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往生品 第四之下 卷四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4. 왕생품(往生品)을 풀이함③ 6
▶論. 釋曰:如大海中有種種寶珠:有能殺毒,有能遮鬼,有能破病,有能除寒熱、飢渴,有能隨人所願皆能與者;如是等無量無數寶珠。大乘海中亦如是,有種種菩薩寶:有菩薩能破三惡道,有能開三善門,有能生五眼,有能修行神通波羅蜜。
▷논. 해석한다; 마치 큰 바다 속에는 갖가지의 보주(寶珠)가 있어서, 어떤 것은 독을 없애고, 어떤 것은 귀신을 막으며, 어떤 것은 병을 낫게 하고, 어떤 것은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을 없애주며, 어떤 것은 사람들의 원하는 바에 따라 모두를 다 주는 등의, 이러한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보주가 있는 것과 같이,
대승(大乘)의 바다 속도 역시 그와 같아서 갖가지 보살의 보배가 있나니,
어떤 보살은 삼악도(三惡道)를 깨뜨리고, 어떤 보살은 삼선도(三善道)의 문을 열며, 어떤 보살은 오안(五眼)이 생기며, 어떤 보살은 신통바라밀을 수행하기도 한다.
是故諸菩薩能爲奇特希有之事,所謂取空相多、地相少,則能隨意動地。一身能多,多身能一;虛空中常有微塵滿中;是人離欲、福德因緣故,集諸微塵以爲諸身,令皆相似。
이러한 때문에 모든 보살은 기특하고 희유한 일을 하게 되나니,
이른바 공상(空相)을 취함이 많으면서 지상(地相)이 적으면 마음대로 땅을 움직일 수 있고,
일신(一身)이 여러 몸으로 되기도 하며 여러 몸이 일신(일一身)으로 될 수가 있으며,
허공에는 언제나 작은 미진이 가득 차 있으므로 이 사람은 욕망을 여읜 복덕의 인연으로 모든 작은 미진들을 모아 여러 몸을 만들어서 모두를 그와 비슷하게 하나니,
有人言:諸非人恭敬是離欲菩薩,入其身中,隨其意所欲變化則皆能化。轉輪聖王未離欲,少有福德因緣故,諸鬼神尚爲其使,何況離欲行無量心人!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이 아닌 모든 비인(非人)이 공경할 때, 이 욕망을 여읜 보살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하고 싶은대로 변화하면서 모두를 교화한다.”고 하나니,
전륜성왕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고 작은 복덕의 인연이 있을 뿐이나 오히려 모든 귀신을 부리는데, 하물며 욕망을 여의고 무량심(無量心)을 행하는 사람이겠는가!
復次,是心相無有住處,若內、若外,若大、若小,以禪定力故,其心調柔,疾遍諸身,還復亦速。譬如千頭龍,眼、耳各有二千,及有千口,心一時用;龍是麤身尚爾,何況菩薩!
또한 이 마음의 심상(心相)은 안이거나 밖이거나, 크거나 작거나 간에 머무르는 곳이 없으며, 선정의 힘으로 그 마음을 조복받고, 신속히 여러 몸에 두루하면서도 다시 되돌아옴도 역시 빠르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눈과 귀가 각각 2천 개요 천 개의 입이 있지만, 그 마음은 일시에 작용하는 것과 같으니, 용은 거친 추신(麤身)임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有人言:坐禪人事,所有力勢,不可思議;故一身爲無量身,無量身爲一身。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좌선(坐禪)하는 사람의 일과 그가 가지고 있는 세력(힘)은 불가사의한 것으로, 일신(一身)이 무량한 몸으로 되고 한량없는 몸이 일신(一身)으로 된다.”고 한다.
石壁無碍者,取石壁虛空相,微塵開闢,如撅入土。履水者,取地相多故,履水如地;取水相多故,入地如水;取火相多故,身出煙火。履 밟을 리, 신 리
돌과 벽에 걸림이 없는 석벽무애(石壁無礙)라는 것이란,
돌과 벽에 모두에 허공상(虛空相)을 취하므로 작은 미진들이 열리게 되면, 마치 말뚝이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물을 땅과 같이 걷는다는 이수여지(履水如地]라는 것은, 지상(地相)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물을 밟는 것이 마치 땅과 같아지는 것이고,
수상(水相)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땅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물과 같아지며,
화상(火相)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몸에서 불을 내뿜는 것이다.
