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大智度論釋 三假品 第七 卷第四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7. 삼가품(三假品) 풀이함  3

 

復次,菩薩有二種:一者、坐禪,二者、誦經。

또한 두 종류의 보살이 있으니, 첫째는 좌선(坐禪)하는 이요, 둘째는 경을 독송하는 이라.

 

坐禪者,常觀身、骨等諸分和合故名爲身,卽以所觀爲譬喩,言頭骨分和合故名爲頭,腳骨分和合故名爲腳,頭、腳、骨等和合故名爲身;一一推尋,皆無根本。

좌선을 하는 이는 항상 몸을 관찰하면서 뼈 등의 모든 부분이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 하는 것이니, 곧 관찰하는 바로써 비유를 삼아 말하기를 “머리의 뼈 부분이 화합한 까닭에 머리라 하고, 다리의 뼈 부분이 화합한 까닭에 다리라고 하며, 머리와 다리의 뼈 등이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 하지만, 그 하나하나를 추구하면서 살펴보면 모두가 근본이 없는 것이다.”고 하나니, 

 

所以者何?此是常習常觀故,以爲譬喩。不坐禪者,以草、木、枝、葉、華、實爲喩。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항상 바르게 익히고, 항상 관찰하기 때문에 그러함으로써 비유를 삼기 때문이며,

좌선하지 않는 이는 초목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로써 비유를 삼으니, 

 

如過去諸佛亦但有名字,用是名字可說。十譬喩亦但有名字,菩薩義亦如是。“十喩”義,如先說。菩薩應如是學三種波羅聶提:

마치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단지 명자(名字, 이름)만 있을 뿐이요, 그 이름으로써 말할 수 있으며, 열 가지의 비유인 십비유(十譬喩) 또한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인 것과 같이, 보살의 이치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열 가지의 비유의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보살은 이와 같이 세 가지의 바라섭제(波羅聶提, Prajñapti)를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解了諸法(해료제법) 如幻如焰(여환여염) 如水中月(여수중월) 如虛空如響(여허공여향) 如犍闥婆城(여건달바성) 如夢如影(여몽여영) 如鏡中像 如化(여경중상 여화)
▷經 제법을 명료하게 풀이하다. 제법은 如幻= 허깨비(māyā.) 같고, 如焰=아지랑이 같고, 如水中月=물속의 달 같고, 허공 같고, 如響=메아리 같고, 건달바의 성 같고, 如夢=꿈과 같고, 如影=그림자 같고, 거울 속에 비친 형상 같고, 如化=변화한 것과 같음을 알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6권 1

 

五衆等法,是名“法波羅聶提”。五衆因緣和合故名爲衆生,諸骨和合故名爲頭骨,如根、莖、枝、葉和合故名爲樹,是名“受波羅聶提”。用是名字取二法相,說是二種,是爲“名字波羅聶提”。

오중(五衆) 등의 법을 바로 법바라섭제(法波羅聶提)라 하나니,

오중의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중생이라 하고, 모든 뼈가 화합한 까닭에 두골(頭骨)이라 하며,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화합한 까닭에 나무라 하나니,

이러함을 받음의 수바라섭제(受波羅聶提)라 하며,

명자(名字, 이름)로써 이 두 가지의 법상(法相)을 취하는 것을 바로 명자바라섭제(名字波羅聶提)라 하며, 

 

復次,衆微塵法和合故有麤法生,如微塵和合故有麤色,是名“法波羅聶提”。

또한 여러 미진(微塵)의 법이 화합한 까닭에 거친 추법(麤法)이 생기나니, 이는 마치 작은 미진이 화합한 까닭에 거친 물질의 추색(麤色)이 있는 것과 같나니, 이를 법바라섭제(法波羅聶提)하며, 

 

從法有法故,是麤法和合有名字生,如能炤、能燒有火名字生;名色有故爲人,名色是法,人是假名,是爲“受波羅聶提”;取色取名,故名爲“名”。

법으로부터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추법(麤法)이 화합하여 이름이 생겨나서, 비출 수 있고 태울 수 있는 것에는 불(火)라는 명자(名字, 이름)가 생겨남과 같으니,

이름의 명(名)과 물질의 색(色)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나니, 명색(名色)은 바로 법(法)이요, 사람이란 곧 임시로 부르는 가명(假名)이니, 이를 받음의 수바라섭제(受波羅聶提)라 하는 것이니,

물질의 색(色)을 취하고 이름의 명(名)을 취하기 때문이다.

