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八空義 第四十八 卷三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8. 초품 중 십팔공(十八空)의 뜻을 풀이함 6
“第一義空”者,第一義名諸法實相,不破不壞故。是諸法實相亦空。何以故?無受無著故。若諸法實相有者,應受應著;以無實故,不受不著;若受著者卽是虛誑。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함의 제일의(第一義)는 제법의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이니, 부서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기 때문에 이 제법의 실상 역시도 공(空)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받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
만약 제법의 실상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받아야 하고 집착해야 하겠지만,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다.
만약 받거나 집착한다면 곧 그것은 허황된 거짓의 허광(虛誑)인 것이다.
復次,諸法中第一法,名爲涅槃。如『阿毘曇』中說:“云何有上法?一切有爲法及虛空、非智緣
盡。云何無上法?智緣盡。”智緣盡是卽涅槃。涅槃中亦無涅槃相,涅槃空是第一義空。
또한 제법 중에서 으뜸가는 법을 열반이라 하나니, 마치 아비담(阿毘曇, 논장) 중에서 “무엇이 위가 있는 유상법(有上法)이고,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며, 허공(虛空)과 비지연진(非智緣盡)인가?
무엇이 위없는 무상법(無上法)이고 지연진(智緣盡)인가? 지연진 이것이 곧 열반이다”고 설한 것과 같으니, 열반 가운데는 역시 열반이라는 상(相)이 없나니, 열반이 공(空)한, 이것이 바로 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
問曰:若涅槃空無相,云何聖人乘三種乘入涅槃?又一切佛法皆爲涅槃故說,譬如衆流皆入于海。
묻나니, 만약 열반이 공한 것이라면 상(相)이 없을 것인 즉, 어떻게 성인은 세 종류의 승(乘, 삼승)을 타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또한 일체 부처님의 법은 모두가 열반을 위하여 설명된 것이니, 마치 물의 여러 줄기의 흐름이 모두 바다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答曰:有涅槃,是第一寶、無上法。是有二種:一者、有餘涅槃,二、無餘涅槃。愛等諸煩惱斷,是名有餘涅槃;聖人今世所受五衆盡,更不復受,是名無餘涅槃。
답하나니, 열반은 있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으뜸가는 보배요 위없는 법이다.
이 열반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고, 둘째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탐애(貪愛) 등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게 되는 것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성인이 이 세상에서 받은 바의 5중(衆, 오온의 육신)이 모두 다하여 다시는 받지 않게 되는 것을 바로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不得言“涅槃無”!以衆生聞涅槃名,生邪見,著涅槃音聲而作戲論:若有若無。以破著故,說涅槃空。
“열반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나니, 중생이 열반이라는 이름을 듣고 삿된 소견을 내어서 열반이라는 음성에 집착하여 쓸모없는 희론을 세워서 “있다. 없다”고 할 것이므로, 그러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열반이 공(空)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若人著有,是著世閒;若著無,則著涅槃。破是凡人所著涅槃,不破聖人所得。何以故?聖人於一切法中不取相故。
만약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세간에 집착한 것이요
만약 없다는 것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열반에 집착한 것이니,
이 범부가 집착하고 있는 열반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며,
성인이 얻은 바의 열반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성인은 일체법 가운데서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復次,愛等諸煩惱,假名爲縛;若修道解是縛,得解脫,卽名涅槃;更無有法名爲涅槃。
또한 탐애 등의 모든 번뇌를 가명을 붙여서 박(縛, 속박)이라 하는데, 만약 도를 닦아서 이 박(縛,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면, 곧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는 것이니, 다시 다른 어떤 법이 있어서 열반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如人被械得脫,而作戲論:“是械,是腳,何者是解脫?”是人可怪,於腳、械外更求解脫;衆生亦如是,離五衆械更求解脫法。
차꼬=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옛 형구
마치 사람이 차꼬를 차고 있다가 벗어나게 되어서도 쓸모없는 희론을 하며 “이것은 차꼬요, 이것은 다리인데 어느 것이 벗어난 것일까?”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이없게도 다리와 차꼬 밖에서 다시 벗어남을 구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과 같이,
중생 또한 5중(衆, 오온)의 차꼬를 여의고서 다시 해탈하는 법을 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復次,一切法不離第一義,第一義不離諸法實相;能使諸法實相空,是名爲第一義空。如是等種種,名爲第一義空。
또한 일체법은 제일의(第一義)를 여의지 않고 제일의는 제법의 실상을 여의지 않으면서, 능히 제법의 실상을 공하게 하나니, 이러함을 바로 제일의공이라 하는 것이라.
