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集散品 第九 卷第四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9. 집산품(集散品) 풀이함 5

 

▶經.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文字中不應住,一字門、二字門,如是種種字門中不應住。

何以故?諸字、諸字相空故,亦如上說。

▷경. 다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문자(文字)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나니,

한 글의 일자문(一字門)과 두 글의 이자문(二字門) 등, 이와 같은 갖가지 글자의 자문(字門)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나니, 왜냐하면 모든 글자의 자상(字相)이 공(空)하기 때문이니, 역시 앞에서의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諸神通中不應住。何以故?諸神通、諸神通相空,神通空不名爲神通,離空亦無神通;神通卽是空,空卽是神通。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諸神通中不應住。”

다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모든 신통(神通)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나니,

왜냐하면 신통은 모든 신통의 상(相)이 공하기 때문이니, 신통이 공하므로 신통이라 하지 못하고, 또한 공을 여의고는 신통도 없는 것이니, 신통이 곧 공인 신통즉시공(神通卽是空)이요 공이 곧 신통인 공즉신통(空卽是神通)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으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마땅히 모든 신통 가운데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합니다.

 

▶論. 釋曰:有二種菩薩:一者、習禪定,二者、學讀。坐禪者,生神通;學讀者,知分別文字。

▷논. 해석한다; 두 가지의 보살이 있나니, 첫째는 선정(習禪)을 익히는 이요, 둘째는 배우면서 독송하는 학독(學讀)하는 이다.

좌선(坐禪)을 하는 이는 신통이 생기고, 배우면서 독송하는 이는 문자를 분별하게 되나니, 

 

一字門”者,一字一語,如地名“浮”。“二字門”者,二字一語,如水名“闍藍”。“三字門”者,如水名“波尸藍”。

如是等,種種字門。復次,菩薩聞一字,卽入一切諸法實相中。如聞“阿”字,卽知諸法從本已來無生。

한 글자의 일자문(一字門)이라 함이란, 한 글로 된 하나의 말이니, 마치 땅(地)을 염부제(閻浮提)의 부(浮)라고 하는 것과 같고,

두 글자의 이자문(二字門)이라 함이란, 두 글로 된 하나의 말이니, 마치 물을 도람(闍藍)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세 글자의 삼자문(三字門)이라 함이란, 마치 물을 파시람(波尸藍, 파니람波尼藍paniya)이라고 한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자문(字門)이 있으며, 

또 보살은 일자문(一字門)을 듣고 곧 일체법의 실상(實相) 안에 드나니, 마치 아(阿, Ā 무無)를 듣고 곧 제법이 본래부터 생김이 없는 무생(無生)임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是等,如聞“頭佉”,一切法中苦相生,卽時生大悲心。如聞“阿尼咤”,知一切法無常相,卽時入道聖行。

餘如“文字羅尼”中廣說。

이와 같은 등으로 마치 두가(頭佉, duḥkha, 고苦)를 듣고 일체법 가운데에서 괴로움의 고상(苦相)이 생기므로 즉시 대비(大悲)의 마음이 생기는 것과 같으며,

마치 아니타(阿尼吒,anitya, 무상無常)를 듣고 일체법의 무상상(無常相)을 알게되어 즉시 도(道)에 들어가서 성행(聖行)을 하는 것과 같나니,

그 밖의 것은 문자다리니(文字陀羅尼)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神通”義,先已說。是二事畢竟空故,菩薩不於中住

'신통(神通)'의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으며,

선정(習禪)과 학독(學讀), 이 두 가지는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보살은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經.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色是無常不應住,受、想、行、識是無常,不應住。

何以故?無常、無常相空。世尊!無常空不名無常,離空亦無無常;無常卽是空,空卽是無常。

▷경. 또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물질(色)이 무상(無常)하다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의 오중(五衆, 오온)가운데에서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나니,

왜냐하면 무상은 무상의 모양이 공한 무상상공(無常相空)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상이 공하므로 무상이라 하지 못하고, 공을 여의고는 또한 무상도 없으니,

무상이 곧 공인 무상즉시공(無常卽是空)이요, 공이 곧 무상인 공즉시무상(空卽是無常)입니다.

