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集散品 第九 卷第四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9. 집산품(集散品) 풀이함  4

 

▶經.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色中不應住,受、想、行、識中不應住;眼、耳、鼻、舌、身、意中不應住,色、聲、香、味、觸、法中不應住;眼識乃至意識中不應住,眼觸乃至意觸中不應住,眼觸因緣生受乃至意觸因緣生受中不應住;地種,水、火、風、空、識種中不應住;無明乃至老死中不應住。

▷경. 또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물질(色) 가운데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색(不應住色)이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의 오중(五衆, 오온)가운데에서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뜻(意)의 육정(六情)서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의 육진(六塵) 가운데에서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안식(眼識)을 비롯하여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意識)의 육식(六識)에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눈의 접촉인 안촉(眼觸)을 비롯하여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身觸) 의촉(意觸)에 이르기까지의 육촉(六觸)에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안촉(眼觸)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受)에서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受)의 육수(六受)에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땅의 요소인 지종(地種)과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의식의 요소인 수화풍공식종(水火風空識種) 가운데에서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하며,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의 십이인연(十二因緣) 가운데에서도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합니다.

 

何以故?世尊!色、色相空,受、想、行,識、識相空。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물질(色)은 물질의 모양이 공한 색상공(色相空)이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의 상(相)도 공(空)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世尊!色空不名爲色,離空亦無色;色卽是空,空卽是色。受、想、行,識空,不名爲識,離空亦無識;識卽是空,空卽是識。乃至老死、老死相空。

세존이시여, 물질(色)이 공(空)하므로 물질(色)이라 하지 못하고,

공(空)을 여의고서 또한 물질(色)도 없으니, 물질이 곧 공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이 곧 물질인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 의식)이 공하므로 수상행식(受想行識)이 공(空)라 하지 못하고 , 공을 여의고서 또한 수상행식 또한 없으니, 수상행식이 곧 공(空)한 수상행식시공(受想行識是空)이요,

공(空)이 곧 수상행식인 공즉시수상행식(空卽是受想行識)이며, 

나아가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의  노사(老死) 상(相)도 공(空)한것 입니다.

 

世尊!老死空不名爲老死,離空亦無老死;老死卽是空,空卽是老死。

세존이시여, 노사(老死)의 상(相)이 공(空)한 것이기에 늙어 노사(老死)라 하지 못하고,

공을 여의고서 또한 노사(老死)도 없으니,

늙어 죽음이 공인 노사즉시공(老死卽是空)이요, 공이 곧 늙어 죽음인 공즉시노사(空卽是老死)입니다.

 

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不應色中住,乃至老死中亦不應住。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물질 가운데 머무르지 않는 불은색중주(不應色中住)이어야 하고,

나아가 늙어 죽음 가운데에도 또한 머무르지 않는 불응주(不應住)이어야 합니다.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四念處中不應住。何以故?四念處、四念處相空。

다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네 가지 알아차림의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의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사념처는 사념처의 상이 공한 사념처상공(四念處相空)이기 때문입니다.

 

世尊!四念處空不名爲四念處,離空亦無四念處;四念處卽是空,空卽是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세존이시여, 사념처는 공한 것이므로 사념처라 하지 못하고, 공을 여의고서는 사념처 또한 없는 것이니,

사념처가 곧 공인 사념처즉시공(四念處卽是空)이고, 공이 곧 사념처인 공즉시사념처(空卽是四念處)이며,

나아가 18불공법(不共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中不應住。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사념처에서 십팔불공법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復次,世尊!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檀波羅蜜中不應住,尸羅波羅蜜、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中不應住。何以故?檀波羅蜜、檀波羅蜜相空,乃至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相空。

또한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단(檀, 보시)바라밀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시라(尸羅, 지계)바라밀ㆍ찬제(羼提, 인욕)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 정진)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 지혜)바라밀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보시)바라밀은 단바라밀의 상(相)이 공(空)한 것이고,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의 상(相)이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世尊!檀波羅蜜空不名爲檀波羅蜜,離空亦無檀波羅蜜;檀波羅蜜卽是空,空卽是檀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

세존이시여, 또한 바라밀은 공(空)한 것이므로 반야바라밀이라 하지 못하고,

공(空)을 여의고서 또한 단(보시)바라밀도 없으니,

단바라밀이 곧 공인 단바라밀즉시공(檀波羅蜜卽是空)이요,

공이 곧 단바라밀인 공즉시단바라밀(空卽是檀波羅蜜)이며,

또한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습니다.

 

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行般若波羅蜜,不應六波羅蜜中住。”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바라밀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論. 釋曰:上須菩提以“謙讓門”說般若,雖言不說,而實爲諸菩薩說般若波羅蜜。今須菩提以“不住門”直爲菩薩說般若波羅蜜。

▷논. 해석한다; 위에서 수보리는 겸양하는 겸양문(謙讓門)으로써 반야를 설한 것이니,

비록 말로 설하지 않는다 하여도 시로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였으니,

지금의 수보리는 머무르지 않는 불주문(不住門)으로써 곧장 보살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한 것이다.

