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三十七品義 第三十一卷第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1. 초품 중 삼십칠품(三十七品)의 뜻을 풀이함 10

 

問曰:何等是五種邪命?

묻나니, 어떠한 것이 다섯 가지의 잘못된 삶=邪命(사명)입니까?

 

答曰, 一者 若行者爲利養故 詐現異相奇特, 二者 爲利養故 自說功德,

三者 爲利養故 占相吉凶爲人說, 四者 爲利養故 高聲現威令人畏敬, 

五者 爲利養故 稱說所得供養 以動人心。邪因緣活命故 是爲邪命。

답하나니, 첫째는 수행자가 이득을 얻기 위하여 거짓으로 특이한 현상을 꾸며 나타내는 것이요,

둘째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의 공덕을 선전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길흉화복을 점쳐서 남에게 말해 주는 것이요,

넷째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높은 소리로 위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공양 얻은 것을 자랑하여 남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

곧 삿된 인연으로 살아가는 까닭에 사명(邪命)이라 하는 것이요.

 

是八正道有三分, 三種爲戒分, 三種爲定分, 二種爲慧分。

이 팔정도(八正道)를 삼등분으로 나누면,  3종의 계에 대한 戒分(계분), 3종의 선정에 대한 定分(정분), 2종의 지혜에 대한 慧分(혜분)이니,

 

慧分 定分分別 如先說。

지혜에 대한 慧分(혜분) 선정에 대한 定分(정분) 이미 설명한 바와 같으며, 

 

戒分 今當說, 戒分是色性 不可見 無對 無漏 有爲 無報 因緣生 三世攝 色攝 非名攝 外入攝。

이제 계에 대한 戒分(계분)을 설명하리라.

戒分(계분)은  물질(색온)의 성품이니 볼  없는 不可見(불가견)이며, 대할  없는 無對(무대)이며, 무루(無漏)이며, 유위(有爲)이며, 인연에 의해 생겨난 因緣生(인연생)이며, 미래 현재 과거의 삼세(三世)에 속하고, 물질에 속하는 것으로, 이름에 속하거나 외입(外入)에 속하지 않으며,  

 

慧知 非斷見 不可斷 修法 無垢法 是果亦有果 非受法 四大造 有上法 非有法 相應因。

지혜로써 아는 것으로, 단멸견(斷滅見)이 아니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며, 참된 가르침을 닦음이며, 때가 없는 무구법(無垢法)이니, 이는 과위가 있는 것이니 유과(有果)이기도 하며,

느낌의 법이 아닌 수법(受法)이 아니고,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유위의 법과 허공과 비지연진(非智緣盡)의 유상법(有上法)이 아니며, 유법(有法)이 아니며, 상응하는 상응인(相應因)도 아니며,

 

一善分攝三正 三正攝一善分, 不善 無記 漏 有漏不相攝。

無漏一法攝三正 三正亦攝無漏一法。如是等 種種分別 如'阿毘曇'廣說。

(사정근의) 하나의 선분인 일선분(一善分)으로 정어ㆍ정업ㆍ정명의 삼정(三正)을 포섭하고,

이러한 삼정(三正)으로 (사정근의) 한 선분을 포섭하며,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와 누(漏)와 유루(有漏)는 서로 포섭하지 않으며, 

무루(無漏)의 한 법이 삼정(三正)을 포섭하고, 삼정(三正)이 또한 무루의 한 법을 포섭하나니,

이렇게 갖가지로 분별함은 아비담(논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으니라.

 

是三十七品 初禪地具有。未到地中三十六 除喜覺。

第二禪中亦三十六 除正行。禪中閒 第三, 第四禪 三十五 除喜覺 除正行。

이러한 37조도품은 초선의 경지인 初禪地(초선지)에서 갖추어지는 것이며,

아직 사선(四禪) 이르지 않은 지위(수다원)에서는 희각지(喜覺地)를 뺀 36품이 있으며, 

제2선(二禪)에도 정행(正行)을 제한 36품이 있으며, 

선(禪)의 중간인 제3선(三禪)과 제4선(四禪)에는 35품이 있으니, 희각지와 정행을 제외한 것이다.

 

三無色定中三十二 除喜覺 正行 正語 正業 正命, 有頂中二十二 除七覺分 八聖道分。

欲界中二十二 亦如是。

是爲聲聞法中 分別義。

3무색정(三無色定)에는 32품이 있으니, 희각지와 정행과 정어와 정업과 정명을 제외하였으며,

유정(有頂, 색구경천)에는 22품이 있으니, 7각지와 8성도분을 제외하였으며, 

욕계 중의 22품도 역시 이와 같으며,

이것이 성문의 법에서 분별한 이치(정의)이니라.

