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業果甚深

(1) 文殊問寶首菩薩

* 受報十種事 과보를 받는 열 가지 일.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寶首菩薩言하사대 佛子야 一切衆生이 等有四大호대 無我無我所어늘

云何而有受苦受樂과 端正醜陋와 內好外好와 少受多受와 或受現報와 或受後報이닛고

然이나 法界中엔 無美無惡니이다

 

[業果甚深. 업의 과보. 우리가 업을 짓고, 그 지은 업에 의해서 받는 과보가 지극히 깊고 오묘한 도리이다. 모두 똑 같은 사람인데 왜 얼굴이 다르고, 성격은 왜 달라서 똑 같은 사물에 대해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그렇게 다른가? 하나하나 깊이 뜯어보면 참으로 甚深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無上甚深微妙法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의 실상 그 자체가 사실 無上甚深微妙法입니다. 그러니 그 실상을 확연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無上甚深微妙法이 아닐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爾時文殊問寶首菩薩(문수문보수보살)하사대, 그때 문수사리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말했다=물었다. 

佛子야 一切衆生이 等有四大(등유사대)호대, 불자여, 일체중생이 똑 같이 4대=지수화풍을 지녔으나  

無我며 無我所(무아무아소)어늘, 도 없고 아소도 없는데

[사대육신, 사대가 화합해서 지금 이렇게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조금 눈을 밝게 뜨고 보면 無我= “라고 할 것이 없고 無我所= 나의 것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없으니까 나의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四大는 假名無主(가명무주)라. 거짓 이름이고 주인이 없다. 무상게에 四大忽散(사대홀산) 今者妄身當在何處(금자망신당재하처). 지금 사대가 홀연히 흩어지고 나면 이 망념된 몸뚱이는 마땅히 어느 곳에 있는가? 원각경 보안장과 똑 같은 내용으로, 무상게도 참~ 좋은 글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슬퍼하기는 커녕 快活快活(쾌활쾌활)이로다. 이 거치적거리는 몸뚱이 벗어버렸으니 얼마나 유쾌하고 유쾌합니까? 아파본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요. 사실 애먹이던 몸뚱이 벗어버리고 나면 정말 快活快活이니까 돌아가신 분보고 快活快活=유쾌하고 유쾌하십니다. 

몸뚱이 벗었을 때 그 생각부터 먼저 하라고 시달림 가서 맨 처음 외우는 것이 무상게 아닙니까? 저도 옛날에 시달림 더러 다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무상게 읽는 재미가 있어서 참 좋더라고요. 우리 잘 아시는 게송 있지요? 승조법사, 서른두 살엔가 어떤 국법에 연루 돼가지고 사형언도를 받고 지은 게송.

四大元無主(사대원무주). 사대육신으로 된 이 몸은 원래 주인이 없다.

지수화풍으로 되었으니까 누구를 주인이라 하겠습니까? 땅의 성질을 주인으로 하려니 불의 성질도 있고, 불의 성질을 주인이라고 하려니 물의 성질도 있고, 물의 성질을 주인이라고 하려니 풍대도 있고, 四大元無主라.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이라.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이더라.

以首臨白刃(이수임백인)하니, 그럴 때 목을 새파란 칼날= 흰 칼 앞에다 목을 들이댔는데,

猶如斬春風(유여참춘풍)이라.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더라. 

四大元無主. 사대가 본래 空한 도리를 체득한, 깨달은 사람들이 그냥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이런 게송은 다른 종교ㆍ다른 철학에서는 거짓으로 꾸며내려고 해도 나올 수가 없는 글입니다. 그렇게 보면 불교 참~~ 위대한 종교입니다. 한 경지를 뛰어 넘어서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云何而(운하이) 有受苦受樂(유수고수락)과, 어찌하여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고,

[苦 이 상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천 상 낙을 누릴 수도 있고, 똑 같은 공덕인데 그것이 왜 있느냐는 겁니다.] 

