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 中 四無畏義 第四十 卷二十五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0. 초품 중 사무외(四無畏)의 뜻을 풀이함 3
問曰; 佛十力中有無所畏不?若有無所畏 不應但言四, 若有所畏, 云何言無畏成就?
묻나니, 부처님의 십력(十力)에 무소외(無所畏)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무소외가 있다면, 다만 네 가지 뿐이라고 말씀하셔서는 안 될 것이며, 만약 두려움이 있는 유소외(有所畏)라면 어찌하여 무외(無畏)가 성취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一智在十處 名爲佛成就十力 如一人知十事 隨事受名。是十力 四處出用 是無所畏.
답하나니, 하나의 지혜로 열 곳= 십처(十處, 지수화풍, 청황적백, 공, 식)에 머무르기에 부처님이라 하며,
십력(十力)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열 가지의 일을 알고 있으므로 그 일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 십력(十力)이 네 곳으로 나와서 작용하는 것이 무소외(無所畏)이다.
是處不是處力 漏盡力 卽是初 二無畏, 八力雖廣 說是第三 第四無畏。以是故 十力中雖有無畏 別說亦無失。
옳고 그른 것을 아시는 시처불시처력(是處不是處力)과 유루(有漏)가 다한 누진력(漏盡力)이 바로 처음의 두 가지 무외(無畏)요,
여덟 가지 힘의 팔력(八力)은 비록 광대하기는 하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무외를 설명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십력(十力) 가운데에 비록 무외가 있다 하여도 따로 설명하는 것 역시 잘못되지 않은 것이다.
正遍知者 知一切法不顚倒 正 不邪 如餘過去諸佛 是名三藐三佛陁。如佛告阿難, “一切世閒天及人所不能知 佛能遍知故 名三藐三佛陁"
정변지(正遍知)라 함은 일체법에 대하여 알아서 전도(顚倒)되지 않는, 바른 정(正)이며, 삿되지 않은 불사(不邪)인 것이 마치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과 같나니, 이를 삼먁삼불타(三貌三佛陀, Samyaksaṁbuddha 정변지)라 하는 것이니,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두루 아시기 때문에 삼먁삼불타라 하는 것이다”고 하신 것과 같으며,
若有人言, “是法不知。”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問曰; 是何人?
묻나니, 그는 누구입니까?
答曰; 是中佛說, “若沙門 婆羅門 若天 若魔 若梵 乃至欲與佛論者"
답하나니,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만약 사문과 바라문, 혹은 하늘과 마와 범천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함께 논의(論議)하고자 하는 사람이다”고 하셨다.
論何等法?有人言, “佛所不說外諸經書 弊迦蘭那 僧佉 韋陁等十八種大經書"
斤兩근량= 1. 무게의 단위인 근과 냥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근이나 냥으로 계산한 물건의 무게
어떤 법(가르침)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외도의 경서(經書)들과 폐가란나(弊迦蘭那, vyākaraṇa, 어법語法, 수기受記)ㆍ승거(僧佉, saṁkhyā, 수론외도數論外道)ㆍ위타(韋陀, veda 바라문교의 경전) 등의 18종의 큰 경서(經書)이다”고 하며,
有人言, “須彌山斤兩 大地深淺 一切草木頭數"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미산(須彌山)의 근양(斤兩, 무게)와 대지(大地)의 깊고 얕음과 온갖 초목의 두수(頭數, 숫자)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고 하며,
有人言, “是常無常 有邊無邊十四難 佛不能答"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항상하고 항상하지 않은 상무상(常無常)인가, 끝이 있는 유변(有邊)인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인가 등의 열네 가지의 곤란한 질문인 십사난(十四問難)이라서 부처님은 대답하지 못한다”고 하며,
有人言, “是法色法 無色法 可見 不可見 有對 無對 有漏 無漏 有爲 無爲等, 佛但知一種道事因緣 是異法種種因緣 佛或不悉知"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현상과 작용)은 빛깔이 있는 색법(色法)인가, 빛깔이 없는 무색법(無色法)인가, 볼 수 있는 가견(可見)인가, 볼 수 없는 불가견(不可見)인가, 대상이 있는 유대(有對)인가, 대상이 없는 무대(無對)인가,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인가,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인가, 지음이 있는 유위(有爲)인가, 지음이 없는 무위(無爲)인가 등으로, 부처님은 다만 한 가지 도(道)에 관한 일과 인연만 알 뿐이요 이러한 다른 법들의 갖가지 인연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혹은 다 알지 못한다”고 한다.