捫摸日月者,神通不可思議力故,令手及日月,入火定故,月不能令冷;入水定故,日不能令熱。捫 어루만질 문
해와 달을 만지는 문모일월(捫摸日月)이라 함이란, 불가사의한 신통의 힘 때문에 손으로 하여금 해와 달까지 미치게 하며, 화정(火定)에 들기 때문에 달이 차게 하지 못하고, 수정(水定)에 들기 때문에 해가 뜨겁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問曰:是神通力乃至四禪中,此何以言“但至梵世,身得自在”?
묻나니, 이 신통력(神通力)은 사선(四禪)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라면,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범세(梵世, 범천의 세계)까지만 몸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것입니까?
答曰:此先已說,梵是初門故,言“梵世”則攝一切色界。又世人皆貴梵王,以爲世界主故。又是菩薩不欲於欲界散亂心現其自在,是故乃至離欲人中能有所作。如是神通相無量無數,爲易解故,少說譬喩。
답하나니, 이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이다.
범(梵)은 바로 첫 문이기 때문에 ‘범세(梵世)’라고 말하는 것이며, 일체의 색계(色界)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세간 사람들은 모두가 범왕(梵王)을 귀히 여기어 세계의 주인인 세계주(世界主)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이 보살은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서 그 자유자재함을 나타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욕망을 여읜 이들 안에 이르기까지 짓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통의 상(相)은 무랑하고 무수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약간의 비유를 들었다.
諸外道於此神通有二事錯:一者、起吾我心,我能起此事而生憍慢;二者、著是神通,譬如貪人著寶。以是故外道神通,不及聖人神通
모든 외도(外道)는 이 신통에 있어서 두 가지의 잘못이 있으니,
첫째는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을 일으켜서 “나는 이러한 일을 일으킬 수 있다.”고 교만을 내는 것이며,
둘째는 이 신통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치 탐(貪)이 많은 사람이 보물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때문에 외도의 신통은 성인들의 신통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나,
菩薩於是神通力知一切法自性不生,故不著;但念一切種智,爲度衆生故。餘五神通亦如是,如其法分別,先說其相,後皆說空。
보살은 이 신통력에 대하여 일체법의 자성은 나지 않는 자성불생(自性不生)임을 알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으며,
단지 일체종지(一切種智)만을 염(念)할 뿐이니, 이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며,
그 밖의 오신통(五神通)도 그와 같으니, 마치 그 법을 분별할 때에는 먼저 그 상(相)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과 같으며,
六神通餘義,如「讚菩薩品」中五神通義說。以是六神通廣利益衆生,故說:“具足得如是神通,增益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육신통(六神通)의 그 밖의 이치는 「찬보살품(讚菩薩品)」에서 오신통(五神通)의 이치에 대한 설명과 같으니,
이 육신통으로써 널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두루 갖추어 얻는 구족득(具足得)”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 이와 같은 신통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더욱 증익(增益)시키는 것이다.
▶經. “舍利弗!有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檀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不生慳心故。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檀, 보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도(薩婆若道)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畢竟)에는 공(空)이라서 간탐하는 간심(慳心)을 내지 않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有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尸羅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罪不罪不著故。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畢竟空)이어서 죄라거나 죄가 되지 않는 죄불죄(罪不罪)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有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羼提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不瞋故。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찬제(羼提, 인욕)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화를 내지 않는 불진(不瞋)이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有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毘梨耶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身心精進不懈息故。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비리야(毘利耶, 정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몸과 마음이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는 정진불해식(精進不懈息)이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有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禪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不亂不昧故。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선(禪, 선정)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어지럽지도 않은 불난(不亂)이고 어둡지도 않은 불매(不昧)이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有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般若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不生癡心故。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반야(般若, 지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는 불생치심(不生癡心)이기 때문이니라.
如是,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住六波羅蜜,淨薩婆若道,畢竟空故,不來不去故,不施不受故,非戒非犯故,非忍非瞋故,不進不怠故,不定不亂故,不智不愚故。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육바라밀에 머물러서 살바야(薩婆若)의 도(道)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불래불거(不來不去)이기 때문이며,
보시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불시불수(不施不受)기 때문이요,
계율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범하는 것도 아닌 비계비범(非戒非犯)이기 때문이며,
참는 것도 아니고 성내는 것도 아닌 비인비진(非忍非瞋)이기 때문이요
정진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은 불진불태(不進不怠)이기 때문이며,
안정하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은 불정불난(不定不亂)이기 때문이요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은 불지불우(不智不愚)이기 때문이니라.
