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三三昧義 第三十二卷 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2. 초품 중 세 가지 삼매[三三昧]의 뜻을 풀이함 5
四禪 或有隨心行非受相應 或受相應非隨心行
或隨心行亦受相應 或非隨心行非受相應。
사선(四禪)에는 간혹 마음을 따라 행업(行業)을 지음에 수온(受蘊, 느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수심행비수상응(隨心行非受相應)이기도 하며,
혹은 수온(受蘊, 느낌)과는 서로 상응하나 마음을 따르지 않는 수상응비수심행(受相應非隨心行)이기도 하며,
흑은 마음을 따라 행업(行業)을 지으나 역시 수온(受蘊, 느낌)과도 상응하는 수심행역수상응(隨心行亦受相應)이기도 하며,
혹은 마음을 따르지도 않고 수온(受蘊, 느낌)과 상응하지도 않는 비수심행역비수상응(非隨心行亦非受相應)이기 하다.
隨心行非受相應者 四禪攝身業 口業 隨心行心不相應諸行 及受。
마음은 따르나 느낌과는 서로 상응하지 않는 수심행비수상응(隨心行非受相應)이라 함은 사선(四禪)이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포섭하여 마음을 따라 행업을 지음에 마음이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행과 느낌=受(수)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며,
受相應非隨心行者 四禪攝心意識。
느낌과는 서로 상응하나 마음을 따르지 않는 수상응비수심행(受相應非隨心行)이란, 사선(四禪)으로 심(心) 의(意) 식(識)을 포섭하는 것이며,
隨心行亦受相應者 四禪攝想衆及相應行衆。
마음을 따라 행업을 지으며 또한 느낌과도 서로 상응하는 수심행역수상응(隨心行亦受相應)이란, 사선이 생각=想衆(상중)을 포섭하여 行衆(행중)에 상응하는 것을 말하며,
사선(四禪)이라는 아비발치지(阿毗跋致地)에서 행온(行蘊)까지 다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非隨心行亦非受相應者 除四禪中攝 隨心行心不相應諸行 餘殘心不相應諸行。
마음을 따르지도 않고 느낌과 서로 상응하지도 않는 비수심행역비수상응(非隨心行亦非受相應)이란, 사선에서 마음이 모든 행업을 지어 나가는 것을 없이하며, 그 나머지의 마음도 여러가지 행을 지어나가는 것에 상응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想行相應 亦如是。
상온(想蘊)과 행온(行蘊)이 마음에 상응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각(覺)= 탐욕개(貪欲蓋) 진에개(瞋恚蓋) 수면개(睡眠盖) 도회개(掉悔蓋) 의법개(疑法蓋)에 의해 제멋대로 날뛰는 거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각(覺)”이라고 하고 밖의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라는 오욕(五慾)에 의한 영향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는 산란한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을 “관(觀)”이라 합니다. 이러함에 의해 초선(初禪)은 “유각유관(有覺有觀)”이고, 이선(二禪)은 “무각유관(無覺有觀)”이며 삼선(三禪)은 “무각무관(無覺無觀)”으로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표현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각관(覺觀)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각관(覺觀)은 심사(尋伺)이며, 심(尋)은 찾아 헤매는 마음과 사물에 대한 개략적인 사고 작용, 사(伺)는 그보다 세심한 분별 작용을 가리킨다. 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隨煩惱)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선정=定도 무의식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이 있다. 그러나 심사와 다른 점은 선정은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고 심사는 바르지 못한 것이다.
是四禪中 三禪中, 二禪 非隨覺行亦非觀相應。
사선(四禪)과 삼선(三禪)에서는 상온(想蘊) 및 행온(行蘊)에 상응하나
이선(二禪)에서는 각행(覺行)을 따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관(觀,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도 않는다.