“沙門”者 說出家人, “婆羅門”者 說在家有智人, “天”者 說地天 虛空天, 魔者 說六欲天, “梵”者 說梵天王爲首 及一切色界, “餘”者 除此更有餘人。“如實”者 若以現事 若以因緣難。
사문(沙門)이라는 것은 출가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바라문(婆羅門)이라는 것은 집에 있는 이로서 지혜가 있는 사람을 말하며,
하늘 천(天)이라 함은 지천(地天, 12천)과 허공천(虛空天, 무색계, 천상)을 말하는 것이고,
마(魔)라는 것은 욕계의 6욕천(欲天)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말하는 것이며,
범(梵)이라 함은 범천왕(梵天王)을 첫째로 한 일체의 색계(色界)를 말하는 것이며,
그 나머지의 여자(餘者)라 함은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진실한 이치에 계합하는 여실(如實)이라 함은 현재에서의 일 또는 인연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천(地天, 프리티비)은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 중 하나이다. 고대 인도의 신 프리티비가 불교에 편입된 것으로서 십이천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하늘로써 동 · 서 · 남 · 북의 4방(四方)과 동북 · 동남 · 서북 · 서남의 4유(四維) 또는 4우(四隅)와 상(上) · 하(下)의 10방(十方, 십방, 시방) 즉 10가지 방위에 일(日)과 월(月)의 2천(天)을 더한 것으로,
동에 제석천(帝釋天) 동남에 화천(火天) 남에 염마천(閻魔天) 서남에 나찰천(羅刹天) 서에 수천(水天) 서북에 풍천(風天) 북에 비사문천(毘沙門天) 동북에 이사나천(伊舎那天) 상(上)에 범천(梵天) 하(下)에 지천(地天), 그리고 일천(日天)과 월천(月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乃至不見是微畏相”者, “相”名因緣。我不見 小小因緣如法能來破我者 以不見故 至誠言, “安立阿梨沙秦言聖主住處”。
나아가 조금의 두려운 모습도 보이지 않는 불견시미외상(不見是微畏相)이라고 한 것은, 그 모양 또는 모습의 상(相)이란 인연(因緣)이라 하는 것이며, “나는 소소한 인연으로 마치 여법(如法)한 듯이 와서 나를 깨트리고자 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보지 않는 까닭에 성심으로 말하되 “아리사(阿梨沙, Ārṣa) - 진나라 말(秦言)로 성주(聖主, 성왕, 부처님) - 가 머무는 곳에 안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佛至誠言, “我一切漏盡" 若有人言“ 是漏不盡”者 無有畏也。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온갖 번뇌가 다하였으니, 설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번뇌는 다할 수 없는 것이다’고 하여도 두려워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何等是漏?漏名三漏, 欲漏 有漏 無明漏。
어떤 것이 번뇌, 루(漏)인가 하면, 번뇌란 곧 세 가지 번뇌의 삼류(三漏)를 말하는 것으로,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復次 漏名六情中出 垢心相應心數法。復次 如『一切漏障經』中 分別說七漏。
또한 이 번뇌는 육정(六情)으로부터 나오는 때가 낀 마음의 구심(垢心)과 그에 상응하는 심수법(心數法)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루장경(一切漏障經, Sarvāsravasūtra)』에서는 분별하여 견루(見漏) 수루(修漏) 근루(根漏) 악루(惡漏) 친근루(親近漏) 수루(受漏) 염루(念漏)의 칠루(七漏)를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누(漏, āsrava)=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흐르다' 또는 '새어 나오다'이다. 누(漏)는 인간이 번뇌 때문에 각종의 악업을 행하고 그 결과 고(苦)가 그 사람의 삶에 누출(漏出: 새어나옴)되어 나타나고 번뇌와 고의 이러한 누출로 인해 그 사람은 혹(惑) · 업(業) · 고(苦)의 윤회3도(輪廻三道)를 전전하면서 미혹의 세계[迷界]를 유전(流轉: 끊임없이 윤회함)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漏)를 곧 번뇌라고 할 수 있다 - 위키
障道法 名諸有漏業 及一切煩惱 惡道報障, 爲世閒故 布施 持戒 修十善道 受諸味禪, 略說若能障涅槃 若善 若不善 若無記 是名障道法。
도를 장애하는 장도법(障道法)이라 함은 모든 유루업(有漏業)과 일체 번뇌와 함께 악도의 장애를 받는 과보를 받는 보장(報障)을 말하는 것으로,
세간을 위하는 것으로는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고 10선도(善道)를 닦고 모든 선정을 맛보는 미선(味禪)을 느끼는 것 등이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능히 열반을 장애하는 것으로 혹은 선(善)과 혹은 불선(不善)과 혹은 무기(無記)이며, 이러함을 이름하여 도를 장애하는 장도법(障道法)이라 하는 것이다.
삼장(三障)= 불도 수행이나 선근(善根)을 행하는 데 있어서의 세 가지 장애를 말하며,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痴) 등의 번뇌장(煩惱障),
오역(五逆)·십악(十惡) 등의 업장(業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 등의 보장(報障).
