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三三昧義 第三十二卷 第二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3. 초품 중 사무량(四無量)의 뜻을 풀이함 1

四無量心者,慈、悲、喜、捨。

4무량심(四無量心)이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말하는 것이라.

 

慈”名愛念衆生,常求安隱樂事以饒益之, “悲”名愍念衆生受五道中種種身苦、

心苦;“喜”名欲令衆生從樂得歡喜;“捨”名捨三種心,但念衆生不憎不愛。

자(慈)는 중생들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이니, 항상 안온함의 즐거움을 구하여 요익하게 하여 주는 것이요,

비(悲)란 중생들이 오도(五道)를 오가며 갖가지의 몸을 받아서 몸과 마음으로 고통스러움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요,

희(喜)란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따라 환희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요,

사(捨)란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오직 중생들을 생각하되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修慈心 爲除衆生中瞋覺故;修悲心 爲除衆生中惱覺故;

修喜心 爲除不悅樂故;修捨心 爲除衆生中愛憎故。

자심(慈心)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생각을 없애기 위함이요,

비심(悲心)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번거롭다는 생각을 제하기 위함이요,

희심(喜心)을 닦는 것은 함께 기뻐하지 못함을 제하기 위함이요,

사심(捨心)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한 사랑도 미움도 제하기 위함이라.

 

問曰, 四禪中已有四無量心乃至十一切處, 今何以故別說?

묻나니, 사선(四禪)에 이미 사무량심과 나아가서는 십일체처까지 있거늘 지금 어찌하여 따로 설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雖四禪中皆有是法,若不別說名字則不知其功德;譬如囊中寶物,不開出則人不知。

답하나니, 비록 4선(四禪) 가운데에 모두 있기는 하나, 만약 법(가르침)을 말과 글을 통하여 따로 설하지 않으면 그 공덕을 알지 못하나니,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의 보물을 꺼내 놓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若欲得大福德者,爲說“四無量心”.

만약 큰 복덕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설하여 주고

患厭色如在牢獄,爲說“四無色定”,

색(色, 생온)에 대하여 근심하고 싫어하기를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같이 하는 이에게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말해 주고, 

於緣中不能得自在、隨意觀所緣,爲說“八勝處”,

대상= 緣(연)에 대하여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여 마음대로 반연할 바를 관찰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팔승처(八勝處)를 설해 주고,

若有遮道,不得通達,爲說“八背捨”,

도(道)에 가로막힘이 있어 통달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팔배사(八背捨)를 설해 주고, 

心不調柔,不能從禪起次第入禪,爲說“九次第定”,

마음을 조복받지 못한 까닭에 그 마음이 유연하지 못하여 선(禪)을 따라 차례대로 다음 선(禪)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에게는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말해 주고, 

不能得一切緣遍照、隨意得解,爲說“十一切處”。

일체의 대상= 緣(연)을 두루 비추어 보지 못하여 뜻을 따라 이해(解)를 얻지 못하는 이에게는 10일체처(十一切處)를 설하여 주며,

 

若念十方衆生令得樂時,心數法中生法,名爲慈,

만약 시방의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때에, 그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 가운데 법(가르침)을 따르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 일컬어 () 하나니,  

是慈相應受、想、行、識衆,是法起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是法和合,皆名爲慈。名爲慈故,是法生,以慈爲主,是故慈得名。譬如一切心心數法雖皆是後世業因緣,而但思得名,於作業中,思最有力故。

이러한 자(慈)에 상응하여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심수법(心數法)으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일으키는 것과 그 일어나는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제행(諸行)으로, 이러한 법에 화합하는 모든 것을 자(慈)라 하나니,

이름이 자(慈)인 까닭에 이 법이 생길 때에는 자(慈)로써 우두머리(王)를 삼나니, 그러므로 자(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라.

비유하자면, 일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이 비록 후세의 업의 인연이 되는 것이지만, 오직 생각(思)만이 이름을 얻나니, 업을 짓는 가운데서 생각(思)이 최고의 힘을 가진 때문이다.