初禪 或有隨覺行非觀相應 或觀相應非隨覺行 或有隨覺行亦觀相應 或有非隨覺行非觀相應。
초선(初禪)에서는 혹은 각행을 따르나 관(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수각행비관상응(覺行非觀相應)이기도 하고,
혹은 관(觀, 마음)에 상응하나 각행을 따르지 않는 관상응비수각행(觀相應非隨覺行)이기도 하며,
혹은 각행을 따르면서 또한 관(마음)과 서로 응하는 수각행역관상응(隨覺行亦觀相應)이기도 하며,
혹은 각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비수각행비관상응(非隨覺行非觀相應)이기도 하니,
隨覺行非觀相應者 初禪攝身業 口業 及隨覺行心不相應諸行 及觀。
각행은 따르나 관과 서로 응하지 않는 수각행비관상응(覺行非觀相應)이라 함은 초선에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마음을 따르는 행업을 포섭하여 청정한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 및 관을 말하며,
觀相應非隨覺行者 謂覺。隨覺行亦觀相應者 覺觀相應諸心心數法。
관(마음)에 상응하나 각의 행을 따르지는 않는 관상응비수각행(觀相應非隨覺行)이라 함은 각(覺)을 이르는 것이며,
각의 행을 따르기도 하고 관과 상응하기도 하는 수각행역관상응(隨覺行亦觀相應)이라 함은 각과 관이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에 상응하는 것이며,
非隨覺行亦非觀相應者 除隨覺行心不相應諸行 餘殘心不相應諸行。
각의 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 비수각행비관상응(非隨覺行非觀相應)일 함은 각의 행(업을 짓는 행)을 따르는 마음을 없애어 마음이 모든 지어감에 상응하지 않으며, 그 나머지 마음도 모든 지어감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四禪皆有因緣 亦與因緣。
사선의 각각에는 모두가 인연이 있고, 또한 인연이 되기도 하나니,
四禪中, 初禪 或次第 非與次第緣 或次第 亦與次第緣 或非次第 亦非與次第緣。
사선에서의 초선(四禪)은 혹은 차제연(次第緣)이 되기도 하고,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하며,
혹은 차제연(次第緣)이 되기도 하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주기도 하며,
혹은 차제연(次第緣)이 되지 않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하며,
四緣: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因緣者
모든 종류의 원인을 네 종류로 분류한 사연(四緣, catvāraḥ. pratyayaḥ)이 있으니,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 因緣(인연, hetu-pratyaya)ㆍ
앞의 찰라심이 뒤의 찰라심의 원인이 되는=次第緣(차제연, samanantarana-pratyaya. 등무간연等無間緣)ㆍ
가깝거나 먼 대상이 연이 되는=緣緣(연연, ālambana-pratyaya)ㆍ
일체의 간접적인 연= 增上緣(증상연, adhipati-pratyaya)이며,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7권 10
次第 非與次第緣者 未來世中欲生心心數法。
차제연(次第緣)이 되기도 하고, 차제연(次第緣)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생겨나게 될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이요,
次第 亦與次第緣者 過去 現在心心數法。
차제연(次第緣)이 되기도 하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이요,
非次第 亦不與次第緣者 除未來世欲生心心數法
차제연(次第緣)이 되지 않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생겨나게 될 오욕이 없어진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이요
餘殘未來世中心 心數法 身業 口業及心不相應諸行。
그 밖의 미래의 마음과 심수법(心數法)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그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제행(諸行)이라.
第二 第三禪亦如是。
제이선(二禪)과 제삼선(三禪)도 이와 같으니라
第四禪 次第 不與次第緣者 未來世中欲生心心數法 及無想定若生 若欲生。
제사선의 차제연(次第緣)이 되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심수법(心數法), 그리고 무상정(無想定)이 생긴 것이거나 생겨 나려는 것이요,
次第 亦與次第緣者 過去 現在心心數法。
차제연(次第緣)이 되기도 하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이요,
非次第 亦非與次第緣者 除未來世中欲生心心數法,
차제연(次第緣)이 되지 않고 또한 차제연(次第緣)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생겨 나려는 오욕이 없는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이요,
餘殘未來世心心數法 除心次第心不相應諸行 餘殘心不相應諸行 及身業 口業。
그 밖의 나머지 미래에 생겨나려는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은 순서대로 일어날 마음과 그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제행)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과 그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제행)과 신업(身業)과 구업(口業)들이다.
무상정(無想定 asaṃjñi-samāpatti))은 무상멸정(無想滅定) 또는 무상등지(無想等至)라고도 한다.
무상정은 색계의 4선천 중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인(因)이 되는 선정으로, 6식(六識)의 심(心) · 심소(心所)가 모두 없어져 6식(六識)의 활동, 즉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되게 하는 선정이다. 상(想)의 심소를 위주로 하여 멸하기 때문에 '상(想)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의 무상정(無想定)이라고 이름한다.
비유하자면, 무상정에서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는 마치 물고기가 얼음 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나 혹은 벌레가 땅속에서 겨울을 나면서 정지 상태로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무상정은 번뇌를 억제하거나 약화시키기는 하나 단멸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성자의 지위[聖果]에 들게 하지는 못한다. 즉 무상정을 닦아 6식의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 도달하더라도, 무상정은 번뇌를 단멸하는 무루혜(無漏慧)를 증득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자의 지위가 시작되는 견도위(見道位)에 들지는 못한다.
이에 비해 2무색정 가운데 멸진정은 번뇌를 단멸하는 무루혜가 증득되게 하고 발현되게 하는 선정이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2무색정 가운데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며 무상정은 범부(凡夫)나 외도(外道)가 닦는 선정이라고 말한다.-위키
四禪中攝身業 口業及心不相應諸行 與緣 非緣, 餘殘 亦緣 亦與緣。
사선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포함한 그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제행)은 연이 되기도 하고, 연이 되지 않기도 하고, 그 밖의 나머지도 연이 되기도 하고 연이 되어 주기도 하며,
是四禪亦增上緣 亦與增上緣。如是等 '阿毘曇'分中廣分別。
이러한 사선은 일체의 간접적인 연= 增上緣(증상연)이기도 하고 증상연이 되어 주기도 하나니,
이러한 일들은 아비담(논장)에서 자세히 분별하여 설명한 것과 같으니라.
