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가 勤首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인데 어째서 번뇌를 끊고 번뇌를 끊지 못하는 같지 않음이 있는지 질문한 열 가지 질문이다. 근수 보살이 답한 첫 1행의 게송은 듣기를 권유하는 것이요, 다음 1행의 게송은 법을 듣고 부지런히 닦아 나감을 권하는 것이며, 이하 9행은 그 게으름을 질책하는 것이다.
명칭이 勤首인 것은 앞의 목수보살이 복전의 인과를 잘 보임으로써 부처님의 명호가 구경지이지만, 이 지위는 반드시 부지런히 행하기 때문에 근수라 칭함을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가 最勝智인 것은 부지런히 닦아 나가 진보함으로써 최승지를 얻어 果가 됨을 밝힌 것이다.
또한 근본부동지불을 因으로 삼고 최승지불로 닦아 나감의 果를 삼는 것이다.]]
六, 敎法甚深
(1) 文殊問勤首菩薩
十種敎法無差別 열 가지 교법이 차별 없음이라.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勤首菩薩言하사대
佛子야 佛敎가 是一이어늘 衆生이 得見에 云何不卽悉斷一切諸煩惱縛하고 而得出離이닛고
然其色蘊受蘊想蘊行蘊識蘊과 欲界色界無色界와 無明貪愛는 無有差別하니
是則佛敎가 於諸衆生에 或有利益이며 或無利益이니이다
爾時에, 그 때에 文殊師利菩薩이 問勤首菩薩言(문근수보살언)하사대, 문수사리보살이 근수보살에게 물었다
佛子야 佛敎가 是一이어늘, 불자여,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인데
衆生이 得見에, 중생들을 보건대 → 중생들이 불교를 얻어 보는데 있어서
云何不卽悉斷一切諸煩惱縛(운하부즉실단일체제번뇌박)하고, 어째서 모든 번뇌의 속박을 바로 끊어
而得出離(이득출리)이닛고? 벗어나지 못합니까?
[出離를 얻지 못합니까? 일체 번뇌의 속박을 다 끊고 거기서 벗어남을 얻지 못합니까? 아니 不자를 거기다 새겨야 되겠지요. 一斷에 一切斷(일단일체단)이라. 불법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한번 끊으면 일체가 다 끊어진다는 도리가 있습니다.]
然이나 其色蘊受蘊想蘊行蘊識蘊(기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과, 그러나 그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과
欲界色界無色界(욕계색계무색계)와 無明貪愛(무명탐애)는 욕계, 색계, 무색계와 무명, 탐, 애는
無有差別(무유차별)하니, 차별이 없으니 是則佛敎(시즉불교)가, 이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이
於諸衆生(어제중생)에, 모든 중생에게
或有利益(혹유이익)이며 或無利益(혹무이익)이니이다. 이익이 있거나 혹은 없는 것입니다.
(2) 勤首菩薩의 偈頌答
時에 勤首菩薩이 以頌答曰
그러자 근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① 許答
佛子善諦聽하소서 我今如實答호리니 或有速解脫이며 或有難出離니라
1. 佛子善諦聽(불자선체청)하소서, 불자여 잘 들으소서.
我今如實答(아금여실답)호리니, 내 이제 사실대로 답하거니와
或有速解脫(혹유속해탈)이며, 어떤 이는 속히 해탈하고
或有難出離(혹유난출리)니라. 어떤 이는 難出離=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出離=解脫 같은 뜻입니다. 삶의 질곡, 생 노 병 사로부터 벗어나는 것→ 出離. 생 노 병 사로부터 벗어나는 것→ 解脫.
어떤 이는 불교를 듣자마자 바로 해탈해요. 육조 혜능스님같이 나무 한 짐 팔러갔다가 금강경 한 구절 듣고 바로 마음이 환히 밝아져서 해탈해버린 사람도 있고, 우리같이 평생해도 아직도 그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도 있고.]
