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初品中 放光釋論 第十四之餘 卷第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14. 초품 중 放光明=광명 놓으심을 풀이함 16
◎'惔然快樂'者。惔 탈 담
이제 ‘(번뇌의 불길 다 타서) 담연하고 쾌적하다’ 함을 풀이하리라.
問曰, 此何等樂?
묻나니, 이는 어떠한 즐거움입니까?
答曰, 是樂二種, 內樂 涅槃樂。是樂 不從五塵生. 譬如 石泉 水自中出 不從外來, 心樂亦如是 行等心 修梵行 得十善業道 淸淨無穢 是名內樂。
답하나니, 이 즐거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내적인 즐거움=內樂(내락)과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열반락)이라. 이 즐거움은 5진(塵, 색성향미촉법)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니, 비유하자면, 돌 틈에서 솟아 나는 샘물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等心(등심)을 행하고, 梵行(범행)을 닦으며, 10선업도를 얻고, 청정하여 허물과 더러움이 없게 되는 것을 내적인 즐거움이라 하느니라.
問曰, 此樂何界繫? 欲界繫 色界繫 無色界繫耶?
묻나니, 이 즐거움은 삼계(三界)의 어느 세계에 (걸리는) 묶인 것입니까? 욕계에 걸리는 것입니까? 색계에 걸리는 것입니까? 무색계에 걸리는 것입니까?
答曰, 是樂欲界繫 亦不繫, 非色 無色界繫。今言 '譬如 比丘入第三禪' 若是色界繫 不應言 '譬如'。以是事故 知非色界繫。此欲界心生喜樂 一切滿身 譬如煖蘇漬身 柔軟和樂。煖 따뜻할 난, 蘇 차조기 소, 향할 소, 되살아날 소, 漬 담글 지
답하나니, 이 즐거움은 욕계에서는 걸리기도 하고 걸리지 않기도 하지만, 색계와 무색계에는 걸리지 않으니, 지금 말하기를 '마치 비구가 제3선(第三禪)에 든 것 같다'고 하였거니와, 만일 색계에 걸리는 것이라면 마치 비구가 제3선(第三禪)을 얻는 것 같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색계에 걸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경지는 욕계의 마음으로 희락을 내어 온몸에 가득 채우니, 마치 따뜻하고 보드라운 풀=煖蘇(난소)에 몸을 담그면 몸이 유연해지며 화평하고 즐거워 지는 것과 같으니라.
不繫者 得般若波羅蜜相 觀諸法不生不滅 得實智慧 心無所著 無相之樂 是爲不繫。
걸리지 않는=不繫(불계)라고 함은,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관찰하면 모든 법이 나지도 멸하지도 않아 실상의 지혜를 얻고, 마음에 집착이 없어 (인연의 10가지 모습인 색성향미촉의 오진(五塵)과 남여, 생주멸이 없는) 무상(無相)의 즐거움이 있으니, 이것이 ‘걸리지 않는=不繫(불계)’라는 것이다.
問曰, 佛言 涅槃第一樂 何以言 '第三禪樂'?
묻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반이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제3선(第三禪)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 有二種樂 有受樂 有受盡樂。受盡樂 一切五衆盡更不生 是無餘涅槃樂。能除 憂愁煩惱 心中歡喜 是名樂受, 如是樂受滿足 在第三禪中。以是故言 '譬如第三禪樂'。
답하나니, 두 가지의 즐거움이 있으니, 유위(有爲)인 18계의 느낌의 즐거움=受樂(수락) (有爲)인 18계의 느낌이 다한 즐거움=受盡樂(수진락)이니, 느낌이 다한 즐거움이란, 일체의 오온=五衆(오중)이 다하여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곧 무여열반의 즐거움으로, 능히 근심과 번뇌를 제하여 마음속이 환희하니, 이를 즐거운 느낌을 누리는=樂受(낙수)라고 한다.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제3선(第三禪) 가운데 가득차 넘쳐흐르는 까닭에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제3선천의 즐거움 같다'고 하는 것이니라.
問曰, 初禪二禪 亦有樂受, 何以故但言'第三禪'??
묻나니, 초선(初禪)과 이선(二禪)에도 즐거운 느낌이 있거늘 어찌하여 제3선(第三禪)만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 樂有 上中下, 下者初禪, 中者二禪, 上者三禪。
답하나니, 즐거움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는데, 제일 아래의 하(下)는 초선(初禪)이요, 가운데 중(中)은 이선(二禪)이요, 위의 상(上)은 3선(三禪)이라.
初禪有二種. 樂根 喜根, 五識相應樂根, 意識相應喜根。二禪中 意識相應喜根。三禪 意識相應樂根。
초선에 두 가지가 있으니, 즐거움이 뿌리내리게 된=낙근(樂根)과 의식과 상응하는=희근(喜根)이며,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의 오식(五識)과 상응하는 것이 낙근(樂根)이고,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희근(喜根)이며, 이선(二禪)에서 의식은 희근(喜根)과 상응하며, 제3선에서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낙근(樂根)이다.
