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往生品 第四之中 卷三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4. 왕생품(往生品)을 풀이함② 7
問曰:若爾者,何等是慧眼相?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어떠한 것이 혜안(慧眼)의 상(相)입니까?
答曰:有人言:八聖道中正見是慧眼相,能見五受衆實相、破諸顚倒故。有人言:能緣涅槃慧,名爲慧眼;所緣不可破壞故,是智慧非虛妄。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팔성도(八聖道) 가운데 정견(正見)이 바로 혜안(慧眼)의 상(相)이니, 능히 오수중(五受衆, 오중)의 실상을 보면서 모든 전도(顚倒)를 깨뜨리기 때문이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능히 열반의 지혜를 반연함을 일컬어 혜안(慧眼)이라 하나니, 반연할 바의 소연(所緣)은 깨뜨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지혜는 허망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有人言:三解脫門相應慧,是名慧眼。何以故?是慧能開涅槃門故。有人言:智慧現前,能觀實際,了了深入,通達悉知,是名慧眼。有人言:能通達法性,直過無碍。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삼해탈문(三解脫門, 공 무상 무작)과 상응한 지혜를 바로 혜안(慧眼)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이 지혜는 능히 열반의 문을 열기 때문이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혜가 눈앞에 나타나서 실제(實際)를 관찰할 때 능히 분명하게 깊이 들어가서 통달하여 모두 다 아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능히 법성(法性)을 통달하여 곧장 나아가되 막힘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며,
有人言:定心知諸法相如,是名慧眼。有人言:法空是名慧眼。有人言:不可得空中,亦無法空,是名慧眼。有人言:十八空皆是慧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정의 마음인 정심(定心)으로 제법의 법상(法相)을 아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공(法空)을 바로 혜안이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가득공(不可得空) 안에는 역시 법공도 없나니, 이를 혜안이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팔공(十八空)은 모두가 혜안이다.”고 하며,
有人言:癡、慧非一非異。世閒法不異出世閒,出世閒法不異世閒;世閒法卽是出世閒,出世閒法卽是世閒。所以者何?異不可得故。諸觀滅,諸心行轉還無所去,滅一切語言,世閒法相如涅槃不異,如是智慧,是名慧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리석음의 치(癡)와 지혜의 혜(慧)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세간법이 출세간(出世間)과 다르지 않고, 출세간법이 세간과 다르지 않으며, 세간법이 곧 출세간이요, 출세간법이 곧 세간이니, 왜냐하면, 다름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觀)으로 모든 마음의 작용을 멸하여 점차 전환하여 더 갈 데가 없고, 일체의 언어가 소멸한 세간법의 상(相)은 마치 열반과 다르지 않나니, 이와 같은 지혜를 바로 혜안(慧眼)이라 한다.”고 하였다.
復次,此中佛自說:“慧眼菩薩,一切法中不念有爲、若無爲,若世閒、若出世閒,若有漏、若無漏等"是名慧眼。
또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혜안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일체법 가운데에서 유위(有爲)라거나 무위(無爲)라거나 세간(世間)이라거나 출세간(出世間)이라거나 유루(有漏)라거나 무루(無漏)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것을 혜안(慧眼)이라 한다.”고 하셨다.
若菩薩見有爲、世閒、有漏,卽墮有見中;若見無爲、出世閒、無漏,卽墮無見中。是有無二見捨,以不戲論慧,行於中道,是名慧眼。
만약 보살이 유위요 세간이며 유루라고 본다면 곧 있다는 소견의 유견(有見)에 떨어지게 되고,
만약 무위요 출세간이며 무루라고 본다면 곧 없다는 소견의 무견(無見)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렇게 유(有)와 무(無)라는 두 소견을 버리고, 쓸데없는 희론을 하지 않으면서 지혜로써 중도(中道)를 행한다면, 이를 혜안(慧眼)이라 하는 것이다.
得是慧眼,無法不見、無法不聞、無法不知、無法不識。所以者何?得是慧眼,破邪曲諸法、無明諸法。摠相、別相各皆如是。
이 혜안을 얻게 되면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식별(識別)하지 못함이 없으니,
왜냐하면, 이 혜안(慧眼)을 얻으면 삿되게 굽은 사곡(邪曲)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제법의 무명(無明)과 제법의 총상(總相)과 별상(別相)도 각각 모두가 이와 같은 것이다.
問曰:阿羅漢、辟支佛亦得慧眼,何以不說“無法不見、無法不聞、無法不知、無法不識”?
묻나니, 아라한과 벽지불 역시 혜안(慧眼)을 얻거늘, 무엇 때문에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하지 못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慧眼有二種:一者、摠相,二者、別相。聲聞、辟支佛見諸法摠相,所謂無常、苦、空等;佛以摠相、別相慧觀諸法。聲聞、辟支佛雖有慧眼,有量有限。
답하나니, 혜안(慧眼)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전체의 총상(總相)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별상(別相)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제법의 총상(總相)을 보나니, 이른바 무상(無常) 고(苦) 공(空) 등이라.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의 지혜로써 제법을 관찰하시니,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비록 혜안이 있다 하여도 분량이 있고 한계가 있는 것이다.
