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欲住六神通釋論 第四十三 卷二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3. 초품  육신통에 머무르고자 하면[欲住六神通]   풀이함 6

 

問曰:何因緣故,菩薩智慧勝聲聞、辟支佛?

묻나니, 어떠한 인연으로 보살의 지혜는 성문이나 벽지불보다도 수승한 것입니까?

 

答曰:如一『本生經』中說:“菩薩智慧 於無量阿僧祇劫 已來合集衆智,於無量劫中 無苦不行、無難不爲。爲求法故,赴火、投巖、受剝皮苦,出骨爲筆,以血爲墨,以皮爲紙,書受經法" 赴 나아갈 부,

답하나니, 마치 본생경(本生經)에서의 말씀과 같이, 보살의 지혜는 무량한 아승기겁으로부터  지혜를 쌓아서 모았으며, 무량한  동안 괴로운 일(고행)마다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어려운 일마다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법을 구하기 위하여 불에 뛰어 들기도 하였고, 절벽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였으며, 살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도 받았으며, 그리고 뼈를 내어서 붓을 삼고 피로써는 먹을 삼고 가죽으로써 종이를 삼아 경법을 베껴 적었던 것이라.


如是等爲法故,受無量苦;以智慧故,世世供養其師,視之如佛。一切所有經書悉皆誦讀、解說;於無量阿僧祇劫,常思惟籌量,尋求諸法好醜、深淺、善不善、漏不漏、常不常、有無等,思惟分別問難。

이와 같이 법을 위하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았으며, 지혜 때문에 세세마다 그의 스승에게 공양하고 대접하기를 마치 부처님처럼 모셨으며, 일체의 모든 경서(經書) 모두  읽고 외우고 해석하였으며,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 항상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제법의 아름답고 추함과, 깊고 얕음과, 좋 나쁨과,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와 번뇌 없는 무루(無漏)와, 항상하고 무상함과, 있고 없음 등을 찾고 궁구하였으며, 이렇게 사유하고 분별하여, 어려운 것에 대하여 묻기도 하였.

 

爲智慧故,供養諸佛及菩薩、聲聞,聽法、問難、信受、正憶念、如法行。如是智慧因緣具足故,云何不勝阿羅漢、辟支佛!

지혜를 위하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에게 공양하면서 법을 듣고, 따져 묻고, 믿고 받아들여서 바르게 기억하고, 법대로 행하였나니, 이러함으로 지혜의 인연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으니 어떻게 아라한이나 벽지불보다 수승하지 않겠는가?

 

復次,菩薩智慧,五波羅蜜佐助莊嚴,有方便力、於一切衆生有慈悲心故,不爲邪見所妨。住十地中故 智慧勢力深大,大故勝於聲聞、辟支佛;以大因故,小者自壞。阿羅漢、辟支佛無是事。以是故言:“欲勝聲聞、辟支佛智慧,當學般若波羅蜜"

또한 보살의 지혜는 다섯 가지 바라밀로써 도우 장엄하여 방편의 힘을 지니게 되었으며, 일체 중생들을 위한 자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삿된 소견에 방해 받지 않았으며,

10() 머물러 지혜의 힘이 깊고 컸으, 깊고 큰 힘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수승하고  인연이 있게 되었으므로 작은 것은 스스로가 무너지게 되었으나,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이러한 일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보다 수승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하신 것이다.

 

▶經. “欲得諸陁羅尼門、諸三昧門,當學般若波羅蜜"

▷經. 모든 다라니문(陀羅尼門) 모든 삼매문(三昧門)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論.“陁羅尼”,如「讚菩薩品」中說。“門”者,得陁羅尼方便諸法是,如三三昧名解脫門。

論. 다라니(陀羅尼)는 찬보살품(讚菩薩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이라 함은 다라니를 얻는 방편이 되는 제법이니, 마치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삼삼매(三三昧) 얻어야 열반문에 이르게 되는 해탈문(解脫門)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라니(陀羅尼)= ‘총지(摠持) ·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고도 한다.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데, 

첫째는 지혜 또는 삼매(三昧)를 뜻한다. 우주의 실상(實相)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法門)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의 다라니를 기억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연상하여 잊지 않게 하며, 선법(善法)을 가지게 되고 악법을 잘 막을 수 있게 된다. 보살이 타인을 교화하려면 반드시 다라니를 얻어야 하며, 다라니를 얻으면 무량한 불법(佛法)을 잊지 않고 자유자재로 설교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는 진언(眞言)을 뜻한다. 범어를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를 적어서 외우는 것으로,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뜻이 있다. 밀교에서는 주다라니(呪陀羅尼)라 하여, 재난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보고 있다.

