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無住)
文殊師利又問(문수사리우문) 生死有畏(생사유외) 菩薩當何所依(보살당하소의)?
문수사리가 또 묻기를, 생사는 두려운 것이니, 보살은 무엇에 의지해야만 합니까?
Manjusri then asked, What should the bodhisattva rely on when there is fear of birth and death?
維摩詰言(유마힐언) 菩薩於生死畏中(보살어생사외중) 當依如來功德之力(당의여래공덕지력)
유마힐이 답하기를, 보살이 생사의 두려움이 있을 때에는 여래 공덕의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Vimalakirti said, The bodhisattva should rely on the power of the merits of Tathagata amid the fear of birth and death.
[인생은 외롭고 생사는 두려운 것이다. 삶과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 사람은 진정으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다. 이러한 때에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한 사람의 태도는 오직 여래의 공덕의 힘에 의지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여래의 공덕의 힘이란 바로 일심의 위대함이다. 약간의 방편을 이용하여 일심의 위대한 힘에 의지하여야 한다.]
文殊師利又問(문수사리우문) 菩薩欲依(보살욕의) 如來功德之力(여래공덕지력)
當於何住(당어하주)?
문수사리가 또 묻기를, 보살이 여래 공덕의 힘에 의지하고자 할 때에는 마땅히 어디에 머물러야 합니까?
Manjusri also asked, When a bodhisattva wishes to rely on the power of the Tathagata’s merits, where should he dwell?
答曰(답왈) 菩薩欲依(보살욕의) 如來功德力者(여래공덕력자)
當住度脫一切衆生(당주도탈일체중생)
(유마힐이) 답하되, 보살이 여래의 공덕의 힘에 의지하고자 할 때에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度脫=제도하여 해탈시키는 일에 머물러야 합니다.
Vimalakirti: If a bodhisattva wishes to rely on the power of Tathagata’s merits, he should abide upon the liberation of all sentient beings.
又問(우문) 欲度衆生(욕도중생) 當何所除(당하소제)?
또 묻기를,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무엇을 제거해야 합니까?
Manjusri: What obstacles should one eliminate to liberate all sentient beings?
答曰(답왈) 欲度衆生(욕도중생) 除其煩惱(제기번뇌)
답하되,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번뇌를 제거해야 합니다.
Vimalakirti: If one wishes to liberate sentient beings, one should remove their afflictions.
又問(우문) 欲除煩惱(욕제번뇌) 當何所行(당하소행)?
또 묻기를, 번뇌를 제거하고자 하면 마땅히 무엇을 행하여야 합니까?
Manjusri: What should one do to eliminate afflictions?
答曰(답왈) 當行正念(당행정념)
답하되, 마땅히 正念=올바른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바른 생각을 행해야 합니다)
Vimalakirti: One should practice the right mindfulness.
[여래공덕의 힘을 의지한다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중생이란 자기 중생으로부터 다른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번뇌를 제거해야 하고 번뇌를 제거하려면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
又問(우문) 云何行於正念(운하행어정념)?
또 물어 말하되, 어떻게 하면 올바른 마음을 쓸 수 있습니까?(바른 생각을 행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practice of right mindfulness?
答曰(답왈) 當行不生不滅(당행불생불멸)
답하되, 마땅히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不生不滅의 마음을 씀=行해야 합니다.
Vimalakirti: When one practice no arising and no perishing.
又問(우문) 何法不生(하법불생)? 何法不滅(하법불멸)?
또 묻기를, 어떠한 법을 생하지 않게 하며, 어떠한 법을 멸하지 않게 해야 합니까?
Manjusri: What Dharma does not come into being? What Dharma does not extinguish?
答曰(답왈) 不善不生(불선불생) 善法不滅(선법불멸)
답하되, 선하지 않은=不善은 생하지 않게 하고, 선한 법=善法은 멸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Vimalakirti: The unwholesome does not arise, and wholesome Dharma does not perish.
又問(우문) 善不善孰爲本(선불선숙위본)?
또 물었으니, 선과 불선은 무엇을 근본으로 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root of the wholesome and the unwholesome?
答曰(답왈) 身爲本(신위본)
답하되, 몸(kya)을 근본으로 합니다.(몸이 근본입니다)
Vimalakirti: The body is the root.
又問(우문) 身孰爲本(신숙위본)?
또 물었으니, 몸은 무엇을 근본으로 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root of the body?
答曰(답왈) 欲貪爲本(욕탐위본)
답하되, 욕심과 탐심=탐욕을 근본으로 합니다.
Vimalakirti: Desire and greed are the roots.
又問(우문) 欲貪孰爲本(욕탐숙위본)?
