그 이미지 즉 형상(形相)을 요별하여 환히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 즉 요별로서의 행해를 깨달음(무루혜)과 구분하여, 행해를 알음알이라고도 한다.
한편, '안다'는 뜻의 한자어 지(知, vit)를 알음알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 위키
若色是樂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樂行爲行相;若色是苦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苦行爲行相;若色是有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有行爲行相;若色是空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空行爲行相。
혹은 물질(色) 이것은 즐거운 낙행(樂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즐거운 낙행(樂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괴로운 고행(苦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괴로운 고행(苦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존재하는 유행(有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존재하는 유행(有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공한 공행(空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공한 공행(空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습니다.
若色是我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我行爲行相;若色是無我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無我行爲行相;若色是離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離行爲行相;若色是寂滅行爲行相,若受、想、行、識是寂滅行爲行相。
혹은 물질(色) 이것은 '나'라는 아행(我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나'라는 아행(我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무아행(無我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무아행(無我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여의는 이행(行爲)으로 행상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여의는 이행(行爲)으로 행상(行相)을 삼으며,
혹은 물질(色) 이것은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행(寂滅行)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적멸행(寂滅行)으로 행상(行相)을 삼습니다.
世尊!若菩薩摩訶薩無方便行四念處爲行相,乃至十八不共法爲行相。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방편이 없는 무방편(無方便)이면,
사념처(念處)를 행하는 것으로 행상(行相)을 삼고 나아가 18불공법(不共法)을 행하는 것으로 행상(行相)을 삼습니다.
世尊!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作是念‘我行般若波羅蜜有所得行’,亦是行相。世尊!若菩薩摩訶薩作是念‘能如是行,是修行般若波羅蜜’,亦是行相。當知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無方便!”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생각하기를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얻은 바의 행이 있으니, 이 역시 행상(行相)이다.’라고 하거나,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 역시 행상(行相)이다.’라고 한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이 없는 무방편(無方便)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須菩提語舍利弗:“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色受念妄解;若色受念妄解,爲色故作行;若爲色作行,不得離生老病死憂悲苦惱及後世苦。
수보리존자가 사리불존자에게 말하기를,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色)에 대하여 기억하는 색수념(色受念)을 망령되이 이해하거나,
혹은 물질(色)에 대하여 기억하는 색수념(色受念)을 망령되이 이해하여서 물질(色) 때문에 행을 짓거나, 또는 물질(色)로 삼는 행을 짓는다면,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와 우(憂)ㆍ비(悲)ㆍ고(苦)ㆍ뇌(惱)와 후세(後世)의 고통을 여읠 수 없습니다.
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無方便,眼受念妄解乃至意,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이 없는 무방편(無方便)으로,
눈(眼)에 대한 기억을 받아들이는 눈의 안수념(眼受念)으로부터 귀의 이수념(耳受念), 코의 비수념(鼻受念), 혀의 설수념(舌受念) 몸의 신수념(身受念) 뜻의 의수념(意受念)을 망령되이 이해하거나,
色乃至法,
혹은 빛깔의 색수념(色受念), 소리의 성수념(聲受念)ㆍ냄새의 향수념(香受念)ㆍ맛의 미수념(味受念)ㆍ닿임의 촉수념(觸受念)ㆍ법수념(法受念) 내지는
眼識界乃至意識界,
안식의 경계인 안식계眼識界) 이식계(耳識界), 비식계(鼻識界), 설식계(舌識界), 신식계(身識界) 내지 의식의 의식계(意識界),
眼觸乃至意觸,眼觸因緣生受乃至意觸因緣生受,
눈의 접촉인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내지 뜻의 접촉인 의촉(意觸),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의 수(受) 내지 뜻의 접촉에 이르기까지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의 수(受)나
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受念妄解,爲十八不共法故作行。若爲作行,是菩薩不能得離生老病死、憂悲苦惱、及後世苦。
사념처 내지 십팔불공법에 대한 기억을 받아들이는 수념(受念)을 망령되이 이해하여
18불공법 때문에 행(行)을 짓거나, 또는 18불공법을 행(行)으로 삼는다면,
이 보살은 생ㆍ노ㆍ병ㆍ사와 우ㆍ비ㆍ고ㆍ뇌 및 후세의 고통을 여읠 수 없습니다.