원시불교에서는 세속의 주술이나 밀법(密法)을 행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나, 실제로는 원시불교 경전에서 이미 호신주(護身呪)가 쓰였고, 대승불교 초기에 부분적으로 다라니가 채택되어 차차 증대되어갔다. 4세기경부터는 주법(呪法)만을 역설하는 독립적인 경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설법이라고 자칭하는 밀교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움

 

何者是方便?若人欲得所聞皆持,應當一心憶念,令念增長。先當作意,於相似事繫心,令知所不見事;如周利槃陁迦,繫心拭革屣物中,令憶禪定除心垢法。如是名初學聞持陁憐尼。

어떠한 것이 방편(方便)인가! 만약 사람이 듣고 배운 바를 모두 지니고자 한다면, 마땅히 일심으로 기억하여서  기억을 더욱 자라게 하여야 하나니, 

먼저 마땅한 뜻을 세워서 그 뜻에 버금가는 일에 마음을 매어 두고, 보지 않았던 일(알지 못하였던 것)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라. 

마치 주리반타가(周利槃陀迦, Cūḷapanthaka) 존자 마음을 승려들의 가죽신을 닦는에다 매어 두는 선정으로 마음의 () 제거시킨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것을 처음 배우는 이의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 Śrutadharadhāraṇī) 하는 것이.

 

주리반타가(Cullapanthaka, 周梨槃陀迦)는 부처님의 제자이자 16나한으로, 출가 이전부터 바보였고, 출가 후로도 계율이나 가르침을 외우거나 이해하지 못하여서 놀림과 비웃음을 샀다.

같이 출가한 형마저도 안 된다고 하며 쫓아내자 충격을 받은 주리반타가에게 부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귀의했지, 형에게 귀의한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바보가 아니다."라고 위로하시며 수행법으로 흰 천(걸래)를 매단 빗자루를 하나 주고 절을 청소하게 하였다.

주리반타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른 승려가 놀리던 말던 계속 성실하게 청소하다가 어느 순간 "새하얀 천이 검게 물드는것처럼 마음 역시 더러워진다. 그러니 더러운 마음이 깨끗해질 때까지 닦으며 정진하라."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어, 후배 승려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할 때 주리반타가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그를 놀리려고 작정하고 나섰으나 깨달음을 얻어 나한이 된 그에게 존경심을 품고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三聞能得 心根轉利。再聞能得 成者,一聞能得,得而不忘。是爲聞持陁憐尼初方便。

  듣고 능히 얻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근기라면 영리한 것이고, 

  듣고 능히 얻어 가질 수 있는 이라 갖추어진 이며,

  듣고 능히 얻어 가지는 이는 얻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나니,

이것이 문지다라니의  번째 방편이다.  

 

或時菩薩入禪定中,得不忘解脫;不忘解脫力故,一切語言說法乃至一句一字皆能不忘,是爲第二方便。

혹은 보살이 선정에 들어서 잊지 않는 불망해탈(不忘解脫) 얻게도 되나니, 

잊지 않는 해탈의  때문에 온갖 언어와 설법,  글귀와  글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잊지 않게 되나니, 이것이  번째의 방편이다.

 

或時神呪力故,得聞持陁憐尼。或時先世行業因緣受生,所聞皆持不忘。如是等名“聞持陁羅尼門”。

혹은 신주(神呪)  때문에 문지다라니를 얻기도 하나니, 

때로는 전생에 행한 업의 인연으로 () 받으면서 들은 것은 모두 지녀서 잊지 않기도 하는 것이라. 이와 같은  등을 문지다라니문(聞持陁羅尼門)이라 하는 것이.