② 勇猛精進
若欲求除滅 無量諸過惡인댄 當於佛法中에 勇猛常精進이니라
2. 若欲求除滅(약욕구제멸) 無量諸過惡(무량제과악)인댄,만약 한량없는 허물과 악업을 없애고자 한다면
當於佛法中(당어불법중)에, 마땅히 부처님 법 안에서 勇猛常精進(용맹상정진)이니라. 항상 용맹히 정진해야 합니다
[불법 가운데 용맹정진 하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ㆍ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풀린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당부할 때, 해태하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3) 懈怠者(해태자)
3.譬如微少火에 樵濕速令滅인달하야 於佛敎法中에 懈怠者亦然이니라
4.如鑽燧求火에 未出而數息이면 火勢隨止滅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5.如人持日珠호대 不以物承影이면 火終不可得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6.譬如赫日照에 孩稚閉其目하고 怪言何不覩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7.如人無手足하고 欲以芒草箭으로 徧射破大地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8.如以一毛端으로 而取大海水하야 欲令盡乾竭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9.又如劫火起에 欲以少水滅인달하야 於佛敎法中에 懈怠者亦然이니라
10.如有見虛空에 端居不搖動하고 而言普騰躡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3.譬如微少火(비여미소화)에, 비유컨대 미미하고 적은 불씨를
樵濕速令滅(초습속영멸)인달하야, 젖은 땔감이 速令滅= 빨리 꺼지게 하듯이
於佛敎法中(어불교법중)에, 부처님의 교법 안에서
懈怠者亦然(해태자역연)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이 대목은 우리 모두가 가슴 찔리는 곳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읽어야할 대목들입니다.]
4. 如鑽燧求火(여찬수구화)에, 또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
未出而數息(미출이삭식)이면, 불이 나오기 전에 數息= 자주 쉬면
火勢隨止滅(화세수지멸)인달하야, 불기운이 따라서 멈추고 소멸하듯이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옛날 우리 어릴 때 화경이라는 돋보기를 햇빛에 대고 한 1ㆍ2분쯤 기다리면 솜 같은 것은 타는데, 조급한 사람들은 그것 못 참고 자꾸 옮기면 불을 본다는 것이지요. ]
5. 如人持日珠(여인지일주)호대, 마치 사람이 화경(火鏡)을 가졌으나
[日珠= 돋보기 구슬, 햇빛을 모으는 구슬.
옛날에는 구슬형의 돋보기를 사용해서 햇빛을 모으면 초점이 강해서 불이 잘 일어납니다]
不以物承影(불이물승영)이면, 솜털로 햇빛을 받지 아니하면 → 어떤 사물로써 햇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 같으면
火終不可得(화종불가득)인달하야, 불을 끝내 얻을 수 없듯이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6. 譬如赫日照(비여혁일조)에, 비유컨대 눈부신 해가 비추니
孩稚閉其目(해치폐기목)하고. 孩稚= 어린아이가 그 눈을 가린 채
怪言何不覩(괴언하부도)인달하야, 왜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듯이 [怪言= 괴이한 말]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7. 如人無手足(여인무수족)하고, 손발이 없는 사람이 欲以芒草箭(욕이망초전)으로, 억새풀로 만든 화살을
遍射破大地(변사파대지)인달하야, 두로 쏘아 대지를 깨뜨리려 하듯이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8. 如以一毛端(여이일모단)으로, 한 털 끝으로, 터럭 끝 하나로,
而取大海水(이취대해수)하야, 큰 바닷물을 찍어내서, 大海= 큰 바다 물을 한 방울씩ㆍ한 방울씩 찍어서
欲令盡乾竭(욕령진건갈)인달하야, 다 마르게 하려 하듯이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9. 又如劫火起(우여겁화기)에, 또 겁화= 겁의 불길이 일어났는데
欲以少水滅(욕이소수멸)인달하야, 적은 물로 끄려 하듯이
於佛敎法中(어불교법중)에, 부처님의 교법 안에서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10. 如有見虛空(여유견허공)에, 어떤 이가 허공을 보면서 端居不搖動(단거불요동)하고,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而言普騰躡(이언보등섭)인달하야, 다 올라가 다녀보았다고 말하듯이 [오를 등騰ㆍ밟을 섭躡. 하늘을 밟고 올라 간다.]
懈怠者亦然이니라. 게으른 이도 그러합니다
[조사스님들이 '경책 문' 쓸 때에 이 내용들을 많이 활용합니다.]
