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八念義第三十六之 餘卷二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6. 초품 중 팔념의 뜻을 풀이함② 2

 

問曰; 無有將去者 云何得將至善處?

묻나니, 장차 가야할 이가 없거늘, 어찌하여 장차 좋은 곳에 이르게 될 것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雖無將去者 但諸法能將諸法去, 無漏善五衆斷 五衆中强名衆生 將去入涅槃。如風吹塵 如水漂草, 雖無將去者 而可有去。

답하나니, 비록 가는 이는 없다 하여도 오로지 제법만이 능히 제법을 데리고 가는 것이라.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무루선(無漏善)이 5중(五衆)을 끊어 주나니, 5중 가운데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중생이라 하며, 이들을 데려가서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바람이 먼지를 불어가는 것과 같고 물이 풀을 떠내려가게 함과 같으니,

비록 장차 가고자 하는 이가 없다 하여도 감은 있는 것이다.

 

復次 因緣和合無有作 亦無有將去者 而果報屬因緣 不得自在 是卽名爲去。

또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 없다면 역시 가는 이가 없는 것이지만,

그 과보는 인연에 속하여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것을 곧 가는 거(去)라고 하는 것이다.

 

通達無㝵“者 得佛法印故 通達無㝵, 如得王印 則無所留難。

통달하여 일체법에 걸림이 없는 통달무애(通達無礙)라 함은, 부처님의 법인(法印, dharmamudrā, 무생법인)을 얻었기 때문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왕의 국새인 왕인(王印, rājamudrā)을 얻게 되면 어디에 머물건 어려움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 何等是佛法印?

묻나니, 어떠한 것을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라 합니까?

 

答曰; 佛法印有三種, 一者 一切有爲法念念 生滅皆無常, 二者 一切法無我,

三者 寂滅涅槃。

답하나니, 부처님의 법인(法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으로 생각생각마다 일어 나고 없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둘째는 일체의 법에는 나가 없는 무아(無我)이며,

셋째는 번뇌의 불이 꺼진 고요한 적멸열반(寂滅, śāntaṁ nirvāṇam)이 그것이라.

 

行者 知三界皆是 有爲生滅 作法先有今無 今有後無 念念生滅 相續相似生故 可得見知, 如流水 燈焰 長風 相似相續故 人以爲一。衆生於無常法中 常顚倒故 謂去者是常住。是名一切作法無常印。

수행하는 이는 삼계(三界)는 모두가 유위(有爲)요, 나고 없어짐의 생멸(生滅)이라는 것을 알며,

조작된 작법(作法)은 앞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이고, 지금은 있지만 뒤에는 없게 되는 것이며, 생각생각마다 생멸(生滅)을 거듭하면서 계속 이어가되 서로 비슷하게 생겨나기 때문에 보고 알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흐르는 강물과 등불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과 멀리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과도 같으니, 서로 비슷하게 계속 이어지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一)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중생은 무상한 법 가운데 항상 전도(顚倒)되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떠나가는 것을 항상 머무는 것으로 여기나니, 이러함을 일체의 만들어진 작법(作法)의 무상함의 징표인 무상인(無常印)이라 한다.

 

3법인(三法印, tilakkhaṇa)

①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무상(無常) 또는 비상(非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즉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명제로써 무상을 설명한다. 모든 것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변천해 가며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꿈이나 환영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 변화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의 실상(實相)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상(常)을 바란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있다. 불교 경전에 "무상한 까닭에 고인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과 같이 무상은 고의 전제이다.
또 현실을 그와 같이 인식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하며 무상의 덧없음은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에 비유되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에 대하여 비관하거나 기뻐하는 것 자체가 상이며,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을 방일(放逸)함이 없이 정진노력(精進努力)하려는 정신적인 결의가 생겨나게 되며, 이러한 것이 무상관의 참된 뜻이다.

②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 무아(無我)란 이론적으로는 고정적 ·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我 · 아트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 즉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 즉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즉,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수행, 즉 도제(道諦: 팔정도, 37도품, 6바라밀 등의 수행)가 실제로 열반(무위법)에 이르게 하는 길이지, '우주가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영원한가 아닌가? 아(我, 아트만)라고 하는 실체(무위법)가 육체(유위법)와 어떻게 다른가?' 등과 같이 실체(무위법)의 성격은 어떠한지를 논하는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접근은, 마치 독화살에 맞은 상태에서 독화살과 독을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고 독화살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따지는 태도와 같아서, 고타마 붓다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로서 설명되었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불교로서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에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고("無我 · 무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無常 · 무상") 까닭에 우리들의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이상(理想)인 열반(涅槃)은 이 무아행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경지를 말한다.