如是菩薩尚不能得聲聞、辟支佛地證,何況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有是處。
舍利弗!當知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無方便。”
이러한 보살은 오히려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도 증득 할 수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이러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방편이 없는 무방편(無方便)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舍利弗問須菩提:“云何當知是菩薩摩訶薩 行般若波羅蜜有方便?”
사리불존자가 수보리존자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이 있는 유방편(有方便)이라고 알게 되는지요?”
須菩提語舍利弗:“若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時,不行色,不行受、想、行、識;
수보리존자가 사리불존자에게 말하였으니,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할 때에 물질(色)을 행하지 않는 불행색(不行色)이고,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며,
不行色相,不行受、想、行、識相;
물질의 색상(色相)을 행하지 않는 불행색상(不行色相)이고, 불행수상(不行受相)ㆍ불행상상(不行想相)ㆍ불행행상(不行行相)ㆍ불행식상(不行識相)이며,
不行色、受、想、行、識常,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항상한 상(常)이라고 하지 않으며,
不行色、受、想、行、識無常。
불행색상(不行色相)이고, 불행수상(不行受相)ㆍ불행상상(不行想相)ㆍ불행행상(不行行相)ㆍ불행식상(不行識相)이 무상(無常)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不行色、受、想、行、識樂,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즐거운 낙(樂)이라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苦;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괴로운 고(苦)라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我,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나(我)라고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無我;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무아(無我)라고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空,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공(空)이라고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無相,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무상(無相)이라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無作;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무작(無作)이라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離,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여의는 이(離)라 하지 않고
不行色、受、想、行、識寂滅。
불행색(不行色), 불행수(不行受)ㆍ불행상(不行想)ㆍ불행행(不行行)ㆍ불행식(不行識)이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寂滅)이라고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何以故?舍利弗!是色空爲非色,離空無色,離色無空,色卽是空,空卽是色;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이 물질(色)은 공하여 물질이 아닌 비색(非色)이되,
공을 여의고는 물질이 없는 이공무색(離空無色)이며, 물질을 여의고는 공도 없는 이색무공(離色無空)이니,
물질이 곧 공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이 곧 물질인 공즉시색(空卽是色)이기 때문입니다.
受、想、行;識空爲非識,離空無識,離識無空,空卽是識,識卽是空;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공하여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아니로되 공(空)을 여의고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없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을 여의고는 공이 없으니,
공(空)이 곧 수상행식(受想行識)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이 곧 공(空)입니다.
乃至十八不共法空爲非十八不共法,離空無十八不共法,離十八不共法無空,空卽是十八不共法,十八不共法卽是空。
나아가 18불공법도 공하여 18불공법이 아니로되 공을 여의고는 18불공법이 없고 18불공법을 여의고는 공이 없으니,
공(空)이 곧 18불공법이요 18불공법이 곧 공(空)입니다.
如是,舍利弗!當知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有方便;是菩薩摩訶薩如是行般若波羅蜜,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와 같으니, 사리불이여,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이 있는 유방편(有方便)이라고 알아야 하며,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行亦不受,不行亦不受,行不行亦不受,非行非不行亦不受,不受亦不受。”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행(行)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不受)이고,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 것도 또한 불수(不受)입니다.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행불행(行不行)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것도 아니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불수(不受)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不受)입니다.”
舍利弗語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何因緣故不受?”
사리불존자가 수보리존자에게 묻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무슨 인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不受)인지요?”
須菩提言:“是般若波羅蜜自性不可得故不受。何以故?無所有性是般若波羅蜜。
수보리존자가 답하기를,
“이 반야바라밀의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에 불수(不受)입니다.
왜냐하면 무소유(無所有)의 성품, 그것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입니다.
舍利弗!以是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行亦不受,不行亦不受,行不行亦不受,非行非不行亦不受,不受亦不受。
사리불이여,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행하는 것도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며,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것도 아니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며,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不受) 또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何以故?一切法性無所有,不隨諸法行,不受諸法相故;是名菩薩摩訶薩諸法無所受三昧廣大之用,不與聲聞、辟支佛共。是菩薩摩訶薩行是三昧不離,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왜냐하면 일체법의 법성(法性)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어서 제법의 행에 따르지 않고, 제법의 상(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모든 보살마하살이 제법에 대해 ‘받아들임이 없는 무소수삼매(無所受三昧)’라고 하나니, 그 광대한 작용은 성문이나 벽지불과는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이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를 행하여, 여의지 않는다면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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