 

問曰, 摩訶衍所說 三十七品義云何?

묻나니, 마하연(대승)에서 설하는 37품의 이치(정의)는 어떠한 것입니까?

 

答曰, 菩薩摩訶薩 行四念處 觀是內身 無常 苦 如病 如癰 焰聚敗壞。

不淨充滿 九孔流出 是爲行廁。如是觀身惡露 無一淨處, 骨幹肉塗 筋纏皮裹。

답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사념처를 행하여  몸의 안을 관찰하되 '무상하고 괴롭기가 마치  같고 악창(惡瘡, 악성종기) 같으며, 화염이 타올랐다가 스러지는 것과 같으며, 더러운 것이 가득하여 아홉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다니는 변소=行廁(행측)이다'라고 보며, 

이와 같이 몸의 나쁜 점들을 드러내어서 보니, 어느 것 하나도 깨끗한 곳이 없으며, 뼈를 줄기 삼아 살로 덮고 힘줄이 얽히고 가죽으로 덮혀 있는 것이라고 관찰하며,  

 

先世受有漏業因緣 今世沐浴 華香 衣服 飮食 臥具 醫藥等所成。

如車有兩輪 牛力牽故 能有所至, 二世因緣 以成身車 識牛所牽 周旋往反。

몸은 또한 전생의 유루(有漏)의 업을 지은 인연으로 받은 것으로, 금생에서 목욕과 꽃ㆍ향ㆍ의복ㆍ음식ㆍ와구ㆍ약품 등으로 꾸며서 이루어진 바이니,

마치 수레에  바퀴가 있어 소가 끄는  때문에 능히 목적지에 이르게 되듯이,

전생과 현생의  세상의 인연으로 몸이란 수레가 이루어지고, 식(識) 소에 이끌리어 두루 오고감을 왕래하는 것이라. 

 

是身四大和合造 如水沫聚 虛無堅固。是身無常 久必破壞。

是身相 身中不可得 亦不在外 亦不在中閒。身不自覺 無知無作 如牆壁瓦石。

이러한 몸은 사대(四大)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마치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이 허망하며 견고하지 않은 것으로, 

이 몸은 무상하여 오래지 않아 곧 반드시 무너지는 것이며,

이 몸의 실상은 몸 안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몸의 밖에도 있지도 않고 또한 중간에 있지도 않으며,

몸 스스로는 느끼지도 못하는 것으로, 지각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 마치 담장이나 기왓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며, 

 

是身中 無定身相 無有作是身者 亦無使作者。是身先際 後際 中際 皆不可得。

八萬戶虫 無量諸病 及諸飢渴 寒熱 刑殘等 常惱此身。

이러한 몸에는 몸이라고 정(定)해진 실상(實相)도 없으며, 이 몸을 만든 이도 없고, 또한 부리는 자도 없으니,

이 몸은 과거= 先際(선제)나 미래=後際(미래)나 현재=中際(중제)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8만4천의 털구멍마다의 벌레와 무량한 질병과 주림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형벌 등이 항상 이 몸을 괴롭히나니,

 

菩薩摩訶薩 觀身如是 知非我身 亦非他有, 不得自在 有作及所不作。

是身 身相空 從虛妄因緣生, 是身假有 屬本業因緣。

보살마하살은 몸에 대하여 이와 같이 관찰하며, 이러한 몸은 나의 몸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며, 자유롭지 못하여 스스로 만들거나 만드는 자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몸의 실상 공한 것으로 허망한 인연으로부터 생겨나게 된것이며, 

 몸은 거짓으로 잠시 존재하는 것이며, 본업의 인연에 속하는 것임을 아나니, 

 

菩薩自念, 我不應惜身命。何以故, 是身相 不合不散 不來不去 不生不滅 不依猗。

循身觀 是身無我 無我所故空 空故無男女等諸相 無相故不作願。

如是觀者 得入無作智門 知身無作

보살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 하리라. 

왜냐하면  몸의 모습은 합하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닌 不合不散(불합불산)이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不來不去(불래불거)이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不生不滅(불생불멸)이며,

기대어 의지하지 않는 不依猗(불의의)이라. 