이와 같은 등의 여러 가지를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하는 것이다.
“有爲空”、“無爲空”者,有爲法名因緣和合生,所謂五衆、十二入、十八界等。無爲法名無因緣,常不生不滅如虛空。
유위공(有爲空)과 무위공(無爲空)이라 함에서의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5중(衆, 오온)과 12입(入)과 18계(界) 등이요.
무위법(無爲法)은 인연이 없는 것으로써 항상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여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써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今有爲法二因緣故空:一者、無我、無我所及“常相不變異”不可得故空;二者、有爲法、有爲法相空,不生不滅,無所有故。
이러한 유위법(有爲法)에는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공하나니,
첫째는 무아(無我)이고, 내 것이 없는 무아소(無我所)이며, 항상하여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상상불변이(常相不變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며,
두 번째는 유위법(有爲法)은 유위의 법상(法相)이 공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것이며,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問曰:我、我所及常相不可得故應空,云何言“有爲法、有爲法相空”?
묻나니, 나와 내 것의 아아소(我我所)와 항상하다는 상상(常相)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공(空)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유위법(有爲法)에서 유위의 법상(法相)이 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若無衆生,法無所依。又無常故,無住時;無住時故,不可得 知是故法亦空。
無常무상=1. 모든 것이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되고 덧없음 2.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늘 변함 3.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답하나니, 만약 중생이 없다면 법은 의지할 데가 없게 되는 것이며,
또 항상하지 않은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머무르는 때도 없는 무주시(無住時)이며, 무주시(無住時)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니, 이러함을 알기 때문에 법 역시도 공한 것이다.
問曰:有爲法中,常相不可得;不可得者,爲是衆生空?爲是法空?
묻나니, 유위법(有爲法)에서는 항상하다는 상상(常相)을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중생이 공하다는 중생공(衆生空)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법이 공하다는 법공(法空)이 되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我心顚倒,故計我爲常。是常空則入衆生空"
有人言:“以心爲常,如梵天王說:是四大、四大造色悉皆無常,心意識是常。是常空,則入法空"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에 나를 헤아리면서 항상하다 하나니, 이 항상하다는 것이 공한 것을 알게되면 곧 중생이 공하다는 중생공(衆生空)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마음으로써 항상함을 삼나니, 마치 범천왕(梵天王)이 이 사대(四大)를 설명하면서 ‘색(色, 색온)은 사대(四大)로 조작된 것으로써 무상(無常)한 것이지만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은 바로 항상한 상(常)이다’고 하였으니, 이 항상한 것이 공한 것이라 한다면, 법이 공하다는 법공(法空)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或有人言:“五衆卽是常,如色衆雖有變化而亦不滅,餘衆如心說。五衆空,卽是法空。是故常空亦入法空中"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수상행식의 오중(五衆, 오온)은 곧 항상한 것이니, 비록 색중(色衆, 색온, 물질)은 변화한다고 하나, 역시 소멸하지 않는 것이며, 그 나머지의 중(衆, 온蘊)은 마치 마음(心)과 같은 것이다.
색수상행식의 오중(五衆)이 공하다고 한다면 곧 법공(法空)이니, 그러므로 항상한 것이 공하다는 상공(常空) 역시도 법공(法空)에 들어가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復次,有爲法、無爲法空者,行者觀有爲法、無爲法實相,無有作者,因緣和合故有,皆是虛妄,從憶想分別生;不在內,不在外,不在兩中閒。
또한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공(空)’하다 함이란,
수행하는 이는 유위법과 무위법의 실상(實相)을 관하면서 “짓는 작자(作者)가 없으나, 인(因)과 연(緣)이 화합한 까닭에 있는 것이니, 이 모두는 허망한 것이요,
생각과 분별에서 생기는 것이며, 안(육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육경)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둘의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고 하는 것이다.