端正과 醜陋(단정추루)와 단정하고 누추하고,

內好外好(내호외호)와, 안으로 좋아하고 밖으로 좋아하고,  

안으로 좋은 사람밖으로 좋은 사람, 내적인, 개인적으로 좋은 것과 바깥 조건, 환경적인 조건이 좋은 것 사람마다 다름.

少受多受(소수다수)와, 적게 받고 많이 받으며,

[월급도 하루 여덟 시간열 시간 일하면 어떤 사람은 하루에 56만원 받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100만원 받는 사람도 있고, 少受多受. 그 외에 받는 것도 다 다른 것이 참 미묘한 것이지요.]

或受現報(혹수현보)와 或受後報(혹수후보)이닛고? 현생의 과보를 받거나 후생의 과보를 받습니까? 

[우리 염불에는 順現ㆍ順生ㆍ順後報(순현순생순후보)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여기는 두 가지만 이야기했습니다.

現報= 현생, 금생에 받는 것, 後報= 후생에 받는 보입니다. 다음 생ㆍ그 다음 생, 전체를 다 합쳐서 후생이라 합니다.

順生보= 바로 다음 생, 한 생만을 말하는 것, 順後報= 그 다음 많고 많은 생들.] 

然(연)이나, 그러나 法界中엔 無美無惡니이다 법계에는 아름다움도 추악함도 없습니다.

[우리 업과의 차별이 양각색 하지만, 근본이 無我이고 無我所= 아도 없고, 아소도 없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에서는 받는 차별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가 없는 無二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한 자리가 法界입니다.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그 진리의 자리에서는 아름다움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을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문수사리가 寶首보살에게 “먼저 모든 중생이 다 함께 4大가 있지만 我도 없고 我所도 없으니 무엇을 말함인가”라고 물은  가지 질문은 업의 因果法이다. 이하 10행의 게송은 보수보살이 앞의 열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한 것으로

처음은 擧體에 분별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업을 받는 좋고 나쁨이 행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경전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는  대의는 體를 요달하면 업이 없어지고 眞을 미혹하면 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게송의 뜻을 科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첫 두 구절은 과보가 행을 말미암아 생김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 두 구절은 업의 體가 본래 참이라서 근본적으로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교설임을 찬탄한 것이다.

법을 요달하면 업이 없어서 법과 업이 둘이 아니지만 행으로 말미암아 같지 않은 것이니 경문에서 알 수 있다.

둘째의 보살의 명칭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이 信位에서 업이 法體인 요달해서 다시 업이 있지 않음을 法寶라 칭하는데, 이 법보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믿음의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명칭이 寶首임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北方이며 스승의 지위임을 밝힌 것이니,

威儀의 궤칙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威儀智佛이며,

세계의 명칭이 첨복화(瞻蔔華)란 것은 이 꽃이 황색으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복덕의 색임을 밝힌 것이다. 황색은 福慶의 氣로서 안으로 순백의 청정함에 응하니 밖으로는 황색의 相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여래께서 人天의 스승이 되어서 검은 옷을 입는 것은 북방의 감(坎)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안으로 순백 청정의 오염 없는 理에 응하니, 밖으로 황색의 相을 나타낸 것은 바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순백 청정의 오염 없는 福相으로써 세계의 명칭을 삼음을 밝힌 것이며,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함으로써 덕행이 詳序하니 부처님의 명호가 위의지불이고, 항상 법보로 중생을 이롭게 하여 業性의 참됨을 요달하는 것을 보수보살이라 칭하는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제4의 신심에서 스스로 얻은 법인 因果理智의 명호이다.

 

[문] 무슨 이유로 북방이 스승이 되고 임금이 됩니까?

