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善根供養義 第四十六 卷第三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6. 초품  선근공양(善根供養) 뜻을 풀이함 9

 

問曰:經言種種福田,今何以獨言“殖於佛田”?

묻나니, 경전에서는 갖가지 복전(福田)”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유독 부처님의 밭, 불전(佛田)에 심는다 하는 것입니까?

 

答曰:雖有種種福田,佛爲第一福田,以十力、四無所畏、十八不共法 如是等無量佛法具足,是故獨說“殖於佛田”。

답하나니, 비록 갖가지 복전(福田)이 있다 하여도 부처님이 으뜸가는 복전(福田)이니,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의 무량한 부처님 가르침인 불법(佛法)을 두루 갖추신 때문이므로 오로지 “불전(佛田) 심는다 한 것이. 

法寶雖爲佛師,若佛不說,法爲無用;如雖有好藥,若無良醫,藥則無用。以是故,法寶雖上而前說佛寶,何況僧寶!

復次,佛田能獲無量果報,餘者雖言無量而有差降;以是故,佛田第一。

법보(法寶)란 비록 부처님의 스승이라 할지라도 만약 부처님께서 그 법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쓸모 없는 것이 되나니, 마치 비록 좋은 약이 있다 할지라도 좋은 의사가 없다면 그 약은 소용이 없는 것과 같나니, 

 때문에 법보(法寶)가 비록 상위 있다 하여도 먼저 불보(佛寶) 말씀하는 것이니, 하물며 승보(僧寶)이겠는가!

또한 불전(佛田)에서는 한량없는 과보를 얻을 수 있지만,  밖의 것은 비록 “무량하다 할지라도 차등이 있나니,  때문에 불전(佛田)이 첫째가 되는 것이다. 

 

“不盡”者,諸佛成就無量功德故,於中殖福,福亦無盡。

다하지 않는, 불진(不盡)이라 함이란, 모든 부처님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안에 복을 심게 되면   또한 다함이 없게 되는 것이며, 

 

復次,佛功德無量、無邊、無數、無等故,殖福者福亦不盡。

復次,佛爲菩薩時,緣一切衆生,如衆生無量、無邊故,福亦無盡。

또한 부처님의 공덕은 무량(無量)하고 무변(無邊)하며 무수(無數)하고 무등(無等)하기 때문에 그러함에 심은  역시도 불진(不盡)이 되는 것이며, 

또한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실 때에 일체 중생을 반연하셨나니, 마치 중생이 무량(無量)하고 무변(無邊)하기 때문에  역시도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하게 되며, 

 

復次,佛田淸淨:拔愛等諸煩惱穢草,淨戒爲平地,大慈悲爲良美,除諸惡邪鹹土;三十七品爲溝港,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等爲垣牆,能出生三乘涅槃果報 殖種於此無上無比田者,其福無盡!淃 물돌아 흐를 권

또한 불전(佛田) 청정하여 애욕 등의 모든 번뇌의 더러운 잡초를 뽑아내어 버리나니,

청청한 계율을 평지(平地) 삼고, 대자비 아름다움으로 삼아서,

모든 악하고 삿된 소금 밭의 함토(醎土) 제거하며,

37 조도 도랑이 흘러가는 구권(溝淃)으로 삼고,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 사무애지(四無礙智) 등을 담장으로 삼아 

삼승(三乘) 열반의 과보가 생기게 하나니, 

이렇게 무상(無上)하고 비할 바 없는 밭에 씨를 심는 이의 복 또한 무진(無盡) 할 것이다.

 

問曰:一切有爲法無常相故,皆歸於盡;福從因緣生,何得不盡?

묻나니, 일체의 유위법은 무상(無常) 상(相)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다함의 진(盡)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복은 인연에서 생기는 것인데 어찌하여 다하지 않는 불진(不盡)이 될  있는 것입니까?

 

答曰:亦不言“常不盡”,自言“乃至得佛中閒不盡”。

답하나니, 역시 항상 다하지 않는다”것이라 말하지 않는 것이나, 다만 부처가 되기까지의  중간에서 다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復次,一切有爲法雖念念生滅,相續不斷、果報不失故,名爲不盡。如燈雖焰焰生滅不名滅,脂盡炷滅,乃可稱滅;福亦如是,深心種於良田故,乃至法盡而亦不盡。

또한 일체 유위의 법은 비록 생각생각을 따라 일어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하는 것이라 하여도, 서로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며, 과보 또한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불진(不盡)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의 불꽃마다 나고 없어짐이 이어지는 것이나, 꺼졌다는 멸(滅)이라 말하지 않으나,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없어지고 난 뒤에 비로소 꺼졌다고 하는 것과 같이, 

복(福) 역시도 그와 같아서 깊은 마음의 심심(深心)으로 좋은 밭의 양전(良田)에 심었기 때문에 법이 다하는 법진(法盡)까지 다하지 않으며, 

 

復次,菩薩知諸法實相,如涅槃不盡,福德入諸法實相故而亦不盡。

또한 보살은법의 실상(實相) 알기에, 마치 열반이 다하지 않는 불진(不盡)인 것과 같이 복덕 또한 제법의 실상에 들기 때문에 역시 다하지 않는 것이다.