有人言, “道名二法, 聖定 聖慧。是二事等 達到涅槃"
有人言, “三聚道, 無漏 戒定慧" 有人言, “四法 所謂四聖諦"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道)란 두 가지의 법을 말하는 것으로, 거룩한 선정의 성정(聖定)과 거룩한 지혜의 성혜(聖慧)로써, 이 두 가지로써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거룩한 도(道)가 있으니, 즉 무루(無漏)의 계정혜(戒定慧)이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네 가지의 법이 있으니, 이른바 고제(苦諦), 집제(集諦), 제(滅諦), 도제(道諦)의 사성제(四聖諦)이다”고 하며,
有人言, “出世閒五根" 有言, “六出性" 有言, “七覺意" 有言, “八聖道 達到涅槃" 論議師等言, “一切無漏道 達到涅槃"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근(信根) 정진근(精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이라는 오근(五根)을 통해서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간(出世間)을 한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6출성(六出性,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칠각의(七覺意, 칠각지)이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팔성도(八聖道)로 열반에 도달한다” 하고,
또 논의사(論議師)들은 말하기를 “일체의 무루도(無漏道)로 열반에 도달한다” 하였다.
是中若有沙門 婆羅門等來 如實言, “是事不爾" 乃至不見是微畏相, 以不見故 至誠言, “安立阿梨沙住處"
이러한 가운데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등이 와서 마치 사실인 듯 말하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이에 대하여 “아주 작은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되, “아리사(阿梨沙, Ārṣa, 성주聖主, 성왕, 부처님)가 머무는 곳에 안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問曰; 何以故佛至誠言 “安立阿梨沙住處”?
묻나니,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안주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自功德具足 亦令衆生得安樂利益。若佛自得安樂住處 不能利益衆生 不名“阿梨沙住處”, 若但利益衆生 不自具足功德 亦不名“阿梨沙住處”, 若自有功德亦利益衆生 以是故至誠言, “我安立阿梨沙住處。”
답하나니, 스스로의 공덕도 완전히 갖추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시는 것이니,
만약 부처님 자신만이 편안하고 즐겁게 머무를 곳을 얻고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없으시다면 ‘아리사(성인, 부처)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만약 중생만을 이익되게 하고 스스로의 공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다면 역시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공덕도 있고 아우러 중생도 이익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안히 안주한다”고 하신 것이다.
復次 佛自滅惡 亦滅衆生惡 滅二惡故 第一淸淨 妙說法故 安立阿梨沙住處。
또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의 악(惡)을 멸하시었고 또한 중생의 악도 멸하게 하시니, 두 가지의 악을 다 소멸하게 하시기 때문에 제일 청정(淸淨)하시며, 미묘한 법을 설하시기 때문에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안주하실 수 있으시며,
復次 四聖諦 三轉十二行 能轉 能分別 顯示 敷演故 至誠言, “我安立阿梨沙住處"
또한 사성제(四聖諦)를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의 3전(三轉) 12행상(行相)으로 잘 굴리시고 잘 분별하여 드러내 보이고 널리 펴셨기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안주한다”고 하시며,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또는 삼전법륜(三轉法輪)= 처음에 굴린 시전(示轉, 초전)은 견도 차원, 두 번째로 굴린 권전(勸轉, 이전, 교전教轉)은 수행도 차원, 세 번째로 굴려진 증전(證轉)은 무학도 차원에 대한 것으로,
고제(苦諦)= 무상(無相) 고(苦) 무아(無我) 공(空), 집제(集諦)= 인(因) 집(集) 생(生) 연(緣),
멸제(滅諦)= 멸(滅) 정(靜)또는 지(止) 묘(妙) 리(離)또는 출(出),
도제(道諦)= 도(道) 여(如)또는 정(正) 행(行) 출(出)또는 달(達)를 세 번 말씀하신 것이 삼전(三轉),
십이행(十二行)은 불법(佛法)을 십이부경(十二部經)으로 나누어서 설하신 것을 말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復次 一切疑悔 邪見能除卻故 一切甚深問難悉能解釋故 名安立阿梨沙住處“阿梨沙”, 第一 最上 極高 不退 不卻 不沒 具足功德 無所減少 是名“阿梨沙住處。”
또 일체의 의심과 뉘우침과 삿된 소견을 잘 없앴기 때문에 일체의 매우 깊고 어려운 물음의 난문(問難)도 능히 잘 해석하셨으니, 그 때문에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안히 머문다고 하시는 것이며,
아리사(阿梨沙)는 첫째가는 최상(最上)이고, 극히 높으며 물러나지도 않고 되돌아 가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으며, 그 공덕이 구족되어 줄어들지 않으므로, 이러함을 아리사(阿梨沙)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는 것이다.
如是等因緣功德力故 至誠言, “我安立阿梨沙住處"
이와 같은 등의 인연과 공덕의 힘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아리사가 머무른 곳에 편안히 머문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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