[[문수 보살이 法首 보살에게 “부처님께서 설했듯이 어떤 중생이 올바른 법을 받아 지니면 능히 일체 번뇌를 다 끊을텐데 어째서 올바른 법을 받아 지니면서도 끊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라고 질문한 것과 그 가운데 열한 가지 질문에 법수보살이 답한, 10행의 게송에서 첫 한 구절은 듣기를 권한 것이며, 다음 한 구절은 능히 질문함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 두 구절은 많이 들은 자가 수행하지 않음을 질책한 것이며, 이하 9행의 게송은 1행이 하나의 게송인데 많이 들으면서도 마음이 精一하지 못해 능히 번뇌를 끊지 못함을 질책한 것이다.
명칭이 法首인 것은 서북방의 술(戌)과 해(亥) 사이가 되는 것이니, 이는 미혹의 긴 밤 속에서도 능히 正法으로 자신을 이익되게 하고 남을 이익되게 하여 게으름 없이 오로지 구하는 것을 법수라 칭함을 밝힌 것이며, 세계의 명칭이 금강인 것은 견고하고 정밀해 게으름 없는 것이 스스로의 세계로써 서북방의 건괘(乾卦)에 의탁하는데 건(乾)은 堅剛이 된다. 부처님의 명호가 自在智인 것은 스스로 부지런한 정진으로 관조함으로써 理를 요달해 업이 없어지는 것을 自在智佛이라 칭하는 것이다.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근본부동지불을 因으로 삼고, 닦아 나가면서 자재지불을 얻는 것을 果로 삼는다.]]
七, 正行甚深
(1) 文殊問法首菩薩
十種隨煩惱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法首菩薩言하사대
佛子야 如佛所說하야 若有衆生이 受持正法하면 悉能除斷一切煩惱어늘
何故로 復有受持正法호대 而不斷者니잇고
隨貪瞋癡와 隨慢과 隨覆와 隨忿과 隨恨과 隨嫉과 隨慳과 隨誑 과 隨諂이 勢力所轉으로 無有離心하니
能受持法인댄 何故로 復於心行之內에 起諸煩惱니잇고
[10종 수번뇌라고 했지만 수번뇌뿐만이 아니고, 골고루 일체 중요한 번뇌를 다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탐 진 치 3독은 수번뇌가 아닌 근본번뇌입니다.
貪ㆍ瞋ㆍ痴ㆍ慢ㆍ疑(탐진치만의)ㆍ十纏十使(십전십사) 등은 근본번뇌이고,
수번뇌는 교리 상으로 20종이 있습니다.]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그때 문수사리보살이 問法首菩薩言(문법수보살언)하사대, 법수보살에게 물어 말하되
佛子야 如佛所說(여불소설)하야, 불자여, 부처님 말씀처럼 若有衆生(약유중생)이, 만약 어느 중생이
受持正法(수지정법)하면, 정법을 받아 지니면
悉能除斷一切煩惱(실능제단일체번뇌)어늘, 모든 번뇌를 다 끊어 없앨 수 있는데
何故(하고)로 復有受持正法(부유수지정법)호대, 어째서 정법을 받아 지니면서도
而不斷者(이부단자)니잇고? 不斷者= 끊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隨貪瞋癡(수탐진치)와, 탐 진 치와,
隨慢(수만)과, 만을 따르고, 慢= 업신여기는= 교만.
隨覆(수부)와, 배신 [覆= 자기허물 덮어 버리는 것, 이것 누구나 하는 짓입니다. 절대 자기 잘못 드러내놓고 발로참회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버려요.]
隨忿(수분)과, 忿 = 분노 내는 것
隨恨(수한)과, 恨 = 한이 많은 것
隨嫉(수질)과, 嫉 = 질투
隨慳(수간)과, 慳 = 아끼는 간탐심.
隨誑(수광)과, 誑 = 속이는 것이지요.