復次,聲聞、辟支佛慧眼,雖見諸法實相,因緣少故,慧眼亦少,不能遍照法性;譬如燈油炷雖淨,小故不能廣照。
또 성문이나 벽지불의 혜안은 비록 제법의 실상(實相)을 본다 하여도 그 인연이 적기 때문에 혜안 역시 적어서 법성(法性)을 두루 비출 수가 없으니,
비유하자면, 등잔불의 심지가 비록 깨끗할지라도 작기 때문에 널리 비출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諸佛慧眼,照諸法實性,盡其邊底,以是故無法不見、無法不聞、無法不知、無法不識;譬如劫盡,火燒三千世界,明無不照。
모든 부처님의 혜안은 제법의 실상을 그 바닥의 끝까지 다하여 비추나니, 이 때문에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라.
비유하자면, 마치 겁(劫)이 다하여 불이 삼천세계를 태울 때에는 그 광명이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는 것과 같으며,
復次,若聲聞、辟支佛慧眼無法不知者,與一切智人有何等異?菩薩世世集福德、智慧苦行,何所施用?
또한 만약 성문이나 벽지불의 혜안이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다면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분과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보살은 세상마다 복덕과 지혜를 쌓고 고행(苦行)을 하셨는데 베풀어 쓸 시용(施用)할 바가 무엇이 되겠는가?
問曰:佛用佛眼,無法不知,非是慧眼,今云何言“慧眼無法不知”?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불안(佛眼)으로써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지만, 이 불안은 혜안이 아닌데 지금 어찌하여 혜안이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慧眼,成佛時變名佛眼,無明等諸煩惱及習滅故,一切法中皆悉明了。如“佛眼”中說:“無法不見、聞、知、識。”以是故,肉眼、天眼、慧眼、法眼,成佛時失其本名,但名佛眼。譬如閻浮提四大河,入大海中,則失其本名。
답하나니, 혜안은 부처님이 될 때 변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불안(佛眼)이라 하는 것이다.
무명(無明) 등의 모든 번뇌와 번뇌의 습(習)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일체법에 대한 모두를 환히 다 알게 되는 것이라.
불안(佛眼)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법마다 보고 듣고 알고 식별하지 못함이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성불할 때 육안(肉眼)과 천안(天眼)과 혜안(慧眼)과 법안(佛眼)은 그 본래의 이름이 없어지고 단지 불안(佛眼)이라고만 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염부제(閻浮提)의 네 개의 큰 강인 사대하(四大河)가 큰 바다로 들어가면, 강 본래의 이름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何以故?肉眼,諸煩惱有漏業生故,虛誑不實;唯佛眼無誑法。天眼,亦從禪定因緣和合生故,虛誑,不能如實見事。慧眼、法眼,煩惱習未盡故,不畢竟淸淨故捨。
왜냐하면, 육안(肉眼)은 모든 번뇌와 유루의 업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고 진실하지 않지만, 오직 불안(佛眼)만은 거짓된 법이 없기 때문이며,
천안(天眼)도 역시 선정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어서 실답게 사실을 볼 수 없으며,
혜안(慧眼)과 법안(佛眼)도 번뇌의 습기가 아직 다하지 못하여, 필경에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佛眼中無有謬錯,盡其邊極!以是故阿羅漢、辟支佛慧眼不能畢竟淸淨,故不能無法不見。
불안(佛眼)에는 그 끝을 다하기까지 이러한 착오가 없기 때문이며,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혜안은 필경에 청정한 것이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법도 볼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問曰:佛現得果報肉眼,能見色,是事云何?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현재 과보로 얻은 육안으로 빛깔을 보시는데, 이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答曰:肉眼雖生眼識,而佛不隨其用,不以爲實;如“聖自在神通”中說,佛告阿難:“所見好色中生厭惡心,眼見惡色生不惡厭心,或時見色不生污穢、不污穢,但生捨心" 如是則肉眼無所施用。
답하나니, 육안은 비록 안식(眼識)을 낼지라도 부처님께서는 그 작용에 따르지도 않으시며, 진실이라고 여기지도 않으시니, 이는 마치 성자재신통(聖自在神通)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좋은 빛깔의 호색(好色)을 보고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눈으로 나쁜 빛깔의 악색(惡色)을 보고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때로는 빛깔(色)을 볼 때 “더럽다, 더럽지 않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단지 버림의 마음인 사심(捨心)을 낼 뿐이다.
이와 같음은 곧 육안(則肉)으로 보는 바는 베풀어 쓸 시용(施用)되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復次,有人言:得聖道時,五情淸淨異本。復次,諸法畢竟空及諸法通達無碍,是二摠爲慧眼。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도를 얻을 때에는 오정(五情, 오근)이 청정하여 본래와는 다르다.”고 하며,
또한 제법의 필경공(畢竟空)과 제법을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통달무애(通達無碍), 이 두 가지를 통틀어서 혜안(慧眼)이라 한다고 하였다.
大智度論卷第三十九 終 대지도론 제 39 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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