一切三界中 除三禪 更無 意識相應樂根。是五識 不能分別 不知名字相 眼識生如彈指頃 意識已生。
일체의 삼계(三界) 안에서 오직 삼선(三禪)을 제외하고는 달리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없으니, (오직 삼선(三禪)을 제외하고는 계속 무의식(無意識)이 낙근(樂根)과 상응하니) 이는 전오식(前五識)은 분별할 수도 없고 이름의 특징도 알 수 없어서 (분별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에 대한 말과 글이 있게 된 것이니, 안식(眼識)이 생함은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이지만 의식은 이미 생겨나 있는 것이니라.
以是故 五識相應樂根 不能滿足樂, 意識相應樂根 能滿足樂。以是故 三禪中諸功德少 樂多故 無背捨 勝處 一切入. 過是三禪更無樂, 以是故言 '譬如比丘 入第三禪'。
이러한 까닭에 전오식(前五識)이 낙근(樂根)과 상응하여도 만족한 즐거움이 될 수는 없으며, 의식(意識)이 낙근(樂根)과 상응하여야 만족한 즐거움이 되나니, 이런 까닭에 삼선(三禪) 가운데에는 공덕이 적으나, 즐거움이 많은 까닭에 배사(背捨, 팔배사)ㆍ승처(勝處, 팔승처)ㆍ일체의 입(入, 12입)이 없이 스스로 즐거움이 우러나오는 것이라.
이 삼선(三禪)을 지나서(넘게 되면)는 다시 즐거움이 없게 되므로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비구가 제3선(第三禪)천에 든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니라.
8해탈(八解脫)= 8배사(八背捨, 8가지 등지고 버림), 8유무(八惟無, 8가지 꼭 [해야 할] 없애는 일), 8유무(八惟務, 8가지 꼭 해야 할 일)라고도 한다. 내유색상외관색(內有色相外觀色), 내무색상외관색(內無色相外觀色), 정배사신작증(淨背捨身作證), 허공처배사(虛空處背捨), 식처배사(識處背捨), 무소유처배사(無所有處背捨), 비유상비무상배사(非有想非無想背捨), 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 즉 초선(初禪)ㆍ제2선ㆍ제4선ㆍ4무색정ㆍ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8단계의 선정관법.
8승처(勝處, aṭṭha abhibhāyatanāni)= 8해탈(解脫)을 닦은 뒤 숙달된 관상법(觀想法)으로 자유롭게 정ㆍ부정의 경지를 관찰 하는 것.
12처十二處, 12입, 十二入, 12입처, 十二入處=처(āyatana)는 영역이나 장소의 의미로 '입'(入)이라고도 번역되며, 6가지의 감각기관인 6근·6내처의 안·이·비·설·신·의와 이들 각각의 대상인 6경·6외처의 색·성·향·미·촉·법을 말한다.
一切衆生'皆得 好慧 持戒 自守 不嬈衆生'者。
이제 ‘일체 중생이 모두가 좋은 지혜를 얻었으며, 계행을 지녀 스스로를 보호하고,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음’이라 함을 풀이하리라.
問曰, 何以故 次樂後 言 '皆得好慧'?
묻나니, 무슨 까닭에 즐거움을 얻은 다음에 이어 '모두가 좋은 지혜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 人未得樂 能作功德, 旣得樂已 心著樂多故 不作功德! 是故樂後 次第心得好慧。好慧者 持戒 自守 不嬈衆生。
답하나니, 사람이 즐거움을 얻기 전에는 능히 공덕을 지을 수 있으나, 즐거움을 얻은 뒤엔 마음이 즐거움에 집착되므로 공덕을 짓지 않는 예가 많으므로 즐거움 뒤에 차례로 마음이 좋은 지혜를 얻는다고 하며, 좋은 지혜란 계행을 지녀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니라.
問曰, 持戒是名自守 亦名不嬈衆生, 何以故 復言'自守 不嬈衆生'耶?
묻나니, ‘계행을 지님=持戒(지계)’를 일러 ‘스스로를 지키는=自守(자수)'라 하며 또한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不嬈衆生(불뇨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다시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거듭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 身口善 是名'持戒', 撿心就善 是名'自守', 亦名'不嬈衆生'。
답하나니, 몸과 입으로 짓는 선(善)은 ‘계행을 지닌=持戒(지계)’라 하며, 마음을 다스려 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지키는=自守(자수)’라 하며 또한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不嬈衆生(불뇨중생)’이라 하니,
一切諸功德 皆戒身 定身 慧身所攝。言'好持戒' 是戒身攝, '好自守'者 是定身攝, '不嬈衆生' 禪中慈等諸功德 是慧身攝。
또한 일체의 공덕은 모두 계ㆍ정ㆍ혜에 포섭되나니, ‘好持戒(호지계)=계행을 잘 지닌다’ 함은 계(戒)에 포섭되고, ‘好自守(호자수)=스스로를 보호한다’ 함은 (물들지 않게 감싸들이는) 정(定)에 포섭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함이란 선정을 통한 자(慈, 자비) 등의 공덕으로 혜(慧, 지혜)에 포섭되느니라.