[답]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 윤택케 하는 것과 같다. 또 물이 아래를 사모하면서 흐르는 것처럼, 임금이되고 스승이 된 자가 우매한 자에게 나아가 미혹을 제도하여 明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또 북방의 감(坎)이 下位가 됨을 밝힌 것이니,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된 자가 늘 겸손한 행으로 중생이 귀의 하도록 이익을 주어 道로써 윤택케 하기 때문에 군자가 늘 검손으로 하위에 처해서 사물을 제도해 明을 발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북방의 坎을 임금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은 것이니, 무릇 大方은 方隅가 없지만 다만 그 뜻을 취해 덕을 나타낸 것이다. 나머지 지위는 명호품에 이미 해석한 것과 같으니, 한 부처님의 명호가 시방에 두루하기 때문에 방위에 따르는 것으로 법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주역}의 태괘(泰卦)에서 “건곤(乾坤)의 初九에서 모를 뽑으니 여(茹)를 連한다”고 한 것은 모가 결백하고 유약하고 그 뿌리가 달착지근한 것에서 군자의 덕 있음이 모(茅)의 유약하고 결백하고 달콤한 것과 같아 이끌어 들여 일을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茅)는 군자가 아니니 사물로써 비유한 것이고, 方隅는 부처님이 아니니 법으로써 비유한 것으로, 이는 법을 알게 한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는 의지함이 없기에 사물에 의지해서 지혜에 이름을 붙이고, 방위[方]는 방위가 없기에 법으로써 방위를 이루는 것이라서 동서남북의 情見으로 보는 방위가 아니다.]]

 

(2) 寶首菩薩의 偈頌答

時에 寶首菩薩이 以頌答曰

그러자 보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①     隨業報生 업을 따라서 보가 생긴다.

隨其所行業하야 如是果報生이나 作者無所有니 諸佛之所說이로다

 

1. 隨其所行業(수기소행업)하야, 그들의 행한 업에 따라

[所行業= 우리가 행하는 바 업, 무슨 업을 행하느냐?

우리가 화엄경 한 구절이라도 참으로 감동해서 정말 좋다고 감동하는 그 과보는 그 과보대로 틀림없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如是果報生= 이와 같이 과보가 생기지만]

如是果報가 生(여시과보생)이나, 그러한 과보가 생겼으되 [如是= 업과 같이]

作者無所有(작자무소유)니,  '짓는 자는 없다' [作者= 실체가 없다. 무아.] 

[生死涅槃相共和(생사열반상공화). 곧 죽어갈 때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본래 자리= 법성자리에서는 원융해서 무이상이다. 구절로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作者無所有입니다. 그렇게 후련하다고 느끼는 그 어떤 실체는 없다. 있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지고 따져도, 분석하고 분석해 봐도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諸佛之所說(제불지소설)이로다. 부처님들이 말씀하셨으니 =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바로다.

[업이니 과보니 하는 것은 우리 불교인으로서는 너무 친숙한 용어지요. 그리고 늘 하는 이야기이고, 늘 생각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업을 따라서 과보가 생기는데, 그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그 어떤 실체는 없다. 실체가 없는데 분명히 또 업을 짓는 사람도 있고 과보를 받는 사람도 있다.]  

 

②     譬喩

1譬如淨明鏡이 隨其所對質하야 現像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2亦如田種子가 各各不相知호대 自然能出生인달하 業性亦如是니라

3又如巧幻師가 在彼四衢道하야 示現衆色相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4如機關木人이 能出種種聲호대 彼無我非我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5亦如衆鳥類가 從殼而得出호대 音聲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6譬如胎藏中에 諸根悉成就나 體相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7又如在地獄에 種種諸苦事여 彼悉無所從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8譬如轉輪王이 成就勝七寶나 來處不可得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9又如諸世界가 大火所燒然이나 此火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1.譬如淨明鏡(비여정명경), 비유컨대 깨끗하고 맑은 거울이 

隨其所對質(수기소대질)하야, 그 앞에 있는 사물에 따라 =  對質=대상에 따라서

[胡來胡現漢來漢現(호래호현한래한현) 오랑캐가 와서 거울앞에 서면 오랑캐를 비추고, 한나라 사람이 와서 서면 비추면 한나라 사람을 비춰요.]