隨諂(수첨)이, 諂 = 아첨 등을 쫓는 勢力이 所轉(세력소전)으로, 세력의 조종으로
無有離心(무유이심)하니, 여의려는 마음이 없더라도, 마음을 떠나지 못하니
能受持法(능수지법)인댄, 법은 받아 지닐 수 있는데, 능히 불법을 수지 하는 댄, 공부하고ㆍ참선하고ㆍ기도하고ㆍ염불할진댄
何故로 復於心行之內(부어심행지내)에, 어째서 心行= 마음이 행하는 안에
起諸煩惱(기제번뇌)니잇고? 온갖 번뇌가 일어납니까? [공부하고ㆍ기도하고ㆍ참선ㆍ염불, 좋다는 것은 다 하는데 아직 마음속에서는 온갖 번뇌 貪ㆍ瞋ㆍ癡ㆍ慢ㆍ覆ㆍ忿ㆍ恨ㆍ嫉ㆍ慳ㆍ誑ㆍ諂의 10가지가 다시 꾸역꾸역 일어납니까]
[[번뇌(煩惱) 그 본질적 성질이 부적정(不寂靜: 고요하지 않음)인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번뇌의 본질적인 작용은 번뇌가 일어나게 되면, 그 번뇌를 대치(對治)하지 않는 한, 그 자체의 본질적인 성질에 근거하여 그 번뇌가 일으키는 부적정한 영향력[行] 즉 부적정한 업이 몸과 마음에 상속되어 전전(展轉)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필연적으로, 번뇌로 인해 업이, 특히 악업이 발생하고, 업으로 인해 괴로운 상태[苦]에 처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번뇌[惑]가 일어나 몸과 말과 마음으로 악한 행위[身口意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전통적인 용어로 혹업고(惑業苦)의 3도(三道)라고 한다. 그리고 12연기의 유전연기(流轉緣起)는 무명으로 대표되는 번뇌[惑]에서 업으로 업에서 고로 이어지는 혹업고의 연기관계를 보다 자세히 밝힌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런 고통의 생사윤회[苦]의 원인이 되는 번뇌[集]를 반야 즉 무루의 지혜로 끊어 안온한 적정(寂靜)의 상태인 해탈 또는 열반의 상태[滅]에 이르는 것[道]을 수행의 1차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 또는 진리인 고집멸도의 4성제(四聖諦)이다.
번뇌(煩惱)의 어원을 통해 살펴본다면, 산스크리트어 kleśa 또는 팔리어 kilesa를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이를 음역하여 번뇌를 길례사(吉隸舍)라고도 표현한다. 산스크리트어 kleśa는 '괴롭히다'라는 뜻의 동사 kliś에서 파생되었다. 팔리어 kilesa는 '물들이다, 더럽히다'라는 뜻의 동사 kilissati에서 파생된 것으로, 괴롭힘의 뜻 보다는 염오(染污)의 뜻이 강하다.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논서인 《입아비달마론》 제1권에서는 "몸과 마음의 상속[身心相續: 5온의 상속]을 번란(煩亂: 번거롭게 어지럽힘)시키고 핍뇌(逼惱: 괴롭혀 고뇌케 함)하기 때문에 번뇌(煩惱)라고 이름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혜원(523~592)은 《대승의장》 제5권에서 번뇌(煩惱)는 노란(勞亂) 즉 고단하게 하고 어지럽히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효(617~686)는 《이장의》에서 번뇌장(煩惱障)에 대해 설명하면서 "번뇌장은 탐(貪) · 진(瞋) 등의 혹(惑)으로, [몸과 마음을] 번로(煩勞: 번거롭고 힘들게 함)하게 함을 그 본질적 성질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진술에 이어서, "[이들 혹(惑)들이] 마땅한 때에 일어나 현행하여 몸과 마음을 번란(煩亂: 번거롭게 어지럽힘)시키기 때문에 번뇌라고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다 -- 위키백과]]
(2) 法首菩薩의 偈頌答
時에 法首菩薩이 以頌答 曰
그러자 법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화엄경 내용은 우리의 생활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생활 한 순간ㆍ한 순간의 삶과 바로 직결 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경전은 아주 만고에 변하지 않는 진리의 가르침인데, 그것을 우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 현실에 잘 갖다 부합을 시켜서 거기서 어떤 교훈과 경책으로 말하자면 걸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① 勸諦聽
佛子善諦聽하소서 所問如實義니 非但以多聞으로 能入如來法이니라
1.佛子善諦聽(불자선제청)하소서, 불자여, 잘 들으소서
所問如實義(소문여실의)니, 물으신 바가 如實義= 사실과 같습니다
非但以多聞(비단이다문)으로 단지 많이 들은 것만으로
能入如來法(능입여래법)이니라. 여래의 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多聞은 법문 많이 듣고 경전 보면서 실제적인 수행과 조화를 이뤄서 병행하라.]