 

悲、喜、捨亦如是。

비(悲無量心, 비무량심)ㆍ희(喜無量心, 희무량심)ㆍ사(捨無量心, 사무량심) 역시 이와 같으며, 

 

是慈在色界。或有漏,或無漏。或可斷,或不可斷。亦在本禪中,亦禪中閒。三根相應,除苦根、憂根。如是等,『阿毘曇』分別說。

이 자(慈)는 색계에서는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며, 혹은 끊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나니,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는 근본선(根本禪) 가운데에서 선(禪)의 중간에 있기도 하며,

삼근(三根)인 탐진치(貪瞋癡)에 상응하여 고근(苦根)과 우근(憂根)을 없애는 것이니, 

이와 같음은 아비담(논장)에서 분별하여 설명하였느니라. 

 

근본선(根本禪)= 4선(禪) 혹은 4정려(靜慮). 선정에 든 수행자의 마음이 적정해지고 깊어가는 양상, 이른바 사마타의 상태를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으로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말하며

사선정(四禪定)의 초선정(初禪定, 初禪天), 이선정(二禪定, 二禪天), 삼선정(三禪定, 三禪天), 사선정(四禪定, 四禪天)과

사공정(四空定)의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과

일체번뇌습기(一切煩惱習氣)를 멸진(滅盡)하는 삼매(三昧)의 멸진정(滅盡定)을 합한 것이 구차제정.

 

取衆生相故有漏;取相已,入諸法實相故無漏。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jna)을 취하기 때문에 유루이며,

상(相)을 취한 뒤에 제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루이라.

 

사상(四相)=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以是故,『無盡意菩薩問』中說慈有三種:一者、衆生緣,二者、法緣,三者、無緣。

이러한 까닭에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의 물음에 '자(慈)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중생에 대하여 일어키는 자비인 중생연(衆生緣)이요,

둘은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의 법연(法緣)이요,

셋은 대상없이 일으키는 자비인 무연(無緣, anārambaṇa)이다.'고 대답하셨느니라. (삼연三緣의 자비)

 

問曰, 是四無量心云何行?

묻나니, 이 사무량심은 어떻게 행하는 것입니까?

 

答曰, 如佛處處經中說:“有比丘以慈相應心,無恚無恨,無怨無惱,廣大無量,善修慈心得解遍滿東方世界衆生、慈心得解遍滿南西北方四維上下十方世界衆生。以悲、喜、捨相應心,亦如是。”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經)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비구가 자(慈)에 상응하는 마음이 되면, 성냄이 없고, 원한이 없고, 원망이 없고, 번뇌가 없으며, 광대하고 무량하게 자비심= 慈心(자심)을 잘 닦게 되어 이해(解)를 얻어 두루 채우나니,

동방세계의 중생에게도 자심(慈心)으로 이해를 얻어 두루 채우며, 남ㆍ서ㆍ북과 동남 서남 서북 동북의 네 간방=四維(사유)와ㆍ위 아래의 시방세계 중생에게도 비(悲) 희(喜) 사(捨)에 상응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두루 채우느니라.'

十方(시방)= 동서남북의 사방과 북서, 남서, 북동, 남동의 사유(四維)와 상하를 이르는 말이며, 시방세계는 공간적 개념이 됩니다.   
 

慈相應心者,慈名心數法,能除心中憒濁,所謂瞋恨慳貪等煩惱。譬如淨水珠著濁水中,水卽淸。

자(慈)에 서로 상응하는 마음이라 한 것은, 자(慈)는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능히 마음속의 심란함= 憒(궤)와 혼탁함= 濁(탁)을 없애나니,

이른바 성냄=瞋(진)ㆍ원망= 恨(한)ㆍ인색함= 慳(간)ㆍ탐냄= 貪(탐) 등의 번뇌이라.

마치 물을 정화하는 보배 구슬= 浮水珠(부수주)를 흐린 물에 넣어두면 즉시에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으니라.

