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三三昧義 第三十二卷 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2. 초품 중 세 가지 삼매[三三昧]의 뜻을 풀이함 3
問曰, 衆生空 法不空 是可信, 法自相空 是不可信。
何以故, 若法自相空 則無生無滅, 無生無滅故 無罪無福, 無罪無福故 何用學道?
묻나니, 중생이 공하고 법이 공하지 않다는 것은 믿을 수 있지만, 법(法)의 자상(自相)이 공하다 함은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법의 자상이 공하다면 생도 멸도 없을 것이요, 생멸이 없다면 죄도 복도 없을 것이요, 죄와 복이 없다면 왜 도(道)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 有法空故有罪福 若無法空 不應有罪福。何以故, 若諸法實有自性 則無可壞。
性相不從因緣生 若從因緣生 便是作法, 若法性是作法 則可破。
답하나니, 법의 공(空)함이 있는 까닭에 죄와 복이 있으며, 만약 법의 공함이 없다면 죄와 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제법이 실로 자성이 있다면 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며, 성품과 모습(자성自性과 실상實相)이 인연을 따라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라면 이것은 만들어진 作法(작법)이 될 것이니, 만일 일체법의 법성(法性)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곧 무너뜨릴 수 있음이니라.
유법(有法)=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인연화합에 의한 모든 현상과 작용(法).
무법(無法)= 일체법(一切法)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마하반야바라밀다경
若言法性可作可破 是事不然! 性名不作法 不待因緣有。諸法自性有 自性有則無生者 性先有故。若無生則無滅 生滅無故無罪福, 無罪福故 何用學道?
만약 일체법의 법성(法性)을 능히 만들어 낼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옳지 않은 것이다.
본 바탕의 성(性, 성품)이란 만들어 낼 수 없는 법을 이르는 말이니, 인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제법에는 자성(自性)이 있으며, 자성(自性)이 있다면 곧 낢(生)이 없으리니, 성품이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낢이 없으면 멸함도 없고, 남과 멸함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게 되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도를 배울 필요도 없으리라.
*법성(法性, dharmata)= 법의 체성(體性),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본성을 말한다. 그런데 ‘자성(自性)’이란 자기의 성품, 즉 일체법에 있어서 개개의 성품을 말한다. 이에 비해, 법성(法性)이란 법의 성품, 즉 일체법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자성의 총체적 표현이다.
그리고 ‘불성(佛性)’은 일체만덕(반야, 능력)을 갖춘 부처님의 성품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性)은 상(相)이 의지하는 내적본체(內的本體)요, 상(相)은 성(性)에 의해 현출(顯出)되는 외적작용이다.
법성은 법이 되는 근본 성품이고, 불성은 불이 되는 근본 성품이다.
불성(佛性)이란 불교의 독특한 용어인데,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을 불성이라 하고, 일체법계를 말할 때에는 법성(法性)이라 하는데, 일체만법의 본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 법성을 바로 안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다. 법성은 변동이 없으므로 진여(眞如)라 하기도 하고, 그 내용은 중도(中道)이므로 중도라 하기도 하고, 활동하는 자체는 연기에 따라 움직이므로 연기법(緣起法)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일체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해서는 법성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이라 한다.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라 하든, 이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이 부처님이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 즉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본원이다.-아미산
*12인연의 “유(有)”가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현상과 작용(法)이요 이러함이 제법(諸法)의 자성(自性)임을 깊이 새기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시는데 도움이 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若衆生有眞性者 則無能害 無能利 自性定故。如是等人 則不知恩義 破業果報。
法空中亦無法空相 汝得法空 心著故 而生是難。
是法空 諸佛以憐愍心 爲斷愛結 除邪見故說。
만약 중생에게 참성품= 眞性(진성)이 있다면 능히 해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롭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니, 자성(自性)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사람이라면 은혜도 의리도 알지 못하고, 업과 업의 과보를 파괴하는 것이며,
법의 공함 =法空(법공) 가운데에 법이 공하다는 모습(相)도 없는 것이거늘, 그대는 法空(법공)을 얻으려는 마음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 法空(법공)은 부처님들께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애욕의 매듭을 끊고 삿된 소견을 제거하여 주시고자 말씀하신 것이니라.
삼공(三空)=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구공(俱空)
법공(法空, Dharma-sunyata)은 물질적인 현상이나 객관을 대상으로 한 상대적 정신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의 본체(나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본래 공무(空無)한 것이라는 진리를 말한다. 즉, 객관세계의 일체법이 공함을 모르고 여기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을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서 ‘법(法)’은 제법(諸法) 또는 만유(萬有), 삼라만상을 말한다. 따라서 법공은 모든 우주 만유는 인연이 모여서 생겨난 가짜 존재이며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즉,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이다.