또 물어 말하되, 욕심과 탐심=탐욕은 무엇을 근본으로 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root of desire and greed?
答曰(답왈) 虛妄分別爲本(허망분별위본)
답하되, 허망한 분별을 근본으로 합니다.
Vimalakirti: False distinctions are the root.
又問(우문) 虛妄分別孰爲本(허망분별숙위본)?
또 물었으니, 허망한 분별은 무엇을 근본으로 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root of false distinctions?
答曰(답왈) 顚倒想爲本(전도상위본)
답하되, 도리에 어긋난 그릇된 생각=전도망상을 근본으로 합니다.
Vimalakirti: Upside-down thinking is the root.
又問(우문) 顚倒想孰爲本(전도상숙위본)?
또 물었으니, 도리에 어긋난 그릇된 생각=전도망상은 무엇을 근본으로 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root of upside-down thinking?
答曰(답왈) 無住爲本(무주위본)
답하되,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無住를 근본으로 합니다.
Vimalakirti: Non-abiding is the root.
[현장은 ‘무주(無住),’ ‘무소주(無所住),’ 티베트 역에서는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이라 했다.]
[혜능(慧能, 638~713) 대사의 '육조단경'의 삼무사상(三無思想)에서 삼무(三無)란 무념(無念)ㆍ무상(無相)ㆍ무주(無住)를 말한다.
무념(無念)이란 사물을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음이며,
무상(無相)이란 모양(형체)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양에 사로잡히지 않음이며,
무주(無住)란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머문다는 말은 마음이 간다, 집착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무주란 마음을 내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머묾이 없다’ 혹은 ‘머물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무주(無住)’는 ‘무소주(無所住)’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핵심인 깨달음, 해탈, 열반, 반야, 연기, 중도, 공, 무애, 자재 등과 같은 맥락의 말이고, 법계의 실상(實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무주(無住)란 사람의 본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을 보면 분자의 합성일 뿐이다. 그리고 분자가 분해되는 과정 속에 있다.
단백질이라고 하는 분자가 합성됐다가 분해되는 것이다.
이 분자의 분해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생ㆍ로ㆍ병ㆍ사의 흐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住)는 머문다는 뜻으로 집착을 의미한다. 오래 머물면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무주란 집착을 떠난 흐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머문다’는 것이 반연(攀緣)한다, 집착한다, 애착한다, 묶여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은 곧 이름과 모양을 분별해서 그 중 자기 좋은 이름과 모양에 머물러 집착하고 묶여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름과 모양에 머물러 집착하고 묶여 있는 것이 곧 번뇌ㆍ고(苦)이다. 불교는 이러한 번뇌와 고로부터의 해탈을 목적으로 한 가르침이다.-작성자 아미산]
又問(우문) 無住孰爲本(무주숙위본)?
또 물었으니,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무주는 무엇을 근본으로 합니까?
Manjusri: What is the root of non-abiding?
答曰(답왈) 無住則無本(무주즉무본)
답하되,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무주는 근본이 없습니다.
Vimalakirti: Since there is no abiding, there is no such a thing as a root.
文殊師利(문수사리) 從無住本(종무주본) 立一切法(입일체법)
문수사리여, 이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무주가 근본이 되어 모든 법=일체법이 세워졌습니다.
Manjusri It is from the root of non-abiding that establishes all the Dharmas.
[生死有畏(생사의 공포기 있을 때에는)→
當依如來功德之力(여래공덕의 힘에 의지하며)→
當住度脫一切衆生(여래 공덕의 힘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에 의지하며)→
欲度衆生 除其煩惱(일체 중생을 도탈하려면 번뇌를 제거하여야 하며)→
欲除煩惱 當行正念(번뇌를 제거하고자 할 때에는 마땅히 바른생각의 정념을 가져야 하면)→
當行不生不滅(정념을 가지려면 마땅히 불생불멸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不善不生 善法不滅(불생불멸이란 선한 법은 일어나게 하고 불선한 법은 일어나게 하지 않는 것이니)→
善不善身爲本(선하고 불선한 것은 몸을 바탕으로 하며,)→
身孰欲貪爲本(몸은 탐욕에 의지하며)→
虛妄分別爲本(탐욕은 허망한 분별을 근본으로 하며)→
顚倒想爲本(허망한 분별심은 전도된 생각을 근본으로 하며)→
無住爲本(전도 망상이란 결과적으로 무주를 근본으로 하며)→
無住則無本(무주란 머물지 않음이니 그 근본이 없으며)→
從無住本 立一切法(무주가 일체법의 근본이다. 무집착, 무애착, 무반연으로 머물지 않음이 일체법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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