 

多名字邊更有名字,如梁、椽、瓦等名字邊更有屋名字生,如樹枝、樹葉名字邊有樹名生,是爲“名字波羅聶提”。

여러 명자(名字, 이름) 곁에 다시 이름이 있음은 마치 들보ㆍ서까래ㆍ기와 등과 더불어 다시 옥(屋, 집)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과 같고, 마치 나무 가지와 잎의 이름과 더불어 수(樹, 나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과 같으니,

이를 명자바라섭제(名字波羅聶提)라 하는 것이다.

 

行者先壞名字波羅聶提,到受波羅聶提;次破受波羅聶提,到法波羅聶提;破法波羅聶提,到諸法實相中。諸法實相,卽是諸法及名字空般若波羅蜜。

수행하는 이는 먼저 이름의 명자바라섭제(名字波羅聶提)를 파한 뒤에, 받음의 수바라섭제(受波羅聶提)에 이르고,

다음에는 받음의 수바라섭제(受波羅聶提)를 파한 뒤에 법바라섭제(法波羅聶提)에 이르며,

법바라섭제(法波羅聶提)를 파한 뒤에는 제법의 실상(實相) 가운데에 이르게 되나니,

제법의 실상이 곧 제법과 그 이름이 공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인 것이다.

 

▶經.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色名字是常,不見受、想、行、識名字是常,不見色名字無常,不見受、想、行、識名字無常;不見色名字樂,不見色名字苦;不見色名字我,不見色名字無我。

경.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색(色, 물질)이라는 명자(名字)가 항상하다고 보지 않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이름도 항상하다고 보지 않으며,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무상하다고 보지 않고,  수

상행식(受想行識)의 이름도 무상하다고 보지 않느니라.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즐거운 낙(樂)이라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괴로운 고(苦)라고 보지 않으며,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에서 '나(我)'를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에서 무아(無我)를 보지도 않느니라.

 

不見色名字空,不見色名字無相,不見色名字無作;不見色名字寂滅;不見色名字垢,不見色名字淨;不見色名字生,不見色名字滅;不見色名字內,不見色名字外,不見色名字中閒住。受、想、行、識亦如是。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공(空)하다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무상(無相)이라고 보지 않으며,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무작(無作)이라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고요히 멸한 적멸(寂滅)이라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더럽다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청정하다고 보지 않으며,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생(生)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멸(滅)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안(內)라고 보지 않고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밖(外)라고도 보지 않으며,

색(色, 물질)이라는 이름이 가운데 중(中)에 머무는 것이라고도 보지 않으니,

수상행식(受想行識) 또한 그와 같으니라.

 

眼、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諸受,乃至意、法、意識、意觸、意觸因緣生諸受亦如是。何以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字、菩薩、菩薩字,有爲性中亦不見,無爲性中亦不見。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是法皆不作分別。

눈(眼)과 색(色, 물질)과 눈의 분별인 안식(眼識)과 눈의 접촉인 안촉(眼觸)과, 눈의 접촉으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느낌의 수(受)에서 뜻(意)과 법(法)과 뜻의 분별인 의식(意識)과 뜻의 접촉인 의촉(意觸)과 뜻의 접촉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느낌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과 보살이나 보살이라는 이름을 유위의 성품 가운데에서도 보지 못하고 무위의 성품 가운데에서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是菩薩行般若波羅蜜,住不壞法中,修四念處時,不見般若波羅蜜,不見般若波羅蜜字,不見菩薩,不見菩薩字;乃至修十八不共法時,不見般若波羅蜜,不見般若波羅蜜字,不見菩薩,不見菩薩字。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러한 법으로써 모든 분별을 짓지 않으니,

이러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무너지지 않는 특성의 불괴법(不壞法) 가운데에 머무르니,

사념처를 닦을 때에는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고, 반야바라밀의 이름을 보지 않으며, 보살을 보지 않고 보살의 이름을 보지 않느니라.