수행에 의해 물질과 마음의 여러 가지에 대한 객관적 미집(迷執)인 법집을 벗어난 경지이다.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를 의미한다.
물질[색(色)]과 마음[심(心)]의 모든 존재는 모두 원인과 결과, 즉 인연법에 의해 생긴 임시적인 가짜 존재로서 거기에는 고정된 실체로서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만유(萬有)에는 실체가 없다. 공무(空無)하다는 것을 뜻한다.
청담 스님은 「법공(法空)은 현상계의 모든 것은 다 인연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으로 그 실체가 없으며, 따라서 어떤 결정된 법이 없어서 온갖 법이 다 공했음을 증득(證得)한 경계를 말한다. 그러니 아공은 육신이 내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은 객관세계가 다 공해서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를 구속할 게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생사를 벗어난 경지를 체득한 것이 법공이다.」 - 아미산
復次 諸法實相能滅諸苦 是諸聖人眞實行處。若是法空有性者 說一切法空時 云何亦自空? 若無法空性 汝何所難?
또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은 능히 모든 괴로움을 멸하게 하나니, 이는 모든 성인들의 진실한 수행처이라.
만약 이 법공(法空)에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일체법의 공을 말할 때 어떻게 자신 스스로도 역시 공(空)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법공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그대가 따지는 것이 무엇인가?
以是二空 能觀諸法空 心得離諸法 知世閒虛誑如幻。
이렇게 자성(自性)과 자상(自相)이 공한, 이공(二空)으로써 제법의 공함을 관찰하여 마음이 제법을 여읠 수 있고, 세간이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허깨비와 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
如是觀空 若取是諸法空相 從是因緣 生憍慢等 諸結使 言, '我能知諸法實相', 是時應學無相門 以滅取空相故。
이와 같이 공(空)을 관찰하고서도 만약 제법의 공한 모습에 집착한다면, 이러한 인연으로 교만 등의 번뇌를 일으키게 되어 말하기를 '나는 능히 제법의 실상을 아노라' 하게 되나니,
이러한 때에는 무상문(無相門)을 배워야 하는 것으로, 공의 모습= 空相(공상)을 취하려는 마음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若於無相中生戲論 欲分別有所作 著是無相, 是時復自思惟,
'我爲謬錯 諸法空無相中 云何得相 取相作戲論? 是時應隨空 無相行 身口意不應有所作
應觀無作相 滅三毒 不應起身口意業 不應求三界中生身' 如是思惟時 還入無作解脫門。
만약 무상(無相)에 대하여 희론을 일으킨다면, 무상을 분별하고자 하여 이 무상에 집착하게 되나니, 이러한 때에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여야 하나니,
‘내가 착각을 했구나. 제법은 공하고 모습도 없는 무상(無相)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모습(相)을 취하여 그 모습(相)에 집착하여 희론을 내는 것인가?
이 때에는 공(空)함을 따라 무상(無相)을 행하여 신구의(身口意)로 짓는 바가 없게 하여야 하며, 지음 없는 무작(無作)의 모습(相)을 관찰하여 삼독을 멸하고, 신구의(身口意)의 업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하며, 마땅히 삼계 안에 태어나는 것도 구하지 않아야 하리라.’
이와 같이 사유(思惟)할 때, 되돌아와서 지음이 없는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라.
*무상 (無相)= 현상의 모양이 없는 것, 생멸(生滅) 변천하는 모양이 없는 무위법(無爲法), 또 모든 집착을
여읜 상태,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이 무루심(無漏心)으로 닦는 공관(空觀)을 말한다.
是三解脫門 摩訶衍中是一法 以行因緣故 說有三種, 觀諸法空是名'空',
於空中不可取相 是時空轉名'無相', 無相中不應有所作爲三界生 是時無相轉名'無作'。
이러한 삼해탈문은 마하연(대승)에서는 동일한 일법(一法)이건만 수행의 인연에 따라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나니,
제법이 공(空)함을 관찰하는 것이 공(空)이며,
공(空)한 가운데에서는 모습(相)을 취할 수 없으니, 이 때에는 공(空)을 무상(無相)으로 바꾸어 부르며,
무상(無相)에는 어떠한 작위(作爲)도 없으니 삼계에 태어낢이 있을 수 없으니, 이 때의 무상(無相)은 작위 없음= 無作(무작)이라 바꾸어 부르는 것이라.