② 譬喩
2.如人水所漂에 懼溺而渴死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3.如人設美饍호대 自餓而不食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4.如人善方藥호대 自疾不能救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5.如人數他寶호대 自無半錢分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6.如有生王宮호대 而受餒與寒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7.如聾奏音樂에 悅彼不自聞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8.如盲繢衆像에 示彼不自見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9.譬如海船師가 而於海中死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10.如在四衢道하야 廣說衆好事호대 內自無實德인달하야 不行亦如是니라
1.如人水所漂(여인수소표)에,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懼溺而渴死(구익이갈사)인달하야, 빠질까 두려워 목말라 죽듯이
於法不修行(어법불수행)이면,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多聞亦如是(다문역여시)니라.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화엄경을 보면서 저는 자자입심ㆍ구구입심이란 표현을 가끔 씁니다. 글자ㆍ글자, 구절ㆍ구절이 내 마음에 아로새겨져서 감동으로 다가오고, 그 감동으로 다가오는 동안 내 마음ㆍ내 정신세계는 정화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마음에 젖어들고 감동하면, 사실 그 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2. 如人設美饍(여인설미선)호대, 좋은 음식을 차려놓은 사람이
自餓而不食(자아이불식)인달하야 스스로 굶으면서 먹지 않듯이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3. 如人善方藥(여인선방약)호대, 약을 잘 처방하는 사람이
自疾이 不能救(자질불능구)인달하야,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듯이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4. 如人數他寶(여인수타보)호대 남의 보물을 세는 사람이 自無半錢分(자무반전분)인달하야 자기는 반 푼도 없듯이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은행원이 하루 종일 돈을 세지만 자기 돈은 한 푼도 없다.]
5. 如有生王宮(여유생왕궁)호대, 왕궁에 태어난 사람이
而受餒與寒(이수뇌여한)인달하야, 굶주림과 추위를 느끼듯이 [餒 주릴 뇌]
於法에 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왕궁에 태어나면 온갖 것 다 있을 텐데도, 굶주리고 추워서 덜덜 떤다. 우리가 모두가 부처님 왕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굶주리고 한기 들리고 몸 가릴 옷 한 벌 제대로 없는 그런 처지다 이 말입니다. 갖다 맞추면 전부 다 맞아요.]
6. 如聾奏音樂(여롱주음악)에, 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하여 [聾 귀머거리 롱]
悅彼이 不自聞인달(열피부자문)하야, 남은 기쁘게 하되 자신은 못 듣듯이
於法에 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7. 如盲繢衆像(여맹훼중상)에, 맹인이 온갖 모양을 수놓아 [그림그릴 수 繢, 수놓을 수 繢]
示彼不自見인달(시피부자견)하야, 남에게는 보여주되 자신은 못 보듯이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8. 譬如海船師(비여해선사)가, 비유컨대 海船師=바다의 뱃사공, 선장이
而於海中死(이어해중사)인달하야, 바다에서 죽는 것처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법에서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9. 如在四衢道(여재사구도)하야, 마치 네거리 길에서 廣說衆好事(광설중호사)호대, 좋은 일들을 떠들어대지만
內自無實德(내자무실덕)인달하야, 자신에게는 실다운 덕이 없듯이
不行亦如是니라. 행하지 않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열 자를 다섯 자로 감축해버렸습니다]
[[문수가 智首에게 “여래께서는 오직 한 가지 법으로 出離를 얻고 또 불법 속에서는 지혜를 으뜸으로 삼는데, 어째서 보시 등을 탄탄했는가”라고 묻는 열 가지 질문의 대의는 10바라밀과 4무량심이 궁극적으로 體가 없거늘 어째서 반드시 써야 하는가를 밝힌 것이다.