③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一切法無我, 諸法內無主 無作者 無知 無見 無生者 無造業者 一切法皆屬因緣 屬因緣故不自在 不自在故無我 我相不可得故 如破我品中說是名無我印。

일체법에 나가 없는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라 함은, 제법 안에는 주(主, 주제자主宰者, īśvara, svāmin)가 없으며, 짓는 이도 없는 무작자(無作者)이며, 아는 것도 없는 무지(無知)이고, 보는 것도 없는 무견(無見)이며, 나는 이도 없는 무생자(無生者)이며, 업을 짓는 이도 없는 무조업자(無造業者)라.

일체법은 모두가 인연에 속하나니,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재(自在)한 것이 못되고, 스스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가 없는 무아(無我)이니, 그것은 '나'라는 실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파아품(破我品, ātmapratiṣedhaprakaraṇa)에서 설하신 바와 같나니, 이것을 나 없음의 징표, 무아인(無我印)라 한다.

 

問曰; 何以故 但作法無常 一切法無我?

묻나니, 무엇 때문에 다만 만들어진 법은 무상하고 일체법에는 '나'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不作法無因無緣故 不生不滅, 不生不滅故 不名爲無常。

답하나니, 조작되지 않는 법은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도 없고 보조적인 조건의 연(緣)도 없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지 않는다.

 

復次 不作法中不生心著顚倒 以是故不說是無常 可說言無我。

有人說, “神是常遍知相" 以是故說一切法中無我。

또한 조작되지 않은 법에는 마음의 집착이나 뒤바뀐 생각을 내지 않나니,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無常)하다고 하지 않으나, 무아(無我)라고는 말할 수도 있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神, ātman, puruṣa. 상주불변한 나, 정신)은 항상 두루 아는 상(相)이니, 이러한 때문에 일체법에는 무아(無我)라”고 하였다.(곧 실아(ātman)라면 두루 아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영원하고 두루 아는 존재란 없으므로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寂滅者是涅槃 三毒 三衰火滅故 名寂滅印

고요히 갈앉은 적멸(滅멸)이라 함은 바로 그것이 열반이니, 탐진치 3독(三毒)과 늙고 병들어 죽는 3쇠(三衰)의 불이 꺼지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인 적멸인(寂滅印, śāntamudrā)이라 한다.

 

問曰; 寂滅印中 何以但一法 不多說?

묻나니, 번뇌의 불길이 꺼진 고요함의 징표인 적멸인(寂滅印)가운데에서 무엇 때문에 다만 하나인 일법(一法)일 뿐이요 많은 것을 언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答曰; 初印中說五衆 二印中說一切法皆無我 第三印中說二印果 是名寂滅印。

답하나니, 첫 번째의 징표인 인(印)에서는 5중(五衆)을 말하였고, 두 번째 징표인 인(印)에서는 일체법 모두는 무아(無我)라고 말했으며, 세 번째의 징표인 인(印)에서는 두 인(印)의 결과를 말한 것이니 이것을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인 적멸인(寂滅印)이라 하며, 

 

一切作法無常 則破我所外五欲等, 若說無我 破內我法, 我我所破故 是名寂滅涅槃。

일체의 만들어진 작법(作法)이 무상한 것이라면 곧 나의 것인 아소(我所)와 바깥의 오욕 등을 깨뜨리는 것이고,

만약 무아(無我)라고 말하면 안의 나의 법, 내아법(內我法)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니,

나와 나의 것= 아아소(我我所)가 파괴되기 때문에 이러함을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열반(寂滅涅槃)이라 한다.

 

行者觀作法無常 便生厭 厭世苦。旣知厭苦 存著觀主 謂能作是觀 以是故有第二法印 知一切無我。於五衆 十二入 十八界 十二因緣中 內外分別推求 觀主不可得, 不可得故 是一切法無我。作如是知已 不作戲論 無所依止 但歸於滅 以是故說寂滅涅槃印。

수행하는 이가 인연화합으로 지어지는 작법(作法)은 무상하다고 관(觀)하게 되면 곧 싫어하게 되면서 세간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되니,