 

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色是無常不應住,受、想、行、識是無常不應住。

色是苦不應住,受、想、行、識是苦不應住。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물질(色)이 무상하다는 데에 머물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무상하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물질(色)이 괴로운 고(苦)라는 것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괴로운 고(苦)라는 것에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합니다.

 

色是無我不應住,受、想、行、識是無我不應住;色是空不應住,受、想、行、識是空不應住;

色是寂滅不應住,受、想、行、識是寂滅不應住,色是離不應住,受、想、行、識是離不應住,亦如上說。

물질(色)이 무아(無我)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무아(無我)라는 것에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물질(色)이 공(空)하다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공(空)함에도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물질(色)이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라는 것에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적멸(寂滅)이라는 것에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물질(色)이 여읜다는 이(離)에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을 여의는 이(離)에도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나니,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습니다.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如相中不應住。何以故?如相、如相空。

世尊!如相空不名爲如,離空亦無如;如卽是空,空卽是如。

또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한결같은 진여의 여상(如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여상(如相)은 여상(如相)이 공한 여상공(如相空)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의 모양이 공한 여상공(如相空)이므로 여(如)라 하지 못하고, 공을 여의고는 또한 여(如)가 없으니, 여가 곧 공인 여즉시공(如卽是空)이요, 공이 곧 여인 공즉시여(空卽是如)입니다.

 

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法性、法相、法位、實際中不應住。何以故?實際空。

世尊!實際空不名爲實際,離空亦無實際;實際卽是空,空卽是實際。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법성(法性)ㆍ법상(法相)ㆍ법위(法位)ㆍ실제(實際)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실제 등의 모두가 공(空)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실제가 공하므로 실제라 하지 못하고, 공을 여의고는 실제도 없으니,

실제가 곧 공인 실제즉시공(實際卽是空)이고 공이 곧 실제인 공즉시실제(空卽是實際)입니다.

법성즉시공(法性卽是空) 공즉시법성(空卽是法性), 법상즉시공(法相卽是空) 공즉시법상(空卽是法相),

법위즉시공(法位卽是空) 공즉시법위(空卽是法位)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一切羅尼門中不應住,一切三昧門中不應住。

何以故?羅尼門、羅尼門相空,三昧門、三昧門相空。

또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일체다라니문(一切陀羅尼門)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일체삼매문(一切三昧門)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다라니문은 다라니문의 상(相)이 공(空)하고 삼매문은 삼매문의 상(相)이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世尊!羅尼門、三昧門空不名爲羅尼門、三昧門,離空亦無羅尼、三昧門;羅尼、三昧門卽是空,空卽是羅尼、三昧門。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乃至羅尼、三昧門中不應住。

세존이시여, 다라니문과 삼매문은 공(空)하므로 다라니문과 삼매문이라 하지 못하고 공을 떠나서도 또한 다라니문과 삼매문이 없으니, 다라니문과 삼매문이 곧 공인, 다라니문삼매문즉시공(陁羅尼三昧門卽是空)이요

공이 곧 다라니문과 삼매문인 공즉시다라니문삼매문(空卽是陁羅尼三昧門)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모든 다라니문과 삼매문 가운데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합니다.

 

世尊!如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無方便故,以吾我心,於色中住,是菩薩作色行;以吾我心,於受、想、行、識中住,是菩薩作識行。若菩薩作行者,不受般若波羅蜜,亦不具足般若波羅蜜;不具足般若波羅蜜故,不能得成就薩婆若。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서 방편이 없는 까닭으로 나라는 마음의 오아심(吾我心)으로써 물질(色) 가운데에 머무른다면, 이 보살은 물질(色)의 행(行)을 짓는 작색행(作色行)이고,

나라는 오아심(吾我心)으로써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 가운데 머무르면 이 보살은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의 작행(作行)을 짓는 것입니다.