 

問曰:若爾者,涅槃不盡,福德亦應常不盡,云何言“乃至佛中閒不盡”?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 열반이 다하지 않으므로 복덕 역시도 항상 다하지 않아야 하나니, 어찌하여 “부처님이 되기까지의  중간에만 다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是福德者以智慧力故,令是功德如涅槃畢竟空、不生不滅;以是故,喩如涅槃,非卽涅槃。若是涅槃,不應爲喩。若是涅槃,云何果報成佛而不盡?

답하나니,  복덕은 지혜의 힘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덕으로 하여금 마치 열반이 필경공(畢竟空)이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되는 때문에 비유하여 열반과 같다고 하는 것일 뿐, 그것이  열반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열반이라면 비유로 삼지 않아야 하며,

만약 그것이 바로 열반이라면 어떻게 과보로 성불하고는 불진(不盡)이라 할 수 있겠는가!

 

譬如三解脫門:空、無相、無作。如解脫畢竟空相,是空解脫門觀世閒亦畢竟空;如解脫無相相,是無相解脫門觀世閒亦無相相;解脫無作相,是無作解脫門觀世閒亦無作相。以是故說:“欲殖一善根於佛福田,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而不盡者,當學般若波羅蜜。

비유하자면, 마치 삼해탈문(三解脫門)이 공(空)이요 무상(無相)이요, 무작(無作)이라.

해탈이 필경공(畢竟空)의 상(相)이라면, 이 필경공의 해탈문으로 세간을 관찰하여도 역시 필경공이요,

해탈이 무상(無相)이라면, 이 무상(無相) 해탈문으로 세간을 관찰하여도 역시 무상(無相)의 상(相)이요,

해탈이 무작(無作)이라면. 이 무작(無作)의 해탈문으로 세간을 관찰하여도 무작(無作)의 상(相)이라

이러한 때문에 “어느 한 선근을 부처님의 복전에 심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다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 欲令十方諸佛稱讚其名,當學般若波羅蜜!”

▷經.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의 이름을 칭찬하여 주시기를 원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問曰:菩薩若觀諸法畢竟空,內無吾我,已破憍慢,云何欲令諸佛稱讚其名?又菩薩法應供養諸佛,云何反求諸佛供養?

▷論. 묻나니, 보살이 만약 제법이 필경공(畢竟空)임을 관찰한다면, 이미 교만을 깨트려서 안으로는 나라는 아집의 오아(吾我)가  터인데, 어떻게 모든 부처님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칭찬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또한 보살의 법으로는 마땅히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인데, 어떻게 도리어 모든 부처님의 공양을 구하는 것입니까?

 

答曰:佛法有二門:一、爲第一義門,二、爲世俗法門。以世俗門故,欲令諸佛讚歎;雖爲諸佛所讚歎,而不見我,不取衆生相,世閒假名故說。

답하나니, 부처님의 불법(佛法)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으니,

첫째는 제일의문(第一義門)이고, 둘째는 세속의 가르침인 세속법문(世俗法門)이다.

세속법(世俗法)으로써 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으로 하여금 찬탄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비록 모든 부처님의 찬탄을 받는다 하여도 '나'를 보지도 않고,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도 않으니,

세간에서 붙인 가명(假名)인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汝言云“何反求佛供養”者,如後品中,佛所讚歎菩薩 畢竟阿鞞跋致 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是菩薩欲得 決定知是阿鞞跋致以不,以是故求佛讚歎,非求供養!

그대가 어떻게 도리어 부처님의 공양을 구하는 것이냐 말하였는데, 이는 후품(後品)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보살이 필경에는 아비발치(阿鞞跋致)에 이르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되면 부처님의 찬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보살은 결단코  아비발치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부처님의 찬탄을 구하는 것일 뿐, 공양을 구하는 것이 아닌 것이.

 

復次,餘人餘衆生,貪欲、瞋恚、愚癡覆心故,不能如實讚歎。何以故?若偏有所愛,不見實過,但見功德;若偏有所瞋,但見其過,不見其德;若愚癡多,不能如實見其好醜。

또한  밖의 사람들과 다른 중생들은 탐욕과 성내어 노함과 어리석음으로 마음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진실한 찬탄을 알지도 못하나니,

왜냐하면 만약 치우치게 탐애하는 것이 많으면 진실로 허물을 보지 못하나, 단지 공덕만을  뿐이고, 

만약 치우치게 화내는 것이 많으면, 다만 그의 허물만을  뿐,  덕은 보지 못하게 되, 

만약 치우치게 어리석음이 많다면, 아름답고 추함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諸天、世人雖有智慧,三毒薄者,亦不能得如實讚,猶有謬失,無一切智故、結使不盡故。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은 비록 지혜가 있고 삼(三) 얇은 이라 하여도, 역시 부처님의 진실한 칭찬을 얻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짓게 되나, 이는 일체지 없기 때문이요 또한 결사(結使, 번뇌)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聲聞、辟支佛三毒雖盡,亦不能如實讚,猶有餘氣未盡,又智慧不具足故。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삼독이 다하였다 하여도 진실한 찬탄을 얻을 수 없나니, 아직도 남은 습기(習氣) 다하지 못하였으며, 지혜 또한 두루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唯佛一人,三毒及氣永盡、成就一切智故,能如實讚、不增不減。

以是故,行者欲得諸佛所讚,知其實德,不求餘人稱讚。

오로지 부처님 한 사람만이 삼독과 습기가 영원히 다하였으며, 일체지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진실한 찬탄에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기 때문이니,

이에 수행하는 이는 모든 부처님의 칭찬하시는 바를 얻어서 부처님의 진실한 덕을 알고자 하는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은 칭친을 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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