나아가 18불공법(不共法)을 닦을 때에도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고, 반야바라밀의 이름을 보지 않으며, 보살을 보지 않고 보살의 이름도 보지 않느니라.

 

菩薩摩訶薩如是行般若波羅蜜時,但知諸法實相;諸法實相者,無垢無淨。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단지 제법의 실상(實相)만을 아나니,

제법의 실상이라 함이란, 더러움의 구(垢)도 없고 깨끗함의 정(淨)도 없는 것이니라.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當作是知名字假施設。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름이란 임시로 시설된 가시설(假施設)’이라고 알아야만 하느니라.

 

知假名字已,不著色,不著受、想、行、識;不著眼乃至意;不著色乃至法;不著眼識乃至不著意識;不著眼觸乃至不著意觸;不著眼觸因緣生受若:苦若、樂若、不苦不樂,乃至不著意觸因緣生受:若苦、若樂、若不苦不樂;不著有爲性,不著無爲性。

그리고 임시의 가명(假名)임을 안 뒤에는

색(色,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의 육경(六境)에도 집착하지 않고

눈의 분별인 안식(眼識)과 뜻의 분별인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의 육식(六識)에도 집착하지 않고, 

눈의 접촉인 안촉(眼觸)과 뜻의 접촉인 의촉(意觸)에 이르기까지의 육입처(六入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안촉(眼觸)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의 괴로움인 약수(若受) 즐겁다는 약낙(若樂)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불고불락(不苦不樂)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나아가 의촉(意觸)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의 괴로움인 약수(若受) 즐겁다는 약낙(若樂)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불고불락(不苦不樂)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유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고 무위의 성품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不著檀波羅蜜、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不著三十二相,不著菩薩身;不著菩薩肉眼,乃至不著佛眼。

단(檀, 보시)바라밀ㆍ시라(尸羅, 지계)바라밀ㆍ찬제(羼提, 인욕)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 정진)바라밀ㆍ선(禪, 선정)바라밀ㆍ반야(般若, 지혜)바라밀의 육바라밀에 집착하지 않고

32상호(相好)에 집착하지 않으며, 보살의 몸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의 육안(肉眼)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아가 불안(佛眼)에 이르기까지의 오안(五眼)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不著智波羅蜜,不著神通波羅蜜;不著內空乃至不著無法有法空;不著成就衆生,不著淨佛世界,不著方便法。何以故?是諸法無著者,無著法、無著處,皆無故。

지(智)바라밀에 집착하지 않고 신통(神通)바라밀의 십바라밀(十波羅蜜)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내공(內空)에 집착하지 않고 나아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이르기까지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을 성취시키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으며,

방편의 법에도 집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러한 제법에는 집착하는 이도 없고, 집착할 법도 없으며, 집착할 곳, 모두가 없는 개무(皆無)이기 때문이니라.

 

내공(內空)= 사념처(四念處)에서 육입을 관찰하는 내관(內觀)과 상응한 공삼매(空三昧).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著一切法,便增益檀波羅蜜、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入菩薩位,得阿鞞跋致地。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곧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의 육바라밀을 더욱 더 늘리면서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고 아비발치지(阿鞞跋致地)를 얻게 되는 것이니라.

 

具足菩薩神通;遊一佛國,至一佛國,成就衆生,恭敬、尊重、讚歎諸佛;爲淨佛世界、爲見諸佛供養,供養之具。

보살의 신통을 두루 갖추어 일불국토(一佛國土)에서 다른 일불국토(一佛國土)를 유행하면서 중생을 성취시키며,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여 부처님 세계를 정화하고, 모든 부처님을 뵙고 공양하느니라.

 

善根成就故隨意悉得;亦聞諸佛所說法,聞已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終不忘失,得諸陁羅尼門、諸三昧門。

또한 선근을 성취하는 까닭에 공양물이 모두 뜻대로 얻어지고,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을 들을 수 있으며, 법을 듣고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도록 끝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며, 모든 다라니문(陁羅尼門)과 삼매문(三昧門)을 얻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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