만약 보살이 행(行)을 지으면 반야바라밀을 받지 못하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지도 못하며,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살바야(薩婆若, 일체지)를 얻거나 성취할 수도 없습니다.

 

世尊!如是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無方便故,以吾我心,於十二入乃至羅尼、三昧門中住,是菩薩作十二入乃至作羅尼、三昧門行。若菩薩作行者,不受般若波羅蜜,亦不具足般若波羅蜜;不具足般若波羅蜜故,不能得成就薩婆若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방편이 없기 때문에 나라는 마음의 오아심(吾我心)으로써 십이입(十二入) 내지 다라니문과 삼매문 가운데에 머무른다면, 이 보살은 십이입의 행을 짓고 나아가 다라니문ㆍ삼매문의 행을 짓는 것이니,

만약 보살이 행을 지으면 반야바라밀을 받지 못하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구족하지도 못하며, 반야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살바야를 얻거나 성취할 수 없습니다.

 

何以故?色是不受,受、想、行、識是不受。色不受則非色,性空故;受、想、行,識不受則非識,性空故 十二入是不受,乃至羅尼、三昧門是不受。

왜냐하면 물질(色)은 받는 것이 아닌 불수(不受)이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받는 것이 아닌 불수(不受)이기 때문입니다.

물질(色)이 받는 것이 아닌 불수(不受)라면 곧 물질(色)이 아니요,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받는 것이 아닌 불수(不受)라면,

곧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아닌 것이니,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입니다.

 

十二入不受,則非十二入;乃至羅尼、三昧門不受,則非羅尼、三昧門,性空故。般若波羅蜜亦不受,般若波羅蜜不受,則非般若波羅蜜,性空故。

십이입(十二入)은 받는 것이 아닌 불수(不受)이고, 나아가 다라니문과 삼매문에 이르기까지도 불수(不受)이기 때문입니다. 십이입(十二入)이 받는 것이 아니라면 곧 십이입(十二入)이 아니며,

나아가 다라니문과 삼매문이 불수(不受)라면 다라니문도 삼매문도 아닌 것이니,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불수(不受)이고, 반야바라밀이 불수(不受)이라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입니다.

 

如是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應觀諸法性空。如是觀心無行處,是名菩薩摩訶薩不受三昧廣大之用,

不與聲聞、辟支佛共。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제법의 성품이 공한 법성공(法性空)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마음이 행하는 곳이 없는 심무행처(心無行處)이면, 이를 보살마하살의 불수삼매(不受三昧)라 하나니,

그 광대한 작용은 성문이나 벽지불이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是薩婆若慧亦不受,內空故,外空、內外空、空空、大空、第一義空、有爲空、無爲空、畢竟空、無始空、散空、性空、自相空、諸法空、不可得空、無法空、有法空、無法有法空故。

이 살바야의 지혜(般若苦慧반야지혜)도 또한 불수(不受)이나니, 내공(內空)이기 때문이며 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상공(自相空)ㆍ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의 십팔공(十八空)이기 때문입니다.

 

何以故?是薩婆若不可以相行得,相行有垢故。何等是垢相?色相乃至諸羅尼、三昧門相,是名垢相。

是相若受若修,可得薩婆若者。

왜냐하면 이 살바야(일체지)는 상(相)과 행(行)으로써 얻을 수 없으니,

상(相)과 행(行) 때가 있는 유구(有垢)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때가 있는 유구(有垢)의 상(相)인가 하면, 물질의 색상(色相)에서 모든 다라니와 삼매문의 상(相)에 이르기까지이니,

이를 때 있는 구상(垢相)이라 하며, 이 상(相)을 만약 받아서 닦으면 살바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인 가득자(可得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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