몸을 두루두루 관찰하건대  몸은 無我(무아)이며, 無我(무아)이기에 공(空)한 것이며,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남녀 등의 모든 상(相) 없으며, 상(相) 없는 무상(無相)인 까닭에 원(願)을 짓지 않아야 하리라.'

이렇게 관찰한다면 작위 없는 지혜의 문= 無作智門(무작지문) 들어가게 되어, 몸이 무작(無作)임을 알게 되느니라.  

 

無作者 但從諸法因緣和合生。是諸因緣作是身者 亦從虛妄顚倒故有

是因緣中亦無因緣相 是因緣生亦無生相。如是思惟 知是身從本以來 無有生相,

知是身無相無可取。無生故無相 無相故無生 但誑凡夫故名爲身。

무작(無作)이란 다만 제법이 인연화합을 따라 생겨난 것을 말하며,

이러한 인연의 10가지 모습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오진(五塵)과 남(男) 여(女) 생(生) 주(住) 멸(滅)이 화합하여 이 몸이 만들어 진 것이라면 그 역시 허망하게 전도된 생각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리니,

이러한 인연 가운데에 인연의 모습 또한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생하는 것에도 생하는 모습이란 또한 없는 것이라.

이와 같이 사유(思惟)하여,  몸은 본래부터 낢의 生相(생상)이 없음을 아나니, 

 몸은 무상(無相)한 것이며 잡을  없는 것이며, 무생(無生)이기에 無相(무상)이며, 無相(무상)이기에 무생(無生)이거늘 오직 어리석은 범부인 까닭에 일컬어 몸이라 함을 아나니, 

 

菩薩如是觀身實相時 離諸染欲著 心常繫念在身。循身觀如是 名爲菩薩身念處。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에 모든 물든 욕망= 染欲(염욕)과 집착심을 여의게 되나니, 항상 마음이 항상 산란하여지지 못하도록 묶어서 몸에 두고 몸을 두루 살피나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菩薩身念處(보살신념처)라고 하며,

 

觀外身 觀內外身 亦如是。

밖의 몸을 관찰하는 것과 안팎의 몸을 관찰하는 것 역시 이와 같으니라.

 

菩薩云何觀諸受?

보살은 어떻게 모든 느낌을 관찰하는 것인가?

 

觀內受 是受有三種, 若苦 若樂 若不苦不樂。

是諸受無所從來 滅無所至 但從虛誑顚倒妄想生, 是報果 屬先世業因緣.

 안의 느낌= 內受(내수)를 관찰하건대, 

內受(내수)에는  종류가 있으니, 혹은 괴로운 若苦(약고)와 혹은 즐거운 若樂(약락)과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若不苦不樂(약불고불락)이라.

이러한 모든 느낌은 오는 곳도 없고, 멸하여 이르러 가는 곳도 없으니, 오직 허망하게 전도된 망상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렇게 과보를 받는 것은 전생의 업의 인연에 속하는 것이며, 

 

是菩薩如是求諸受 不在過去 不在未來 不在現在,

知是諸受 空 無我 無我所 無常 破壞法。

觀是三世諸受空 無相 無作 入解脫門。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느낌= 諸受(제수)를 구하되, 이는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도 있지도 않으니,  諸受(제수)는 공(空)한 것이라 무아(無我)이며, 내 것= 我所(아소)가 아니며, 무상한 것이라 무너지는 법임을 아나니, 

이러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諸受(제수)는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임을 관찰하면 해탈문(解脫門, 열반)에 들어가느니라.

 

亦觀諸受生滅 亦知諸受 不合不散 不生不滅。如是入不生門。

知諸受不生故無相 無相故不生。

또한 모든 느낌= 諸受(제수)의 생멸(生滅)을 관찰하여

諸受(제수)는 합하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닌 不合不散(불합불산)이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不生不滅(불생불멸)임을 아나니,

이와 같이 하여서 불생문(不生門, 열반)에 들어가나니, 

諸受(제수)는 생겨난 것이 아닌 불(不生)인 까닭에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이고, 무상(無相)이므로 불생(不生)임을 아느니라.

 

如是知已 繫心緣中。若有苦樂 不苦不樂來 心不受不著 不作依止。

如是等 因緣觀諸受 是名受念處。

觀外受 觀內外受亦如是。

이와 같이 알게 되어 마음을 묶어둔다면,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있을지라도 마음이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인연을 통한 모든 느낌을 관찰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수념처(受念處)라.

밖의 느낌을 관찰하고, 안팎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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