譬如城有三門 一人身 不得一時從三門入 若入則從一門。諸法實相是 涅槃城 城有三門, 空 無相 無作。若人入空門 不得是空 亦不取相 是人直入 事辦故 不須二門。若入是空門 取相得是空 於是人不名爲門 通塗更塞。若除空相 是時從無相門入。
비유하자면, 어떤 성에 세 개의 성문이 있으나 한 사람이 동시에 그 세 개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성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으니,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 열반성(涅槃城)이라.
그 성에는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이라는 세 개의 문이 있으니, (법화경法華經의 화성유품化城喩品의 비유)
어떤 사람이 공(空)의 문으로 들어가서 이 공(空)을 얻었으나 그 공의 상(相)을 취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장 들어가 불사(佛事)를 마치게 된 까닭에 나머지 두 개의 문이 필요하지 않으나,
만약 이 공(空)의 문으로 들어가서, 공의 상(相)을 취하여 공(空)을 얻고자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문이라 할 수 없고, 트인 길이 도리어 막힌 길이 될 것이니,
만약 공의 모습, 공상(空相)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무상(無相)의 문을 통하여 곧장 열반문에 이르게 되리라.
若於無相相心著 生戲論 是時除取無相相 入無作門。
만약 무상(無相)의 상(相)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희론을 일으키게 된다면, 이 때에는 무상(無相)의 상(相)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어야 지음 없음의 문= 無作門(무작문)으로 들어가서 열반문에 이르게 되나니,
阿毘曇義中, 是空解脫門 緣苦諦攝五衆。無相解脫門 緣一法 所謂數緣盡。無作解脫門 緣三諦攝五衆。
아비담(논장)의 정의에 따르면, 이 공해탈문(空解脫門)으로 고제(苦諦)를 반연하고 5중(오온)을 포섭하나니,
공해탈문(空解脫門)은 하나 법(가르침)을 반연하나니, 이른바 수연진(數緣盡)이며,
공해탈문(空解脫門)은 멸제(滅諦) 도제(道諦)라는 삼제(三諦)의 세 가지의 진리= 三諦(삼제)를 반연하여 5중(오온)을 포섭하는 것이다.
摩訶衍義中, 是三解脫門 緣諸法實相。以是三解脫門 觀世閒卽是涅槃。
何以故, 涅槃空 無相 無作 世閒亦如是。
마하연(대승)의 정의에서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삼해탈문은 제법의 실상을 반연하며, 이 삼해탈문으로써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관찰하나니, 왜냐하면 열반은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이며, 세간 역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問曰, 如經說涅槃一門 今何以說三?
묻나니, 경에서 말하기를 '열반은 하나의 문이다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셋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先已說 法雖一而義有三。
답하나니, 법(가르침)은 하나이지만 그 정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앞에서 이미 말하였느니라.
復次 應度者有三種, 愛多者 見多者 愛見等者。
또한 마땅히 제도해야 할 중생에 세 종류가 있으니, 애욕이 많은 이, 사견이 많은 이, 애욕과 사견을 균등하게 가진 이이다.
見多者 爲說空解脫門。見一切諸法從因緣生 無有自性 無有自性故空 空故諸見滅。
사견이 많은 중생에게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말해 주어,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 자성(自性)이 없음을 관찰하게 하여,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한 것이며, 공(空)함을 아는 까닭에 모든 사견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愛多者 爲說無作解脫門。見一切法 無常 苦 從因緣生, 見已 心厭離愛 卽得入道。
애욕(애착)이 많은 이에게는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을 말해 주어, 일체법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인연을 따라 생긴 것임을 보게 하나니, 이러함을 본 뒤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되니, 곧 애욕(애착)하는 마음을 여의고 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愛見等者 爲說無相解脫門。聞是男女等相無故斷愛 一異等相無故斷見。
애욕(애착)과 사견을 균등하게 가지고 있는 이에게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말해 주나니, 남녀를 비롯한 일체법이 상이 없는 무상(無相)임을 들은 까닭에 애욕을 끊게 되고, 같음과 다름= 一異(일이) 등의 상(相)이 없기 때문에 사견을 끊게 되나니,
佛 或一時說二門 或一時說三門。菩薩應遍學 知一切道 故說三門。
부처님께서는 혹은 일시에 두 해탈문을 말씀하시고, 혹은 일시에 세 가지 해탈문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마땅히 두루 배워서 일체의 길(道)을 알아야 하는 까닭에 세 가지의 해탈문을 말씀하신 것이며,
更欲說餘事故,三解脫門義略說。
다시 그 밖의 다른 불사를 설하시기 위하여 삼해탈문의 이치(정의)를 간략히 말씀하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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