 

“般若波羅蜜”有種種名字:“觀”、“修”、“相應”、“合”、“入”、“習”、“住”等,是皆名“修行般若波羅蜜”;但種種名字說,聞者歡喜。

반야바라밀에는 관(觀)ㆍ닦음(修)ㆍ상응(相應)ㆍ합(合)ㆍ입(入)ㆍ익힐 습(習)ㆍ머무를 주(住)는 등의 갖가지의 이름이 으니, 이 모두를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修行)한다고 하는 것이나,

갖가지의 이름을 말함으로써 듣는 이들을 기뻐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復次,小有差別:“行”名聽聞、誦讀、書寫、正憶念、說、思惟、籌量、分別、修習等,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摠名爲“行”。

또한 작게 차별된 행(行)이 있으니, 이는 듣는 문(聞)、외울 독송(誦讀)、서사(書寫)、정억념(正憶念)、설(說)、사유(思惟)、헤아릴 주량(籌量)、분별(分別)、익히는 수습(修習) 등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를 통틀어 행한다는 것이다.

 

是行中分別故:初者名“觀”,如初始見物;日日漸學是名“習”;與般若波羅蜜相可,是名“合”;隨順般若波羅蜜,名“相應”;通徹般若波羅蜜,是名爲“入”。

이러한 행 가운데에서 분별하므로, 처음에는 닦는 것을 '관(觀)'이라 이름하나니, 마치 처음에 물건을 보기 시작한 것과 같으며,

점차로 날마다 배우는 것을 '익히는 습'이라 이름하고,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을 '합(合)'하는 것이라 이름하고

반야바라밀을 수순(隨順)하면 '상응()'이라 이름하며,

반야바라밀을 환히 통달하는것을 '들어가는 입(入)'이라 이름하며, 

 

分別取相有是事,名爲“念”;常行不息,令與相似,是名爲“學”;學已,巧方便觀,知是非得失,名爲“思惟”;以禪定心共行,名爲“修”;得是般若波羅蜜道不失,是名“住”;與住相違,名不住”。

분별하면서 상(相)을 취함이 있으면 '염(念)'한다 하고

항상 행하며 쉬지 않으면서 그와 비슷하게 하는 것을 '배울 학(學)'이라 하며,

배운 뒤에 교묘한 방편으로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관찰하여 아는 것을 '사유(思惟)'라 하고

선정의 마음으로써 함께 행하면 '닦는 수(修)'라 하며,

이 반야바라밀 얻은 것을 잃지 않는 것을 '머무를 주(住)'라 하며,

머무르는 주(住)와 반대되는 것을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라 하는 것이다.

 

問曰:先說諸法空,卽是不住,今何以說“諸法中不應住”?

묻나니, 앞에서 제법의 공(空)을 설명한 것이 곧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제법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先雖說,著法愛心難遣故,今更說。復次,有無相三昧,入此三昧,於一切法不取相而不入滅定。菩薩智慧不可思議,雖不取一切法相,而能行道。如鳥於虛空中,無所依而能高飛;菩薩亦如是,於諸法中不住,而能行菩薩道。

답하나니, 비록 앞에서 설명하였다 하여도 법에 집착하는 법애심(法愛心)은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 다시 설명하는 것이.

또한 구하거나 집착함이 없는 무상삼매(無相三昧, ānimitta-samaadhi)가 있나니, 이 삼매에 들어가면 일체법에 대하여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멸정(滅定)에 들어가지 않으니, 

보살의 지혜는 불가사의하여 비록 일체법의  상(相)을 취하지 않을지라도 도(道)를 잘 행하나니,

마치 새가 공중에서 의지할 바가 없으나, 높이 잘 날아 다니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제법 가운데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보살도(菩薩道)를 잘 행하는 것이다.

 

問曰:人心得緣便起,云何菩薩於一切法不住而不入滅定中?

묻나니, 사람의 마음은 반연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거늘, 어떻게 보살은 일체법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멸정 안에도 들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此中須菩提自說,所謂:“色、色相自空,色空爲非色,亦不離空有色,色卽是空,空卽是色。”是義,第二品中已說。乃至不應六波羅蜜中住亦如是,以空故無所住。

답하나니, 이에 대하여 수보리 존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이른바 물질(色)은 그 상(相) 스스로 공한 색상자공(色相自空)이요.

물질(色)이 공하므로 물질(色)이 아닌 색공위비색(色空爲非色)이고,

또한 공을 여의고서 물질(色)에 있지도 않으니, 물질이 곧 공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이 곧 물질인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고 하였으니, 이 이치는 제2품(品) 가운데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나아가 육바라밀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함 역시도 그와 같나니, 공하기 때문에 머무르는 바가 없는 무소주(無所住)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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