現像各不同(현상각부동)인달하야, 나타내는 상이 각각 다르듯이 

業性亦如是(업성역여시)니라. 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무엇이 업을 짓는지 모르지만 우리 각자 업이 달라서 이렇게 얼굴이 각각 다르고, 각자 느낌이 다르고, 각자 마음 씀씀이 다르고, 각자 가는 길이 다르고, 밥 한 그릇을 놓고 밥 먹는 것도 다 다르고, 몸속에 들어가서 소화되는 것도 각각 다 다른 것이, 그야말로 業果甚深입니다. 불가사의한 도리입니다.]

 

2. 亦如田種子(역여전종자), 또 밭에 심을 종자가 各各不相知(각각불상지)호대, 각각 서로를 알지 못하나 

自然能出生(자연능출생)인달하야, 자연히 싹을 돋아 내듯이 業性亦如是니라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배추씨를 뿌렸든, 무씨를 뿌렸든, 그 씨앗과 씨앗은 서로 알지 못하나, 자연히 그 씨앗대로 전부 다 나타나지요. 사람이나 식물이나 똑 같이 能出生인달하야출생하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다.]

 

3. 又如巧幻師(우여교환사), 巧幻師= 능숙한 마술사가 在彼四衢道(재피사구도)하야, 저 네거리에서

示現衆色相(시현중색상)인달하야, 온갖 색상들을 나타내 보이듯이

業性亦如是니라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업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지요. 그 사람의 업의 샘물이 끝없이ㆍ끝없이 나오는 것이 결코 다른 업이 안 나와요. 10년 후에 만나 봐요. 역시 그 사람 변화가 없습니다. 그 모습입니다. 20년 후에ㆍ30년 후에 그 사람 만나도 20년 전에ㆍ30년 전에 같이 살 때 하던 그 성격, 습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겁니다.]

오랫동안 못 봤던 사람을 어쩌다 만나면 말투라든지 마음 쓰는 것이 그대로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표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보고도  “똑 같네. 옛날이나 똑 같네.”라고 합니다]

 

4. 如機關木人(여기관목인), 마치 기관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機關木人= 나무로 만든 사람]

能出種種聲(능출종종성)호대갖가지 소리를 능히 내지만

彼無我非我(피무아비아)인달하야, 그것은 나와 나 아님이 없듯이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는 그냥 나무일뿐입니다.]

業性 亦如是니라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5. 亦如衆鳥類(역여중조류), 또 온갖 새들이  [갖가지 새의 종류들 = 衆鳥類]

從殼而得出(종각이득출)호대, 알에서 나왔으나 [殼 껍질 각]

音聲 各不同(음성각부동)인달하야, 그 소리가 각각 다르듯이 業性亦如是니라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종달새는 종달새소리, 뻐꾸기는 뻐꾸기소리, 비둘기는 비둘기소리하는 그 음성은 다 각각 다르듯이]

 

6. 譬如胎藏中(비여태장중), 비유컨대 태속에서 諸根悉成就(제근실성취)육근을 모두 성취하지만 

體相無來處(체상무래처)인달하야체상은 오는 곳이 없듯이 業性亦如是니라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모태 안에서 육근= 안이비설신의가 다 갖추어 지지만, 그 체상은 어디서 온 곳이 없어요.

한 방울의 물이 사람이 되고 온갖 동물이 되는데, 그들의 온갖 육근ㆍ온갖 기능ㆍ성품ㆍ사량 분별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그 업이라고 하는 것에 따라 그 복잡 미묘한 인체와 그 복잡 미묘한 개개인의 성품과 마음 씀씀이가 나오는 것이지요. 업 성, 업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참 불가사의한, 난사의 입니다. 그래서 요는 결국은 “업을 잘 짓자.”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업을 어떻게 짓느냐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7. 又如在地獄(우여재지옥), 또 지옥에서의  種種諸苦事(종종제고사)갖가지 괴로운 일들이