凡夫顚倒見故有;智者於有爲法不得其相,知但假名,以此假名導引凡夫,知其虛誑無實,無生無作,心無所著。
범부는 전도(顚倒)되어 뒤바뀐 소견 때문에 있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유위의 법에 대하여 그의 상(相)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이 가명(假名)으로써 범부를 인도하되,
그 또한 거짓된 것이고 진실하지 않은 것이며, 생기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앎으로,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復次,諸賢聖人不緣有爲法而得道果,以觀有爲法空故,於有爲法心不繫著故。
또한 모든 성현들은 유위의 법을 반연하지 않으면서 도의 과위인 도과(道果)를 얻나니, 유위법(有爲法)은 공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유위법에 마음으로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復次,離有爲則無無爲。所以者何?有爲法實相卽是無爲,無爲相者則非有爲,但爲衆生顚倒故分別說。有爲相者,生、滅、住、異;無爲相者,不生、不滅、不住、不異,是爲入佛法之初門。
또한 유위를 여의게 되는 즉시 곧 무위 또한 없는 것이 되나니,
왜냐하면, 유위법(有爲法)의 실상이 곧 무위(無爲)이며, 무위(無爲)의 상(相)이란 것이 유위(有爲)가 아닌데, 다만 중생들이 전도(顚倒)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하여 설명할 뿐이다.
유위(有爲)의 상(相)은 나고(生) 멸하고(滅) 머무르고(住) 달라지는(異) 것이나,
무위(無爲)의 상(相)은 나지도 않고(不生) 사라지지도 않고(不滅) 머무르지도 않고(不住) 달라지지도 않는(不異) 것이니,
이것이 부처님의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첫 문이 되는 것이다.
若無爲法有相者,則是有爲。有爲法,生相者則是集諦,滅相者則是盡諦。若不集則不作,若不作則不滅,是名無爲法如實相。
만일 무위법에 상(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유위가 되는 것이며,
유위법에 상(相)이 생긴다는 것은 곧 쌓임의 집제(集諦)가 되는 것이고,
상(相)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다함의 진제(眞諦)가 되는 것이나,
만약 쌓지 않는 불집(不集)이라면 곧 짓지 않는 불작(不作)이며,
만일 짓지 않는 불작(不作)이라면 곧 사라지지 않는 불멸(不滅)이니,
이것을 무위법(無爲法)의 여실한 여실상(如實相)이라 하는 것이다.
사제(四諦), 사성제(四聖諦);
①고제(苦諦, Duhakaha Satya)는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이다. 즉, 인간은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통찰이다.
②집제(集諦, Samudaya Satya)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로,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 · 괴고 · 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번뇌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갈망함) 또는 망집(妄執)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 ·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을 고통의 주 원인으로 본다.
③멸제(滅諦, Nirodha Satya)는 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 혹은 고통의 원인의 완전한 소멸에 관한 진리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 ·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이라 한다.
④도제(道諦, Mārga Satya)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를 말한다. 즉, 도제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의 모든 교의는 사실상 도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원시 불교에서는 도제를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인 것으로 설명한다.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도제를 팔정도를 포함하는 사념처(四念處) · 사정근(四正勤) · 사여의족(四如意足) · 오근(五根) · 오력(五力) · 칠각지(七覺支) · 팔정도(八正道)의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인 것으로 설명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도제를 37조도품 외에 보살의 원행(菩薩의 願行: 보살의 서원과 수행, 간단히 보살행 또는 보살도)을 담은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 원(願) · 역(力) · 지(智)의 네 가지를 추가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위키
若得是諸法實相,則不復墮生、滅、住、異相中;是時不見有爲法與無爲法合,不見無爲法與有爲
法合,於有爲法、無爲法不取相,是爲無爲法。
만약 이러한 제법의 실상을 얻게 된다면, 다시는 나고(生) 멸하고(滅) 머무르고(住) 달라지는(異)의 상(相)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 때에는 유위법이 무위법과 함께 합하여 지는 것도 보지 않고,
무위법이 유위법과 함께 합하여 지는 것도 보지 않으며,
유위법이나 무위법에 대한 상(相)을 취하지도 않게 되나니,
이러함이 무위법(無爲法)이 되는 것이다.
所以者何?若分別有爲法、無爲法,則於有爲、無爲而有㝵。若斷諸憶想分別、滅諸緣,以無緣實智,不墮生數中,則得安隱常樂涅槃。
왜냐하면, 만약 유위법과 무위법을 분별한다면, 유위와 무위에 대한 장애가 있게 되기 때문이니,
만약 모든 생각과 분별을 끊게 되면 모든 연(緣)이 소멸하게 되고,
연(緣)이 없는 실상의 지혜로써 분별하고 헤아림에 떨어지지 않으니,
곧 안온하고 변함없이 항상한 안은상락열반(安隱常樂涅槃)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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