지수보살이 답한 뜻은 모든 助道法으로 근기에 따라 병을 없애는 것이니, 만약 배우고 닦지 않으면 성품 없는 보리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송 안에서 분명히 비유와 정황을 들어 설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병이 있으면 반드시 법에 의거해서 즉시 다스리는 것이니, 마치 길을 가로막은 흙덩이를 없애면 길은 스스로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자기 병이 이미 없어지면 또한 남에게도 복용하라고 주는 것이니, 약과 약방문이 끝내 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
명칭이 智首인 것은 지혜가 능히 근기를 알아 방편으로 法藥을 베풀면서도 4섭법과 4무량심과 10바라밀과 37助菩提分法으로 病이 일어나 두드러진 곳을 따라 복용케 함으로써 보리의 작위 없는 성품을 발휘해 점점 근본해 의지케 하는 것을 智首라 칭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下方세계이니, 보시와 持戒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 등의 10바라밀문으로써 대지처럼 능히 일체의 순백 청정한 법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세계의 명칭이 頗梨色파려색인 것은 이것이 백색으로 水精寶色과 같은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가 梵智인 것은 마음이 대지처럼 만유를 짊어지면서도 늘 알정함을 밝힌 것이니, 梵이란 청정이다.
지위에 따른 인과에 짝짓는다는 것은 또한 자기 마음의 근본부동지불을 因으로 삼고, 닦아 나가면서 心智의 고요함을 얻는 것으로 果를 삼는 것이니, 地體의 안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八, 修行甚深
(1) 文殊問智首菩薩
十種修行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智首菩薩言하사대
佛子야 於佛法中에 智爲上首어늘 如來가 何故로 或爲衆生하사 讚歎布施하시며 或讚持戒하시며
或讚堪忍하시며 或讚精進하시며 或讚禪定하시며 或讚智慧하시며 或復讚歎慈悲喜捨니잇고
而終無有唯以一法으로 而得出離하야 成阿耨 多羅三藐三菩提者니이다
爾時에, 그때에文殊師利菩薩이 그때 문수사리보살이 問智首菩薩言하사대, 지수보살에게 물었다.
佛子야 於佛法中(어불법중)에, 불자여, 불법 안에서 智爲上首(지위상수)어늘, 지혜가 으뜸인데
[불교는 지혜의 종교다. 자비는 그 다음으로, 자비를 제대로 행하려면 지혜가 있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해야 좋은 자비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감정에 떨어져서 “자비가 짚벙거지 된다.”는 표현하잖아요. 지혜가 깔리지 아니한 자비는 개인적인 정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佛法中에는 智爲上首라고 화엄경에 분명히 밝혔습니다.]
如來가 何故로 或爲衆生(혹위중생)하사, 여래는 어찌하여 중생을 위해
讚歎布施(찬탄보시)하시며, 혹은 보시를 찬탄하시거나 → 보시
或讚持戒(혹찬지계)하시며, 혹은 지계를 찬탄하시고 → 지계
或讚堪忍(혹찬감인)하시며, 혹은 감인을 찬탄하시고
[무비 스님이 무서운 병고를 앓고 퇴원해서 방에 돌아오자마자, 칠판에 써놓은 글자가,堪ㆍ忍ㆍ待(대). 석자입니다. 堪ㆍ忍ㆍ待. 견디고 참고 기다리다. 待자를 생략을 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벌어진 현상에 너무 집착 할 것이 아니라, 한 번 견디어보고 또 참아보고 기다려보는 것이지요.]
或讚精進(혹찬정진)하시며 혹은 정진을 찬탄하시고
或讚禪定(혹찬선정)하시며 혹은 선정을 찬탄하시고
或讚智慧(혹찬지혜)하시며 혹은 지혜를 찬탄하시고
或復讚歎慈悲喜捨(혹부찬탄자비희사)니잇고? 혹은 또 자비희사를 찬탄하십니까? [慈ㆍ悲ㆍ喜ㆍ捨 = 사무량심]
[지혜가 上首라면 지혜만 이야기해야 될 텐데 왜 그런 여러 가지 법을 이야기합니까?]
而終無有唯以一法(이종무유유이일법)으로, 그러나 결국 오직 한 법으로 而得出離(이득출리)하야, 벗어남을 얻어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니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법으로써 出離를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오직 한법만 가지고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육바라밀이라든지 사무량심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의 이야기가 되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화엄경 원문과 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7 (0) | 2021.06.01 |
---|---|
제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6 (0) | 2021.06.01 |
제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4 (0) | 2021.05.25 |
제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0) | 2021.05.24 |
제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0) | 2021.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