爾時,菩薩摩訶薩不分別布施不布施、持戒犯戒、忍辱瞋恚、精進懈怠、定心亂心、智慧愚癡,不分別毀害、輕慢、恭敬。何以故?舍利弗!無生法中,無有受毀者、無有受害者、無有受輕慢恭敬者。
이때 보살마하살은 보시하거나 보시하지 않음ㆍ계율을 지니거나 범하는 것ㆍ인욕하거나 성 냄ㆍ정진과 게으름ㆍ마음이 안정하거나 어지러움ㆍ지혜롭거나 어리석음을 분별하지 않으며, 헐뜯음과 해함과 손해와 경만함과 공경하는 것도 분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사리불아, 생함이 없는 무생법(無生法) 안에서는 헐뜯음을 받는 이도 없고, 해침을 받는 이도 없으며, 경만과 공경을 받는 이도 없기 때문이니라.
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得如是諸功德,聲聞、辟支佛所無有。得是功德具足,成就衆生,淨佛世界,得一切種智!”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을 얻나니,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는 얻을 수 없는 이러한 공덕이 구족되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느니라.
▶論. 釋曰:是菩薩初發意,行般若波羅蜜,漸行餘功德,所謂檀波羅蜜等。菩薩住檀波羅蜜,修治薩婆若道,觀一切法畢竟空、不生慳貪心,以是二事故,開薩婆若道。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킨 초발의(初發意)에서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점차로 그 밖의 공덕도 행하나니, 이른바 단(보시)바라밀 등이라.
보살이 단(보시)바라밀에 머물러서 살바야의 도를 닦고 다스리며, 일체법은 필경공임을 관찰하면서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이러한 두 가지의 일 때문에 살바야의 도를 열게 되는 것이다.
所以者何?畢竟空中,無有慳貪;慳貪根本斷故,具足檀波羅蜜,具足檀波羅蜜故,莊嚴般若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畢竟空故,常不生癡心。所以者何?此中佛自說:“一切法不來不去,無施無受故,乃至不智不愚故。”
왜냐하면, 필경공 가운데는 간탐이 없기 때문이니,
간탐의 근본이 끊어졌기 때문에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게 되고,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장엄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은 필경공이기 때문에 항상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되 “일체법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불래불거(不來不去)이며, 보시도 없고 받는 이도 없는 불시불수(不施不受)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은 불지불우(不智不愚)이기 때문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問曰:若能如是觀,行六波羅蜜,得何等利益?
묻나니, 만약 이와 같이 육바라밀을 관하고 행하면 어떠한 이익을 얻는 것입니까?
答曰:此中佛自說:此菩薩不念有所施與、無所施與。若念有施,入虛妄法中,又著布施,心生憍慢。若念無所施,卽墮邪見中。
답하나니,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 보살은 베풀어 주는 바가 있다거나 베풀어 주는 바가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니, 만약 베풂이 있다고 생각하면 허망한 법에 들게 되고 또 보시에 집착하여 교만한 마음을 내게 되며,
만약 베풂이 없다고 생각하면 곧 삿된 소견에 떨어진다.”고 하셨으니,
是布施論議,是佛法中初門,云何言無?乃至不念有癡、有慧。是人如金剛山,四面風起,不能令動。
보시에 대한 논의(論議)는 바로 부처님의 불법(佛法) 가운데 첫문이거늘 어떻게 없다거나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어리석음이 있다거나 지혜로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은 마치 금강산(金剛山)과 같아서 사면에서 바람이 일어나도 움직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是菩薩爾時若有罵詈、讚歎,心無有異。何以故?此中佛自說:“無生法中無有罵者、無有害者、無恭敬者。”
그 때에 이 보살에게 설령 욕설을 하거나 찬탄하여도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생김이 없는 무생법(無生法) 안에서는 욕하는 이도 없고 해치는 이도 없으며 공경하는 이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聲聞、辟支佛,有加害者,不能深有慈悲心,若默然、若遠離。菩薩則不然,能深加慈心,愛之如子,方便度之。
어떤 사람이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해를 끼친다면, 자비의 마음이 깊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잠자코 있거나 또는 멀리 떠나버리게 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인자한 마음을 더욱 더하여 그를 사랑하기를 마치 아들처럼 여기면서 방편을 일으켜서 제도하게 되나니,
是故勝一切聲聞、辟支佛,而能敎化一切衆生,忍辱、慈悲、方便深故,隨願淸淨業因緣故,能淨佛世界。是法具足故,不久當得一切種智。
이러한 때문에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게 능히 일체 중생들을 교화할 수 있나니, 인욕과 자비의 방편이 깊기 때문이니, 원을 따르고 청정한 업의 인연 때문에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이 법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서 일체종지를 얻게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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