問曰, 亦無有人言'不好持戒'者, 今何以言'好持戒'?
묻나니, 아무도 ‘계행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거늘, 지금 어찌하여 행(戒)를 잘 받아 지닌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 有如婆羅門 著世界法者言, 捨家好持戒 是爲斷種人 又以自力得財 廣作功德 如是有福。出家乞食 自身不給 何能作諸功德?' 如是爲 '呵好持戒'。呵 꾸짖을 가, 꾸짖을 하,
답하나니, 마치 바라문이 집착하는 세계에 대한 가르침(法)에서 이렇게 말하나니, '집을 버리고 계를 잘 지킨다면, 이는 종자를 끊는 사람이 되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재물을 얻어 널리 공덕을 짓는, 이러한 이에게는 복덕이 있으나, 출가하여 걸식하는 이는 자신도 꾸려 나가지 못하거늘 어떻게 능히 온갖 공덕을 지을 수 있겠는가?' 라고 것과 같은 것들을 일러 ‘계행을 잘 지니는=持戒(지계)하는 이를 꾸짖음’이라 하며,
亦 有著世界 治法道人 呵好自守者言, '人當以法治世 賞善罰惡 法不可犯 不捨尊親 立法濟世 所益者大 何用獨善其身 自守無事? 世亂而不理 人急而不救!' 如是名爲 '呵好自守'。
또한 세상을 다스리는 법에 집착한 어떤 도인은 스스로를 지키는=自守(자수)의 사람을 꾸짖어 말하기를, '사람은 마땅히 법으로 다스려서 선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벌을 주어야 하니, 법을 범해서는 안 되며, 존귀하고 친한 이를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며, 법을 세워 세상을 구제하는 것의 이익 됨이 크거늘, 무엇 때문에 자기 몸 하나만을 좋게 하려고 스스로를 보호하며 무사(無事)에 빠져 세상이 어지러워도 바로 잡지 않고 사람이 급해도 구제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을 일러 ‘스스로를 보호하는= 自守(자수)하는 이를 꾸짖음’이라 하며,
亦有人 呵好不嬈衆生者言, '有怨不能報 有賊不能繫 惡人不能治 有罪無以肅 不能卻患救難 默然無益 何用此爲!' 如是爲 '呵好不嬈衆生'。如說;
또한 어떤 사람은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不嬈衆生(불뇨중생)을 꾸짖어 이렇게 말하나니, '원수에 보복하지도 않고, 도적을 잡지도 못하고, 악인을 다스리지 않고, 죄가 있어도 엄단하여 벌하지 못하고, 환란을 물리쳐 구하지 못한 채 잠자코 있음이 이익되지 못한 것이나니, 어째서 이렇게 하는 것인가?'하고 하는 것을 일러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不嬈衆生(불뇨중생)을 꾸짖음’이라고 하나니, 게송에서 설함과 같으니라.
人而無勇健 何用生世閒
사람이 용맹하고 굳세지 못하면, 세상에 살아 무엇하리오.
親難而不救 如木人在地。
가까운 이가 위태해도 구제 못하니, 마치 땅 위에 선 나무장승과 다르지 않도다.
如是等種種不善語名 爲呵不嬈衆生。是諸天人 皆得好慧 持戒 自守 不嬈衆生, 行是善法 身心安隱 無所畏難 無熱無惱 有好名善譽 人所愛敬, 是爲向涅槃門。
이러한 갖가지의 선하지 못한 그릇된 말들을 하는 것을 일러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이를 꾸짖음’이라 하나, 그러나 이러한 천인(天人)들 모두는 좋은 지혜를 얻었고, 계행을 잘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니, 이러한 善法(선법)을 행하면 몸과 마음이 안온하여져서 두려움과 어려움=畏難(외난)에 떨지 않으며, 번뇌=熱(열)도 없고 근심=惱(뇌)도 없이, 좋고 착한 명예만이 있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공경을 받으며, 이것이 열반의 문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命欲終時 見福德心喜 無憂無悔。若未得涅槃 生諸佛世界 若生天上。以是故言, '得好慧 持戒 自守 不嬈衆生'
목숨을 다하여 마칠 때에 복덕스러운 모습을 보아 마음이 기쁘고 근심과 후회가 없으니, 설사 열반을 얻지 못하였다 하여도 부처님들의 세계나 천상에 태어나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좋은 지혜를 얻은=好慧(호혜), 계행을 잘 받아 지님=持戒(지계)’, ‘스스로를 지키는=自守(자수)'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不嬈衆生(불뇨중생)’이라 하는 것이니라.
大智度論 卷第八 終 (대지도론 제 8 권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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