이렇게 괴로움을 싫어하게 되면 그러한 집착으로 주체= 주(主)를 관하면서 “내가 능히 이런 관(觀)을 짓는다”고 여기나니, 이 때문에 두 번째 법의 징표인 일체법개무아(一切法皆無我)이며, 일체에는 나=주체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알면 오중(五衆, 오온五蘊)과 12입(入) 18계(界) 12인연(因緣) 가운데서 안팎을 분별하고 추구(推求)하면서 주체인 주(主)를 관한다 하여도 얻을 수가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체법에는 내가 짓는 아작(我作)이 없는 무아(無我)이라.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쓸모없는 희론(戱論)도 짓지 않고, 의지하고자 하지도 없으며, 다만 멸(滅)에 돌아갈 뿐이니, 이러함 때문에 번뇌의 불길이 꺼진 열반의 징표인 적멸열반인(寂滅涅槃印)을 말하는 것이다.

 

問曰; 摩訶衍中說“諸法不生不滅 一相 所謂無相”,

此中云何說“一切有爲作法 無常名爲法印”? 二法云何不相違?

묻나니, 마하연(摩訶衍, 대승)에서 제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한 모양의 일상(一相)이어서 이른바 모양 없음의 무상(無相)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이 무상(無常)함을 일컬어 법의 징표인 법인(法印)이라 하는 것입니까? 이 두 법은 어떻게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答曰; 觀無常 卽是觀空因緣, 如觀色念念無常 卽知爲空。過去色滅壞 不可見故無色相, 未來色不生 無作無用 不可見故無色相, 現在色亦無住 不可見 不可分別知故無色相。無色相卽是空 空卽是無生無滅。無生無滅 及生滅其實是一 說有廣略。

답하나니, 무상(無常)함을 관하면 곧 그것이 공(空)의 인연을 관하는 것이니, 마치 물질= 색(色)에 대하여 생각마다 무상하다고 관하면 곧 공인 줄 알게 됨과 같으며,

과거의 물질= 색(色)은 사라지고 무너져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는 무색상(無色相)이요,

미래의 물질= 색(色)은 아직 생겨나지 않아서 조작도 없고 작용도 없는 무작무용(無作無用)이어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는 무색상(無色相)이요,

현재의 물질= 색(色)도 역시 머무름이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분별하여 알 수도 없기 때문에 무색상(無色相)이라.

무색상(無色相)이라면 그것은 곧 공(空)이요, 공(空)이라면 곧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것이니,

남도 없고 멸함도 없음의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나고 멸함의 생멸(生滅)은 실로 하나의 모습이니, 설명함에 있어서 자세함과 간략함이 있을 뿐이다.

 

問曰; 過去 未來色 不可見故無色相 現在色住時可見 云何言無色相?

묻나니, 과거와 미래의 물질= 색(色)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색상(無色相)이지만, 현재의 물질= 색(色)은 머무를 때에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무색상(無色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現在色亦無住時 如四念處中說, 若法後見壞相 當知初生時壞相 以隨逐微細故不識。如人著屐 若初日新而無有故 後應常新 不應有故。若無故應是常 常故無罪無福 無罪無福故 則道俗法亂。屐 나막신 극

답하나니, 현재의 물질= 색(色)도 역시 머무는 때가 없는 것이니, 4념처(念處)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만약 법이 나중에 파괴되는 모양의 괴상(壞相)을 보인다면 마땅히 처음 생겼을 때부터 괴상(壞相)이 있음을 알 것이나, 파괴가 미세하게 진행되어 쉬임 없이 변하여 마침내 무너지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마치 사람이 신을 신는 것과 같으니, 신을 신은 첫날에는 새 신발이어서 헌 곳이 없었다면 후일에도 마땅히 헐어 떨어짐이 없는 새 것이어야 하며, 만일 헐어 떨어짐이 없다면 이것은 항상한 상(常)이어야 하며, 

항상한 것이기 때문에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죄도 없고 복도 없다면 곧 도(道)와 세속의 가르침= 법(法)이 문란해질 것이며,

 

復次 生滅相常隨作法 無有住時, 若有住時 則無生滅。以是故 現在色無有住。住中亦無有生滅 是一念中住 亦是有爲法故是名“通達無㝵”。如是應念法。

또한 생(生)하고 멸(滅)하는 모양은 항상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진 작법(作法)을 따르므로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며,

만약 머무는 때가 있다면 곧 생(生)하고 멸(滅)함이 없으리니, 이러한 까닭에 현재의 물질= 색(色)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며,  머무름에는 역시 생(生)하고 멸(滅)함이 없으니, 이는 한 생각 가운데 머무르며 또한 이것은 유위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컬어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통달무애(通達無礙)라고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법을 염하여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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