 

復次,菩薩聞一切音聲語言,分別本末,觀其實相,知音聲語言 念念生滅。音聲已滅,而衆生憶念取相。

또한 보살이 일체 음성과 언어를 듣고  본말(本末, 근원) 분별하여서  실상(實相) 관찰하나니, 음성과 언어가 찰나찰나의 생각에 따라 나고 사라짐을 거듭하는 것을 알게 되며,

음성은 이미 사라졌으나 중생들은 기억하여 그 상(相)을 취하여, 

 

念是已滅之語,作是念言:“是人罵我而生瞋恚,稱讚亦如是"

是菩薩能如是觀衆生,雖復百千劫罵詈不生瞋心,若百千劫稱讚亦不歡喜;知音聲生滅如響相。

이미 사라진 언어를 기억하고 생각하기를  사람은 나를 꾸짖고 욕하였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또한 칭찬한 것 그와 같은 것이라. 

 보살은 능히 이와 같이 중생을 관찰하므로 비록 다시 백천  동안 욕설을 듣는다 하여도 화를 내지 않으며, 혹은 백천  동안 칭찬을 받는다 하여도 역시 기뻐하지도 않나니, 

음성의 나고 없어짐을 마치 메아리의 모양과 같음을 아는 것이.

 

又如鼓聲無有作者,若無作者是無住處,畢竟空故,但誑愚夫之耳。是名“入音聲陁羅尼”。

또한 마치  소리와 같으니, 북 소리는 (북 소리 그 자체는) 짓는 이가 없으니, 만약 짓는 이가 없다면, 머무르는 곳도 없는 것이니, 이는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리석은 범부의 귀를 속일 뿐이니, 이를 입음성(入音聲, Ghoṣapraveśadhāraṇī)다라니 한다.

 

復次,有陁羅尼,以是四十二字攝一切語言名字。何者是四十二字?阿、羅、波、遮、那等。“阿提”,秦言初;“阿耨波奈”,秦言不生。

또한 어떤 다라니는 42()로써 일체의 언어와 이름과 글을 포섭하나니,

무엇이 42자인가?  아(阿  a)   라(囉  ra)  파(波  pa)   차(遮  ca)ㆍ 나(那  na) 등이라. 

아제(阿提, Adi) (秦, 중국)나라 말로 처음()이요 

아뇩파나(阿耨波奈, anutpāda, 아누파나) 진나라 말로 나지 않는 불생(不生)의 뜻이다. 

 

行陁羅尼,菩薩聞是阿字,卽時入一切法初不生。如是等,字字隨所聞 皆入一切諸法實相中,是名“字入門陁羅尼”,如「摩訶衍品」中說諸字門。

다라니를 수행하여 보살이 아(阿  a) 들으면 즉시 일체 법은 처음부터 나지 않는 초불생(初不生)이라 데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이, 이러한 각각의 글자를 들음 따라 그에 따른 일체법의 실상(實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자입문(字入門, Akṣarapraveśadhārāṇī)다라니 하는 것이니,  

마치 마하연품(摩訶衍品)에서 모든 글자의 자문(字門) 설명한 것 같은 것이다.

 

復次,菩薩得是一切三世無㝵明等諸三昧,於一一三昧中,得無量阿僧祇陁羅尼。如是等和合名爲“五百陁羅尼門”,是爲菩薩善法功德藏。如是名爲“陁羅尼門”。

또한 보살은 일체 삼세에 대하여 장애 없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일체삼세무애명(一切三世無礙明)삼매 등과 같은 모든 삼매를 얻게 되나니,  낱낱의 삼매 속에서는 한량없는 아승기의 다라니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서로 어우러진 것을 이름하여 오다라니문(五百陁羅尼門)이라 하며, 이러함이 보살의 선법(善法)과 공덕을 모아놓은 창고이며, 이러함을 이름하여 열반문에 이르게 하는 다라니문(陁羅尼門)이라 하는 것이.

 

“諸三昧門”者,三昧有二種:聲聞法中三昧、摩訶衍法中三昧。“聲聞法中三昧”者,所謂三三昧。

모든 삼매의 삼매문(三昧門)이라 함에서, 삼매에는  가지가 있으니, 성문의  중의 삼매와 마하연의  중의 삼매이다. 성문의  중의 삼매는 이른바 삼삼매(三三昧)이라.