菩薩得禪方便 及禪相 禪支 禪波羅蜜中已廣說。
보살이 선(禪)의 방편과 선(禪)의 실상과 18종(種)의 초선(初禪)에서 사선(四禪)까지의 선의 가닥= 선지(禪枝)를 얻는 것에 대해서는 선바라밀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한 바이니라.
問曰, 是般若波羅蜜論議中但說諸法相空 菩薩云何於空法中能起禪定?
묻나니, 이러한 반야바라밀의 논의(論議)는 제법의 실상이 공(空)함 만을 설명하셨거늘, 보살은 어찌하여 공한 법 가운데서 능히 선정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答曰, 菩薩知諸五欲及五蓋 從因緣生 無自性 空無所有 捨之甚易。衆生顚倒因緣故 著此少弊樂 而離禪中深妙樂。菩薩爲是衆生故 起大悲心 修行禪定。
답하나니, 보살이 오욕(五欲)과 오개(五蓋)가 모두 인연 따라 생긴 것이어서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며,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을 안다면, 그러한 것들은 버리기가 매우 쉬우나,
중생들은 전도된 인연 때문에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즐거움에 집착되어 선정의 깊고도 묘한 즐거움을 여의었나니, 보살은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켜 선정을 닦는 것이다.
繫心緣中 離五欲 除五蓋 入大喜初禪,
그 마음을 대상에 매어 두는 계심연(繫心緣)으로 오욕(五欲)을 여의고 오개(五蓋)를 제거하여서, 커다란 기쁨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가며,
滅覺觀 攝心深入 內淸淨 得微妙喜 入第二禪,
다시 거친 마음(覺)과 분별하는 산란한 마음(觀)을 멸하여, 마음을 거두어 깊은 내면의 청정함에 들어가 미묘한 기쁨을 얻는 제2선에 들어가며,
以深喜散定故 離一切喜 得遍滿樂 入第三禪,
다시 제이선의 깊은 기쁨이 정(定)을 산란시키기에 일체의 기쁨을 여의게 되면, 두루 가득한 즐거움을 얻는 제3선에 들어가게 되며,
離一切苦樂 除一切憂喜及出入息 以淸淨微妙捨而自莊嚴 入第四禪。
다시 일체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여의고 일체의 근심과 기쁨 및 들고나는 들숨과 날숨을 제하여, 청정미묘한 평정한 마음= 捨(사 upeksa)로 스스로를 장엄하는 제사선에 들어가게 되니,
계심연(繫心緣)= 마음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欲)에 묶어놓아 중도(中道)를 갈무리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것이 화두(話頭)를 붙잡고 늘어지게 하는 오늘날의 선종(禪宗)이 탄생되는 배경인 것입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捨(사, upeksa)=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치우치지 않고, 너무 가라앉거나 들떠 있지도 않은 완전한 평정 상태에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 -다움
是菩薩雖知諸法空無相 以衆生不知故 以禪相教化衆生。
若實有諸法 空是不名爲空 亦不應捨五欲而得禪
今諸法空相亦不可得不應作是難言, 若諸法空 云何能得禪?
이렇게 보살은 제법이 공하여 무상(無相)임을 줄 알지만 중생들은 알지 못하는 까닭에 선의 모습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
만일 제법이 실로 있는 것인데 이를 공(空)한 것이라 한다면 공(空)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오욕(五欲)을 버리고서 선(禪)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니, 버릴 수도 없고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제법의 공한 모습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제법이 공한 것이라면 어떻게 능히 선(禪)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復次 是菩薩不以取相愛著得故 行禪, 如人服藥 欲以除病 不以美也。為戒清淨 智慧成就故行禪。菩薩於一一禪中 行大慈觀空 於禪無所依止, 以五欲麤誑顛倒故 以細微妙虛妄法治。譬如有毒 能治諸毒。
또한, 이 보살은 모습을 취하고 애착하여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병을 없애기 위하여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곧 계를 청정히 지키고 지혜를 성취하기 위한 까닭에 선(禪)을 행하는 것이니,
보살이 하나하나의 선(禪) 가운데에서 대자(大慈)를 행하고 공을 관하면서도 선(禪)에 의지하지 않으니, 오욕(五欲)이 거칠고 거짓된 것이며 전도된 것인 까닭에 미묘하고 허망하다는 법으로 다스리나니, 비유하자면 독(毒)으로써 능히 온갖 독(毒)을 치유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대지도론(大智度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7 (1) | 2024.01.15 |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6 (1) | 2024.01.14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4 (0) | 2024.01.12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3 (1) | 2024.01.11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0권 2 (1) | 2024.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