 

無恚恨者,於衆生中,若有因緣、若無因緣而瞋,若欲惡口罵、殺害、劫奪,是名瞋;待時節、得處所、有勢力當加害,是名恨。以慈除此二事故,名無瞋恨。

성냄=瞋(진)과 원망= 恨(한)이 없다고 하는 것에서 

먼저 성냄=瞋(진)이란 중생들에 대하여 인연이 있거나 인연이 없거나 간에 화를 내는 것이니, 곧 욕하고 꾸짖고 해치고 위협하는 등을 성냄=瞋(진)이라 하며,

그러함이 시절(때)을 기다리고 적절한 장소를 만나서 세력을 얻게 되면 응당 해치려 하는 것을 원망= 恨(한)이라 하나니,

자심(慈心)으로써 이러한 두 가지를 없애는 까닭에 성냄과 한= 瞋恨(진한)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無怨無惱,恨卽是怨,初嫌爲恨,恨久成怨;身口業加害,是名惱。

원망(無怨)과 번뇌가 없는= 無惱(무뇌)라 함이란, 한(恨)이 곧 원망(怨)이니, 처음에는 싫어하는 것을 한(恨)이라 하고, 한(恨)이 오래 묵게 되면 원망(怨)이 되어, 몸(신업)과 입(구업)으로 해를 가하게 되는 것을 괴롭힘(惱뇌 번뇌)라 하는 것이며, 

 

復次,初生瞋結名爲瞋;瞋增長籌量,持著心中未決了,是名恨,亦名怨;若心已定,無所畏忌,是名惱。忌 꺼릴 기

또한 처음에 성냄의 번뇌(結결)가 생겨나는 것을 성냄=瞋(진)이라 하고, 성냄=瞋(진)이 자라나서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이 되어 끝맺음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을 한(恨)이라고도 하고 원망(怨)이라고도 하며,

만약 마음이 결정되어 두려움이나 미워함에 거리낌 없게 되면 괴롭힘(惱, 번뇌)라 하느니라.

 

以慈心力除、捨、離此三事,是名無瞋無恨、無怨無惱。此無瞋無恨、無怨無惱,佛以是讚歎慈心。一切衆生皆畏於苦,貪著於樂;瞋爲苦因緣,慈是樂因緣。衆生聞是慈三昧能除苦、能與樂故,一心懃精進行是三昧。以是故,無瞋無恨、無怨無惱。

자심(慈心)의 힘으로 한(恨) 원(怨) 괴롭힘(惱)의 세 가지를 여의게 되면, 이를 일컬어 성냄이 없고, 원한 없고, 원망 없고, 번뇌가 없다고 하는 것이라.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성냄 없음ㆍ원한 없음ㆍ원망 없음ㆍ번뇌 없음으로 자심(慈心)을 찬탄하셨으니, 

일체 중생 모두가 괴로움을 두려워하고 즐거움에 탐착하거니와 성냄은 고통=苦(고)의 인연이 되고, 자(慈)는 즐거움의 인연이 되는 것이니, 

중생들이 이러한 자삼매(慈三昧)를 듣게 되면, 능히 고통을 제거하고 즐거움을 얻게 되는 까닭에 일심으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삼매(三昧)를 행하여야 하는 것이라.

이러한 까닭에 ‘성냄 없고, 원한 없고, 원망 없고, 번뇌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廣”、“大”、“無量”者,一大心分別有三名:

넓을 廣(광) 클 大(대) 무량(無量)한 것이라 함은, 하나의 큰 마음= 大心(대심)을 말하는 것이며, 분별하면 세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廣”名一方,“大”名高遠,“無量”名下方及九方。

넓을 광(廣)이란 한 방향을 말하고, 클 대(大)란 높고 높은= 高遠(고원)하다는 뜻이며, 무량(無量)이란 아래쪽과 그 나머지의 아홉 방위를 말하는 것이며,  

 

復次,下名“廣”,中名“大”,上名“無量”。

또한 아래는 넓을 광(廣)이요, 중간은 클 대(大)요, 위는 무량(無量)이며, 

 

復次,緣四方衆生心是名“廣”,緣四維衆生心是名“大”,緣上下方衆生心是名“無量”。

또한 사방의 중생심을 반연하는 것을 넓을 광(廣)이라 하고, 동남 서남 서북 동북의 네 간방= 四維(사유)의 중생심을 반연하므로 클 대(大)대라 하고, 위와 아래의 중생심을 반연하는 것을 무량(無量)이라 하며, 

 

復次,破瞋恨心是名“廣”,破怨心是名“大”,破惱心是名“無量”。

또한, 성내고 한을 품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을 넓을 광(廣)이라 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을 클 대(大)라 하고, 번뇌심을 깨뜨리는 것을 무량(無量)이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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