彼悉無所從(피실무소종)인달하야, 그 모두가 온 곳이 없듯이 業性亦如是니라. 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고통은 어디서 온 곳이 없어요.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지장경의 어떤 전설 같은 그런 고통이 아니고, 우리가 현실에서 받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 고통은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며칠 전에 얼음에서 넘어져서 발을 다쳐서 아파 죽을 지경인데, 이 아픔이 얼음에서 온 겁니까? 만약 얼음에서 온 것이라면, 겨울에 얼음 많이 얼었을 때는 온 동네사람이 아파 죽는다고 야단이 나야 될 것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얼음 아무리 많이 얼어도 누구하나 아프다는 사람 없다고요. 그럼 발에서 온 겁니까? 발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발에서 왔다면, 발이 항상 아파야 될 것 아닙니까? 항상 발 아픈 것 아니잖아요.

그 고통은 분명히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아픔만 있고 나는 없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나도 없고 나를 아프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누구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픔만 있습니다.

그것은 내 것도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하려니까 따지고 보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이라고, 이렇게 관하는 겁니다.

대승불교, 특히 법화경이나 화엄경 같은 경전은 그런 것을 세세하게 이야기를 안 하지만, 소승경전에서는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들이 개인의 어떤 문제를 치유하는 데는 그런 가르침이 상당히 유효하고 효과가 아주 좋아요. 

아픔만 있는 겁니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나는 없는, 彼=고통은 悉無所從 쫓아온 바가 없듯이 業性亦如是니라.  

업 성도 또한 어디에 구체적으로 실재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온 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야 찾아지진 않아요. 그러면서 또 그와 같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이것이 업의 이치입니다. 

어디 쫓아온 바는 없지만, 너무나도 확실하게 또 있습니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있으면서도 찾아보면 또 실체가 없다. 그러면 이런데서 한 눈을 뜨면 업에 대해서 초탈하는 것이지요. 업 때문에 오는 일ㆍ업 때문에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이제 아주 그야말로 猶如斬春風= 마치 목을 칼날 앞에 갖다 들이대도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이 그렇게 가뿐하고, 시원하고 그야말로 快活快活거치적거리는 몸뚱이 가져갔으니 얼마나 쾌활하고 쾌활한가? 이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8.譬如轉輪王(비여전륜왕), 비유컨대 전륜왕이 成就勝七寶(성취승칠보), 수승= 뛰어난 칠보를 성취= 가지고 있지만 

來處不可得(내처불가득)인달하야, 그 온 곳을 알지 못하듯이 業性亦如是니라. 업의 성품도 그와 같으며 

[지금은 야당, 여당이 있지만, 옛날에는 普天之下가 莫非王土(보천지하막비왕토). 온 천하가 왕의 국토 아닌 곳이 없고,

率土之民이 莫非王臣(솔토지민막비왕신). 온 천하 백성들이 전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체가 없는 업이 내 인생을 좌우하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업 잘 짓자고 이렇게 공부하는 겁니다. 업 잘 짓자고 포교하고ㆍ업 잘 짓자고 절 운영하고ㆍ불공하고ㆍ기도하고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루 24시간 중에 우리는 무엇인가 업을 짓고 살아야 됩니다.

누워서 자면 자는 업이요. 앉아 있으면 앉는 업이요. 산책을 하면 산책 하는 업이요. 경을 보면 경보는 업이고, 불공하면 불공하는 업이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업이고, 24시간 중에 우리는 무엇인가 업을 짓고 사는데, 최고의 업 짓는 것이 부처님말씀 화엄경을 공부하는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9.又如諸世界(우여제세계), 또 모든 세계가 大火所燒然(대화소소연)이나, 큰 불에 태워져도 

[劫火洞燃 大千 俱壞(겁화통연대천구괴) 겁의 불= 성 주 괴 공에서 이 지구가 마지막 무너질 때 일어나는 불이

燒海底(소해저)라. 저 바다 밑까지도 다 태울 정도로 그 겁화는 맹렬하다는 것입니다]

此火無來處(차화무래처)인달하야, 그 불이 온 곳이 없듯이 業性亦如是니라업의 성품도 그와 같도다

[업력! 전부가 업력인데 그 업 성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인지? 그 실체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 역시 공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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