 

復次,三三昧:空空三昧、無相無相三昧、無作無作三昧。

삼삼매는 공(空)함을 관하는 공삼매(空三昧) 무상(無相)을 관하는 무상삼매(無相三昧) 지음이 없는 무작을 관하는 무작삼매(無作三昧)이며,

 

復有三三昧:有覺有觀、無覺有觀、無覺無觀。

다시 삼삼매가 있으니, 초선의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 이선의 무각유관삼매(無覺有觀三昧) 삼선의 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이며,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3권 9에서 설명하고 있음)

 

復有五支三昧、五智三昧等。是名諸三昧。

다시 오지삼매(五支三昧)와 오지삼매(五智三昧) 등이 있으니, 이러함을 모든 삼매라 하는 것이.

 

*오지삼매(五支三昧)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제법(諸法)의 자성(自性)이 되는 어느 한 곳[一境性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에 붙들어 매놓는 것과 사선(四禪)을 말한다.
*오지삼매(五智三昧)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를 통한 삼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復次,一切禪定亦名定,亦名三昧。四禪亦名禪,亦名定,亦名三昧。除四禪,諸餘定亦名定,亦名三昧,不名爲禪。十地中定名爲三昧。

또한 일체의 선정(禪定) ()이라 하기도 하고 삼매라 하기도 하나니,

사선(四禪) ()이라 하기도 하고 정(定)이라 하기도 하고 삼매라 하기도 하며,

사선(四禪) 제외한  밖의 모든 정(定)을 또한 정(定)이라 하기도 하고 역시 삼매라 하기도 하나 선(禪)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십지(十地) 정(定)을 삼매(三昧)라 하는 것이.

 

有人言:“欲界地亦有三昧。何以故?欲界中有二十二道品,故知有三昧;若無三昧,不應得是深妙功德"

어떤 분이 말하기를 욕계의 경지인 욕계지(欲界地)에도 역시 삼매가 있나니, 왜냐하면 욕계에도 스물두 가지의 도품(道品) 있기 때문에, 삼매가 있음을   있으며, 만약 삼매가 없다면  깊고 묘한 공덕을 얻지 못하는 것이 하였으며, 

 

復次,「千問」中亦有是問:“四聖種幾欲界繫、幾色界繫、幾無色界繫、幾不繫?”

또한 천문(千問)에도 역시 이와 같은 질문이 있으니, 

“사성종(四聖種)에서의  가지가 욕계의 매임인 욕계계(欲界繫)이고  가지가 색계의 매임인 색계계(色界繫)이며,  가지가 무색계의 매임인 무색계계(無色界繫)이고  가지가 매이지 않은 불계(不繫)인가?”

 

성종(聖種)이란 성자가 될 수 있는 바탕= 종(種)이 되어 있다는 뜻으로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수학修學하는 이는 곧 보리菩提를 이루어 성자聖者의 지위에 나아가게 될 것이므로 이렇게 이름하늠 것이며, 

사성종(四聖種)이란, 聖者가 되는 네 가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① 의복희족성종(衣服喜足聖種) ② 음식희족성종(飮食喜足聖種) ③ 와구희족성종(臥具喜足聖種) ④ 락단락수성종(樂斷樂修聖種) 이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衣·食·住를 얻는 바에 따라 만족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탐애貪愛를 끊어 성도聖道를 닦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다.

 

答曰 “一切當分別。四聖種,或欲界繫、或色界繫、或無色界繫、或不繫。四念處、四正懃、四如意足亦如是"

그러자 답하기를 “일체의 것은 마땅히 사성종(四聖種)으로 분별하여야 하나니, 

혹은 욕계의 매임이기도 하고 혹은 색계의 매임이기도 하며 혹은 무색계의 매임이기도 하고 혹은 매이지 않기도 한 것이며, 4념처(念處)와 4정근(正懃)과 4여의족(如意足)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였다.

 

以是義故,當知欲界有三昧;若散亂心,云何得此上妙法?以是故,是三昧在十一地中。如是等諸三昧,阿毘曇中廣分別。

이러한 이치 때문에 욕계에도 삼매가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만약 마음이 산란하다면 어떻게 이러한 으뜸가고 묘한 법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매는 11() 중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삼매는 아비담(阿毘曇, 논장)에서 자세히 분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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